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주권 사수를 위한 창작농활과 2004 전국농민문학의 밤>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농민회총연맹, 민족문학작가회의, 삶이 보이는 창, 민주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2004 전국농민문학의 밤 추진위원회와 해당 시군농민회에서 주관하였다.
농활을 떠났다. 다 늦은 겨울이었다. 비닐하우스 작물이라면 모를까, 맨몸 그대로 드러내는 벼농사며 밭농사는 벌써 오래 전에 한해 농사를 마친 뒤끝이었다. 시인, 소설가, 영상활동가, 사진작가, 화가, 가수, 만화가가 열댓 명씩 한 짝을 이뤄 강원 화천, 경북 영천, 경남 김해, 전남 화순으로 창작 농활을 다녀왔다. 식량주권을 지키기 위해 해마다 숨결 느껴지지 않는 아스팔트 위에서 싸워야 했던 농민들, 해마다 농사지은 피땀을 갈아엎어야 했던 농민들, 바늘 끝 위에 서 있는 농민들의 삶과 우리의 삶을 알고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알리기 위해서.
여의도 바람 부는 데서 외로웠고 또 외로웠다(12월7일)
떠나는 날 출발하기 전에 발대식을 했다. 아침 10시에 모이기로 해서 출발하는데 전날 비가 온 터라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찼다. 내복도 입고 두꺼운 겉옷을 걸치고 집을 나서면서 내내 “춥다, 춥다”라는 말을 거듭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맞은 편 천막농성장이 죽 늘어서 있는 곳에서 모이기로 했다. 찬바람을 껴안으면서 싸우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말만 듣고 한 번도 나와 보지 못했던 나는 찬 밤과 찬 새벽에 이어 찬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난감했다. 그렇게 긴박하게 싸우고들 있었다. 우리가 떠나는 날부터 해서 농민들 역시 각 지역에서 싸움을 하고 있었다. 농기계시위도 예정되어 있었고, 군농민대회도 잡혀 있었다. 분명 한가한 때가 아니었다. 농민들의 실상을 알아보고 알린다고 가는 우리가 되려 그이들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가는 곳은 전남 화순. 아침 11시, 버스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평일이라 고속버스는 한가했다. 전날 고속버스를 탈까, 기차를 탈까 고민하며 5시까지 모이기로 한 시간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화순까지 가는 길을 알아보느라 송정리로 장성으로 버스터미널에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 모르는 길을 나서는 데는 이것저것 알아봐야 할 게 많았다. 모르는 건 길뿐만이 아니었다. 농민의 고민도 모르고, 삶도 모른다. 5박 6일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하고자 하는 내 마음과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해야 할 게 무언지도 사실 잘 모른다.
광주에서 내려 화순읍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차를 잘못 탔는지 광주시내를 거의 뺑뺑 돌다시피 했다. 오후 5시, 화순군청을 찾아가니 군청 앞 광장에 농민회가 세워놓은 천막이 있었다. 천막 앞에는 쌀자루들이 쌓여있었다. 천막 사방으로 펼침막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쌀 개방 반대”, “수매제 폐지 반대”, “농업지원법 제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 농민들이 맞닥친 문제들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고 우리는 도암면 도장리 마을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해가 다 졌다. 저녁인데도 한밤중 같았다. 어둠과 찬 공기, 띄엄띄엄 보이는 불빛들을 보니 내가 도시를 빠져나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장리 마을 들머리에 있는 마을회관이 우리가 머물 곳이었다. 방바닥은 따뜻했고 부엌에는 농민회 회원이 가져다 놓은 쌀 한 자루와 셀 수 없이 많은 달걀이 판에 담겨 있었다. 저녁을 지어먹고 농민회 회원들과 간담회 시간을 마련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할머니 한 분께서 동치미를 가져오셨고, 번갈아 가며 마을 주민들이 이불 한 채씩 품에 안고 오셨다.
“멀리서 여기까지 온 걸 환영합니다.”
말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 농민회 회원들이 벌써 손길과 마음씀씀이로 우리를 맞이해 주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행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돌아가며 한 마디씩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대되고 설렌다. 우리에게 많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농촌의 삶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농기계 시위를 하고 왔다. 쌀 문제 절박하다고 하는데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한다.”
“농민의 문제가 모두의 문제임을 알려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농촌 문제에 관심 가지고 우리 마을에 와서 고맙다. 우리 농업이 벼랑 끝으로 가고 있다. 이런 문제를 단순히 농민문제로 치부하는 언론의 문제도 있다. 농촌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여의도에 10만이 모이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30만이 모여도 해결이 안 된다. 여의도 바람 부는 데서 외로웠고 또 외로웠다. 민족농업이라고 해도 농민문제로만 치부한다. 거리에서 만나는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로 못 느낀다. 얼굴표정에서 함께 느낀다는 걸 읽을 수가 없다.”
“수매 하나도 못했다. 조합에서 어처구니없는 가격으로 수매가를 결정하려고 한다.”
“농업문제가 우리 민족의 미래의 문제인데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농촌의 문제와 현실을 잘 나타내는 문학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마을 분들만 만나도 농민문제는 대충 다 나올 것이다.”
부엌에서 가져온 동치미를 썰기까지 해 놓으신 할머니께서 자리에 함께 하셨다. 마을 주민으로서 한 마디 해 주시라고 하자 손을 내저으신다. “굿보러 왔제 나 말하러 온 사람 아니여.” 하시더니 사람들이 죽 하는 말을 들어보시고는 “말 들어보니까 우리 마을 양반들 더 많이 와야 되겠구먼. 이야기를 많이 들어 봐야겠구먼.” 하신다.
