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씨족(동족)의 계통을 기록한 책. 같은 씨족(동족)의 시조로부터 족보편찬 당시의 자손까지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씨족(동족)이란 성(姓)과 본관(本貫)이 같아서 동족의식을 가진 남계친족을 가리키는데, 실제로 여러 족보에는 씨족 · 본종(本宗) · 종족 · 종으로 나타나 있다. 족보는 동족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역사이기 때문에 족보를 통하여 종적으로는 시조로부터 현재의 동족원까지의 세계와 관계를 알 수 있고, 횡적으로는 현재의 동족 및 상호의 혈연적 친소원근(親疎遠近)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가계(家系)의 영속과 씨족의 유대를 존중하는 사회에 있어서는 족보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따라서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고, 가계를 계승하며, 씨족을 단결하고, 소목(昭穆)을 분별하는 등 동족집단의 본질을 여실히 나타내준다. 족보는 이처럼 동족결합의 물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동족조직의 성격을 알 수 있다.
(1) 연원
족보는 서양에도 있었다고 하나 동양과는 달리 대체로 개인의 가계사(家系史)와 같은 것이다. 동양에서 족보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때 족보가 등장하였다. 족보의 편성 · 간행을 촉진시킨 사회적 정세에 대해 김두헌(金斗憲)은 “한국에 있어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현저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계급적 의식과 당파관념이 자못 치열해짐에 따라 문벌의 우열을 명백히 하려고 하였음에 기인한다. ”고 말하고 있다. 또한 간행을 촉진시킨 사회적 요인으로서, ① 동성불혼과 계급내혼제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③ 적서(嫡庶)의 구별, ④ 친소의 구분, ⑤ 당파별의 명확화 등 다섯가지를 들고 있다. 《고려사 高麗史》나 고려시대의 묘지명에 나타난 사료에 의하면 소규모의 필사된 계보는 이 고려시대 이래로 귀족 사이에서 작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에 간행된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 永樂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는 문화유씨의 두번째 족보인 1562년 간행된 10책의 《가정보 嘉靖譜》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세보 安東權氏世譜》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임이 확인되었다. 족보는 모든 종족이 같은 시기에 간행하지는 않았다. 어떤 종족은 16세기에, 어떤 종족은 17,18,19세기에, 어떤 종족은 20세기 초 내지는 최근에 간행하기도 하였다. 물론 현재까지도 족보를 간행하지 않은 종족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이 족보의 간행시기가 차별이 있는 것은 동족의 형성이나 조직성은 종족에 따라 시대적으로 차이가 나며, 동시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동족조직이 형성된 종족도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족보의 발간경위와 수보(修譜) 기간을 알아보면, 조선초기의 족보와 후기의 족보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16세기에 간행된 족보의 서문에 나타난 발간경위를 종합해보면 첫째, 친손 · 외손의 차별 없이 모두 수록하며, 둘째, 남자 · 여자의 차별없이 자녀를 연령순위로 기재하고, 셋째, 규모가 작은 가첩 내지 사보(私譜)의 수준이며, 네째, 수록 자손의 범위는 내외 8촌의 범위 정도였다. 또한 수보기간도 17세기 이후에 시간된 족보보다 훨씬 길게 조사되었다. 이는 조선 중기 이전에 비록 족보가 발간되었다 하나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족집단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거나 동족의식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 조선 전기의 족보는 친손과 똑같이 외손, 외손의 외손 등도 포함하는 자손보(子孫譜)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후기에는 외손들이 제거되고 주로 자, 손, 손의 손 등의 부계친의 계보를 기록함으로써 동족질서를 부계의 선으로 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종류와 명칭
가계의 기록 혹은 가족계보의 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개별적인 가계기록인 가첩(家牒) · 가승(家乘) · 내외보(內外譜) · 팔고조도(八高祖圖) 등도 족보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가첩이나 가승은 동족 전부가 아닌 자기 일가의 직계에 한하여 발췌, 초록한 세계표(世系表)를 지시하는 것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대체로 족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족보에 수록되는 동족의 범위에 의하여 족보를 구분하면, 첫째, 일반적으로 한 동족(동성동본) 전체의 계보인 ‘족보’, 둘째, 한 동족 안의 한 분파(分派)의 세계에 한하는 ‘파보(派譜)’, 셋째, 국내 족보 전반을 망라하는 ‘계보서’ 등 3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족보의 명칭으로는 ‘세보(世譜)’가 가장 많으며, 다음이 ‘족보’, ‘파보’의 순서로 이 3종이 전체의 8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 다만 ‘대동보’의 명칭을 가진 것이다. 대개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대동보’, ‘대종보’, ‘대동세보’, ‘대보’ 등은 보통 파보보다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파보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 《김해김씨 대동보》, 《옥천육씨 대동보》. 둘째, ‘대동보’의 명칭 이외에 파명을 부기한 것이다. 예: 《전주최씨 문영공 대동보》. 셋째, 다만 ‘족보’, ‘세보’의 명칭을 가진 것이다. 이 명칭의 족보는 동성동본의 동족 모두를 포괄하는 것도 있지만 동성동본 가운데 그 일파만을 포함하는 파보도 상당히 있다. 특히 대성(大姓)의 경우는 거의 전부가 그러하다. 예: 《전주최씨 세보》(1925∼1940년 사이에 15회나 간행되었는데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동족성원이 각각 다르다. 말하자면 세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파보인 것이다.) 넷째, ‘족보’,‘세보’의 명칭 외에 파명을 부기한 것이다. 예: 《해주오씨 관북파 세보》. 다섯째, ‘파보’라는 명칭을 가진 것이다.
