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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氏의 유래 및 비조(鼻祖) 오첨(吳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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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 성의 기원은 고대 중국 양자강 부근 연릉 사람인 태백이 세운 吳나라에 부차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손자 루양이 천자로 부터 오씨성을 하사 받고 오나라의 왕이 되어 이때부터 오씨가 생겼다. 우리나라 오씨의 비조는 태백왕의 25세인 오기(초나라 제상)의 45세인 첨公(武惠公)이, 지증왕 원년인 500년에 중국 제나라에서 신라로 건너와, 왕명으로 김종지(金宗之)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낳고 함양에서 21년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때 두 아드님 중 둘째 응(應)이 어려서 따라가지 못하고 함양에 살았다. 첨公의 11세인 吳禧는 3남1녀를 두셨는데 따님께서 고려 태조비인 장화황후가 되고 禧는 國舅(국구)가 되어 다련군에 封君(태조4년 921年)되었으며, 장화황후의 아드님이 고려 제2대 임금인 혜종이시다. 다련군(오희)의 세 아드님인 相은 금성백(錦城伯), 桓은 수양백(首陽伯), 檢은 천령백(天嶺伯)에 봉해졌다. 그 후 첨의 18세인 문양공(오연총)께서 고려 예종때 원수 윤관과 더불어 부원수로써 여진을 정벌하였으며, 관직이 중서시랑평장사 이르렀고, 文武에 걸쳐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吳氏 가문을 가장 높여, 公(우측 문양공 영정)을 중시조로 여겼고, 수양오씨(首陽吳氏)라고도 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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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오씨 시조 오현보(字:오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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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총(문양공)의 6세인 오수권의 세 아드님인 현보(字:應夫), 현좌(字:應儒), 현필(字:應男) 3형제가 1216년(고종3)에 거란을 물리친 공으로 오현보는 해주군, 현좌는 동복군, 현필은 보성군에 봉해져 각각 해주오씨, 동복오씨, 보성오씨로 분관하였으며, 이후 오씨의 많은 분관이 이루어 졌다. 해주오씨 시조인 해주군(오현보)은 비조 오첨의 24世이며, 관직은 1199년에 낭장으로 명주 민란을 진압하였고, 상장군에 올라 거란족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으며, 1224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참지정사(종2품)로 卒하셨다, 아드님으로 종인(吳宗寅:동정공:금자광록대부 검교군기감 소감)公 등이 있다. [자료실 13 항목]
▶ 해주군 동복군 보성군을 설단하여 錦陽壇(금양단) 이라함. 1966年 三君의 묘가 실전한지 오래라, 후손된 자로 報本할 곳이 없어 恨이 되어 설단하여 享祀하고자, 여러 종친들이 힘을 모아 조상을 숭상하고 종친간의 화목함을 목적하여, 전남 곡성군 덕산사 문양공 享祀 때 논의가 되어, 三君 후손 대표로 해주군 후손(潤煥), 동복군 후손(영택), 보성군 후손(東植), 諸氏 등이 적극 추진하시어 三君을 설단하고 공주군 儒道會의 제의로 이름을 錦陽壇이라 하고, 매년 음력 3월 6일에 공주 儒道會가 參席하는 성대한 祭享을 지내고 있다. [위치 : 충남 공주군 장기면 신관리산]
▶ 덕산사와 문양공 영정. 문양공 오연총(1055-1116)의 영정은 현재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천덕산 아래 덕산사에 모셔져 있는데, 공의 사적이 關北 지방에는 祠宇, 位牌, 영정 등이 남아있는데 비하여 남쪽에는 남아 있는게 없어 후손들이 한스럽게 여겨오다, 1928年에 宗家의 長老인 吳致基와 吳寬淳 등이 의논하여 함경도 北靑의 至德祠와 안북사에 가서 약간의 유적과 士林들의 春秋享祝文 및 奉安文 그리고 영정 등을 얻어가지고 돌아와 1928, 11月에 남쪽의 유일한 문양공 사우인 덕산사를 지어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또한 자료를 모아 1936년에 吳基泳 등이 문양공실기를 간행하였다. [전남문화재 제120호/1984.2.29] [上記 자료출처 : 고려사/ 동국병감/ 해주오씨족보/ 문양공실기/ 덕산사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