농민들의 시위가 있는 날이면 모든 텔레비전과 라디오 뉴스에서는 농민들의 시위로 길이 막히고 교통이 혼잡하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전국의 농민들이 해마다 여러 차례 서울로 올라왔을 때 ‘여의도 바람 부는 데서 외로웠던’ 그 마음을 나는 몰랐다.
농사지어 보셨나요(12월8일)
아침 8시. 마을 한 집에서 김장을 한다기에 일손을 도우러 갔다. 농사일은 거의 없고 집집마다 김장하는 일만 남은 때였다. 김장 준비는 미리 다 해 놓은 상태라 버무리는 일만 남았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오셨다. 아니, 예순, 일흔이 되신 분들이시니 할머니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랑 마주보며 배추를 버무린 할머니는 남광주역에 서는 새벽시장에 자주 나가신다고 했다. 집에서 이것저것 농사지은 것을 직접 팔러 나가시는 것이다. 할머니께서 시장에 나갈 때 한번 따라가 보겠다고 했다.
할머니들 고향도 대개 도암면이어서 걸어서 시집을 오셨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농사를 짓고 시집와서도 농사를 짓고 살아온 분들이다. 자식들은 다들 타처에 나가 살지만 이 분들은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은 분들이다. 땅을 떠나지 않은 분들이다. 살아갈 든든한 힘을 주는 먹을거리들을 생산하는 일에 평생을 손길 멈추지 않은 분들이다.
사람 손이 무섭다는 말처럼 시간이 가니 여섯 명이 달려든 김장이 어느새 끝을 볼 수 있었다. 마을회관으로 돌아오니 회관 뒤꼍에서는 장작불에 호박죽을 쑤고 있었다. 전날 간담회 때 호박이 몇 통이나 있다는 말을 누군가 꺼내어 죽 쒀 먹자는 말이 나왔는데 바로 행동으로 옮겨졌다. 솥이 크기도 엄청 컸다. 저녁에 마을주민들 다 모여 한 그릇씩 나누어먹자고 한 것이다. 안에서는 다들 달려들어 찹쌀 새알심을 빚었다. 새알심도 얼추 다 빚어놓고 호박은 푹 익을 때까지 기다리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다. 마을을 둘러보려고 몇 사람이 나섰다.
마을 윗길로 오르다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 나타났다. 한때는 아궁이에 불을 때 더운 김이 났으련만 부엌은 무너져 내리고 마당은 풀들이 수북이 자라나 제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집도 훈김을 쐬어야 한다지. 무언가 마음을 놓아버린 사람이 순식간에 폭삭 늙듯이 집도 늙어버렸다. 빈집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본 동네 아주머니께서 차 한 잔 하라고 부르신다. 마을의 부녀회장이셨다. 차 한 잔 얻어 마시면서 두 집주인의 이야기도 얻어들었다.
벼농사를 짓고 하우스에 참외농사와 고추농사를 짓는 아주머니는 아무리 힘들어도 웬만하면 놉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인건비로 해서 이것저것 떼고 나면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런 촌에서도 헛길로 갈라하면 문제없이 가버린다”는데 아주머니, 아저씨는 한눈팔지 않고 이 악물고 일을 해서 네 자녀를 키워 다 도시로 내보냈다.
아주머니는 쌀 투쟁 때문에 서울에 다녀온 일도 여러 차례다. 가장 최근에 올라갔을 땐 도장리에서 아주머니 세 사람 해서 모두 여섯 명이 갔다고 한다. 쌀 개방을 앞두고 아주머니는 “큰일이지라 앞으로 살아나가려면. 깝깝해불제.”하신다.
일을 할 때는 모자도 안 쓰고 힘들어도 ‘항상 마음만 즐겁게 먹으면 된다’고 몸 안 아끼면서 일을 하시는 분이다.
“한번 해야 할 일은 기연이 이 콱 물고 하제. 용기는 있지 아직까장. 어렸을 때는 여그 산에다 매화나무든, 복숭나무든지 심고 잡았어. 나는 도시 가서 산다 어쩐다 그런 생각은 없었어.”
아주머니께서 살아온 세월은 도시를 꿈꾸거나 도시 사람들을 부러워한 세월이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삶터를 좋아했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생산하는 일을 좋아하셨다. 그러기에 힘든 일도 해 올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아주머니네는 참외농사를 9년 동안 지었는데 그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12월 그믐께쯤 되면 준비해야 돼. 설 새고 바로 옮겨야 되니까. 씨로 모종을 내서 옮겨 심지라. 전기를 깔아 갖고 다 키워내. 스승의 날, 어린이날에 맞춰야 좀 가격이 나오지 그때를 넘어졌다든지 좀 빨리 나오면 가격이 안 맞아버려. 빨리 나오면 추운께 참외가 차서 사람들이 안 먹으려고 하는데 그때는 마침 날도 좋고 행사도 많응께 금방 나가버려. 그 다음에 나오면 참외가 씨가 두꺼워서 영판 맛이 없어. 날마다 서너 달을 부직포를 열었다 닫았다, 낮에는 더운께 열어 주고, 밤에는 또 추운께 덮어 줘. 아침에 또 열어 줘. 그걸 날마다 반복해보쇼. 순을 따줘야 하고. 손톱이 다 닳아져버린당께. 참외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고추 하지라. 비닐하우스는 일년에 두 번씩 해.”