여기에는 첫째, ‘파보’라는 명칭만을 가진 경우(예:《전주최씨 파보》), 둘째, 파명을 병기하되 파명이 지명인 경우(예:《광주안씨 김해파보》), 셋째, 파명이 장차(長次)의 구별인 경우(예:《장수황씨 장파보》), 네째, 파명이 파조의 관직명 또는 호명(號名)인 경우(예:《순흥안씨 참판공 파보》) 등이 있다. 결국 파보는 단지 한 동족의 1분파만을 수록한다는 수록범위의 차이에 의해서만 한 동족 전체를 포괄하는 족보와 구별될 뿐 그 내용 · 형식 · 분량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하다. 국내 족보 전반을 망라한 계보서로는 《청구씨보 靑丘氏譜》 · 《만성대동보 萬姓大同譜》 ·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족보는 60여종의 명칭이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 중국에서 흔하게 쓰이는 ‘종보(宗譜)’라는 명칭이 보이지 않는 반면에, 월남이나 유구(琉球)에서 많이 사용되는 ‘가보(家譜)’라는 명칭이 많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3) 체재 및 내용
족보의 구성이나 내용은 종류와 크기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나 기본 편집은 거의 대동소이하며, 다음의 원칙과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1) 서(序)와 발(跋)
서는 족보의 권두에 실린 서문이며, 족보 발간의 의의, 동족의 연원 · 내력, 편성 차례 등을 기술한다. 발은 서와 거의 같은데, 다만 편찬의 경위가 좀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개 직계 후손 중에서 학식이 높은 사람이 기술하나 드물게 세상에 이름난 다른 동족원이 쓰는 경우도 있다. 증보 · 수정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구보(舊譜)의 서와 발을 같이 수록한다. 또한 파보 등의 지보(支譜)에는 종보(宗譜)의 것을 그대로 재록한다.
2) 기(記) 또는 지(誌)
시조 또는 중시조의 사전(史傳)을 기재한 것으로 현조(顯祖)의 전기 · 묘지(墓誌) · 제문 · 행장 · 언행록 · 연보 등을 기록한다. 또한 시조전설, 득성사적(得姓事績), 향관(鄕貫), 지명의 연혁, 분파의 내력 등을 자세히 기록하기도 한다. 간혹 그 조상에게 조정에서 내린 조칙이나 서문(書文)이 있으면 명예롭게 여겨 이를 수록한 것이 있다.
3) 도표
시조의 분묘도(墳墓圖), 시조 발상지에 해당하는 향리의 지도, 종사(宗祠)의 약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선조의 화상 같은 것은 별로 없다.
