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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이 글은 홍콩 반환 전의 전반적 사회분위기를 취재한 글임을 박혀 둔다.>
영국국가가 정중하게 연주되기 시작하고 대회당 전면에 게양되어 있던 영국국기와 홍콩정청기가 조용히 하강된다. 이어 밤12시. 정확하게 자정에 맞추어 이번에는 중국국가가 울려 퍼지고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와 홍콩특별행정구 구기가 게양된다. 1천3백평 넓이의 대회장에 참석한 4천3백명에 달하는 각국의 국왕 대통령 총리 장관 특사 등 내외빈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낸다.
홍콩 완차이에 있는 컨벤션센터에서 거행될 홍콩주권반환식 광경이다. 주권반환식이 끝나면 곧바로 이 「세기의 의식」에 영국을 대표해서 참석했던 찰스왕세자와 홍콩의 마지막 영국총독인 크리스토퍼 패튼 현총독은 컨벤션센터 앞 빅토리아항에 정박해 있는 브리태니아호에 승선, 홍콩을 떠난다. 이로써 영국의 1백50년에 걸친 홍콩통치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전세계가 주목하게 될 이날의 홍콩주권반환 행사는 이에 앞서 황혼 무렵 빅토리아항의 영국해군 주둔기지에서 영국측 자체 고별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영국 왕실을 대표한 찰스왕세자와 영국정부를 대표한 말콤 리프킨드 외무장관 홍콩주둔 영국군사령관 브라이언 두톤 소장 그리고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데이비드 윌슨 전 홍콩총독 등 홍콩반환을 결정했거나 홍콩반환에 주요 역할을 했던 전현직 영국 고위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이 고별의식 역시 전세계에 생중계된다. 이어 해가 완전히 지면서 인근 컨벤션센터에서 본격적인 주권반환식이 시작된다. 이 행사에 참석할 중국측 대표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江澤民총서기 겸 국가주석이나 李鵬총리가 유력시되고 있으며 최고실력자 鄧小平은 만약 그때까지 건강이 허락한다면 참석토록 한다는 게 이미 결정되어 있다. 본행사는 중국과 영국 양측 군의장대의 입장 및 경례의식으로 시작돼 영국측 대표의 고별사 중국측 대표의 주권 인수연설 등의 순서로 진행되며 자정을 기해 주권 반환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게 계획되어 있다.
불안한 홍콩인들
홍콩의 주권반환은 혁명과 전쟁 등 비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체제가 사회주의체제로 편입되는 역사상 유일한 사례가 된다. 홍콩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 변화는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될까. 「홍콩 1997년 여름」의 모습은 벌써부터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국 식민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로 바뀜에 따라 홍콩인들이 겪게 될 변화는 벌써부터 일부 직업인들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홍콩주둔 영국군 군속인 알랜 추엔씨(52)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지난 61년부터 홍콩내 각 지역에 산재한 영국군 군사시설의 검침원으로 군속생활을 시작한 그는 현재 경력 35년째의 건물관리인이다. 그의 현재 보수는 월 2만7천5백58홍콩달러. 우리돈으로 약 2백95만원이다. 이 돈은 풍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홍콩에서 평범한 서민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는 있는 액수다. 그는 매달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에게 4천홍콩달러, 노모에게 3천홍콩달러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내년 6월말이면 직장을 잃게 된다. 그가 내년에 영국군으로부터 퇴직금으로 받게 되는 액수는 근무연한인 36년에 1.5를 곱한 54개월치의 월급과 정년인 60세까지 남은 근무연수에 대한 퇴직보상금 등 모두 70개월치의 월급액인 1백93만홍콩달러가 전부다. 그는 일단 직장을 잃은 뒤에는 그의 나이 등을 감안할 때 새로운 직장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설혹 빌딩관리인이나 아파트관리인 등의 직장을 얻는다 해도 이들 직종은 경력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신참자로 취급되어 월급이 현재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
