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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공직생활 31년의 마지막 휴가 다녀온 기행문입니다. 졸필을 양해바랍니다.
공직의 마지막 휴가 나들이
鄭 永 倬
“과장님은 언제 휴가가시겠어요?……”
과 서무주임이 물었다. 통상 하계 휴가는 8월 피크 타임이 아닌 8월 15일 전후로 정하는 것이 나의 통상 습관적 휴가일정이다.
“나 신경쓰지 마시고 젊은 직원들이 아이들과 가족과 함께 피크타임에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러나 여행지별로 숙박시설이 구청에서 마련하였기 때문에 과장님부터 먼저 정하셔야지요. 마지막 휴가이시기도 한데!……”
그래서 못이기는 척하고 지리산 뱀사골 토비스 콘도를 선택하겠노라고 하여 그리 확정되었다. 실은 한정된 휴가 숙박시설이라 전직원이 다 혜택을 입을 수 없고 심지를 뽑아 선택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그러나 서무주임의 살가운 배려로 임의 배정되었다. 직원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을 떨쳐버리기 무엇한 감이 들었지만 그대로 못이기는 척 고맙다고 받아드렸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동문이며, 서울시에 한솥밥을 먹는 이곤승 풍납2동장이 7월 말 아차산 등산 시에 산에 오르며, 이런 저런 예기 중에 나에게 하는 말,
“그 숙박티켓 젊은 사람에게 주지, 뭘 정년퇴직이 가까운 사람이 차지하려고 하였느냐”는 말에 좀 속된 말로 ‘초잡’하기도 한 감이 들어 머슥해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찌할 도리는 없고, 휴가 시 누굴 동행해볼까 이 사람 저사람 생각해 보았다. 우리 내외 두사람만 야외숙박나들이가 조금은 아깝고 부담이 가는 그런 기분이었고, 이런 기회에 생색을 한번 내 보는 것도 동반하는 이들이 고마워할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니 강남구 근무 때 구청에서 배려한 홍천 대명콘도에 2번 씩 교회 목사님 등과 같이 동반 휴가를 보낸 적이 있고, 지난 해에도 송파구청의 배려로 둘째 아이 근무부대(서해 만리포 해양 경비부대) 근처 몽산포 해수욕장에 아이들 친구와 같이 보낸 터라, 이번에는 공무원 시절 마지막 배려로 마련된 여행이니 만큼, 우리 둘 내외만 호젓하게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그냥 둘만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여행 경비를 아이들께 갹출해야 겠다는 마음이 들어 큰 놈(출가한 딸), 둘째 놈(미성인 아들), 셋째 놈(미성인 아들)에게 출연 명령을 내린 바, 거금 이십만원이 갹출되었다. 그리하여 구청에서 베푸는 선택적 복지비 잔여금 구만원을 교통비에 보태서 가기로 마음먹고 여행의 소요경비를 예상했다.
지리산 뱀사골 토비스 콘도는 이미 다녀온 직원의 소개에 의하면 한적하고 시원하나 뱀사골 계곡에서 6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하여 이왕에 나선 여행, 가고 싶은 곳을 아내와 함께 인근 진주, 하동, 남해까지 가보기로 하고 열심히 지도를 미리 익혔다. 지도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모든 곳을 여행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난다. 어쩌면 사람의 본 근성 중에 여행이나 자기 거처를 떠나 타 지역에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란 욕구가 잠재해 있나보다.