4) 편수자 명기(名記)
대개는 족보의 편수를 담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어떤 파보에는 거기에 참여한 다른 파의 유사(有司)도 기입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명예를 표창하는 동시에 기록의 정확을 기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5) 범례
일반 서적의 범례와 같이 편수기록의 차례를 명시한 것으로 기록 내용을 아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가규(家規) 또는 가헌(家憲)과 같이 범례 이상의 것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6) 계보표
족보의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전질(全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서문 · 기 · 도표 · 편수자명기 · 범례 등은 첫째 권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고 나머지 전부는 이 계보표로 이루어져 있다. 기록양식은 명청(明淸)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시조부터 시작하여 세대순으로 종계(宗系)를 이루고, 그 지면이 끝나면 다음 면으로 옮아간다. 이 때 매면마다 표시(예를 들어 천자문의 한자씩을 차례로 기입하는 방식 등)를 하여 대조에 편리하게 한다. 각각의 사람에 대해서는 이름 · 자호 · 시호 · 생졸(生卒) 연월일 · 관직 · 봉호(封號) · 과방(科榜) · 훈업(勳業) · 덕행 · 충효 · 정표(旌表) · 문장 · 저술 등 일체의 신분관계를 기입한다. 특히 이름은 반드시 관명(冠名)을 기입하는데, 그 세계(世系)와 배항(排行)에는 종횡으로 일정한 원칙에 의한다. 자녀에 대해서는 후계의 유무, 출계(出系) 또는 입양, 적서(嫡庶), 남녀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친생자(親生子)는 ‘자(子)’ 양자는 ‘계(繼)’라고 적기하며, 서자는 대개 수록하지 않고, 여자는 이름을 적지 않고 사위의 성명을 기입한다. 분묘의 소재지, 묘지(墓誌), 비문 등을 표시하며, 특히 시조의 묘지를 선영(先瑩) 또는 선산(先山)이라고 표시한다. 이상과 같은 족보의 체제 및 내용은 종족 또는 시대에 따라 변화과정을 겪었다.
(4) 체제 및 내용의 변천과 사회적 의미
족보의 일반적인 성격, 즉 개념 · 종류 · 명칭 · 연원 · 발간 · 체재 등은 족보가 처음 출현한 조선 초기부터 현재까지 항상 같지는 않았다. 동일한 종족이 간행한 족보라 하더라도 구보와 신보의 기재방식과 내용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동족의식 내지 동족의 조직성을 반영한 것이기에 시대의 변천에 따라 동족의 성격이 변화하였음을 반증해 줄 수 있다.
1) 수록 자손의 범위
조선 초기의 족보는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끝까지 기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6세기 이전에 간행된 안동권씨 · 전의이씨 · 문화유씨 등의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청풍김씨 세보》(1750), 《안동김씨 을축보》, 《남원윤씨 족보》(1706), 《한양조씨 파보》(1917) 등의 범례에 의하면 구보에서 친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재하였다고 나와 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을 문화유씨의 《가정보》(1562)를 통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유씨의 친손도 사위나 외손과 마찬가지로 성(姓)을 꼭 기재하였다. (조선후기의 족보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둘째, 자녀의 기재순위는 출생순위, 즉 연령순이다. 여자는 언제나 사위의 이름으로 기재한다. 셋째, 문화유씨의 성을 가진 친손뿐만 아니라 외손, 외손의 외손, 외손의 외손의 외손--- 까지 모두 기재하였다. 이렇게 볼 때 문화유씨의 《가정보》는 후기의 부계친의 가계보와 성격이 다른 친손과 외손의 자손보(子孫譜)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족보에는 이성자(異姓子)는 보통 사위만이 기재되는데 이는 조선후기로 올수록 수록자손의 범위, 특히 외손의 범위가 축소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축소과정에 대해 20개 동족을 조사해보면, 이중에서 14개 동족은 18세기에 들어와서 외손의 범위를 3대 또는 2대로 축소하였다. 요컨대, 15∼16세기까지는 대체로 외손도 친손과 동일하게 기재하다가 17세기에 들어와서 일부는 외손의 기재범위를 3대로 한정하였고, 18세기에 들어와서 대다수 동족이 외손 3대로 한정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16세기 이전의 조선 초기에 족보를 시간(始刊)한 동족은 다음의 어느 한 과정을 거쳐 외손의 기재범위를 점차 제한하게 되었다.