며칠 뒤 결혼을 앞둔 딸이 집에 왔다. 자라면서 농사짓는 부모를 죽 보아왔을 텐데 어떤 기억들이 있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는 저희가 어떻게 자랐냐 하면, 엄마 아버지가 이제 논으로 밭으로 가시면 저희는 방안에 가두어져 자랐어요. 저는 몰랐는데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싼 똥을 먹고 그랬대요. 엄마 아버지가 상당히 정이 많으시고 남들한테 베푸는 거 좋아하시고 저희도 그런 거 많이 따랐죠.”
아마 농촌에서 자란 이들의 어릴 적 모습이 대부분 같을 것이다. 특별히 아이를 맡길 어린이집도 없던 때 부모들은 아이들을 방안에 남겨두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일을 가거나 바구니에 담아 밭 끝에 놓아두거나 줄을 달아 나무에 묶어 놓거나 해야만 했을 것이다. 밭에 따라 나와 흙을 주워 먹던 아기들이 이젠 다 어른이 됐을 것이다. 검게 얼굴 그을린 아저씨는 땀 흘린 노동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마음이 좋지 않다.
“농사지어서 가격이 잘 나오면 좋죠. 그런데 가격이 안 나올 땐 속상하죠. 정부에서 잘 사줘야 하는데 안 사준께. 그러고 가격도 올려줘야 하는데 가격도 안 올려주고. 매상가격이 떨어진께. 올해도 몇 % 다운시켰다고 하드만. 전량 수매해달라고 서울 올라가지라. 외국산은 와분께. 농사를 못 지어먹은께. 농사지어봐야 판로가 있어야제.”
아저씨의 말에 곧이어 아주머니는 “앞으로 외국서 다 와불고 그러면 우리 촌사람은 어찌 된다우? 아무리 막아봤자 뭐할기여 다 와분디. 그럼 우린 어찌 해야 써 앞으로?” 하시는데 정말 어찌 해야 할까.
3천원 주고 산 윗옷을 십 년째 입을 정도로 최대한 아낄 것은 아끼고 사는 아주머니는 옛날 가난한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암만 없다 해도 부자지만 무장 세상이 살기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게다가 농사지어 들어오는 돈은 빤한데 촌이라고 해서 돈 써야 할 데가 도시랑 다른 건 아니다.
“촌도 도시하고 씀씀이가 똑 같애. 전부 전화세, 전기세 물도 다 쓰고 그런께. 전기세 그것도 그러지만 모든 면이, 뭐이든지 도시하고 똑같아 틀린 점이 하나도 없어. 근디 농사 다 수입 개방되면 앞으로 촌사람들 어찌 사냔 말여. 난 그것이 걱정이 돼. 촌사람들만 문제가 아니라 도시 사람들도 큰 문제여. 왜냐면 촌사람들이 도시 가서 활용을 해줘야 도시 사람들이 살제 만약의 경우에 촌사람들이 돈 쓸 게 없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보쇼 도시 사람들도 큰일이여. 직접적인 이득은 오지 않지만 보이지 않게 그게 다 놔나지거든. 말하자면 예식장 같은 거도 돈 없다고 해서 집에서 오물딱 해 버리면 도시로 안 가버려. 아휴 참말로 탈이여 앞으로 인자. 우리 같은 세대는 인자 이 정도라도 살았은께 괜찮지만은 앞으로 젊은 사람들이 탈이제.”
농사일을 30년 넘게 평생 지어온 아주머니, 아저씨와 농사일을 한번도 손대본 적이 없는 우리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는 딸이 물었다. 농사일 해 본 적 있냐고.
“저도 일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실 때 고추를 따거나 풀을 매거나 하는데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 젊은이들이 죽고 싶다고 자살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제 생각에는 그래요,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시골에 와서 하루만 일해봐라, 정말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죽고 싶다는 마음은 쏙 들어가고 나 정말 살아야겠다 내 힘으로 다른 일 못 하겠냐 농사일이라도 도와가며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에요. 여기 오신 분들이 농촌 많이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막상 일은 안 하셨다고 하시니까 이번 여름에 와보셔서 모내기도 해 보시고…….”
참 뜨끔해지는 말이었다. 농민들의 싸움을 지지하고 시위 대열에 동참하고 함께 주먹 치켜들고, 쌀 개방 반대 서명 종이에 서명을 해도 그대로 뒤돌아서면 잊고 사는 일 많다. 우리의 문제일지언정 결코 내 문제는 아닌 듯 살아가는 일도 많고. ‘연대’란 무엇일까.
새벽 두 시에 나와요 - 남광주역 새벽시장(12월9일)
새벽 다섯 시. 남광주역에 선다는 시장에 가보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함께 가기로 했던 할머니께서 오늘은 안 나가신다고 했다. 자주 그곳에 나가신다는 다른 분들도 오늘은 안 나가신다고 했다. 혼자서라도 가보고 싶어 첫차를 타기 위해 회관을 나섰다. 5시 40분쯤에 첫차가 온다고 했으니 시간이 꽤 남았다. 잠든 마을을 별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안 되었는데 차가 쌩 달려온다. 남광주 가는 걸 확인하고 탔다. 그나저나 내려서 어떻게 찾아가야 하나 싶은데 다음에 차가 멈추자 머리에 한 보따리 짐을 지고 손에도 든 아주머니께서 타신다. 남광주역 시장에 가는 아주머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시장에 농사지은 걸 팔러 가는 아주머니들, 새벽 산에 가려는 아주머니들, 멀리 일터로 일 나가는 사람들이 새벽 첫차에 올랐다. 얼마 안 가서 차는 꽉 찼다. 창문 밖으로 날일을 소개해주는 곳이 보였다. 서울에서는 보통 ‘인력소개소’라는 이름을 다는데 이곳에는 ‘근로자 소개소’라는 이름을 달았다. 농사만 짓고는 못사는 현실이다. 농번기에 힘껏 일하고 겨울 한철 쉬는 것도 이젠 옛말이다. 쉬지 않고 건축현장으로, 공장으로 일을 찾아 나서야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농촌이다.