출발하기 전 날까지만 해도 게릴라성 호우가 쏟다 붓다하는 식으로 기상청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줄곳 내려 이 기간까지 휴가낸 이들에게는 여름의 휴가를 만끽하지 못한 듯 한 날씨였으나, 다소 미안함 감마저 들 정도로 화창하게 개인 날씨였다. 어제 대충 꾸려논 여행가방에다 오늘 옷가지를 더 챙겨 뒷자석에 챙겨넣고 인근 경정비소에서 다이어 휠 밸런스와 GPS 작동을 위한 휴스를 교체한 후, 인근 주유소에서 연료를 가득 채우고 천호대로를 직진하여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중부고속도로는 노면이 콩크리트로 시공되어 주행 시 바닥과 마찰음이 요란하며 아스팔트 시공 노면보다 승차감이 역시 떨어진다. 서청주를 지나 남이 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서니 노면이 아스팔트시공이라 금방 승차감이 금방 좋아졌다.
아내와 둘이서 가는 여행도 호젓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대전IC를 지나 대전-통영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이 고속도로는 처음 이용해 본다. 이 고속도로를 근간으로, 인근 유명 관광지를 구경하며 지리산 토비스 콘도에서는 숙박만 하기로 하고 우선 무주 구천동을 다시금 가보기로 했다.
무주 구천동은 19년 전 영등포 구청 근무 시에, 토요일 업무를 마치고 등산차림도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경부선을 이용해 영동에 내려, 무주 구천동행 버스를 타고 눈오는 덕유산을 구두신고 정상 ‘향적봉’까지 오른 경험이 있다. 그 구천동 계곡을 아내와 같이 올여름에 또 방문한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가 와서 계곡물이 많아, 힘찬 물줄기가 마음껏 내리 달리는 것을 보니 온 간담이 시원하다.
아내에게 점심메뉴를 물으니 콩국수를 먹고 싶다고 한다. 인근 중국집에 들어 둘이서 콩국수를 말아 먹으니, 시원하고 구수하여 요기가 된다. 국수를 좀더 달라하여 양껏 먹고 나니 고량진미의 식단도 부럽지 않다. 아내도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맛있어 한다. 시원한 소주나 막걸 리가 생각나지만, 운전 습관상 어쩔 도리 없이 참을 수 밖에 없다.
친한 벗들과 하는 여행이나 등산과, 아내와 단 둘이 함께 하는 여행은 나름대로의 운치가 다르다. 아이들도 이제 같이 가자고 조르지 않으니 신혼 초기의 기분을 느껴본다. 이제는 내년(2008년) 퇴직 후 여행을 자주 다녀야 겠다. 도시의 갇힌 분위기를 탈피하여 시골의 트인 기분을 마음껏 아내와 함께 느끼리라!…….
다시 남덕유산IC를 통해 대전-통영 고속도로로 다시 진입하여, 지리산 토비스 콘도로 향했다. 함양IC 인근 88올림픽고속도로 통해 지리산IC로 나와 15분 쯤 계곡을 따라 토비스 콘도에 도착하였다. 뱀사골과는 6km 정도 못미쳐 자리하고 있다. 예약 배정된 방을 열고 들어서니, 큰 방 두개와 부엌이 있고 거실은 거의 없다시피 한 방이다. 우리 둘 내외 만 있기는 너무 넓은 공간이다. 누구랑 같이 동행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운전하느라, 조수석에 앉아 부군의 운전에 긴장하고 있노라고 피곤한 아내와 우선 잠시 동안의 잠을 청한 후, 뱀사골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 좌측으로 계곡이 펼쳐지고, 우렁차고 힘찬 지리산 계곡물이 도도히 흘러내려 우리의 여행의 피로를 씻어내려 준다. 지리산 전적 기념비를 감상하고, 저녁은 산채 비빔밥을 참기름에 비벼서 맛있게 요기하였다. 식당이 굉장히 넓은데 비해 손님이 우리 둘 뿐이다. 나중 손님이 세 사람 더 있었으나 한적하고 쓸쓸한 가게 분위기를 느꼈다. ‘이렇게 큰 식당에 손님이 없다니’ 생각하였다. 휴가철인데도 말이다. 저녁을 들고 어둠의 땅거미가 내려깔린 계곡길을 내려왔다. 도착하여 씻고 휴식으로 첫날을 보냈다.
