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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達羅紀(아달라기)
初支所禮王妃毛利神母 寡居以其財宝歸先今 未幾其女只珍內禮 亦受先今寵 一日夢見大盧神君騎黃赤虎來 授寶月珠 只珍內禮受 而呑之 固言于先今 今吉之 乃合而生帝 頗異有精彩 乃承嫡統 只珍內禮 始以二骨爲聖母 登天宮位 先今崩 自以爲恩重而殉之 遺命分骨 于私夫昔鄒陵 上至孝 依其命 分骨 因尊昔鄒爲葛文王 以胞弟伐休爲其太子 上自幼友愛 凡有所好 必傾與之 伐休亦至誠事帝 未嘗離側 不以己心 爲心唯從 上好 上太子時 恐違先今 密近于汗介 及先今 不預以八生相約 密以璽宝居之 伐休諫之曰 “父今尙嚴 兄何自急” 汗介密囑于上 曰 “小兒窺爾位無爲” 洪介所欺 上曰 “吾弟無他意 汝何妬之” 乃命伐休入井居之 媚事汗介 及登大位 以休妻黃氏紫凰皆爵權妻 入井居之 時稱二君
처음 지소례(支所禮)왕비 모리(毛利)신모(神母)가 과거 그 재산과 보물을 선금(선왕, 일성이사금)에게 바치고 귀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딸 지진내례(只珍內禮)가 역시 선금의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꿈에 대노신군(大盧神君)이 황적색 호랑이 타고 보월주(寶月珠, 보석으로 만든 달 모양의 구슬)를 주었는데, 지진내례가 받아 그것을 삼키었다. 오로지 선금에게 말하였는데, 이에 길하다고 하여 선금과 합환을 하여 왕을 낳았다. 자못 정채(精彩 정묘하고 아름다운 빛깔, 생기가 넘치는 활발한 기상)가 남다름이 있었다. 이에 적통을 이었다. 지진내례는 두개 성씨의 성모(聖母)가 된 시초였다. 천궁(天宮, 여기서는 황후의 지위)의 지위에 올랐다. 선금이 죽자 스스로 은혜를 중히 여겨 (선금을) 따라 죽었다. 사부(私夫) 석추(昔鄒)의 무덤에 분골(分骨, 뼈를 나누어 장사를 지내는 일)을 해달라는 명을 남기고 죽었다. 왕이 효성이 지극하여 그 명에 따랐다. 분골로 인하여 석추(昔鄒)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였다. 이로써 같은 어머니의 동생 벌휴(伐休)를 아달라의 태자로 삼았다. 왕이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있었는데, 무릇 (벌휴를) 사랑하는 바가 있었고, 끝까지 함께 하였다. 벌휴 역시 지성으로 왕을 섬겼다. 일찍이부터 옆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자신의 마음대로가 아닌, 마음을 다하여 오로지하여 따랐다. 왕이 좋아하였다. 왕이 태자일 때, 선금(先今)을 두려워하여 도망가려 하였다. 은밀히 한개(汗介)와 가까워졌는데 선금에게 미치자(지마이사금 18년 11월 기사 참조), 예상치 못하게 팔생(八生)을 서로 약속하게 되었다(한개가 아달라를 유혹하여 통정을 하고, 벌휴가 이를 말리자 벌휴를 무고하였고, 결국 일성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석추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벌휴를 용서한 일). 은밀히 옥쇄를 차지하였다. 벌휴가 간하여 말하기를 “부금(父今, 아바마마)는 숭상되고 엄한데, 형은 어찌 스스로 급한가.”라고 하였다. 한개가 은밀히 왕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어린 아이(벌휴를 지칭)가 너의 자리를 엿보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홍개가 속이는 바가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동생은 다른 뜻이 없다. 너는 어찌 시새움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이에 벌휴를 궁에 들어와 살게 하였다. 한개를 아첨하여 섬기고, 대위(大位, 천자의 지위)에 오르기에 이르렀다. 벌휴의 처 황씨(黃氏)와 자황(紫凰)은 모두 권처의 직위를 받고 궁궐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 당시 2군(二君, 두명의 군주)이라 칭하였다.
二月 先今崩 上與只后登祚受朝 只后 以板檍爲伊伐飡 馬元稟主
(AD212년), 2월, 선금이 죽어, 왕과 지후가 천자의 자리에 올라 조회를 받았다. 지후(只后)가 판억(板檍)을 이벌찬으로, 마원(馬元)을 품주로 삼았다.
