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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근본적으로 거룩하다. 언어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언어(말씀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성 요한이 창세기를 다시 썼을 때,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참으로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그 발언과 함께 성 요한은 그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하나님이 누구인지) 드러내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즉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태초에 하나님이셨던 그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당시 그 지역의 일상어였던 아람어를 사용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하게 증언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자신의 증언 즉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이 아람어로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과 이야기를 헬라어로 번역했다. 이 말씀이신 예수님은 언어이시면서 동시에 언어를 사용하셨다. 그 언어는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하나님을 계시하는 언어,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 주는 언어, 성부,성자,성령으로서 우리와 인격적으로 함께하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방식을 드러내 주는 언어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분의 말을 이해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막12:37). 예수님은 그들의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언어를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을 받으면서 사람들은 그 말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형성되었다. 즉 그들은 ‘거듭났던’것이다.
성경을 영어로 옮긴 초기 번역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그가 번역한 신약 성경의 첫 인쇄본은 1526년에 발행되었다)은 ‘쟁기질을 하는 소년’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상의 언어로 성경 번역을 하였다.
틴데일과 동시대인이자 모든 개혁주의 번역가들의 할아버지 격인 마르틴 루터(그가 번역한 신약 성경은 1522년에 출판되었다)는 성경 텍스트를 번역하는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나가서 가정에 있는 어머니, 거리에 있는 아이들, 시장에 있는 평범한 남자에게 물어야 한다. 그들이 말할 때 움직이는 입을 보고 그대로 번역하라. 그러면 그들은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이 그들에게 독일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성경을 독일어로 옮긴 그의 번역의 힘은 그가 도서관에 앉아서 한 작업만큼이나 길거리에서 배운 것들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모세의 율법에서 나오는 희생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양의 내장을 연구하려고 동네 정육점 주인이 양을 해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독일어로 옮긴 루터와 영어로 옮긴 틴데일의 선구적이고 혁신적인 구어체 번역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조적으로 매끄럽고 위엄있는 울림을 가진 흠정역 성경이 거의 400년이 흐른 지금도 영어권에서는 여전히 가장 많이 판매되고 가장 널리 보급된 번역본이 되어 있다. 흠정역 성경은 성경이 처음 말해지고 들려지고 기록된 언어 형태를 가장 잘못 대변하는 영어 번역인데도 말이다. 흠정역 성경의 번역가들은 틴테일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여 작업했는데, 약4분의3정도를 근본적인 변화 없이 그대로 가져다 썼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표절한 텍스트를 가지고 해낸 일은 원래 텍스트의 침해에 가깝다. 그들은 말하자면 틴데일의 문장에 레이스 장식을 단 셈이다. 내가 앞에서 사용한 문구대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상향의 모독1)’을 한 것이다. 그들은 틴데일이 사용한 언어의 어조를 바꾸어, 쟁기질 하는 소년의 거친 말투를 기술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왕실의 매끄러운 말투로 만들어 놓았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번역가들이 제임스 왕과 ‘동창’ 지간이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의 엘리트 계층에서 편안하게 보호받는 삶을 산 주교들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흠정역 성경의 번역가들을 빈틈없이 연구한 저자이자 그들의 업적을 무척 존경하는 아담 니콜슨(Adam Nicolson)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흠정역 성경은 …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길거리에서 들을 만한 그런 영어가 아니다.… 그 학자들은 성경의 언어를 그들이 알고 있고 집에서 사용하는 영어로 옮긴 것이 아니다. 흠정역 성경은 외국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영어를 외국어의 조건에 가깝게 밀어붙였다. 다시 말해서, 영어를 경건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 영국 사람이나 쓸 법한 산문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틴테일은 중세 교회의 면전에서, 또 권력의 비호를 받는 교회 엘리트의 면전에서 모욕을 당할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의 번역을 내놓았다.… [그는] 겹겹이 쌓인 중세 스콜라주의의 두텁고 무거운 층과 수세기 동안 쌓여 온 먼지를 털어버릴 직접성과 명확성을 성경에서 구하고 있었다.