이튿날 9시경 콘도를 나서서 진양호와 진주성, 또 남해를 향해 남도길 여행에 나섰다. 뱀사골을 나와 함양을 향해 24번국도를 올랐다. 함양을 거쳐 함양IC에서 대전-통영고속도로을 이용하여 진주로 향할 요량으로 출발하였다. 함양으로 가는 길은 오고 가는 차가 거의 없고, 우리 내외가 타고 가는 차 뿐이다. 한적하고 호젓한 시골길을 포장해 놓은 것이다. 제법 큰 국도인데도 이렇게 차들이 없으니 대도시와 비교할 때 너무 큰 차이가 난다.
함양 읍내를 지나 함양IC를 통해 대전-통영 고속도로에 접속했다. 제한 속도는 백킬로이다. 고속도로에 올라오니 제법 오가는 차량이 분주하다. 50분경 달리니 서진주IC가 나타나 진양호로 향해 빠져나왔다.
진양호는 문화 공연장과 함께 조용한 호반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한민족의 명산 지리산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시원하게 트인 전망과, 호반의 물안개가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는다. 호수 앞 공터에 해방 후 한 때 가요계를 풍미했던 가요계황제 남인수 동상이 서 있었다. 그는 폐결핵으로 45세로 요절했다하나, 이 지방 진주출신으로 ‘감격시대’ 등 대중의 인기를 한 때 몰고 다녔다 한다.
진양호를 뒤로 하여 사적 118호 진주성 관광을 하러 진주시내로 들어섰다. 남강이 조용히 흐르고 그위에 촉석루가 서있다.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곳이다. 고려말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잦은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 10월에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 장군이 3,800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쳐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역사를 남기고 있다.
촉석루에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오르는 것과 같이, 신발을 벗고 누각에 올라야 한다. 촉석루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서 누워 한여름 시원한 남강의 강바람을 온 몸에 휘감으며 낮잠을 자는 이들이 다수 있다. 우리도 이곳 마루에 누우니 남장대 현판이 위로 걸려 있다. 남장대란 이곳 촉석루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진주시민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진주는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된 곳이다.
남해를 향해 다시금 다시 대전-통영 고속도로 위로 올랐다. 15분쯤 가다가 진주IC를 거쳐 남해고속도로 순천을 향해 가다가, 진교IC로 빠져나와 1002번 지방도로를 따라 남해로 향했다. 인근 금오산(하동군 금남면 소재) 동쪽을 돌때쯤 인근 대치리에 지방문화재로 ‘鄭氏古家’ 안내판이 길가에 쓸쓸히 서있다. 이곳은 내가 여섯 살 어린 시절, 이댁으로 양자들번 하였으나, 선친의 반대로 입양되지 못하였던 집이다. 이집이 바로 나의 이모댁이다.
이모님은 만석군 집안의 이모부 ‘鄭在涴’ 씨와 혼인하여 지내시다가, 무자하여
같은 ‘진양정가晋陽鄭家’로 시집온 여동생인 나의 모친에게 아버지를 설득하여 입양을 권유하였으나, 선친의 반대로 무산되어, 진양정가의 다른 분이 양자로 드셨는데, 그 분마저 무자하여 대가 끊겨 집만 홀로 서있는 집이 바로 지방기념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마을 앞 찻길에서 입간판의 표시가 된 길을 따라 200여 미터 올라가니 집의 내력을 기술한 또 다른 큰 입간판이 문앞에 외로이 지키고 서있다. 아내와 같이 큰 대문앞에 열린 틈으로 안을 기웃거리니 대지 3000평에 지어진 집이 홀로 을씨년스럽다. 돌아가신 어머님과 이모님의 생각을 같이 떠올라 지나온 삶의 한 여정을 되돌아 보게 한다.
