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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의 <샘> |
‘미적인 모든 것을 불태워라’는 뒤샹의 성상파괴적 태도는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은 입체주의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반미학이 미학을 대체했고 시각적 무관심이 취미를 대체했다. “당신이 좋아하거나 또는 싫어하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예술가에게 전혀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을 선택하라.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에 도달하라. 그 순간 그것은 레디메이드가 된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수작업에 의해 예술이 창조되기 때문에 기계적 생산보다 고상한 작업이라는 신념을 파괴하고 기계적 생산 양식도 예술에 적용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파격적 시도였다. 이 시도는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20세기의 문화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뒤샹의 저항방식은 반대가 아니라 무관심이었다. 재미있게도 일부 비평가들은 이처럼 관례적 가치로부터 벗어나서 어떤 판단 없이 사물을 무관심하게 보는 방식을 ‘자생적 선(禪)’이라고 평가한다. 과연 그럴까?
체스놀이를 하는 뒤샹
다다이즘은 어떤 진지함도 거부했다. 그것은 현실을 냉소적으로 조롱함으로써 현실을 초월하고자 했다. 그 점에서 다다의 무대가 전쟁의 포화가 미치지 않았던 중립국 스위스와 대서양 건너 뉴욕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다다는 현실에서 한 발짝 벗어난 예외적인 존재들에게만 허용된 행운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술은 부정했지만 예술가임은 부정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존재는 전통사회에서 예술가들이 누렸던 예외적 특권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반미학적 과격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저항은 미학적 차원에 제한되어 있었다.
뒤샹의 예외성은 전쟁의 압박이 전혀 없었던 미국에서, 유럽의 모든 예술적 경향을 동경해마지 않았던 미국의 문화적 후진성 가운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923년부터 뒤샹은 공식적으로 모든 작품제작 활동을 중단하고 체스에 투신했다. 당시 사람들은 뒤샹의 이 태도마저 아방가르드적 행위로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예술적 노력과 진지함을 비웃으며 초연하게 체스놀이를 즐기는 예외자, 따라서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예술가로 간주되었다. 과연 그는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명인들처럼 지상의 모든 가치들에서 초탈하여 체스의 유희를 즐겼을까?
뒤샹의 유작 <에땅 돈네>
뒤샹의 사후 <에땅 돈네>라는 유작이 발견된다. 이 발견은 당시 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기만 때문이 아니라 다다의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예술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하나의 안티테제로 만들었지만 결국 그는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그 ‘무의미한’ 현실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니체의 경고가 의미하는 바처럼, 안티테제는 테제의 반대로서만 존립하기 때문에 테제의 부정성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결국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했듯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현실 속에서 미적 자유란 허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훗날 다다가 돌아왔을 때 그것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있었다. 홉스봄이 지적하듯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절망적인 항변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한 옛 다다의 선물로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미술관이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먹혀버리고 말았다.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아방가르드가 개척한 새로운 자유 덕분에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고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점도 다양화되었다.
만약 뒤샹의 미술과 선불교의 유사성을 찾는다면 부정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그렇다. 그들은 결코 선의 긍정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방가르드의 불교, 특히 선에 대한 관심은 바로 그 부정성 때문에 촉발되었으며, 선은 서양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수용되었다. 지금까지도 선을 부정성으로 이해하는 비평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불교 이해의 근본적인 문제를 말해준다. 이 문제는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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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의 <자전거 바퀴> |
뒤샹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필라델피아에 대한 내 지식은 톰 행크스가 에이즈로 죽어가는 게이로 열연한 영화 필라델피아가 전부였기 때문에, 여름에 뉴욕에서 만난 한국인 간호사가 필라델피아에 간다고 했을 때 얼른 따라 나섰다. 유럽풍으로 잘 정비된 도시 설계에 따라 미술관들이 한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당일 일정으로 떠난 우리에겐 미술관 한 곳을 관람하는 것도 시간이 부족했다.
마감시간을 꾹꾹 채워 그림을 감상한 뒤, 필라델피아에 오면 치즈버거를 먹어야 한다는 정보에 따라 한 시간 남짓 발품을 팔아 치즈버거집을 찾아갔다. 시장기를 참으며 찾아간 곳은 우리나라 롯데리아보다 작은 버거집이었다. ‘아니, 정크푸드가 필라델피아의 명물이라고!’ 근사한 레스토랑과 맛있는 저녁식사를 기대했던 우리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그다지 감동스럽지 않은 맛이었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남을 만큼 충분한 양과, 나로서는 먹을 수 있는 메뉴인 베지버거를 찾았다는 기쁨으로 실망은 충분히 보충되었다.
나중에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도 유세 도중 이 집을 찾았다고 한다. 우리처럼 필라델피아가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후에 이 집을 찾는 사람은 그의 기념사진도 덤으로 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