三月 內禮汗介爲左右后 以只后命追尊昔鄒爲葛文王 伐休爲太子
3월 내례(內禮)와 한개(汗介)를 좌후(左后)와 우후(右后)로 삼았다. 지후가 석추를 갈문왕으로 추존하고, 벌휴를 태자로 삼았다.
四月 只后與上及內后 謁桃山 謂上曰 “內后聖骨正統 可以傳吾位” 乃以雚服加之 托自禱于神 而斷髮爲尼 上恨之 及葬先今 遂殉 而從之 以遺命分骨壤井
4월 지후와 왕과 내후(內后, 내례)가 도산을 찾아가 (조상들에게) 아뢰었다. (지후가) 왕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내후는 성골정통(聖骨正統)이다. 가히 이로써 너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관복(雚服, 황새의 깃털로 만든 의복)을 더하도록 하였다. 몸소 신에게 기도하여 부탁하였다. 니금을 위하여 머리카락을 잘랐다(직역하면 머리카락을 자르고 여승이 되었다라고 해석되나 따라 죽었다는 기사와 사망 후의 기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므로 생을 마감한 듯 하다.) 왕이 원통해 하였다. 왕이 선금을 장사지냄에 이르자 따라 죽었다. 뼈를 나누어 양정(壤井)에 묻어 달라는 유명(遺命)을 따랐다.
五月 仙徒可馬成治等欲立班君之子忽郞 起仙軍 鷄徒虎徒馬徒多從之 牛徒羊徒反之 上命長昔討平之 忽郞君走入太伯神山 命勿追 命置郞君奴 屬于神山
5월 선도(仙徒) 가마성치(可馬成治)등이 반군(班君)의 아들 홀랑(忽郞)을 세우기 위해 선군(仙軍)을 일으켰다. 계도(鷄徒), 호도(虎徒), 마도(馬徒)의 무리들은 모두 따랐지만, 우도(牛徒), 양도(羊徒)가 따르지 않았다. 왕이 장석(長昔)에게 쳐서 평탄하도록 명하였다. 홀랑군은 태백신산(太伯神山)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왕이) 추격하지 말라고 명하고, (홀랑)군의 노비를 두어 신산에 속하도록 명하였다.
1. 홀랑군의 계보는 祗摩(愛禮) - 班君(所松) - 忽郞이다.
아달라기엔 또 한번의 반란(길선이 주도)이 있는데 모두 지마의 자손들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였다.
2. ‘可馬成治’는 사람의 이름으로 보인다. 지마이사금 26년은 신라본기에는 없는 해로 일성이사금 5년에 그 기사가 있다. 즉, 날기신산은 태백신산과 같은 이름으로 현재의 백두산으로 추정된다. 지리적으로 고구려의 남쪽, 백제의 동쪽, 신라의 북쪽이다. 이곳에 야인(野人)이라고 불리던 무리들이 살았는데, 신라사초 내물왕기에 왜(倭)를 야(野)롤 칭하였다는 문구가 있으며, 신라사초에는 신라본기의 왜인이라고 김부식이 기재한 곳에 야인이 등장한다. 하지만 열도 왜인과의 혼돈이 생길 수 있으므로, 남당 선생의 유고대로 야인이라고 적는 것이 보다 정확한 사서해석이라 할 것이다.
3. 고구려의 언어와 열도의 언어가 유사하거나 같은 뿌리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고구려의 언어가 50개도 남아 있지 않는 상황이므로, 그 주장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일 수밖에 없다.
*지마이사금 26년(AD184) 9월의 기사참조
九月 行大場 于達勾火
9월 달구화의 큰 마당으로 갔다.
上與達亥份其市巡狩 至捺己 遊神山 份乃黑齒女也 黑齒以爲捺己神山 有天子氣 使其女誘上 出遊欲朶 而歸也 齒內結逸聖副君 外托鷄亥 竟至上 相廣占田宅 分置子女妾屬 曰 ‘彌伐社’ 威振一世
왕과 달해(達亥), 빈기시(份其市)가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면서 날기(捺己)에 이르렀다. 신산(神山)에서 유람하였다. 빈(기시)는 흑치(黑齒)의 딸이다. 흑치는 이로써 날기신산(捺己神山)으로 삼았다.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어 그 딸에게 시키어 왕을 유혹하도록 하였다. 나가서 늘어지게 놀기를 바랐는데 돌아왔다. 흑치는 안으로는 일성(逸聖)부군과 마음을 뭉치고, 외부로는 계해(鷄亥)를 밀었다. 끝내 왕에게 미치어 서로 넓은 밭과 집을 차지하고, 자녀와 첩을 나누어 두고 속하게 하였는데, 말하기를 ‘미벌사(彌伐社)’라고 하였다. 위엄이 1세(30년)동안 떨쳤다.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5년 10월
5년 2월,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였다.
