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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노동열사(8월)
세계에서 유래 없는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지 3년이 지난 1948년 8월15일, 하나의 민족이 둘로 나뉘어 남쪽에서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탈취, 불안한 권력에 서 있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8월2일, 언론윤리법을 제정해 언론을 관제(官制)화 하려 했고, 이에 전국의 언론인이 들고 일어섰다. 같은해 8월14일 인혁당 사건을, 1968년 8월24에는 통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해 민중당 의원 61명은 8월12일 의원직사퇴서를 제출했다. 1969년 8월1일 대구고에서 데모를 주동한 학생 16명을 퇴학처분했고 병무청은 30일 군입대 영장을 발부해 물의를 일으켰다. 1971년 8월10일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내쫓긴 광주단지 주민 3만명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달 23일 실미도 특수대원 난동사건이 발생했다. 1972년 사채동결과 재벌특혜를 골자로 하는 8.3 긴급명령조치가 발포되었고, 8월30일 대한적십자 대표단 54명이 평양을 방문, 남북적십자 첫 본회담이 열렸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고, 75년 8월 17일에는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79년 8월9일 YH노조의 신민당사 점거농성과 11일 강제해산 과정에서 발생한 김경숙의 죽음을 경찰은 자살로 발표했지만 2008년 사건을 조작했음이 밝혀져 그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YH 여성노동자 투쟁은 몰락하던 박정희정권의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투쟁이었다.
1980년 8월4일 삼청교육대 실시로 3,252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39,742명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그중 54명이 사망했다. 민주노조 간부 191명이 강제 정화조치 당했다. 8월27일 전두환이 체육관에서 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2년 8월10일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문부식과 김현장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984년 8월24일 재개발과정에서 목동주민 천여명이 양화교 점거하고 격력한 시위를 벌였다. 1987년 8월17일 전국을 달군 노동자대투쟁 현대그룹노동자들의 연합가두시위가 울산에서 있었고, 8월19일 전국 95개대를 포괄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이 결성되었다. 1988년 8월25일 방송사상 처음으로 MBC노조가 파업에 돌입, 공영방송의 의미와 중요성이 사회적으로 부각되었다. 1989년 8월15일 문규현신부 임수경이 판문점을 넘어 귀환, 분단 후 민간인 신분으로 처음 분단선 위에 서서 통일을 크게 말했다. 1995년 8월25일 전국 78개 대학 3560명의 교수 서명의 5.18특별법 입법청원운동은 공소시효 만류로 기소되지 않았던 전두환 노태우를 처벌받도록 만들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후 8월15일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 김경숙(1979.8.11 21세) 초등학교 6학년때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한 김경숙 동지의 삶은 한국 최대 가발무역 YH에 입사후 노조 대의원 소그룹 ‘차돌이’ 그룹장으로 이어졌다. 1979년 4월13일 1차 위장폐업은 철회시켰지만 또다시 자행된 폐업에 맞서 신민당사 농성이 감행되었다. 8월11일 동지는 2천여의 경찰이 벌인 ‘101호작전’ 과정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YH 투쟁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18년 박정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문영수 (1982. 8.22 29세) 삼천리연탄에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한 동지는 진아교통에 입사, 운전기사들의 처우개선과 안내양에 대한 회사측의 몸수색에 항의하였다. 회사를 그만둔 후 ’82년 8월 19일 작은 폭행사건에 연루 파출소에 연행, 조사 받던 중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했다. 경찰은 행려사망자로 처리, 전남대의대에 해부용 실습교재로 넘겨 버렸다.
홍기일(1985.8.22 25세) 80년 광주민중항쟁에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동지는 사우디에 미장공으로 취업, 귀국후 건설현장에서 노동했다. 1985년 8월15일 전남도청앞에서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 전단 살포,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분신했다. 경찰과 의사들은 새벽 산소호흡기 제거 화순군 야산에서 동지를 매장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대용(1987.8.1 24세) 1977년부터 노동자로 살아온 동지는 야간중학을 다니면서도 1986년 동양튜브 임금인상투쟁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87년 8월 1일 산마루교회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에 참여하던 중 동료를 구하고 운명했다.
유인식(1987.8.1 24세) 고려대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투신한 동지는 1987년 한국기독노동자 인천지역연맹대표자회의 성원, 6월투쟁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87년 8월1일 샘터교회 노동자들과 인천지역 노동자여름수련회에 참가, 물놀이중 동료를 구하고 운명했다.
박용선 (1987.8.1 20세) 동인천중학 졸업후 어려운 형편으로 진학을 포기, 16세 어린나이로 공장문을 두드리고, 노동자로 살아가던 동지는 ‘백마교회’문화교실을 통해 한국사회에 노동자 현실에 눈뜨기 시작, 투쟁과 학습에서 늘 앞장섰다. 인천지역 노동자수련회에 참가중 발생한 물놀이 사고 당시 동지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김현욱(1987.8.1 21세) 가톨릭노동사목의 교육을 통해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세워가던 동지는 1987년 7월말 군복무 휴가기간 중 ‘인기노’ 주최 수련회에 참가하여 물놀이 프로그램 중 물에 빠진 동지를 구하고, 짧고 굵은 생을 마치게 되었다.
’87년 8월 1~3일까지 매포수양관에서 인천기노련 주최 ‘인천지역노동자 여름수련회’중 물놀이 장소 바로 옆에 얼마 전에 불법골재 채취 작업으로 깊은 웅덩이가 있는 것을 몰랐고, 일행 중에 갑자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한 3명의 노동자가 뛰어가 1명을 구했지만 구하러 들어간 두 명이 힘이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동지와 다른 동료들은 인간 사슬을 만들어 구출을 시도하였으나, 동지조차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
이석규(1987.8.22 22세) 1983년 대우조선에 입사한 동지는 87년 대투쟁과정에서 김우중회담 면담을 요구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중 폭력경찰이 쏜 최루탄에 오른쪽 가슴을 맞아 숨졌다. 광주 망월동으로 장례조차 가로막은 정부에 항의, 장례를 무기연기한 것을 사체를 볼모로 한 투쟁이라 왜곡하고 시신을 탈취해 남원에 묻어 또 한번 동지를 죽였다.