° 외손 전부 → 3대 → 2대 → 사위
° 외손 전부 → 3대 → 사위
° 외손 전부 → 2대 → 사위
그러나 조선 중기에 족보를 시간한 동족은 대개 처음부터 외손 3대 내지 2대만 기재하다가 사위만 기재하게 되었고(예: 1702년에 시간한 대구서씨의 경우) 조선후기 이후에 족보를 시간한 동족은 처음부터 사위만을 기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예: 1821년에 시간한 철원제씨의 경우). 이와 같이 기간의 경과에 따라 외손의 기재범위가 점차 줄어드는 이유는 족보의 범례에 나타나 있는 용어를 빌리면, ‘본말(本末)’이나 ‘주객(主客)’ 또는 ‘내외지별(內外之別)’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외에 경제적 이유를 드는 족보도 있지만 이 경우도 부계친의 동족의식이 강화되어 외손보다는 친손을 더욱 존중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같은 자손이라도 동성동본의 자손(친손)과 이성의 자손(외손)을 구별하고자 하는 본종(부계친) 중심의 의식이 강화되어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2) 남녀 서열
조선초기의 족보에는 아들 · 딸(사위)을 출생순위로 기재하였으나 중기 · 후기로 내려오면서 아들을 먼저 기재하고 딸(사위)을 나중에 기록하는 ‘선남후녀(先男後女)’의 기재방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17세기에 벌써 선남후녀의 양식을 따르는 동족도 있는 반면에(평산신씨 · 고성이씨 · 문화유씨), 18세기에도 아직 남녀의 출생순위별 기재방식을 따른 동족도 있기는 하지만(반남박씨 · 연안김씨 · 달성서씨 · 용인이씨 · 동복오씨 · 풍양조씨 · 청풍김씨 · 남원윤씨 · 안동김씨), 대체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동족이 선남후녀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17세기에는 출생순위가 지배적이고, 18세기에는 출생순위와 선남후녀의 두가지 방식이 공존하다가,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선남후녀의 기재방식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남녀 기재방식의 변천은 성의 기록여부나 외손의 기재범위 축소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동족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실 자녀를 연령순으로 기재하는 방식의 사회적 의미는 윤서(倫序), 즉 차례를 존중하는 것이라면, 선남후녀 기재방식은 동족, 즉 본종을 존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재방식이 ‘출생순위’에서 ‘선남후녀’로 바뀐 현상은 윤서보다 동족질서를 우위에 두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후기로 내려오면서 본종사상(동족의식)이 강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부계친에 있어서 선남후녀로 바뀐 시대에도 ‘외손’만은 이러한 선남후녀의 규칙을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 대구서씨 세보(1775) · 기계유씨 족보(1704)]
3) 양자와 종가사상(宗家思想)
입양의 보편화는 무후자(無後子)가 부계의 선을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동성자 집단(동족)의 형성 · 유지를 위한 종가사상의 정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데 조선초기 문화유씨 족보에 나타난 14개파의 종손의 가계도를 분석해보면, 첫째, 조선초기 · 중기까지는 파조의 장남계보가 시종일관 계승된 집이 하나도 없었고 차남 · 3남 계열로 가계가 계승되지만, 둘째,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입양을 해서라도 장남계열의 가계계승이 정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입양의 경우에도 16세기까지는 형(장자 長子)에게 친생자가 없는 경우 동생의 장남이나 독자를 입양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고 다만 동생의 차남 · 3남을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17세기부터는 동생의 장남 · 독자를 입양시키는 경우와 차남 · 3남을 입양시키는 두 가지 경우가 공존하다가, 18세기 이후부터는 동생의 장남 · 독자를 입양시키는 경향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종가의 대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종가사상’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강화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4) 항렬(行列)의 사용
조선시대에 발간된 족보에서 항렬자 사용의 변화경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항렬자의 사용은 형제간 · 4촌 간 등에 한정되었지만, 점차 6촌 · 8촌으로 확대되어 조선후기 이후부터는 전체의 대동항렬자를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예컨대 문화유씨는 1864년, 연안김씨는 1870년, 남원윤씨는 1860년, 남양홍씨는 1834년, 능성구씨는 1853년 등이다. 둘째, 가족차원의 항렬이 동족차원으로 확대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다. 가족보다 더 큰 동족의 최소 범위를 8촌이라고 한다면 8촌간에 같은 항렬자를 사용한 시기는 17세기 이후이기 때문이다. 항렬자의 사용은 한 집단의 조직성과 통일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17세기에는 항렬자의 사용이 가족차원을 넘어 8촌까지 확대되며 18∼19세기를 지나면서 동성동본까지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이 범위 내에서 조직성과 통일성을 가진 동성자 집단이 형성, 유지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기록이고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사문서이지만 공문서의 성격도 지닌다. 족보의 기록을 통하여 자기 조상의 업적을 배우고, 동족원의 협동과 상부상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가계기록 이상의 사회통합적 순기능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족보는, 첫째, 동성불혼의 판단자료가 되는 법률적 효용성을 지니고 있으며, 둘째, 여러 종중의 족보기록을 통하여 우리 나라 전통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규명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다. 반면에 과거의 조상을 미화시킨다든지, 없는 조상을 일부러 만들어 넣는 등 위보(僞譜)를 만드는 경우도 있어 그 폐해도 없지 않다. 더욱이 전통사회에서 부역을 면하기 위하여 다른 집안의 족보에 이름을 얹는 부보(附譜)가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족보가 단순한 가계기록 이상의 기능을 지닌다고 할 때 오늘날에도 존재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대의 족보는 부계중심의 기록이라든가, 현대적인 감각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 거론되는 가운데 한글로 풀어쓴 것이라든가, 영상자료 형태의 족보도 등장하는 등 변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