두분다 진양 정씨 가문에 출가하여 이모님은 무자하여 안타까운 가운데 양자를 들였으나, 양자든 형님도 또 무자하여 대가 끊긴 상태다. 그리하여 돌아가실 때에도 아무도 임종한 이가 없이 돌아가셨다. 외롭게 살다가 가신 이모님!……
어머님은 다산하여 우리 형제 자매를 많이 생산하셨으나, 회갑을 못 채우시고 속병으로 운명하신 어머님!……
두분 모두 생을 외롭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다시금 지방도로 1002호를 들어서 남해로 향했다. 불과 자동차로 10여분을 달리니 쪽빛바다 노량해협위에 남해대교가 나타났다. 화면에서 본 화려함과 웅장함과는 달리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아름답고 조용한 시골의 두 마을, 고성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연결해 주는 연륙교 역할을 하는 현수교이다. 토목공학적, 미학적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임진왜란 시 충무공 이순신이 내침한 왜구를 대첩한 그 유명한 노량대첩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리위는 왕복 2차선의 도로가 놓여있다. 이 다리를 넘어서 설천면 노량리에 소재한 진주 식당에서 회정식을 주문하여 점심식사로 대신했다. 5만원짜리 모듬회를 주문하여 우리 내외가 먹고도 남아, 음식물 재활용 차원에서 나머지를 양념포장하고 공기밥도 한그릇 정도 사서, 뱀사골 콘도로 가져가 저녁식사로 대신하기로 했다.
왔던 길을 다시되돌아 지방도로 1002호를 타고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대전-통영고속도로에 올라 88올림픽 도로로 지리산 IC로 내려와 토비스콘도로 향했다. 오는 길에 인월(남원시 인월면)에서 차를 세우고 수퍼마켓에 들러 이 곳에서 제조한 ‘인월막걸리’도 한병 사왔다. 지방에 출장 내지 여행을 할 때는 그 지방 막걸리 맛을 보는 것이 나의 음주 문화습관이다.
다시 뱀사골 토비스 콘도로 돌아와 재활용 포장된 양념모듬회를 냄비에 풀어 넣고 물만 다시 부으니, 훌륭한 생선찌게가 레인지 위에서 만들어졌다. 식사 하면서 반주로 ‘인월막걸리’를 한잔 거후르니 신선이 부럽지않다. 이제 내 나이 ‘耳順’, 후로는 아내 말대로 걱정, 근심, 염려, 분노는 필요없을 것 같다. 오직 긍정적인 삶과 희락과 감사와 마음의 평정만을 유지하는 것이 가할 듯하다.
하룻밤을 이곳에서 묵고 이튿날 남원 시내를 돌아보자고 권유했으나, 아내의 거부로 귀소본능에 따라 답십리 집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아내를 만나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이곳에서 40년을 살았으나, 서울이 나에게 객지라는 상념은 떼 놓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내가 태어나 자란 그곳 ‘대구’란 곳은 객지 서울을 떠나 추풍령만 넘어서면, 고향의 아늑한 느낌이 가슴으로 져며 오곤 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우리가 살아가는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그 나름대로 여행의 終了를 선언하고 쉼을 허락한다. 이제 공직생활의 마지막 여름휴가를 끊낸 것이다. 여기까지 31년의 서울시 공직 생활과, 나머지 10개월의 직장생활을 의미있게 마무리하여야 한다. 아내도 나와 셋 아이들과 함께 빠듯한 공무원살림을 꾸려가느라 고생이 많았던 것같다.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고마움의 정을 아내에게 보낸다.
첫댓글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30여년 공복으로 뚜렷한 자취를 남기신 정영탁님의 삶에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많은 아쉬움 속에서도 공직생활을 마감하는 시점 뜻깊은 여행을 공직기간 중 내조에 수고하신 생의 동반자와 같이 하신게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간접적으로 곳곳을 구경 할 수 있도록 기행문을 올려 주신 정영탁님께 감사에 인사드립니다. 정영탁님의 가정과 남은 기간 항상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