이에 따라 그는 요즘 우울하고 암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는 일이 추엔씨와 같은 사람에겐 엄청난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주권이양에 따라 홍콩사회의 시민의식이나 질서 등 전반적인 사회문화 수준이 개악될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 영국 대신 중국이 주권국이 됨에 따라 중국의 부패와 무질서 그리고 도덕적 불감증도 몰려들어와 악화가 양화를 밀어내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망은 이미 일부 분야의 일상생활에서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 친절함과 정직성으로 홍콩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던 택시기사들이 점차 부정직하거나 불친절해진다는 평을 듣고 있는 것이 그중 하나다. 합승이나 승차거부는 아예 개념조차 없고 목적지의 주소만 대도 가장 합리적인 코스를 택해 원하는 지점까지 정확하게 데려다 주었던 홍콩 택시기사들이었으나 최근 들어 영어로 의사소통이 안되는 기사가 많이 늘었고 심지어 미터를 속이거나 외국인 승객에게는 먼거리를 돌아가는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근년 들어 본토에서 밀입국자가 대거 몰려들면서 강도 절도 등 범죄가 늘고 이에 따라 주민 서로간에 불신풍조가 만연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의 한 모습. 아파트나 일반주택의 출입문에 자물쇠를 3개씩이나 채우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고 도심의 사무실에서도 대낮 강도를 우려, 문을 안에서 잠그고 근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밀어닥치는 밀입국자들
홍콩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홍콩경찰에 체포된 밀입국자는 지난 93년 3만7천5백17명, 지난해 2만6천8백24명 등으로 연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매년 거의 3만명 안팎의 밀입국자들이 검거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거의 10배에 이르는 사람들이 밀입국에 성공할 것이라는 게 관계당국의 추산이다. 이에 따라 인구 6백만명의 홍콩은 이제 밀입국자들로 포화상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들 밀입국자들의 눈으로 보면 홍콩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나 다름없다. 지난 95년말 현재 중국의 1인당 평균소득이 5백71달러인 데 비해 홍콩은 2만3천5백달러로 홍콩인들이 중국 내지인에 비해 무려 40배 이상의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이 일단 홍콩에만 가면 부와 행복을 한꺼번에 손에 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본토 밀입국자들은 거의 내지에서 생활이 궁핍해 무작정 몰려드는 사람들로 특별한 기술도 없고 말도 영어는 물론이고 홍콩 현지어인 광동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아 밀입국에 성공해도 현지 적응과 정착에 큰 문제를 안고 있다. 결국 이들은 홍콩의 변두리인 신계지역 빈민촌에서 기거하며 생계를 위해 범죄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홍콩사회의 이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홍콩인들은 홍콩의 앞날에 대해 낙관하고 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지가 지난 10월 아니사 커머셜 리서치사에 의뢰해 실시했던 주권반환에 대한 민의조사에 따르면 약 56%의 주민들이 주권반환 이후의 생활에 대해 낙관하고 있는 데 반해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는 반응은 18%에 불과했다. 이같은 수치는 지난 94년 주권 반환에 대한 민의조사를 처음 실시했을 때 단지 26%가 낙관하고 37%가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최근의 조사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예전에 40% 이상을 차지했던 무응답층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이들이 낙관론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 낙관론자들은 남자들에게서 특히 많아 조사대상 남자들의 3분의 2가 홍콩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같은 낙관론을 반영하듯 홍콩을 떠났던 사람들이 근년 들어 되돌아오는 회류율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홍콩인력자원관리학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 95년의 회류율은 무려 60.3%에 달했다. 1백명의 이민자 중 60명이나 되돌아온 셈이다. 이같은 회류율은 지난 90년에는 7.2%에 불과했고 93, 94년도에도 각각 29.1%와 27.9%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갑자기 크게 증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 홍콩의 부동산 가격도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홍콩 부동산업계 통계에 따르면 96년 한해 동안 중소형아파트는 대략 25%, 대형아파트나 호화주택은 30%의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아파트의 가격은 서울로 치면 강남구에 해당하는 홍콩섬 미들레벨이나 피크지역의 1천3백평방피트(약 36평) 크기가 대략 한화 8억∼9억원을 호가하니 서울의 3배 이상은 되는 셈이다.