7월, 알천 서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10월,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고, 태백산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다.
六月 太子汗昔自阿瑟羅入朝 曰 “聖人當國 老臣願以壽憲” 而來上 賜日知宅居之 復妻門介 昔以汗介之父 被召遇 以太公禮
6월 태자 한석(汗昔)이 아슬라(阿瑟羅)로부터 입조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나라를 맡음에 노신은 목숨을 바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고 왕에게 들어왔다. 일지(日知)의 집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문개(門介)를 다시 처로 삼았다. (한)석은 한개(汗介)의 아버지로, 때를 만남에 이르러 부름을 받았다. 이로써 태공(太公)의 예로 (대접하였다.)
七月 太太門其薨 葬以神母禮 加洪完及其妻章氏玄方爵 以洪介爲太聖
7월 태태(太太) 문기(門其)가 죽었다. 신모(神母)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홍완(洪完)과 그 처 장씨(章氏)와 현방(玄方)에게 작위를 더하였다. 이로써 홍개(洪介)를 태성(太聖)으로 삼았다.
八月 大享四徒 于南桃
8월 4도(四徒, 4종류의 선도무리)에게 남도(南桃)에서 큰 잔치를 벌렸다.
上幸洪介井 禱門其太太神 仍幸洪介 洪曰 “妾年尙少 太聖之位 雖貴不如三母” 上可之 復以洪介爲聖母
왕이 홍개정(洪介井)에 행차하여 문기 태태의 신령에게 기도하였다. 때문에 홍개에게 행차하였다. 홍(개)가 말하기를 “첩의 나이는 태성의 지위가 비록 귀하기가 삼모(三母, 聖母)와 같지 않더라도 태성으로 숭상되기엔 어리다.”라고 하였다. 상이 그것을 옳다고 여겨 홍개를 다시 성모로 삼았다.
十月 以王理聖母爲太聖 納理爲左井 洪介爲右井 內禮爲眞骨 汗介爲大元 左爲日宮 右爲月宮 眞骨爲天宮 大元爲地宮 太聖爲神宮 黃氏爲春宮 紫黃爲夏宮 辣后爲秋宮 葛后爲冬宮 命宅師一新宮室 九宮之制 乃立
10월 이로써 왕리(王理)성모를 태성(太聖)으로 삼고, 납리(納理)를 좌정(左井), 홍개(洪介)를 우정(右井), 내례(內禮)를 진골(眞骨), 한개(汗介)를 대원(大元)으로 삼았다. 좌(정)을 일궁(日宮)으로, 우(정)을 월궁(月宮)으로, 진골을 천궁(天宮)으로, 대원을 지궁(地宮)으로, 태성을 신궁(神宮)으로 하였다. 황씨(黃氏)를 춘궁(春宮)으로, 자황(紫黃)을 하궁(夏宮)으로, 랄후(辣后)를 추궁(秋宮)으로, 갈후(葛后)를 동궁(冬宮)으로 삼았다.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궁실을 일신하도록 하였다. 9궁(九宮)의 제도가 이에 세워졌다.
《해설》‘井’과 ‘宮’의 뜻이 혼용되어, 같이 쓰이는 말임을 나타내주는 글이다.
十一月 行先今愛后只后大祭 于蛇陵門 以內后爲祭主 召文夫余加耶諸國來弔
11월 선금(行先, 일성이사금)과 애후(愛后)와 지후(只后)의 큰 제사를 사릉문(蛇陵門)에서 행하고, 내후(內后,일성이사금과 애례의 딸)를 제주(祭主)로 삼았다. 소문(召文), 부여(夫余), 가야(加耶)의 모든 나라가 와서 조문을 하였다.
十二月 汗昔太子請立黑齒祠 許之
12월 한석(汗昔)태자가 흑치사(黑齒祠)를 세우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다.
元年 正月 上與五后 受朝大井
원년(AD213년) 1월 왕과 5후(춘하추동의 4후를 제외)가 대정(大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二月 大宴骨門
2월 골문(骨門)에게 큰 잔치를 벌였다.