최성조(1989.8.5) 동지는 100여일간의 남성홍진노조 파업투쟁에 앞장섰다. 7월30일 50여명의 구사대가 조합사무실을 폭력 점거했다. 천막농성장을 사수하던 중 각목과 쇠파이로 구타당한 동지는 2차례 수술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89년 8월 5일 운명하고 말았다.
최동 (1990.8.7 30세) 성균관대에서 광주학살진상규명 요구 시위로 구속된 동지는 출감후 부천지역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86년 반제동맹당사건으로 도피생활중에 ‘인노회’ 창립의 산파역할을 했다. 이적단체구성죄 적용으로 구속된 동지는 극심한 고민으로 ‘우울증 정신분열증세’ 진단으로 출소후 상태가 악화되어 90년 8월7일 분신, 운명했다.
김처칠(1991.8.22 35세) 1982년 화창운수에서 택시노동자로 시작된 동지의 노동운동은 1990년 합동물산노조 위원장으로 1년여 동안 도급제 철폐투쟁으로 이어졌다. 차고지가 없어져 성산대교 양화대교 밑에서도 택시노동자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동지의 투쟁은 하루 세끼를 라면으로 때우면서도 멈추지 않았지만 끝내 한강에 투신해 삶을 마감했다.
박태순(1992.8.29 26세) 한신대 재학시절 반독재민주화, 노동자 권익을 위한 민중운동에 나선 동지는 89년 수원검찰청 점검농성, 구속 후 군입대를 거부하고 수배상태에서 부천 수영기계에 위장취업했으나 92년 8월29일 행방불명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 활동을 통해 10년만에 시흥역 사고사망자와 동일인임이 확인, 2002년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김주리 (1993.8.8 29세) 이화여대 활동중 사회모순을 알고 노동현장 투신, 우진 진영물산 등에서 해고후 장시간노동에도 저임금에 시달리는 봉제노동자 스스로 주인되는 생산공동체 ‘미모사’를 건설, 활동중 불의의 화재로 뜻을 이루지 못한채 동지들 곁을 떠났다.
최경철(1999.8.20 36세) 1990년 현대자동차노조 4대 대의원으로 노조활동을 시작한 동지는 8대 집행부 조직부장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999년 8월20일 임잔투 승리리를 위한 노조신문 배포중 생산차와의 추돌사고로 입원했으나 5일만에 24일 운명했다.
박용순(1999.8.25)
서울 스타택시에 근무하던 동지는 택시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분신 운명했다.
김종배(1999.8.27 36세) 성균관대 사범대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에 헌신하다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한주기업 노조결성,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전노협 결성후 조직, 조사통계, 정책 업무 등을 수행했다. 91년 5월 ‘박창수열사옥중살해 진상규명’ 투쟁으로 구속되는 등 동지는 투쟁 전면에 늘 있었다. 공공연맹 교육국장으로 교육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했다.
유희수 (2000.8.12 34세) 재능교육에서 선생님으로서 일할 맛 나는 민주직장,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기위해 재능교육교사노조 설립과 파업투쟁시 열성적으로 참여한 동지는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던 2000년 8월12일 지부간부수련회시 익사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최진욱(2000.8.26 29세) 전국지역의료보험노조 경기지역노조에 가입, 노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동지는 전국대의원으로 통합투쟁에 선두에서 활동했다. 파업기간중 민주노총 집회에 참석위해 상경하다 깃대를 펼치던 중 전철역 고압선에 감전, 짧은 생을 마감했다.
송석창(2003.8.4 39세) 8월4일 국민연금관리공단 남원지사에서 스스로 목을 맨 동지는 업무기준도 없이 매월 3~4천건의 소득조정 업무와 납부예외를 공단으로부터 강요당하고 있었다. 단기실적평가 도입으로 지사별 경쟁과 지역가입자에게 보험료를 일방적으로 상향조정하는 파행에 양심상 심리적 고통으로 제도개선을 요구하며 자결을 선택했다.
이현중(2003.8.26 30세) 10년간 근무하던 세원테크에서 2001년 10월 노조를 결성하자 사측은 용역깡패를 동원 조합원들을 현장 밖으로 쫓아내는 등 거세게 탄압했지만 이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켰다. 154일간 파업중 2002년 8월 구사대 폭력으로 두개골 함몰, 안면뼈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수술부위에 암이 발생, 1년만에 동지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하중근(2006.8.1 45세) 포항건설노조 제관분회에서 활동하던 동지는 2000년 7월16일 형산강 집회에서 경찰폭력에 의한 뇌 손상으로 8월1일 운명했다. 주5일제 실시에 따른 대책, 임금인상 등 당연한 요구에 대해 실질적 사용자 포스코는 불법 대체근로와 공권력을 동원해 탄압했다. 정당한 요구를 내건 노동자의 집회를 무도하게 탄압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명백한 타살이었지만 국가권력은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이정미 (2006.8.19 41세) 1993년 청구성심병원 간호사로 시작한 동지는 노조 교육부장, 위원장, 2000년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직을 수행했다. 2001년 위암으로 위 절제술이후에도 변함없는 열정으로 활동에 헌신하던중 2004년 위암이 재발했지만 탄압에 맞서 지부장대행을 맡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나 2006년 8월19일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