낙관론 확산되는 이유
점포 임대료도 갈수록 상승세를 타고 있다. 홍콩의 부동산 컨설턴트회사인 마르린 랜드사가 96년 12월 조사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홍콩섬의 중심가는 코스웨이베이의 이화가(怡和街)와 낙극도(駱克道) 일대의 점포임대료는 1평방피트(0.0281평)당 월세가 평균 5백27홍콩달러(약 5만6천원)로 세계에서 가장 비쌌다. 평당 월 임대료가 약 2백만원인 셈이다. 최근 들어 주가도 꾸준히 올라 96년 12월의 주가는 전년말에 비해 23%나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확산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홍콩이 현재와 같이 국제무역금융도시로서 계속 번영을 누리는 게 중국에도 단연 유리하기 때문에 굳이 홍콩의 현체제를 허물어뜨리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점차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중국도 영국 못지않게 홍콩을 훌륭하게 관리할 수 있음을 대내외에 보여주어야 하는 북경당국의 입장도 낙관론의 주요 이유 중 하나다. 지금까지 영국은 오늘날 홍콩이 이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은 영국이 식민통치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며 만약 중국이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홍콩은 처음 그대로 낙후된 시골 어촌으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중국측의 주장은 정반대다. 홍콩의 번영은 70년대 이후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전세계의 물자와 자본이 홍콩을 통해 중국으로 드나들면서 이룩된 것이며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배경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뿐 영국의 통치 탓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따라 만약 중국이 주권을 인수받은 뒤 홍콩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면 이는 영국 때문에 홍콩이 번영했다는 영국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 되는 셈이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어떻게 하든 홍콩을 현재보다 더욱 번영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셋째 이유로는 중국이 앞으로 합병하려는 마카오와 대만에 대한 선전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중국은 마카오를 오는 99년 12월에 포르투갈로부터 반환받게 되어 있고 21세기 초반에 대만과의 통일을 이루는 것을 국책의 기본방향으로 정해놓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입장에선 마카오와 대만인들을 안심시키고 통합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도 홍콩이 계속 번영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넷째, 중국이 홍콩에 투자해놓은 엄청난 자본 때문에 홍콩경제를 계속 부양시켜야만 할 입장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홍콩의 권위있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에 따르면 홍콩에 진출해 있는 중국자본은 96년말 현재의 시장가치로 따져 4백24억US달러에 이른다. 중국자본이 홍콩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였다. 당초 중국자본의 홍콩진출은 경제논리보다는 정치적 고려에 의해서였다. 영국이 통치하는 홍콩에서 기존의 회풍(匯豊), 태고(太古), 이화(怡和)그룹 등 정경 결합을 통해 성장한 영국자본의 기업들이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 주권 반환협상이 이루어질 때 중국이 크게 불리하다고 판단한 것. 중국측은 이에 따라 영국자본 기업에 대항할 중국자본을 심는다는 목적으로 70∼80년대에 홍콩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으며 이제 어느덧 홍콩에서 하나의 거대한 자본으로 성장한 것이다. 신화사 홍콩분사 통계에 따르면 현재 대외경제무역부의 허가를 받아 홍콩에 공식적으로 진출해 있는 중앙정부 및 각 성시(省市) 소유의 중국기업은 1천8백여개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흘러나온 중국자본의 기업을 모두 합하면 5천여개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마지막으로 홍콩인들의 낙천성과 비정치적 성향도 홍콩의 미래를 낙관 쪽으로 전망케 하는 요인의 하나다. 중국이 주권을 반환받은 뒤 홍콩에서 가장 신경쓰는 것은 정치적 반북경 또는 반사회주의 움직임이다. 이에 따라 중국측은 홍콩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거나 홍콩언론이 반체제를 선동하지만 않는다면 북경당국은 자치특구인 홍콩에 대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것이며 홍콩은 지금과 다름없이 자본주의체제를 향유할 수 있을 것임을 이미 여러 차례 천명해왔다. 