汗后生女達介 上曰 “朕多女 而未生子 汝珥都 亦生女乎” 汗曰 “妾始生汝身 所生爲貴 汝何言南女乎 所珥者 攝于神也 今與汝接 安得爲都乎”
한후(汗后, 한개)가 딸 달개(達介)를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딸이 많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 너는 도도(都都)인데 역시 딸을 낳느냐”라고 하였다. 한(개)가 말하기를 “첩은 처음으로 너의 자식을 낳았는데, 소생의 자식을 귀하게 여기느냐. 네가 어찌 남녀를 말할 수 있느냐. 도자(都者)는 신령을 끌어당기는 사람이다. 지금 너와 성교를 하면, 어찌 도(都,신을 모시는 사람)를 얻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三月 繼元伊伐飡 淡色稟主 康禮兵飡 洪完左部執書 如老右部執書 大日大師小光太子薨 汗昔太公代之 以古治爲大道師
3월 계원(繼元)을 이벌찬으로, 담색(淡色)을 품주로 삼았다. 강례(康禮)를 병(관이)찬으로 삼고, 홍완(洪完)을 좌부집서로, 여노(如老)를 좌부집서로 삼았다. 대일대사(大日大師) 소광(小光)태자가 죽었다. 한석(汗昔) 태공이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고치(古治)를 대도사(大道師)로 하였다.
《해설》계원의 가계도(상장돈장 참조)
大樹(君門) - 君乙(多利) - 君啓(馬發) - 繼元
日知(韓那) - 馬知那(兪生) - 馬發(君啓) - 繼元
日知(韓那) - 馬知那(兪生) - 所松(班君) - 忽郞
日知(韓那) - 馬知那(兪生) - 兪知那(敦其市) - 敦父(文窘)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원년 기사
원년 3월, 계원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군무와 정사를 맡겼다.
四月 亥鄒爲角干 圓孝沃沮軍事
4월 해추(亥鄒)를 각간(角干)으로 삼고, 원효(圓孝)를 옥저군사(沃沮軍事)로 삼았다.
六月 汗后率骨女百人 大行流頭 于蚊川 上服骨女衣密從 汗后使骨女不能知 流罷 上出舞岩上 諸女大驚 名其岩曰 ‘尼今岩’ 百女奉帝 至泉曰 ‘百女泉’
6월 한후(汗后)가 골녀 100인을 거느리고 문천(蚊川)에서 유두(流頭)를 크게 행하였다. 왕이 골녀의 옷을 입고 은밀히 따라갔다. 한후가 골녀를 부리었는데 알지 못했다. 흐르는 물속에서 쉬고 있는데, 왕이 나와서 바위위에 올라 춤을 추었다. 골녀들이 크게 놀랐다. 그 바위를 이름 하기를 ‘니금암(尼今岩,대왕암)’이라 하였다. 100명의 여자들이 왕을 모셨는데, 그 샘을 이름 짓기를 ‘백녀천(百女泉)’이라 불렀다.
七月 行大月歌
7월 월가(月歌)를 크게 행하였다.
월가를 행하는 시기는 매월 정해져 있지 않다.
阿瑟羅太守虹彘 無嫡而薨 上命內公爲虹彘妻陽地繼夫 內公乃上之叔父也 陽地入京 謝恩曰 “不意今日中興祖業”
아슬라(阿瑟羅)태수 홍체(虹彘)가 적자가 없이 죽었다. 왕이 내공(內公)을 홍체(虹彘)의 처 양지(陽地)의 계부(繼夫, 남편을 이었다)로 삼았다. 내공은 왕의 숙부이다. 양지가 입경하여 감사하며 말하기를 “오늘 조상의 기업을 일으킬 뜻이 없다”라고 하였다.
해석이 이상하다. 아슬라 태수였던 홍체가 신라와 골족이 다른 모양이다. 상장돈장에 나오는 혈연관계를 살펴본다.
阿盧(虹門) - 虹盧(彘君) - 虹彘(臼君) - 臼人(內公)
九月 以牛徒主古治爲大道師
9월 우도(牛徒)의 주(主)인 고치(古治)를 대도사(大道師)로 삼았다.
3월의 기사와 중복된다.