내릴 때가 되었다. 아까 눈여겨보아 둔 아주머니가 그 많은 짐을 어떻게 혼자 내릴까 싶었다. 나는 아주머니께 짐을 들어드리겠다고 했다. 차에서 내려서 아주머니는 됐다고 고맙다고 하시는데 나도 시장 가는 길이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평소에는 짐이 여러 개여서 한 번에 다 못 옮길 때는 몇 개는 정거장에 그대로 남겨두고 한번 갖다 놓고 두어 번 더 발걸음을 해서 짐을 옮겨 놓으신다고 한다.
새벽 6시 30분. 예전 기차역이었던 남광주역에는 벌써 시장이 쫙 펼쳐졌다. 아침 9시까지만 시장이 선다고 한다. 시장이 서는 자리가 주차장이기 때문이다. 수수, 팥, 조, 율무, 콩을 비롯한 잡곡, 채소, 건어물, 없는 게 없었다. 그리고 다 싱싱했다. 내가 짐을 들어드린 아주머니는 붉은 고추를 가지고 오셨다. 아주머니가 짐을 부릴 곳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 시장은 자리를 잡으려면 새벽 일찍부터 나와야 한다. 어떤 아주머니들은 새벽 2시부터 나오기도 한단다. 아주머니는 여러 차례 시장을 돌다가 간신히 자리를 하나 찾으셨다. 내게 고추를 주신다는 걸 간신히 말렸다.
시장 중간에 일흔이 넘은 할머니께서 강낭콩을 까고 계셨다. 바닷가에서 내 살았던 할머니는 조개도 캐고 문어도 잡는 일로 자식들을 다 키워 서울로 보내고 혼자 광주에서 사신다고 한다. 굳이 당신이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살 만하지만 할머니는 새벽부터 일을 하신다. 바람이 꽤 찬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을 하신다. 춥지 않으세요 하니 깔고 앉은 통을 가리킨다. 고추장을 담는 큰 깡통인데 그 안에 초가 불이 붙은 채 들어가 있다. 그리고 통 사방으로 구멍을 뚫어놓으셨다. 할머니가 만든 불의자인 셈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만들어 쓴다고 한다.
잡곡을 늘어놓고 파는 아주머니는 고흥에서 오셨다고 한다. 같은 마을 사람들하고 돈을 모아 차를 대절해서 함께 나오신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 만에 가지고 나온 잡곡을 다 팔 수 있는 게 아니기에 한번 물건을 싣고 나오면 다 팔릴 때까지 광주에 계신다고 한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딸이 근처에 살아서 며칠씩 딸네서 머무르며 장사를 하신다. 늘어놓은 곡식이 꽤 되는데 시장이 파하면 다시 다 갈무리해서 창고에 돈을 주고 맡긴다. 가지고 나온 곡식도 좋고 값도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사간다고 한다. 한번 단골은 꼭꼭 찾는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가장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새벽 두 시부터 나오셨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보통 큰 트럭을 가지고 나와 장사를 한다. 배추며 무, 파를 산더미처럼 싣고 온다. 큰 무 다섯 개 한 묶음이 겨우 천 5백원이다. 어떻게 저렇게 쌀 수가 있을까. 대체 씨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싣고 온 그 노동이 다 값이 매겨질 수가 있을까 싶은데 나중에 사람들이 시장 본 물건을 차로 날라주는 아저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며칠 전만 해도 천원이었다며 ‘5백원 올랐네요’ 하신다. 무밭을 갈아엎었다는 말, 배추밭을 갈아엎었다는 말, 거두지 않고 그대로 땅에 묻는다는 말이, 심정이 느껴졌다.
시장 뒷골목 쪽으로 가보니 늦게 와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분들이 가지고 나온 채소며 곡식들을 늘어놓고 파셨다. 그 자리에 나온 분들은 대부분 기력이 쇠해 보이는 할머니들이셨다. 가지고 나온 물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많이 들고 나올 힘도 이젠 없는 분들이셨다. 팔리지 못한 농작물들, 더 놔두었다가는 그래도 버려져야할 텐데 할머니들 눈에는 자식처럼 소중한 것일 게다. 그것들을 다 팔면 오고가는 차비나 나오려나.
