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점점 발달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디지털 치매'라는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수십 명에 달하는 지인들의 '전화번호' 정도는 누구나 거뜬히 외우고 다닐 정도였고, 노래방에 가면 '좋아하는 노래의 번호' 정도는 습관적으로 눌러 신나게 불러재끼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지인들의 연락처'도 같이 잃어버리고 만다. 물론 '백업'을 미리 받아놓아서 그럴 염려가 없을 수도 있지만, 결국엔 '지인들의 연락처'를 척척 눌러서 연락하지는 못한다. '검색기능'이 너무 익숙해지고 편리한 세상이 되다 보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는데, 이 책은 '거꾸로' 생각을 해보란다. '처지를 바꾸서 생각해보기'는커녕 '내 처지조차 생각해보지' 않는데 익숙해져버린 요즘 사람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일 수도 있겠다.
허나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해보았을 것이다. '내 처지'와는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고려해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전문용어(?)로 '배려'라고 한다. 이 책에는 8명의 명사들이 나름의 생각을 '뒤집어서' 펼쳐보인 세상을 바라보는 시도를 해보았다. '승자독식', '공정무역', '과학기술', '생명', '시', '공동체', 그리고 '평화'에 관한 각각의 편견들을 한껏 뒤집어 보았다. 그렇게 세상을 '뒤집어' 볼 때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뒤집힌 세상이 불편할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를 위해서 또 한 번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려'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할 때인 것이다. 그런 '배려'가 전문용어인 까닭은 '그것'은 아무리 남발되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배려' 받는 사람은 고마워하고, '배려'를 배푸는 사람은 박수를 받기 때문이다. 설령 그 '배려'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배려'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가장 기본적이자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2008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벌써 16년이나 지난 책이라서 '책내용'을 읽다보면 옛날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 책이 신박한 까닭은 십여 년 전에 '미래예측'한 내용이 담겨 있고, 그 당시의 '미래'가 바로 지금의 '현재'인 까닭에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 당시에 '예상'했던대로 지금 이루어진 점도 있지만, 그 예측이 사뭇 달라지게 진행된 것도 있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불평등'에 관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당시엔 '예측'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엔 '심각한 현실문제'가 되어 버린 '불평등'은 너무나 정확해서 놀랄 지경이었다. 이를 테면, 2008년 당시엔 '중산층의 몰락'을 위험하다고 경고했었는데, 2024년인 지금은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나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내용이다. 이 책은 '승자독식 사회'의 위기를 경고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위기가 '현실'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그래서 이젠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폐기처분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계층사다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회속에서 '경제적 계급사회', 즉 '새로운 신분제도'가 형성되고 말았다.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적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자, 이렇게 몇몇 '소수'가 경제적 부를 독차지한 세상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99%의 소외된 사람들은 '불만족한 상태'일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우스운 일이지만 '경제적 부의 불균형'이 벌어진 사회현실에 별로 불만을 품지 않은 사람들이 꽤나 많다. 오히려 좋단다. 소위 말하는 '하우스 푸어'들이 그 대표적이다. '아파트 공화국'인 현실에서 어떻게 '아파트 몇 채'를 손에 쥔 이들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에 대해서 자신의 부가 늘어난다는 착각(?)에 빠져 '내집마련'의 꿈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경제적 무능' 때문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자신들은 '경제적 유능(?)'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사회적 전반적인 문제를 오히려 '문제없음'으로 인식하고, 집값이 더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방관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오르는 '집값' 말고는 이들도 변변한 재산이 없는 형편이다. 대한민국 상위 1%라는 '재벌계급'에 낑기지도 못하면서 언젠가는 자신들도 '부동산 재벌'이 될 것처럼 '승자독식의 세상'을 찬양할 따름이다. 이런 사람들이 '배려'라는 것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한민국 1%'만 만족스럽게 만드는 '승자독식'이 판을 치게 냅둘 것인가? '언제까지' 말이다. 현재의 2, 30대 청년들은 온통 불만투성이다. 