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2)
위의 시를 읽어보고 오세영이란 시인의 삶과 문학을 생각하면 그의 인생관이나 삶의 가치관이 금방 극명하게 드러난다.그는 종교적으로 관찰할 때 불교쪽에 더 가깝고 동양사상과 밀접헌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 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시인의 성숙한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삶은 유전하는 것이며 고정되거나 머무를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유랑하는 삶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찾을 것인가.그는 이 문제로 한동안 고민해왔으리라 믿는다.시인의 고민이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발견햇을때 그 고민의 감도는 도를 더해간다. 그러나 일단 그 문제가 해결은 되지 않았어도 얼추 들어맞는다고 생각할 때는 자신이 생기고 자신감위에 폭포처럼 많은 시를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시 저변에 깔려잇는 것은 불교적인 연기설(緣起說) 혹은 윤회설(輪廻說)이아닐까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그릇은 인간의 모양이다. 흙으로 구워진 여러 가지 모양의 그릇들은 곧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삶을 버린다면 인간의 삶 또한 무의미하다. 시인은 바로 이렇게 그릇에서 모순의 흙,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깨닫고 있다.
"산업 사회가 급속도로 전개되면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한편 정신적 가치의 혼란을 체험하는 모순의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사회적 조건과 관계가 된다. 이 시에서 '그릇'은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하찮은 '그릇'의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에 비유하여 존재론적 지평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차원의 세계를 내면화하여 시적 미의식과 결합시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릇'이라는 사물은 '흙으로 빚어진' 것이고, 언제인가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쉽게 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졌다. 결국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 덩어리. 그것이 바로 그릇이다.
2연에서는 이러한 사물의 이미지를 인간의 일상적 삶의 국면과 연결시키는 재치가 보인다. 그것은 이미지의 추구를 넘어 존재의 탐색이라는 차원으로 이동하는 중간 단계이다. '생애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가지만 결국은 '깨지는 그릇'처럼 인간은 마침내 죽고야 마는 운명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이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흙이 비록 그릇으로 만들어져 언젠가는 깨질지언정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리는 고도의 정신적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4연에서는 인간 존재의 모순성을 '절대의 파멸'로 인식하는 예지를 터득한다.
접시는 '깨어져서 완성되는' 시적 표현은 모순되는 진술이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접시가 깨지는 것은 접시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죽음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그것은 사물의 유한성을 벗어나 영원한 존재의 세계로 남는 것이다. '그릇'이라는 언제인가 깨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순의 그릇'이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담으면서도 비어 잇는 것이고, 담고 있는 그릇은 그 내용물을 버려야 하는 그야말로 모순 덩어리이다. 인간의 삶도 '깨어져서 완성되는/저 절대의 파멸'과 같은 역설적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존만 해야 한다는 이념적 구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여 지상적 삶의 유한성을 초월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진정한 정신의 자유를 누릴 필요가 있다. 세속적 삶의 한계에서 초월하여 존재론적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시의 주된 내용이다
<윤재열의 즐거운 시여행에서 인용>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에서 주인공 싯달타가 하는 말이 생각이 나는 장면이다.하나의 사물은 여러경로를 거쳐서 나무도 될 수가 있고 또 다른 무엇도 될 수가 있다. 따라서 죽음이란 영원히 산 자가 없엊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변하는 과정이다.즉 삶과 죽음을 한개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이 이 시를 낳게 한 것이다.
너 어디서 걸어왔더냐 눈 쌓인 비탈에 선 자작 한 그루,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곁눈질 한번 주지 않고 용케 예까지 걸어왔구나. 너 어디로 가는 길이더냐. 이 벼랑 건너뛰면 또 다른 벼랑, 이 봉우리 넘어서면 또 흐르는 흰 구름, 가도 가도 길은 끝이 없는데 자작나무야, 산문에 기대선 늙은 중처럼 꽃잎을 버려 잎새를 버려 너 허공에 몸 기대고 있구나. 어디로 가려느냐. 어린 까치, 집 버려야 하늘 날듯이 자작나무야. 까치집 하나 지고 겨울 나무야.
하나의 대상에 그것도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시인이란 모름지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는 의미있는 한 줄의 시로서 이야기를 한 셈이다.자작나무 한그루란 보는 이에 따라서 그냥 서잇는 자작나무이고 땔감으로서의 가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란 보통사람들의 생각과는 상반되는 의미를 자작나무에 불어넣어 생명을 만든 것이다.