그런데 홍콩인들 자체가 오직 경제와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북경 정부와 갈등을 빚을 일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홍콩을 포함한 광동인들은 전통적으로 이재(理財)에 밝은 반면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 정평이 나 있다. 홍콩인력자원관리학회 등장봉의(鄧張鳳儀) 부회장은 『중국이 홍콩의 자치를 거듭 천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홍콩이 현재와 같이 계속 번영을 누리게 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확산되는 것』 이라고 진단했다. 그들은 또 도박을 좋아하고 미신에 얽매여 있지만 사상과 철학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현재 홍콩 최대의 대학인 홍콩대학이나 중문대학에는 서구 각 대학에 있는 대부분의 학과가 설치되어 있지만 유독 철학과만은 없다. 이에 대해 영국이 식민지 통치정책의 하나로 사상이나 철학 등 근원을 따지는 학문은 설치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홍콩인 스스로가 이런 학과는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따지는 것을 싫어하는 이러한 홍콩인들의 성향이야말로 식민통치에 가장 적합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홍콩인들이 민족의 자존을 찾으며 반정부 시위에 나서고 독립운동을 했다면 오늘날 홍콩의 양상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홍콩인들은 주권이나 통치의 주체문제보다는 내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개인의 행복과 부의 축적에 관심이 더 많았다는 게 홍콩에 오래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지적이다.
「보통화」강좌 대만원
그러나 최근의 홍콩은 주권반환일이 차츰 다가오면서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급격한 중국화다. 직장인들 사이에 중국의 국어인 보통화 학습이 붐을 이루고 있으며 최근 들어 중국인으로서 민족의식이 크게 고양되고 있다. 홍콩인들의 분위기로만 보면 요즘의 홍콩은 단지 총독만 영국인이 맡고 있을 뿐 이미 중국 영토가 된 느낌이다. 최근 들어 홍콩에서 중국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중 하나가 중국 국기다. 일반 시민들이 영국국기나 홍콩정청의 기보다 중국 오성기를 접할 기회가 훨씬 많아진 것이다. 건물 등에는 중국국기가 공공연하게 내걸리고 많은 택시기사들이 차안 운전석 앞 선반에 소형중국국기를 꽂고 다닌다. 이들에게 있어 홍콩은 이미 영국의 식민지가 아닌 것이다. 보통화 열기도 대단하다. 초중고 모든 학교에서 보통화를 가르치고 홍콩대학과 중문대학이 직장인들을 위해 개설하는 야간 보통화 강좌는 대만원이다. 반면 홍콩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 홍콩인들에게 있어 이제 보통화는 영어보다 더 절실한 언어가 된 것이다. 주권반환일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홍콩인들 사이에 중국인이라는 민족의식도 크게 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하반기의 조어도(釣魚島) 열기. 조어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일본과의 분쟁에서 홍콩인들은 정작 대만사람이나 중국본토인들보다 더 흥분하고 더 적극적인 투쟁 양상을 보였다. 또 지난 여름 애틀랜타 올림픽 때에도 홍콩 TV들은 중국선수들의 경기와 중국국기가 게양되는 장면을 홍콩선수들이 출전한 경기와 마찬가지로 모두 방영했고 중국선수들의 메달획득 숫자가 홍콩인들의 큰 관심사가 됐었다. 최근 들어 중국 TV가 제작했거나 또는 홍콩 TV가 중국측과 같이 만든 「삼국지연의」나 「무측천」 등 중국 역사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홍콩인들의 중국 방문도 급증하고 있다. 이때까지 유럽 미국 호주 등에 편중됐던 해외관광 취향이 중국 내 역사 풍물 기행으로 바뀌고 있으며 특히 자녀들을 동반한 부모의 중국기행이 늘고 있다. 근년 들어 연간 홍콩인들이 업무상 또는 친지방문 관광 등으로 본토를 방문하는 수는 연인원 2천6백만명에 이르고 있다. 홍콩의 전체 인구가 6백만명 남짓한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내왕이 아닐 수 없다. 홍콩 내의 이같은 중국열기가 반환 후에도 그대로 이어질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홍콩역사 1백55년
