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우리본당에 부제님이 오셨네요 , 사제서품 을 받고 평신도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 하기 위해서
미리 직접 현장에 오셔서 체험 을 하셔야 하니까요
저는 우리본당에 온 부제님을 보고 신앙선조들의 신학교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되새겨 보고자 글 올립니다
한국 천주교회 사제 를 양성하는 신학교
1836년 - 샤스탕 모방 신부 에게 선발된 김대건 , 최양업, 최방제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출발
최방제 신학생은 풍토병으로 1837년 사망
남은 2명의 신학생은 1837년부터 마카오에서 학부 4년을 열심히공부 한후 ,
대학원과정은 조선땅에서 조금 가까운 만주 벌판 "소팔가자"에서 공부한다
이곳은 조선과 가까운 곳 이라 조선에 잡입 하는 길을 빨리 파악 해야 하기 때문에 대학원 과정을 이곳에서
한다. 공부도 하고 , 어떻게 하면 조선땅에 들어 갈수 있는 길을 빨리 파악 하기 위하여
1944년 12월 김대건 신부는 중국 만주 벌판 "소팔가자"에서 최양업과 부제품 받는다 . 1달후
1945년1월 부제품 후 김대건 혼자 의주를 거처 압록강 얼음위 를 기어 입국한다
입국 이유는 조선 천주 교회의 상황을 파악해서 주교님께 보고 하고 다시
주교님과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 하기위함이다 그래서
6월에 다시 서울 마포를 출발해서 연평도
지나 중국 상해 도착후
1945년 8월 중국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께 서품 을 받고
8/31일 상해출발 (페레올주교 , 다를뤼 신부 , 김대건 신부)
10/12일 나바위도착 국내에서 6개월 사목활동 후
1946년 5월
상해에 있는 메스트르 신부 와 최양업 신부를 서해 바다 건너입국 시키기 위해 ,
김대건 신부의 일행들은
마포 출발 - 연평도 - 순위도- 소청도- 대청도- 백령도에 와서 중국 배 와 접선( 서해안 지도와 편지
전달) 을 무사히 잘 마친다
그런데 돌아 오는 길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간 뱃사공 과 몇몇신자들이 순위도에 다 달았을때 조기가
풍년이라 조기를 잡게되고 말려서 집으로 싣고 갈려고 , 순위도에서 이틀 더 머물기를 신부님께
청하였고 , 신부님은 허락 합니다
이허락이 문제가 됩니다 . 조선관리들이 백령도에 중국배들이 마
음 대로 국경을 넘어 조기잡이를 하자
포졸들을 시켜 쫓아 낼려고, 어부들의 배를 징발하고 하고 있었는데,
김대건 신부의 배도 차출 에 포함 되게 된다 , 배 차출 과정 에 김대건 신부를 수상히 여긴
포졸들이 김대건신부 를
체포 하게 된다 당시 순위도에서 조기만 안 잡았으면 신부님이 체포 되지 않았는데 조기 때문 김대건
신부님 잡히십니다 .
1846년 - 한국천주교회는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 에서 순교 하고
아직도 중국에서 못 들어온 최양업 신부가 조선에 들어올 기회 만 엿보고 있습니다
최양업 부제는 "소팔가자" 에서 1944년 부제품을 받고 1849년 상해로 가서 서품을 받습니다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서품을 받습니다)
그리고 의주로 해서 압록강을 건너
고국 으로 입국합니다 , 그후 사목 활동을 경상도 , 전라도 ,충청도 서울 이남을 다 다닙니다 .
파리외방 전교회는 방인 사제의 중요성을 최양업 신부님 을 보고 절실히 깨닫습니다
멀리 동남아에 있는 신학교에
신학생을 보내는 것이
힘든 일 이라는 것을 알고 ,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 는 드디어 조선 땅에 최초의 서양 학교 를
신학교를 세웁니다
1855년 - 충북 배론 교우 촌에서 "성요셉 신학교“ 로 출발 합니다
당시 많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말도 안통하는 프랑스 신부님 보다는 조선인 사제가
절실히 필요했다 ,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박해가 심해서 깊는 산중에 신학교를 만듭니다
신학교의 모든 땅 과 건물을 제공 하고 모든 살림 을 맡은 경리책임 장주기 요셉 과 교장 푸티니콜라 , 교사 푸르티에 신부 , 신학생들에게 신학,철학,라틴어 ,불어 ,유학과 한문 등 여러과목 을 가르킵니다
1861년 - 최양업 신부는 지금의 경북 문경새제 ( 진안리성지)에서 장티푸스로 병사합니다
(서품 받고 12년간 사목 활동 하셨습니다)
이때 가장 가까이 충북 배론에 있던 푸티니콜라 신부님이 달려 오셔서 최양업 신부를
모셔 배론 신학교( 현재 배론성지 )로 모셔 옵니다
1866년 - 대원군이 일으킨 병인 박해 때 포졸들이 배론 교우촌을 습격합니다
교장 푸티니콜라 , 교사 푸르티에 신부는 서울 로 압송,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받습니다
이렇게 방인사제 양성을 위해 만든 조선에 최초의 서양식 신학교는 병인 박해로 무너집니다
2분의 유해는 명동 성당 제대 아래 , 지하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2분은 순교 하셨지만 성인에 오르 시지는 못 합니다
신학교 모든 땅 과 건물을 제공 하고 모든 살림 을 맡은 경리책임 장주기 요셉은