자작나무에 둥지를 만든 까치와 까치집 그것들은 모두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생명이고 생명에 대한 외경감이면서 그 생명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진 유명시인이나 독자에게 생소한 시인을 불문하고 시를 접하고 시적인 마음이 들어서는 데는 여러가지 동기가 있을 것이다. 오세영 시인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가 처음 시를 대하게 된 것은 중2 때로 김소월의 시가 마약처럼 황홀하게 감각으로 와 닿는 슬픔의 세계였고 괴테, 하이네, 워즈워스, 바이런, 휘트먼 같은 서구 낭만파 시인들의 시는 멋과 분위기로 읽었고 지금 생각하면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셨다. 고2가 되어 읽은 서정주, 유치환, 신석정, 김광균, 박목월의 시인들이 결정적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서정주의 『화사집』은 하나의 전율로 이후에 읽은 정지용과 더불어 이들을 시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에 ‘위대한 스승이 위대한 시인을 낳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같이 늙어가는 세대에게 있어서 시는 그 당시에 구원을 향한 탈출구이기도 했다.공부를 잘했건 잘못했건 간에 웬만한 학생들의 책가방 속에는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시집 한권쯤이 박혀있엇던 그 시절은 참으로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김소월의 토속적이고 쉽게 풀어쓴 그 시어들은 학문이 깊지 않았어도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와닿았고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은 그뜻을 제목에서 추려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오세영 시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문학적 동경을 심어준 문학작품으로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과 이태준의 「청춘무성(靑春茂盛)」인데 이 두 작품은 각각 삶의 존재론적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지만 관념적 이상 세계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닌다고 하셨다. 현실이 궁핍했으므로 미지의 세계를 꿈꾸었는데 거기에는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이 많았으며 가령 현실을 희생하고 영원을 추구했던 알리사, 삶의 추악성 속에서 순결한 빛을 추구했던 알료샤, 육과 영혼의 갈등에 빠져 방황하는 싱클레어, 사랑의 순교자 제인에어, 관념이 아니라 행동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카추샤, 일상 삶의 덧없음을 일깨워 준 줄리앙 소렐 등이 나오는 작품에 심취한 것은 자폐적이어서 홀로 있었고 현실적인 삶을 부정하는 가운데 유미주의에 경도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시인이 되고나서 도대체 시인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스스로 회의를 느낀 일도 많았다.무기력한 일상에서의 시인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아래와 같은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일.시인의 일
자유는 독재와 구별된다는 이런 따위 말이 나를 웃게 만든다. 할일 없을 땐 다방에 앉아 미스 김의 눈에 말라붙은 웃음이나 우려 따끈한 차라도 마시면 되지. 우리가 하는 일이란 답배 피고 술마시고 뚱보 김시장에게 고개숙이고 신문을 보면서 혀나 차는일 웃어도 웃어도 울고 싶은 친구의 농담이나 들으면서 서울의 밤거리를 헤매다가 돌아오는 그런 하루나 보내는 일이지.
날카로운 지성과 현실비판적이고 정의감이라면 남들의 몇십배나 더한 시인들이 거대한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서 존재의 가치조차 불분명해지는 그런 무력감이 들때 시인들은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그렇다면 시인들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고작 문학지에 몇편의 작품이나 보내고 그것을 보는 독자들의 얼굴을 상상이나 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일이 과연 시인들이 하는 일인가. 뚱보 김사장의 트릿하고 부도덕작인 치부에 저헝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의 눈치를 본면서 말장단이나 맞추는 비굴한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그러한 분노를 오세영 시인은 아래와같은 시론으로서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ㅣ시론] 이 몸이 죽어 죽어…
<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
중등학교 시절, 우리 세대가 자주 외우던 시조 가운데 고려말의 충신, 포은(圃隱) 선생의 ‘단심가(丹心歌)’가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인용하자면 “이 몸이 죽어죽어 일 백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내용으로 가히 섬뜩한 공포감을 자아내게 할 만큼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 시조였다. 이 무렵의 우리들은 선조들의 이같은 충절의 미덕을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마치 왕이나 국부처럼 칭송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충절에 대한 이 맹목적 흠모의 교육 탓일까. 오늘의 대통령을 포은이 노래한 봉건 왕조의 왕으로 착각해서인지 몇 주전 노무현 대통령과 국민의 대표들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노인이 바닥에 꿇어 엎드려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리는 해프닝을 TV 화면을 통해 보았다.
오늘의 가치관에서도 충절이란 물론 존중되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예컨대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나 국민에 대한 것이지 한 특별한 개인에 대해 바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국의 대통령도 허물이 있거나 국가 이익에 심각하게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다면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는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이다. 충절이란 존중되어야 할 덕목이긴 하지만 이렇듯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 때문일까. 유럽사람들과 달리 우리들은 충(忠)뿐만 아니라 충에 유사한 행위들도 유달리 높이 사는 관습적 사고에 젖어 살고 있는 듯하다. 그 중 하나가 ‘소신’이라 부르는 어떤 정신자세이다. 오죽하면 ‘소신에 죽고 산다.’는 말까지 생겼으랴.