화려하게 실내 장식이 된 유명 대학과 왕실에서 일하면서 틴테일의 작업(그로부터 85년 전에 영국 왕을 피해 추적당하는 유배자로 살면서 혼자서 한 작업)에 많은 부분 의존한 47명의 흠정역 성경 번역가들은, 본질적으로 틴테일의 작업을 해체하여 그의 평번한 말투를 위엄 있고 웅장한 말투로 바꾸어 놓았다. 틴테일이 “주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니 그는 운 좋은 사내(a luckie felawe)였다”라고 번역한 것을 흠정역 번역가들은 ‘상향’ 번역해서 “주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니 그가 번창했더라(a prosrerous man)”(창39:2)로 옮겼다. 흠정역 번역가들은 서구 세계에서 문학의 고전이 된 성경 번역본을 내놓았지만, 그것은 틴데일의 쟁기질 하는 소년을 희생시킨 결과였다.
세월이 지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읽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참으로 큰 아이러니다.
가장 널리 배포되었고 또한 영향력 있는 영어 번역 성경은 영국의 제임스 왕이 인증하고 1611년에 출판된 성경이다. 이 번역본은 지금도 그 왕의 이름을 달고 있는데, 킹제임스 흠정역(King James Version)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위대한 업적, 즉 ‘영국과 북미 청교도주의의 위대한 기념비’는 일련의 개정을 거치는 혜택을 누렸는데, 이는 시기적으로 좀더 앞서고 좀더 정확한 사본의 복구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개정 작업들이 우리에게 감동적일 정도로 정확한 텍스트를 제공해 주기는 했지만, 성경의 언어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 사이의 간극이 계속해서 멀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처럼 성경이 구별된 언어, 신성한 장소와 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종교의 언어, 경건한 어조로 말하는 혹은 속삭이는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가정은 일상적인 삶과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로부터 성경을 분리시키는 바리케이트를 쌓아버렸다.
고고학(1897년 이집트의 옥시린쿠스 마을과 1923년 시리아의 고대 왕국인 우가리트)의 발굴은 흠정역 이후 성경 번역의 세계에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열어 주었다. 이 두 지명이 성경 독자들에게 딱히 일상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나는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지명은 성경 번역의 혁명(결코 지나치지 않은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을 가져온 언어와 문화의 세계를 우리 눈앞에 펼쳐 주기 때문이다. 이 고고학의 발견에서 놀라운 것은 신약 성경이 기록된 언어다. 즉 성령께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히4:12) 위해서 사용하시는 언어는 ‘성령’의 언어가 아니라 평범한 길거리의 언어라는 것이다. 성경이 원래 기록된 종류의 언어로 번역되기만 한다면 사실상 그 누구라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첫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똑똑해야 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장 보러 갈 때, 게임을 할 때, 혹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감자를 더 먹어도 되겠는지 물을 때 사용하는 언어와 똑같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똑같은 언어로 번역될 것을 요구한다.
모든 언어가 슬며시 나타나는 상향 모독에 취약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성경의 언어는 더욱 취약하다. 그러한 상향 모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의 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경 텍스트가 은연중에 그 땅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딤전2:4)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에 학문적 엘리트만이 접근할 수 있는 비밀스런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다.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서 평범한 일상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번역에 대해 글을 쓰는 조지 스타이너는, 번역이 “원문에 새로운 울림, 더 긴 생명력, 더 넓은 독자층을 제공하고, 역사와 문화에서 더 실질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해준다”라고 주장했다.
성경이 번역된 많은 아프리카 언어를 배경으로 글을 쓴 베디아코는 모든 아프리카 모국어가 그 나름의 유일무이한 구문론과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다할 수 없는 부요함을 더 충실하게 듣는 데 각자가 나름대로 기여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각각의 새로운 번역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희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 잘 다듬어 주며, 새로운 무대와 맥락을 제공하고, 초월로 가는 또 다른 통로가 되는 은유들을 제공한다. 모든 번역은 ‘불멸의, 보이지 않는, 유일한 지혜이신 하나님’의 굴절을 만들어 내는데 이러한 굴절은 전 세계 성도와 교제하며 사는 우리의 공동체적 삶에 새로운 복음을 알려 주는 통찰과 예배의 저장고를 더 풍성하게 해준다.