서울 로 압송됩니다 . 그리고 충청도에서 체포돤 다블뤼주교 , 민위앵 , 오매트르, 황석두
루가 와 함께 순교 하길 원해서 서울에서 순교 하지 않고 충청도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처형 당 한다
왜 서울에서 처형 하지 않고 보령 까지 끌고 가서 처형한 이유? 처형할 때 대원군의 아들 고종 과 며느리 민비와 결혼 하는 날이라 왕족의 경사날 사대문 안에서 피를 보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 해서 , 서울에서 250리 떨어진 곳에서 피를 부르는 일을 저질렀다
우리 본당 형제 자매들도 기회 가 있으면 충청도 보령 갈매 못 성지, 5분의 성인 의 순교 현장을 순례 하셔요 , 눈물납니다 . 서울에서 5분의 성인은 쇠사슬에 메어 끌려 옵니다 , 형장 가까이 음봉면 삼 거리 에서 5분은 바위에 앉아 막걸리를 마셨다는 현장도 있습니다. "오성 바위"입니다
1885년 - 병인박해 이후 조선 천주 교회 는 또 다시 신부도 없고 신학교도 없는 세월 20년을
보냅니다 , 그러나 세계 의 정세는 유럽의 문물 들이 서서히 아시아 로 밀려 들어 와
조선도 그 의 영향 권 안에 들어 옵니다 그리고 조선 천주 교회도 다시 박해를 피해 중국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 들이 들어와 조선 천주교회 도 종교의 자유를 대비 해서 준비 하기 시작 합니다
그래서 먼저 시작한 것이 경기도 여주 군 강천면 부평리 부엉골 에서 신학교 설립을
합니다 . 2년 신학교 운영 하다 조선에도 종교의 자유가 인정 될 분위라 서울 로 이전 합니다 .
당시 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님이 신학교 뿐 만 아니라, 명동 성당 을 지을 준비도 함께 합니다. 명동 성당 터는 판서를 지낸 윤 정현 (윤 선도 후손) 저택 이 있던 곳입니다. 이 저택을 블랑주교는 종교의 자유를 대비해서 구입합니다.
방이 100개 있는 저택을 헐고 우리 나라 최초 의 증거자 김범우 집이 기까이 있던 곳에 조선 천주 교회 의 중심을 만들기 위해 교회 장상 들이 준비 작업을 하셨습니다 . 사제 양성을 하는 신학교 와 조선 천주 교회 의 심장부 명동 성당 작업을 이때 부터 시작 하였습니다
1887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에서 서울 용산 으로 이전 한 신학교 이름 은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현재 원효로 성심여고 자리 )
페낭 (말레이지아)으로 신학생 유학 보냈어나 21명중 7명 병사 기후와 음식이 맞 지 않습니다, 1910년 일제 시대 때는
일본 나가사키 “라텐 신학교”로 신학생 보 냅니다.
1901년 경기도 안성 미리내에 있던 김대건 신부 무덤 발굴 후 신부님 유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로 이전
(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 시신 , 40일후에 이민식 빈첸시오가 시신을 미리내 페레올 주교 옆에 안장 )
*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이전한 이유는
뮈텔 주교님께 신학교 부속 성당을 봉헌 하겠다는 분이 나타났는데
프랑스 인 "드사라 "여사 는 봉헌 조건이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 해야 한다는 조건 이었습니다
주교님은 “드사라" 여사 설득
① 새남터는 홍수 지역이라 안된다
②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서 새남터 가 한눈에 보인다
③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계승하는 신학생 학교에 성당이 더의미있다
④ 새로 봉헌 하는 성당에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모신다
성당 을 봉헌하는 후훤자 의 뜻을 용산 신학교 제대 방에 유해 를 안치 유해모심 대리석에 순교자를 상징 하는 빨마 가지 와 1821년-1846년
AK 안드레아 킴 이니셜을 새 깁니다
* 1960년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 혜화동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으로 이전
치아골 - "절두산" 에 모심
하악골 - "미리내" 에 모심
1896년 뮈텔주교 주례로 약현 성당에서 서품식 (강도영,정규하,강성삼 부제)
1900년 까지 12명 사제 양성
1942년 일본 탄압으로 “용산 성심 신학교” 폐교
1945년 혜화동 신학교 개교 (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1962년 예수회가 주축이 되어 전라도 광주교구에 “대건 신학 대학 ” (현재 학교명은 광주 가톨릭신학대학) 개교
1984년 대구 가톨릭 대학 . 대전 가톨릭 대학
인천 가톨릭 대학 . 부산 가톨릭 대학
수원 가톨릭 대학 . 한국에 7개 교구 에서 사제를 양성 하는 학교가 7개가 있다
이렇게 이제는 많은 신학교에서 많은 사제가 양성 됩니다 . 우리 성당에 오신 부제님은
수원가톨릭 대학 소속입니다
이글 을 올리면서 한국 천주 교회에 많은 훌륭한 사제가 태어나 가난하고 , 병들고, 힘들어 하는 평신도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오완수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