한 할머니가 찹쌀과 고춧가루를 검은 비닐에 싸 가지고 나오셨다. 할머니 앉은자리만큼만 펼쳐진 물건들이었다. 아직 하나도 못 파신 것 같은데 불쑥 말을 건네기가 미안했다. 그때 사실 나는 강낭콩, 조, 수수가 담긴 비닐봉지 세 개를 벌써 들고 있었다. 나는 찹쌀까지 사고 말았다. 7천 원이라고 한다. 쌀금 대중이 없는 내가 봐도 참 싼값이었다. 내가 사고나니 바로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남은 두 봉지를 다 샀다. 그리고 고춧가루까지 산다. 고춧가루를 입에 대 보며 좋다고 한다. 먼저 다른 곳에서 산 고춧가루를 열어 보이며 할머니께 좋은가 어떤가 여쭈어본다. 할머니는 손으로 만져만 보면서 고춧가루 품질이 어떤가 다 알아내셨다. 할머니께 “제가 사자마자 다 팔리네요” 하니 좋아하신다. 할머니는 화순에서 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당신이 농사지은 작물이 아주 좋은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해가 뜨자 시장이 환하게 보인다. 해가 떠도 겨울 찬바람은 데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몇 시간째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추울 것이다. 계속 걸어 다닌 나도 발이 시려서 더는 못 있을 정도였다. 한 할머니가 너무나 얇은 잠바 하나로 찬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바싹 마른 몸인 할머니 발아래에는 말린 무청과 자디잔 모과들이 있었다. 할머니는 서서 국밥을 드시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곳곳에서 아침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새벽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시장 한쪽에서 밥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국과 밥, 한두 가지 반찬으로 이루어진 아침이었다. 할머니는 어디 앉아서 먹을 형편이 아니어서 국 대접에 반찬과 밥을 한꺼번에 말아 손에 들고 드셨다. 부들부들 떨면서, 온몸을 떨면서. 손에 든 숟가락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추위를 견디려 따뜻한 국을 청했을 텐데 드실수록 할머니 몸은 더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가 아침을 다 드신 후 가까이 가니 늦게 나와서 하나도 팔지 못했다며 싸게 줄 테니 가져가라고 하신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에 할머니는 무청과 모과까지 다 담아버렸다. 왔다갔다 차비하고 아침밥값까지 하면 할머니 주머니에는 거의 남는 게 없을 것 같다. 자디잘고 상처 많은 모과였지만 향만큼은 진하디 진했다.
생산하는 사람들이 파는 일까지 신경 쓰지 않고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비도 나오지 않는 길을 나서야 하는 할머니들. 뭐라도 팔아 담은 얼마라도 현금을 만들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찬바람 맞으며 나오는 일흔 넘은 할머니들을 보면서 ‘늙으셔서도 일하시고 부지런하시고 건강하시다’라고 그야말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보려 해도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시장이 파할 무렵 도장리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에 만났던 아주머니께서 일러준 정거장으로 갔다. 표를 끊고 보니 도장리 마을에 사는 아저씨가 차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저씨는 어제 마을에서 나와 광주 아들네에서 하루 자고 다시 집으로 가시는 길이라고 하신다. 아주머니는 암으로 수술도 받으신 터라 더 이상 농사는 함께 짓지 못하고 아들네서 손녀, 손자들을 돌봐주신다고 한다. 차가 올 때까지 매표소 의자에 앉아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아저씨도 자식들에게 농사를 물려주지 않으셨다. 그만큼 힘든 일이 농사일이다. 그런데 힘든 건 몸이 아니라 어쩌면 마음일지도 모른다. “쌀 개방을 하면 누가 농사를 짓겠는가” 하시는 아저씨는 “정부가 농민들의 말은 제대로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하신다. “배운 것 없고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 무시하는가보다”고 하신다. 요즘은 기계로 농사를 짓지만 아저씨가 일해온 시간들은 모두 몸으로 농사를 지어온 시간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쉬지 않고 일해 온 그 시간들이 그나마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어 각자 살길을 마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와 엊저녁 끓인 호박죽으로 나는 늦은 아침을, 아저씨는 이른 점심을 함께 먹었다. 이제 혼자 지내는 집. 겨울 한 철, 아내와 자식 그리고 손녀, 손자들이 있는 따뜻한 곳에서 지낼 수도 있겠지만 다시 새로이 올 봄을 준비해야 하는 농부는 자신의 집을 비우지 않는다.
골프 날아가요 - 화순군 능주장(12월10일)
아침에 첫날 동치미를 가지고 오셨던 할머니께서 능주면에 장이 서는 날이라고 장바구니를 들고 나가시는 걸 창문으로 보았다. 할머니를 따라 장 구경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보니 다들 장에 가는지 만원이다. 의자에 앉은 분들은 거의 여든 넘어 보이는 머리가 새하얗게 샌 분들이고 서 계시는 분들도 보통은 예순이 넘은 분들이었다. 농촌에서는 예순이면 청년이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능주 장에서 차에 탄 사람들이 죄다 내렸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허리가 90도로 꺾인 할머니 한 분이 깨를 팔려고 가셨다. 꺾인 허리는 90도를 넘어 거의 0도에 가까워 보였다. 할머니는 도대체 저 깨를 어떻게 들고 가시려고 길을 나섰을까. 잠깐 길이 갈리기 전까지 들어드렸는데 젊은 내가 들기에도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함께 간 할머니께서 장보러 나온 김에 머리도 좀 다듬으신다고 해서 함께 미장원에 들어갔다. 코스모스 미장원에는 젊은 미용사와 보조 미용사가 있었다. 아직 보조 미용사는 가위를 들 수 없는지 미용사 혼자 하느라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할머니들이셨다. 특별히 뭔가를 사지 않아도 머리도 다듬고, 병원에 들러 물리치료도 받으려고 나오신 분들이었다.