중국땅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1백55년 전의 일이다. 1842년 8월 영국과 당시 청국의 남경조약에 의해서였다. 홍콩은 원래 중국대륙의 남부해안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던 향나무를 주로 실어나르는 작은 어항이었다. 그리고 부근의 섬들은 해적들의 근거지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인도를 거쳐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탐색하던 중 바로 이 홍콩이 천혜의 항구임을 알고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을 벌여 이 섬을 영구적으로 할양받게 된다. 영국은 이어 1856년 중국인 소유의 홍콩선박 애로호에 대한 청국관리의 아편수색을 트집잡아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고 이 결과 1860년 10월 북경조약을 통해 구룡반도를 영구 할양받는다. 당시 청국은 1894년 8월부터 1895년 4월까지 계속된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고 프랑스에도 광주만을 조차당하는 등 몰락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국이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1898년 6월 홍콩 및 구룡항을 방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제2차 북경조약을 체결, 지금의 신계지역인 구룡반도 북부 및 주변의 2백35개 섬을 99년간(1898년 7월1일부터 1997년 6월30일까지) 조차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에 있어서 홍콩은 19세기말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유린당한 상징물이면서 치욕의 역사를 드러내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한 셈이다. 영국과 중국은 지난 84년 공동성명을 통해 영국이 99년 동안 조차했던 신계지역뿐 아니라 영구 할양받은 홍콩섬과 현 민주체제가 반환 후 50년간 유지되도록 합의했다. 영구 할양지까지 선뜻 되돌려주기로 했다는 점에서 일견 영국이 상당한 결단을 내려 양보를 한 것으로 보이지만 영국의 계산은 달랐다. 19세기말에 힘으로 빼앗은 남의 땅을 영구토록 소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순순히 반환하고 그대신 홍콩에 민주제도를 유지시키는 것이 이곳에 있는 자국기업의 엄청난 자본과 이익을 그대로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권력 집중과 자치
중국과 영국의 공동선언에 따라 홍콩의 헌법격으로 만들어진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에 따르면 홍콩은 중국으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은 물론이고 경제 금융 해운 대외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소위 일국양제(一國兩制)인 것이다. 그러나 홍콩이 일국양제 원칙에 의해 완전 자치로 운영된다고는 하지만 수장인 행정장관 선출에서부터 의회인 입법국의 구성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의 입김과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지난 12월11일 홍콩의 각계 대표 4백명으로 구성된 선출위원회에서 선출된 동건화(董健華·59) 초대 행정장관도 중국이 의도했던 인물이 뽑힌 것은 물론이다. 회주의 중국 속에서 민주주의 체제 홍콩이 앞으로 성공하는가 여부는 상당 부분 중국당국의 자세에 달려 있다. 만약 중국이 홍콩에 대해 사사건건 개입하고 장악하려 한다면 홍콩의 장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과 홍콩은 체제가 근본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그 구성원의 사고방식도 달라 중국이 억지로 중국식을 강요한다면 홍콩의 활력은 시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영국 등 서방뿐만 아니라 중국내의 두뇌집단들도 홍콩문제에 대한 중국의 신중하고 이해심 있는 접근을 권고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중국 국무원내 홍콩과 마카오 문제를 담당하는 부서인 홍콩·마카오판공실은 광주(廣州) 중산대학 홍콩·마카오연구소에 지난 95년초 중국이 홍콩을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지에 대한 연구용역을 주었다. 이 연구소는 보다 객관적이고 완벽한 연구를 위해 다수의 연구원을 홍콩 현지에 수개월씩이나 파견했을 뿐 아니라 홍콩인들이 많이 이민가 있는 캐나다까지 파견해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나고 홍콩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자료를 모아 보고서를 작성, 지난해 초 정부에 제출했었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어 있는 사회주의체제의 중앙정부와 고도의 자치를 누리는 자본주의체제의 홍콩특별행정구는 근원적으로 상호 모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이에 따라 북경당국은 홍콩을 여타의 성시(省市)와 같이 중앙정부와 지방의 관계로 보아서는 안되며 홍콩을 철저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없이 함부로 홍콩에 간섭하려 하다간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으리라는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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