물론 소신도 존중되어야 할 가치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예컨대 정당하고 올바른 신념에 대한 소신은 가능한 한 실천되고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충절이 그러하듯 소신 또한 한사코 고수하는 일만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의 시대-민주주의 시대-가 그러하다. 봉건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한 개인의 통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 모두의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그 구성원 각자가 지닌 각기 다른 생각, 다른 신념들이 조정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성원을 구성하는 각자는 그 지적 수준, 정서적 감수성, 인격, 능력, 성별이 어떠하든 모두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 판단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그 참여자의 한 사람일 뿐인 어떤 자가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무작정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하려 한다면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하물며 그 같은 소신을 가진 자 바로 인간이며, 하늘 아래 인간이란 그 누구든 완전치 못함에랴.
최근 우리 사회에는 이렇듯-그 주장하는 바 신념이 옳든 옳지 않든-죽음을 불사하고 자신만의 소신을 관철하려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엊그제 아수라장이 된 민주노총 총회가 그러하고, 몇 주전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 건설을 중지하라며 한 스님이 죽기 살기로 벌였던 단식투쟁이 그러하고, 몇 달전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반대, 마치 종교 의식처럼 전국토를 종단하여 포퓰리즘에 불을 지른 종교인들의 삼보일배가 그러하다. 그들의 상대가 어떤 태도로 그들을 대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들의 주장이 과연 최선의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소신을 무작정 관찰하려 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 누구나 귀를 활짝 열고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에 의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옛 성현도 말하지 않았던가.
“귀 있는 자 들어라.”
산업 사회가 급속도로 전개되면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한편 정신적 가치의 혼란을 체험하는 모순의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사회적 조건과 관계가 된다. 이 시에서 '그릇'은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하찮은 '그릇'의 구체적 사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에 비유하여 존재론적 지평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차원의 세계를 내면화하여 시적 미의식과 결합시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릇'이라는 사물은 '흙으로 빚어진' 것이고, 언제인가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쉽게 깨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졌다. 결국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 덩어리. 그것이 바로 그릇이다.
2연에서는 이러한 사물의 이미지를 인간의 일상적 삶의 국면과 연결시키는 재치가 보인다. 그것은 이미지의 추구를 넘어 존재의 탐색이라는 차원으로 이동하는 중간 단계이다. '생애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가지만 결국은 '깨지는 그릇'처럼 인간은 마침내 죽고야 마는 운명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이 앞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흙이 비록 그릇으로 만들어져 언젠가는 깨질지언정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리는 고도의 정신적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4연에서는 인간 존재의 모순성을 '절대의 파멸'로 인식하는 예지를 터득한다.
접시는 '깨어져서 완성되는' 시적 표현은 모순되는 진술이면서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접시가 깨지는 것은 접시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죽음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그것은 사물의 유한성을 벗어나 영원한 존재의 세계로 남는 것이다. '그릇'이라는 언제인가 깨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순의 그릇'이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담으면서도 비어 잇는 것이고, 담고 있는 그릇은 그 내용물을 버려야 하는 그야말로 모순 덩어리이다. 인간의 삶도 '깨어져서 완성되는/저 절대의 파멸'과 같은 역설적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존만 해야 한다는 이념적 구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여 지상적 삶의 유한성을 초월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진정한 정신의 자유를 누릴 필요가 있다. 세속적 삶의 한계에서 초월하여 존재론적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시의 주된 내용이다.
- 윤재열 <즐거운 시여행> 중에서
그는 그동안 많은 시집과 시론, 그리고 시와 연관된 논문집을 발표했다. 또한 문단에서도 시인협회장을 비롯한 굵직한 직함으로서 그의 출생지인 호남에서분만아니라 많은 후학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그가 문자화한 많은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저서는 아래와 같다.
【시집】<반란(反亂)하는 빛>(1970.현대시학사)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1983.문학사상사) <모순(矛盾)의 흙>(1985.고려원) <무명연시(無明戀詩)>(1986.전예원) <불타는 물>(1989.문학사상사)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구룡사시편 겨울노래>(1992) <어리석은 헤겔>(고려원.1994) <벼랑의 꿈-집만이 집이 아니고>(대한매일신보사.1999) <사랑의 저쪽>(미학사.1990)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시와시학사.1991) <눈물에 어리는 하늘그림자>(현대문학사.1994) <벼랑의 꿈>(시와 시학사.1999) <적멸의 불빛>(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