洪后生伐休子納正 而詐稱上子 上大喜 洗之曰 “今始生子 汝吾妻也” 洪后百媚 而欺之 洪后自先今時 密納其婿伐休 休自懼 乃引上通之 而復爲寵后 上使伐休 同外聖井 混合四宮 欲得子門 故洪后以納正爲上子 而上不疑也
홍후(洪后,홍개)가 벌휴(伐休)의 아들 납정(納正)을 낳고 왕의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칭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아기를 씻겨주며 말하기를 “지금 나의 아들을 처음 낳으니, 너야 말로 나의 처다”라고 하였다. 홍후가 갖가지 아첨하며, 그 사실을 속였다, 홍후는 선금(先今)때 부터 그 사위인 벌휴를 은밀히 거두었다. 벌휴가 스스로 두려워하자, 이에 왕을 유혹하여 통하였다. 그리고 다시 총애를 받는 후가 되었다. 왕이 벌휴에게 바깥의 성정(聖井) 4궁(四宮)을 혼합하도록 하여 아들을 얻으려 하였다. 때문에 홍후가 납정을 왕의 아들이라 하였지만 왕이 의심하지 않았다.
上幸敦父茅 辛其妻文窘(원문은 같은 자) 拜敦父爲通路將軍 文窘上之異母妹也 上幼時相洽 故至時復幸窘 乃請入井故也
왕이 돈부(敦父)의 모옥을 방문하였다. 그의 처 문군(文窘)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돈부에게 통로장군(通路將軍)을 내렸다. 문군은 왕의 다른 어머니의 여동생이다. 왕이 어렸을 때 서로 합한 바가 있었는데, 그런 까닭에 이때에 이르러 다시 (문)군에게 행차하였고, 이에 궁으로 들어오길 청하였던 까닭이다.
十月 夫余美姬天乙地乙來 夫余歎媚二君 揀?其骨女之美者 獻于上及伐休也
10월 부여의 아름다운 계집 천을(天乙)과 지을(地乙)이 왔다. 부여는 2군을 칭찬하며 아첨하였다. 그 골녀 중에서 이쁜 사람을 골라 뽑아 왕과 벌휴에게 바친 것이다.
十一月 大宣角干薨 以其子大郞爲京都兵官 興宣爲護城兵官 皆先今之外孫 有渠父之風
11월 대선(大宣) 각간(角干)이 죽어, 그 아들 대랑(大郞)을 경도병관(京都兵官)으로 삼았다. 흥선(興宣)을 호성병관(護城兵官)으로 삼았다. 모두 선금의 외손인데 나라의 기둥의 품성이 있었다.
대랑과 흥선의 가계도
天神(仙桃聖母) - 日光(閼英) - 奉母(星帝) - 順貞(馬元) - 順宣(大羊)- 大宣(解生) - 大郞
天神(仙桃聖母) - 日光(閼英) - 奉母(星帝) - 順貞(馬元) - 順宣(大羊)- 大宣(解生) - 興宣
十二月 上幸黑齒祠拜像
12월 왕이 흑치(黑齒祠)의 사당에 행차하여 조각상에 절하였다.
文介生汗昔子文昔 上幸其茅 賜米衣
문개(文介)가 한석(汗昔)의 아들 문석(文昔)을 낳았다. 왕이 그 모옥에 행차하여 쌀과 옷을 내렸다.
二年 正月 上與內后祀祖廟 大赦天下
2년(AD214) 1월 왕과 내후(內后,내례)가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에 대사면을 하였다.
康禮伊伐飡 金女稟主 興宣一吉飡 興宣母解生大白馬
강례(康禮)를 이벌찬으로, 금녀(金女)를 품주로 삼았다. 흥선(興宣)을 일길찬으로, 흥선의 어머니 해생(解生)에게 대백마(大白馬)를 주었다.
강례와 흥선의 가계도
日神(仙桃聖母) - 福公(月姑) - 月福(紅梯) - 摩帝(美禮) - 愛禮
日神(仙桃聖母) - 福公(月姑) - 月福(紅梯) - 摩帝(美禮) - 有禮(雲生) - 康禮(金女)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2년 기사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묘에 직접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흥선을 일길찬에 임명하였다.
二月 上與辣后謁壤井 祀吐解大神 命伐休爲法
2월 왕과 랄후(辣后)가 양정(壤井)을 찾아뵙고 토해대신(吐解大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벌휴를 (양정)의 법(法)으로 명하였다.
三月 試射士于北川
3월 활쏘는 관리를 북천(北川)에서 시험하였다.
藥師白知爲兵官調理
약사(藥師) 백지(白知)를 병관(兵官)조리(調理, 현재의 군의관)으로 삼았다.