사회는 점점 팍팍해지고, 비전은커녕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도록 깜깜한 세상인데, 뭘 어쩌란 말인가? 점점 물가는 오르고, 정규직 취직은 '뽑지를 않으니' 애초에 포기할 수밖에 없고, 비정규직이 되느니 알바나 뛰면서 '실업급여'를 받으며 근근히 버티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비극을 살고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열정페이'니, '아프니까 청춘이니' 따위는 헛소리나 나불거린다. '라떼'는 사절이다. 기성세대들은 그나마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청춘들은 '노력한 만큼 골병만 드는 암흑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정책은커녕 '실업급여'마저 '시럽급여'를 받아먹는다며 어처구니없는 비난을 퍼붓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앞서 말한대로 '생각'이란걸 하지 않기 때문인 듯 싶다. 정보의 바다를 넘어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지만, 정작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엄지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습관적'으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엄지를 놀려서 '시선'을 사로잡는 미디어들을 보면서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런 각양각색의 미디어를 보면서 '생각'이란 걸 해보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그 생각에 '진입'하기도 전에 넘겨버리기 바쁘다. 그러니 '거꾸로' 생각해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은 온통 불만투성이라고 투덜거릴 뿐이다.
변화의 중심은 '내'가 되어야 한다. 온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태클을 걸어주면 '땡큐'다. 나는 거기에 수백만 가지 '반박'을 날려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으로 충만한 사람은 무엇이든 '긍정적인 자세'를 갖추는 법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는 '긍정에너지'는 현대인들의 눈에 '미친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론 '미쳐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법이다. 왜냐고? 세상이 미쳐돌아가고 있으니 미치지 않고서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각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그야말로 미쳤다. '강대국'이란 이유로 '주변국'을 간섭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펴는가하면, '납치'를 당했으니 '테러집단'이 숨어있을만한 곳은 학교나 병원, 심지어 '유엔'일지라도 대량살상무기를 터뜨리고 보는 '피의 보복'이 당연하다고 나불대고 있다. 또한, 핵오염수를 자국내에서 처리하는 것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바다에 '걸러서' 버리겠다는데도 소위 강대국이란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저 방관만 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위험하다고 증명되지 않았으니 '안전'할 거라는 밑도 끝도 없는 헛소리를 해도 아무도 막으려 들지 않고 있다. 이처럼 끔찍한 만행들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자칭 선진국들의 방관'은 이미 도를 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남'이 해결해주겠지라면서 넋을 놓고 기다리면 될까? 택도 없는 소리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내'가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맘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돼! 아무리 납치를 당한 처지라고 해도 '테러단체'만 골라 잡아야 곱게 봐줄 수 있지 마구잡이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들을 향해 폭력을 저지르면 누가 '응원'해줄 수 있겠어. 그건 절대 용납 못 해! 네가 저지른 폭력만큼 너도 똑같이 당하는 날이 반드시 올꺼야. 피의 보복은 언제나 그랬거든! 핵오염수가 그렇게 안전하다면 너희 식수로 쓰라고 말했잖아. 그 오염수를 쬐끔 '누출'했을 때 질색하고 난감해하던 모습을 보니 결코 안전해보이지 않더만. 그런데도 또 방류하겠다고, 더 많이 방류하겠다고?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지 않겠니! 이렇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왜 말을 하지 않느냔 말이다. '생각'이라는 걸 한다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진 않다. 그저 '생각'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할 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한다고 해도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 혼자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아리가 잘 울리는 '환경'이 있는 법이다. 나의 외침에 '공명'이 울려서 여기저기 널리 퍼져나가는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다. 만약,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을 경우, 그런 때가 찾아왔을 경우에 내가 외치지 않고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나'라도 계속 외치고 있어야 한다. 나의 외침이 '공허'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화답'이 올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뭐, '희망고문'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변화를 바란다면 '나'는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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