그때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성경인 스코필드 해설판의 흠정역성경과는 달리 필립스의 성경은 내게 단지성경의 말이 아니라 성경의 세계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성경의 놀라운 문장 속에 나를 잠기게 했고, 은유의 힘을 느끼도록 도와주었다. 자신의 번역경험을 설명하면서 그는 자신이 종종 “‘주요 전원은 차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래된 집의 배선 공사를 하는 전기 기사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고 했다. 훗날 나는 필립스의 번역을 읽은 첫 독자들은 그가 목회를 하던 런던 교구의 내 또래 청소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번역은 그에게 목회의 행위였는데, 자신이 사역하던 런던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세계로 성경의 언어를 전달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였다. 머지않아 그 번역은 대서양을 건너 서쪽에 있는 몬태나까지 와서 나와 내 친구들이 사는 언어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다. 그후 필립스는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구약 성경 첫 회분의 번역을 이어서 계속했는데, 나는 탐욕스러울 정도로 새로 나오는 번역들을 사서 읽었다. 각각의 번역본은 ‘성경적’인 것에 대한 내 감각과 참여를 확장시켜 주고 깊어지게 했다. 그 ‘성경적’인 것은 해독하고 풀어야 하는 외딴 세계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가까운 세계였다.
나는 계속해서 읽었다. 몇 년 후 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성경을 읽고 있었고, 필립스가 소개해준 직접성, 그 편안함이 성경이 처음 기록되고 읽힌 그 문체와 어조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문체와 어조가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역’을 통해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목사 번역가 덕분에 성경 텍스트는 나를 작고 비좁은 텍스트 ‘해독’의 세계에서 벗어나 텍스트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크고 거대한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나에게 ‘성경적’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살고, 상상하고, 믿고, 사랑하고, 대화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길거리에서 쓰는 일상 언어로 말씀하신)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표현되었고, 내가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게 된, 정확하게 드러나고 풍성하게 유기적인 상황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유진 피터슨 (이 책을 먹어라)
1) 언어가 추상적으로 부풀려지거나 레이스처럼 엮인 거미집처럼 비실체적인 것이 될 때 일어난다. 과장된 언어는 독설이나 위선의 말(하향 모독)만큼이나 언어의 신성한 핵심을 침해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남에게 아첨하거나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려고 말을 사용할 때 일어난다. 성경을 읽고 성경에 반응하는 문제에서라면 하향 모독보다는 상향 모독의 위험이 훨씬 더 큰데, 그 이유는 단순히 상향 모독이 간파하기 더 어렵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빌어먹을 하나님!”(God dammit!)하고 내빝는 말과 같은 공공연한 신성모독은, 예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존귀하고 높으시며, 거룩하고 비길데 없는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읊조리는 아첨 떠는 경건보다 훨씬 더 이목을 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후자가 오히려 전자보다 더 심하게 언어를 모독하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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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진피터슨은 뛰어난 학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흠정역 성경을 읽는 것과 다른 번역본을 읽어보았을 때, 어떤 성경이 더 영감있는지, 성령의 감동하심이 있는지의 관점에서 성경번역을 평가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로 쉬운 번역이 편하지만,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더 있는 번역인가를 보았을 때 저는 현존하는 번역성경중 흠정역 성경만한 번역본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세지 성경도 쉽고 주목을 끄는 성경임에 틀림이 없으나 한 문장을 여러번 읽어 보았을 때 성령의 감동하심에 대해서는 아직 흠정역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 제 개인적 의견입니다.
