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들>-기억하는 모든 것들은 사랑이 된다
"기억하는 모든 것들은 사랑이 된다"
송일곤 감독의 2006년 개봉작 <마법사들>의 메인 카피다.
이 영화는 2005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 중 그의 단편 부분을 장편화 한 것이다.
그간의 그의 영화가 그래왔듯 이 작품 역시도 신화적이고 몽환적인 연극적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아니, 굳이 어느 장면이랄 것도 없이 이 작품은 영화의 외형을 한 거대한 한 편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총 11막으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장면, 장면을 따로 찍어 편집하지 않고 '컷' 없이 '원 싱글 테이크'로 촬영한 매우 실험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가 주는 지루함이나 난해함에 대한 편견을 과감히 탈피하는 미덕을 이 영화는 갖고 있다.
현재와 과거가 한 공간에서 따뜻하게 교류하고, 배우들의 뒤를 따라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름다운 판타지를 구현한다.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영화적 요소들, 일테면 숲과 환상(거미숲), 아르헨티나와 탱고의 선율(깃), 그리고 송일곤의 페르소나처럼 느껴지는 배우 장현성 까지도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작품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어있다.
어두운 흑백의 자작나무 숲을 나비처럼 나풀나풀 걸어가는 한 여인의 뒤를 따라 나는 천천히 '마법사들'의 세계로 걸어들어간다.
젊은 여인은 왼쪽 눈 밑에 피에로처럼 커다란 눈물 자국을 그려 넣고 있다.
푸른 롱코트 뒤에 수놓아진 작은 나비, 대각선으로 둘러맨 기타, 자유롭지만 슬픈 영혼의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손짓한다.
나를 따라와요, 어서요...
빽빽한 은빛의 숲을 지나 그녀가 들어선 곳은 목조 건물의 고즈넉한 카페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 곳 강원도 숲 속 카페 주인인 재성(정웅인 분)과 말쑥한 양복 차림의 명수(장현성 분)는 낄낄거리며 이런저런 대화에 한창이다.
명수는 취한 목소리로 에스파니아어를 중얼거린다.
재성이 정신과 의사와 선 본 얘기, 그들이 연주했던 음악들이 시시껄렁한 안주가 되어 질겅질겅 씹힌다.
자은(이승비 분)은 기타를 벗어 벽에 걸고 그리운 듯, 두 사람의 등 뒤로 걸어가 볼을 쓰다듬고 어깨를 끌어안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녀의 존재가 마치 빛처럼, 투명한 그림자처럼 그들 사이로 투과된다.
두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데킬라를 마시기 시작한다.
비로소 그녀의 비현실적인 치장과 몸짓들이 두 사내가 풍기는 현실적인 분위기와 너무도 상반된 모습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나풀거리는 나비, 그녀는 이승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재성과 명수의 대화에서도 '죽음'이란 단어가 불쑥 튀어나온다.
3년 전, 자살, 밴드 '마법사'의 멤버들, 기타, 노래, 그리고 사랑.
그들은 '마법사 밴드'의 멤버들이었고 3년 전 자은의 자살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한 해의 마지막 날, 두터운 눈길을 헤치고 이 곳 산장에 모인 것이다.
영원히 올 수 없는 자은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하영(강경헌 분)을 기다리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지난날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런데 현재와 과거가 맞물리는 지점이 무척이나 독특하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밑에 서서 재성은 벽에 걸린 작고 네모난 거울을 들여다 본다.
거울은 색색의 작은 전구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왼 쪽 눈 밑에도 검은 무늬가 그려져 있다.
모자를 정성스레 매만진 그가 계단을 올라가자 과거 속의 자은이 현실이 되어 앉아 있다.
천재적인 기타리스트였지만 불우한 성장과정으로 '외계인'이 되어버린 그녀, 술과 마약에 찌든 뮤지션, 사과 씹는 소리에도 발작을 일으키는 상처 입은 영혼.
팔목을 그어버린 자은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재성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그녀의 뿌리 깊은 상처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게 몇 번인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던 재성은 결국 자은을 버리고 만다.
그리고 예의 그 거울 앞에서 모자를 매만지고 화장(분)을 한다.
현재로 돌아오는 일종의 의식이다.
오른 쪽 눈 밑에 칼처럼 길고 검은 그림자를 가진 명수 역시 마찬가지다.
거울을 보며 천천히 화장을 한 그는 현관을 지나 자작나무 숲으로 걸어 나간다.
나무 밑에 바위처럼 웅크린 하영이 보인다.
"이게 무슨 나무인 줄 알아? 이건 실비아야, 자은이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대. 실비아..."
하얗게 웃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미간에도 인도여인의 보석 같은 검고 선명한 점이 찍혀 있다.
"자은이가 없어...나 이제 더 이상 노래하지 않을 거야..."
3년 전 오늘, 자은의 전화를 받고 하영은 또 술에 취해 있는 그녀를 나무라며 말한다.
"내일 노래 녹음하는 거 알잖아, 언제까지 그럴래, 나 피곤하다..."
"언니, 사람은...사람은 왜 변하냐? 관계 말이야..."
이 말을 남기고 자은은 발코니에서 투신해 버린다.
나비처럼 가볍게...
그녀의 죽음으로 죄의식에 사로잡힌 하영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폭설로 차가 끊긴 산길을 힘겹게 걸어 올라와 재성과 명수의 현재에 합류하고 자은의 영혼도 반갑게 하영을 맞이한다.
이제 다시 모인 '마법사' 멤버들은 3년 전, 출가하는 길에 우연히 카페에 맡겼던 스노보드를 찾기 위해 다시 들른 스님(김학선 분)의 주재로 자은의 제사를 올린다.
사랑을 잃고 충동적으로 출가를 결심했던 한 스노보드 국가대표 선수가 3년 만에 화두를 풀고 다시 속세로 나가듯, 가슴 속 깊은 상처로 인해 방황하던 세 사람도 '사랑'이라는 마법으로 저마다의 상처를 치유하게 되는 것이다.
자은 또한 푸른 코트를 검정 코트로 번갈아 뒤집어 입고 과거와 현재를 드나듦으로써 자신의 죽음 뒤에 남겨진 세 사람의 아픔과 죄의식, 절망들을 낱낱이 이해하게 된다.
제사상에 올린 사과를 커다랗게 베어 물며 활짝 웃는 자은의 모습은 아픈 전생을 벗고 자유로워진 그녀의 영혼을 의미하는 가슴 따뜻한 환상이다.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을 핑계로 또 한 번 도피하려던 명수와 그가 작곡한 노래를 다시 부르며 사랑을 되찾는 하영, 사랑하던 자은의 영혼을 나비처럼 훨훨 날려 보내고 비로소 행복한 남자로 남은 재성.
그들이 부르는 엔딩 곡, '러브홀릭'의 '실비아'는 관객들을 아련한 환상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할 만큼 아름답고 몽환적이다.
또한 주인공들이 과거의 문을 열 때마다 주문처럼 울려 퍼지던 탱고, '휴고 디아즈'의 하모니카 연주곡도 이 영화를 더욱 '마법사들'답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이 작은 영화 안에서 '큰' 연기를 보여준 네 주연배우들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싶다.
송일곤의 배우 장현성의 섬세한 연기는 물론이려니와 특히 그간 코믹한 연기로 사랑받아 온 정웅인의 깊은 내면 연기는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해준다.
'배우 정웅인의 재발견'이 된 이 영화 <마법사들>을 내가 아끼는 영화 목록에 추가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글/배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