일흔이 넘으신 분들이었는데 곱고 젊어 보이신다고 하니 “머리 염색허니께 그러제 머리 염색 안 허면 허얘.”, “머리 염색 안 하면 백여시여 백여시.”라고 하신다. ‘백여시’라는 말에 미장원 안 모든 사람들이 다 웃었다. 영감님이 도와줄 때도 있지만 늘 혼자 하는 염색이라 고루 염색이 안 되고 허옇게 남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농한기면 가마니를 짜서 팔기도 했다는데 이제는 겨울이면 ‘만날 들에서 사느라’ 아프고 쑤신 몸을 치료하러 다니신다. 바쁜 때는 다리가 아파도 새벽이면 또 일하러 나선다고 한다. 아파도 “어쩔 수가 없제.”라고 하신다. 할머니들보다 좀 젊은 분들은 김치공장에도 나가고 미나리 밭이나 고구마 밭으로 날일을 나가기도 하는데 요즘은 근처에 많이 생긴 골프장으로 일을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마침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 중에 한 분이 골프장에서 일을 해보셨다고 한다.
“저그 함평에 있는 골프장에 다녀봤어. 풀 매러. 옛날에 시작할 때 떼 입히고 그럴 때 가봤어. 그러고는 안 가봤어. 그때 얼마 받았나 잊어버렸어. 시방은 2만 5천원이제. 시방은 어쩐가 몰라도 점심도 싸 갔어. 골프장 일이 제일로 수월해. 말하자면 개인 밭에 일하러 가면 주인이 늘 따라다니면서 막 간섭을 하는디 골프장은 회사 일이라 나서 직원이 한번 요것 하쇼 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 그러니께 댕겨.”
직원이 일을 배분해주고 나면 그 다음에는 다른 간섭이 없어서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한쪽에서는 일을 하고 한쪽에서는 골프를 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좀 씁쓸하지 않은가. 종종 사고도 일어난다고 한다.
“여그서 풀 매다가도 저그서 골프 치면 ‘골프 날아가요’ 그래. 그러면 저그 먼 디로 달음질을 치고 도망가지. 공 맞으면 여지없이 터져부러. 공이 아주 요따만한 독인디 독. 무서워서 피하지. 우리는 돈 벌러 갔는디 자기네들은 이쁜 아가씨들이랑 20명, 30명씩 나래비로 와서 우리 일하고 있으면 저리 치우라고 골프를 저런 데로 탁 치든만.”
좋은 산들을 깎아 만든 골프장. 마을 주민들은 생전 일하러 가는 일 아니면 들어가 볼 수 없는 골프장들이 지금 농촌 곳곳에 만들어져 있고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평생 농사를 지은 할머니들이 일을 나가신다. 도장리 마을에서도 저녁에 골프장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할머니들을 여러 분 볼 수 있었다.
“농약을 영양제하고 벌레 죽이는 약하고 뿌리는디 영양제는 얼른 크라고 약을 한갑디다. 긍께 골프장 잔디가 우리나라 잔디랑 틀려 갖고 지금도 새파래요. 우리나라 잔디는 다 죽어 갖고 희커니 몰라져버리잖아요. 그놈은 새파래요, 지금도. 그전에는 재래종이었는디 지금은 덥석 큰놈을 가져다 하지 않소. 재래종은 약도 안치고 그랬는디 지금은 번성을 잘 해서 다 뽑아내고 그럽디다.”
골프채를 한번이라도 만져보셨냐고 물었더니 “뭘 해 봐 망구가. 누가 잡아보라고 한디.” 하신다.
머리를 다듬은 할머니와 미용실을 나와 능주 장 곳곳을 돌면서 필요한 것들을 샀다. 할머니께서 산 것과 쓴 돈이다.
청각 5천원, 김치 담을 비닐봉지 1천원, (다른 사람이 부탁한) 바늘세트 1천원, 굴 5천원, (술을 좋아하셔서 날마다 드시는 할아버지 때문에 술이 지긋지긋하지만 다시 할아버지를 위해 산) 소주 3천 2백원, 플라스틱 채 3천원, 채칼 2천원, 대파 1천원, 미나리 2천원, 쪽파 1천원, 머리 자르는 데 2천원. 지퍼 달린 작은 지갑에 담긴 할머니의 돈은 순식간에 다 나왔다.
마을로 돌아와 할머니 집까지 짐을 들어드리자 할머니는 나를 그냥 보내지 않으신다. “우리 집은 험한디” 하면서 찬방에 놔두었던 홍시를 내놓으시면서 먹으라고 하시더니 못내 서운하셨던가 플라스틱 바구니에 사람들 주라고 홍시를 여러 개 담아주신다. 두 노인양반들이 긴 겨울 동안 자실 간식일 텐데 말이다.
할머니 집은 그동안 봐왔던 집들과 달랐다. 대부분의 집들이 입식으로 바꾸거나 아예 새로 집을 지었지만 할머니네 집은 그대로 오래된 시골집이었다. 그리고 좁은 마당에는 거름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겨우내 쓸 땔감들도 한 가득 쌓여있었다. 허리 굽은 할아버지가 해다 나른 땔감들이었다. 집 벽에는 낡은 호미며 낫도 걸려 있었다. 보기 드문 시골집이었다.
낮에는 혼자 논둑길을 걸었다. 저 멀리 산자락에서 뭔가를 밀대에 싣고 부지런히 걷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따라갈 요량으로 부지런히 걷는데 어찌나 걸음이 빠르던지 당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추운 날 무슨 일을 하시고 가는 걸까 궁금했지만 벌써 저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 아주머니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주머니가 걸었던 길로 따라가 보니 산길이다.
혼자 걷다 보니 만나는 것도 참 많다. 마른 풀도 만나고, 삐삐 새소리, 수우우수우우 댓잎 흔들리는 소리, 바람소리도 만난다. 파릇파릇한 마늘밭도 보고, 사람들이 일하러 다녔을 길도 본다. 논밭 흙을 보면서 새삼 ‘흙’이라는 말이 참 예쁘다고 혼자 생각하다가 ‘흙, 흙, 흙’하고 되뇌어 보니 눈물 흘리며 우는 소리 ‘흑, 흑, 흑’이 떠오른다.