형님의 염려와 마음은 저도 알고 동의하는 바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글에도 언급이 되었듯이 (....이 위대한 업적은 ... 우리에게 감동적일 정도로 정확한 텍스트를 제공해 주기는 했지만, 성경의 언어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 사이의 간극이 계속해서 멀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흠정역성경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인생의 대부분을 성경이 없는 지역에 성경을 보급하는 선구자적 업적으로 수고하는 번역가들의 성경의 번역에 있어 고풍스럽고 품위있게 번역되어지는 것보다는 일상의 평범하고
교육이 짧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 번역의 가장큰 전제가 되어져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밭에서 쟁기질하는 소년에게도 어렵지 않게 읽혀질 수있는 일상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져야 한다는 틴테일의 마음은 성경을 훼손시키고자 한다기 보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어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 양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틴데일은 제가 존경하는 순교하신 성경 번역가 중 한명입니다. 제가 사실 염려하는 것은 성경원어의 뜻을 문자적으로 직역했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어질 수 있는 데 의역은 대의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모두 전달되어질 수 있는지의 점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라는 것이지 틴데일의 정신이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맞추어져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의역은 의미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변개되어지지 않고 그 뜻 그대로 전달되며 빠짐없이 증거하고 있는가란 측면에서 아직 그런 의역을 만나보지 못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출판사에서 나온 "바르게 읽는 성경(김문수 저)"란 책을 참조해 보신다면 현재 저희들이 읽고 있는 성경번역의 심각성과 이것에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존하신 성경사본이 무엇인지와 그러한 사본에서 번역을 직역으로 한 흠정역 성경이 얼마나 충실하게 원뜻을 전달하고 있는지 그 구절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몇가지의 문제가 아니라 수백가지의 문제가 있음에 저는 사태의 심각성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다른 성경번역들(다른 번역본들, 의역본 포함)은 수백가지의 구절이 생략되어 원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사본으로부터 번역이 된 문제가 보다 더 심각한 것이며, 흠정역이 영감있는 점은 모든 구절들을 포함
하여 가능한 원전에 충실하게 번역을 했다는 점과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성화,경륜 등 중요한 교리적인 부분에 까지 부실한 성경번역본들에서 번역되어 원뜻을 침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 잘못전달되고 있는 현재의 성경번역의 문제점을 비교적 잘 보완해주고 있는 점을 비추어 볼 때 흠정역 성경의 영감성은 고풍스러운 문체가 뛰어난 점에 우수성이 있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빠짐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사본으로부터 번역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많은 분들이 원어에 가까운 성경을 통해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장황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글이 아닌 입으로 선포되고 전해지고 들려지다가 문자화 되어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문자로 기록되어짐으로 잃어버리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시대를 초월해서 보존되고 많은 세대들과 많은 민족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문자화라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영어, 독일어 등등 많은 족속과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지금도 계속 번역되어지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을 전하시는데 제한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성경(한 언어권) - 킹제임스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사단의 성경이다는 말씀보존학회의 고집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의 무오성은 원본에만 국한 된 것이고 사본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볼때 킹제임스역시 원본이 아님에도 다른 선의의 많은 성경사본(번역본)들을 모두 사악한 성경으로 보고 비판과 칼바람을 휘두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점이구요, 둘째로 우리나라에 보급된 한글 개역성경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으며, 킹제임스역만을 고집하는 분들께서는 과연 어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는가 하는 점이구요, 셋째로 세계 각지에서 선교사들이 미 전도 종족(부족)에 복음을 전하여 영혼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데 사용되어지고 번역되어지는 성경
의 많은 부분이 무시되어져야 하는가 이구요, 넷째는 킹제임스역 성경이 탄생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용한 성경이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언어(히브리어,아람어)가 다른 언어(헬라어) 또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지는 배후는 사단의 역사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와 주권으로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 않은가 하는 생각이구요, 하나님을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거룩한 사랑의 열정의 열매로 성경은 번역되어졌고 지금도 번역되어지고 있습니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진 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 사회에 전해지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만 옳다 하는 사람들은
엘리야가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말할때,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자 7000을 남겨 두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에 우리만 옳다하는 말씀보존학회의 아집과 태도는 비록 흠정역이 아무리 정확하게 번역이 되어졌다고 해도 바른 태도와 자세는 아닌것 같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겸손과 온유함이 흠정역만을 고집하는 말씀보존학회분들에게도 흘러 넘쳐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며, 다른 번역본의 사람들에게 칼바람을 휘두르는 우려스러움이 종식되어지기를 바랍니다 ^^ 그분들의 옳음을 입으로만 아닌 그분들의 태도와 마음으로도 보여주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가정 정확히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과연 그들의 바른 신앙을 보증해 주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를 주로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은 어느시대보다도 더 정확한 히브리 원어로 문자화된 성경(구약)을 가지고 밤낮없이 대하고 살폈음에도 살아계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못 박아버렸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