다시 아까 그 아주머니가 밀대를 끌면서 나타났다. 아까 갔던 길을 다시 가는 것이다. 보니 전날 마을회관에서 만났던 아주머니였다. 어디 가시냐고 물으니 배추를 실으러 가시는 길이란다. 김장할 배추였다. 아주머니는 자기 농사를 짓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 밭에서 사 놓은 배추를 실어오는 것이었다. 한참을 산길을 올라가니 밭이 있고 거기에 아주머니가 미리 자루에 담아놓은 배추가 있었다. 그 배추를 싣고 함께 밀었다.
아들 하나를 둔 아주머니한텐 땅이 없었다. 벼농사를 지을 논도, 배추를 심을 밭도 없었다. 아주머니는 날일을 나가신다고 한다. 미나리 밭에도 가고 고구마 밭에도 가고 양파 밭에도 가고. 다음날 새벽에 미나리 밭에 나갈 예정이라고 하신다. 일이 이어지면 계속 가지만 없으면 쉬기도 한다. 새벽 5시 30분에 아주머니를 태울 승합차가 온다고 한다. 하루 일당은 보통 2만 5천원에서 3만원인데 기사한테 5천원에서 7천원씩 떼어준다고 한다. 기사가 일감을 연결해 주기도 한단다. 얇은 웃옷 하나만 걸친 아주머니는 벌써 몇 차례 배추를 실어 나른 터라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전날부터 학교 끝나고 마을회관으로 놀러온 아이들이 다시 올 시간이라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갔다. 혼자 걸었던 길이 좋아서 아이들과 바람맞으러 가야지 싶었는데 아이들도 좋다고 한다. 아이들이 건너에 있는 산에 가자고 한다. 산에 오르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훤하니 산을 알고 있었다. 벌써 저만치 오른다. 다람쥐처럼 날랜 아이들을 나는 턱턱 숨 막혀 하며 따라갔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마을회관 마당에서 놀았다. 놀다가 아이들한테 몸으로 나무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했다. 아이들은 자기 몸으로 나무를 만들었다. 혼자씩 나무를 만들다가 모두 함께 나무를 만들어보자고 하니 누구는 나무줄기가 되고 누구는 나뭇가지가 되고, 나뭇잎이 된다. 낙엽이 되어보자고 하니 7살 아이가 땅바닥에 웅크린다. 아이들이 눈이 되어보겠다고 하더니 마을회관 마당에 있는 큰 바위에 죄다 올라 하나씩 하나씩 떨어진다. 눈이 한 송이 한 송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특별히 연극놀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어떻게 하는 거라고 한 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그냥 표현해낸다.
왜 농촌에서 살았냐고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12월11일)
새벽에 일어나 나가보니 미나리 밭에 가려고 내려오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긴 고무장화에 수건을 두르고 모자를 쓴 아주머니. 아예 집에서부터 일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가시는 것이다. 겉에 걸친 잠바가 아무래도 홑잠바 같았다.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냐고 추울 텐데 든든하게 입고 나오시지 않았냐고 물으니 일하다 보면 땀이 나와서 두껍게 입지 못한다고 하신다. 아주머니를 태우러 올 차를 기다리며 정거장 의자에 앉았다. 아침은 드시고 오셨냐고 하니 가면 아침을 먹는다고 하신다. 노임을 받고 일을 하다 보면 주인이 영 말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 게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한참을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는다. 거의 30분 넘게 기다리는데도 차가 오지 않는다. 아주머니한테는 손전화도 없었지만 전화번호도 없었다. 내게는 무작정 기다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결국 아주머니를 태울 차가 오고 아주머니는 그 차를 타고 나주 노안으로 갔다. 아주머니는 낮에 있는 부녀회장님 댁 둘째딸 결혼식에도 저녁에 있을 농민문학의 밤에도 못 간다.
능주 장에 함께 갔던 할머니께서 뒤늦게 영정 사진을 찍으러 아침 일찍 마을회관으로 오셨다. 할머니께서 밭 매러 가신다기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할머니 집에 가보니 전날 새벽 남광주역 시장에 갓을 팔러나가셨던 할머니께서 와 계셨다. 내가 남광주역 시장에 혼자 다녀온 날 저녁에 이 할머니께서 시장에 내다 판다고 밭에서 갓을 뽑고 계신 걸 보았다. 가셔서 금방 오셨냐고 물으니 하루 종일 남광주에 있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찬바람 속에 있었던 할머니는 된통 감기가 들었다.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서서 저녁 7시가 넘어서 돌아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안 팔리면 아주 헐값으로 옆에 상인한테 넘기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할머니는 끝까지 팔겠다고 그곳에서 버티셨나 보다. 목소리까지 변하셨다. 왕복 차비 4천원, 두 끼니까지 챙기면 아무래도 남는 게 없다. 찬바람 속에 덜덜 떤 몸 구석구석이 받아낼 몫은 애당초 없었던 것일까. 밭에 남은 갓을 또 팔러 나가실 거냐고 물으니 이제 그건 그만 뽑을 거라고 하신다. 아마 다른 걸 들고 가실 것이다.
밭에 가기 위해 할머니는 모자를 쓰셨다. 나한테도 챙이 넓은 모자를 하나 주셨다. 할머니는 빨간 자전거를 끌고 가실 참이었는데 나랑 같이 가는 바람에 자전거를 놔두고 가야했다. 이제 다리가 아파 한참 떨어진 밭까지 걸어가는 것도 큰일이 되어버린 할머니는 일 년 전에 자전거 타는 걸 배웠다고 한다. 아, 일흔에 자전거를 배워 타고 다니는 할머니!
한참 걸어가니 산 가까이에 할머니네 밭이 나왔다. 그런데 그곳에 누군가 지어놓은 집도 있었다. 할머니 막내아들이 혼자 사는 집이었다. 할머니 눈에는 다 늦도록 결혼 안 하는 자식의 거처가 애물단지로 보일지는 몰라도 아들이 직접 혼자 지었다는 딱 한 사람 살기에 족한 그 집과 할머니 밭은 참 평화로워 보였다. 할머니께서 내게 일바지를 주셨다. 그대로 바지 위에 입으면 되었다. 호미도 한 자루 챙겨주셨다. 할머니는 날마다 나오실 때도 있고 상황 봐서 가끔 오실 때도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뽑아야 될 풀들을 일러주시는데 풀 하나하나 자기 이름이 있었다. 뽑아내야 할 풀이었지만 예뻤다. 어떤 풀은 삶아서 먹기도 한다고 한다.
외콩, 물래쟁이, 곰봄부레, 풍년대, 빱죽, 광나물, 광대쟁이, 개불딱지.
할머니가 아무리 일러줘도 누가 누구인지 금방 까먹고 다시 물어본다. 그동안 그냥 풀, 잡초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또 풀 하나하나 먹어도 되는 거, 뽑아도뽑아도 번식력이 강해 또 나는 거, 봉숭아물들일 때 함께 넣으면 색이 더 선명하다는 거 그런 특성을 다 아신다. 풀도 다 다르듯이 할머니는 농사짓는 일도 다 다르다고 한다.
“나는 새벽일을 못 허요. 되도록이믄 새벽일은 안 해, 나는. 어쩔 수 없을 때는 할 수도 있제. 그지만은 별로 안 해. 다 이녁 성품에 따라서 살제. 새벽일 많이 하는 사람은 또 많이 하고. 나는 그런디 늦게 인난게 새벽일은 안 해. 인자는 눈이 어두워서 포도시 볼 거 있으면 돋보기로 보는데 옛날에 젊었을 때는 새농민도 얻어다 보고 그랬네. 새농민 보다가 농원을 본께 훨씬 체험이 그놈이 더 깊드만. 새농민은 더 얇고. 재미가 있었지 농원이. 젊었을 때는 그런 것도 봤지라. 인자는 못 그래.”
저녁에 할 농민문학의 밤에 글 하나 쓰셔서 읽어보시면 어떻겠냐고 아침에 말할 때는 못한다고 하시던 할머니는 풀매고 돌아와서는 하나 썼는데 어떤가 보라고 누런 갱지에 쓴 글을 가져오셨다. 할머니는 ‘밭노래’ 의상인 검은치마 흰저고리를 입고 오셨는데 저고리 소매에 깨끗이 글을 옮겨 쓴 하얀 종이를 넣어오셨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사람들 앞에서 쓰신 글을 큰 소리로 읽으셨다.
저녁에 화순읍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전국농민문학의 밤 행사를 했다. 화가가 마을 청년들과 함께 그린 걸개그림을 한 편에 걸어두고 다른 쪽에는 만화가가 그린 만화도 전시했다. 나주에서 농사짓는 여성들이 ‘논두렁 밭두렁’이라는 연극모임을 만들었는데 그이들이 와서 연극도 하고 ‘전남여성농민글쓰기모임’에서 공동창작한 시를 낭송하고, 창작농활에 참여한 시인들이 5일 동안 보고 느낀 걸 시로 써서 낭송도 했다. 며칠 마을회관에 나와 뛰어 놀았던 초등학생들이 부모님께 쓴 편지도 읽고, 도장리 여성들이 도암 밭노래도 불렀다.
전국농민문학의 밤 행사를 마치고 대절해온 관광버스에 올랐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맨 뒷자리로 가서 자기들끼리 자리를 만들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차가 출발하자마자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노래가 한번도 멈추지 않고, 끊기지 않고 마을 들머리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앞에 앉은 도장리 이장님부터 해서 어른들은 수도 없이 고개를 돌리고 몸을 돌려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어디선가 훌쩍하는 소리도 났다. 대처에 나간 자식들이 낳은 손녀, 손자들이 생각났을까. 갓난아기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농촌의 현실이 아팠을까, 이 아이들이 있어서 희망을 꿈꿀 수 있었을까, 어른들은 무척 좋아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들 곁에 소중한 아이들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 귀가 너무 즐겁지 않소!”
“집에 좀 늦게 도착했으면 쓰겄네!”
노래를 쉬지 않고 부른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아버지는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이 아이들이 이곳에서 자라나 스무 살 청년이 되었을 때도 남아있을 수 있게 이 사회가 살아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까 차안에서 정말 감동적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슬펐다. 이 아이들이 커서 왜 농촌에서 살았냐고 아빠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으로 남는 문화는 유전적인 것 같다, 그게 걱정이다. 한을 접어버리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텐데…….”
동네 어른들이 쌀 개방을 앞두고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보이지 않을 때 이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늦은 저녁 행여 어머니, 아버지가 내쉬었을 한숨 소리가 아이들의 가슴에는 어떻게 전달되었을까. 결국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희망이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가 힘내어야 할 이유도 이 아이들에게 있지 않을까. 떠나지 않고도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떠나지 않고 남아있음이 결코 고여 있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