四月 大求人才 于州郡 勿拘骨地而擧
4월 인재를 주군에서 골품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뽑았다.
五月 文窘生上子達文 上洗之
5월 문군(文窘)이 왕이 아들 달문(達文)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 주었다.
九月 大行月歌 于閼川
9월 월가(月歌)를 알천(閼川)에서 크게 행하였다.
十一月 以羽林年功者 分屬州郡
11월 우림(羽林)군에 오래 근속하고 공이 있는 자는 주군에 나누어 속하도록 하였다.
禁民私自遷移 投入雜徒
백성들이 사사로이 옮겨 다니며 잡도(雜徒)를 투입하는 것을 금하였다.
三年 正月 洪完伊伐飡 章氏稟主
3년(AD215) 1월 홍완(洪完)을 이벌찬으로, 장씨(章氏)를 품주로 삼았다.
三月 汗后生 上子達于 賜酺三日
3월 한후(汗后)가 왕의 아들 달우(達于)를 낳았다. 3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다.
四月 隕霜 內后生伐休女昔禮
4월 서리가 내렸다. 내후(內后)가 벌휴(伐休)의 딸 석례(昔禮)를 낳았다.
妙德公主生居利子欽室 賜米衣
묘덕(妙德)공주가 거리(居利)의 아들 흠실(欽室)을 낳았다. 쌀과 옷을 내렸다.
五月 通路敦父開鷄立岺 功成召還 以大解代之
5월 통로(通路)(장군) 돈부(敦父)가 계립령(鷄立岺)을 열어, 공을 이루자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대해(大解)를 대신하게 하였다.
야후 백과사전에 계립령은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연풍면(延豊面) 주진리(周榛里)에서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가은읍(加恩邑) 원북리(院北里)로 넘어가는 고개의 옛이름으로 마골참(麻骨站)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지릅재·지름재·기름재·경태 등으로 불린다. 이 기사는 아달라이사금 5년의 기사와도 같은 문맥을 이룬다.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3년, AD156년(丙申)
三年 夏四月 隕霜 開雞立領路
3년 4월, 서리가 내렸다. 鷄立岺(계립령)길이 열렸다.
七月 加耶世主阿修獻方物 好禮生上女七禮
7월 가야(加耶)의 무리의 주인 아수(阿修)가 방물(方物)을 바쳤다. 호례(好禮)가 왕의 딸 칠례(七禮)를 낳았다.
八月 邇父文窘爲京路
8월 돈부(敦父)와 문군(文窘)을 경로(京路)로 하였다.
十月 甘文大亂 命暖門討平之
10월 감문(甘文)에서 큰 난이 있어, 난문(暖門)으로 하여금 토벌하여 평탄하게 하였다.
十二月 命骨女修女藝于南桃
12월 골녀(骨女)들에게 명하여 남도(南桃)에서 여자들의 기예를 닦도록 하였다.
以蛙山鎭爲郡
와산진(蛙山鎭)을 군(郡)으로 삼았다.
大道師古治爲大師 賜名澄然
대도사(大道師) 고치(古治)를 대사(大師)로 삼고, 증연(澄然)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四年 正月 吉玄伊伐飡 完解稟主
4년(AD216) 1월 길현(吉玄)을 이벌찬으로, 완해(完解)를 품주로 삼았다.
二月 置甘勿馬山二縣
2월 감물(甘勿)과 마산(馬山) 2현을 설치하였다.
三月 巡至長岺鎭 賜將士征袍
3월 나라를 살피다가 장령진(長岺鎭)에 이르러, 장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4년
四年 春二月 始置甘勿-馬山二縣 三月 巡幸長嶺鎭 勞戌卒 各賜征袍
4년 2월, 감물현과 마산현 두 현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3월, 왕이 장령진에 행차하여 주둔하는 병사들을 위로하고 각각의 군사들에게 군복을 하사하였다.
四月 多婆那以迎烏郞爲君
4월 다파나(多婆那)가 영오랑(迎烏郞)을 왕으로 삼았다.
삼국유사의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의 기사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丁酉; 157)에 동해(東海) 바닷가에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가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나라 사람들은,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紀>를 상고해 보면 전후前後에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는 변읍邊邑의 조그만 왕王이고 참말 王은 아닐 것이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서 찾아 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와 같이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로 귀비(貴妃)를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없었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말한다.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五月 西路瓜盧彡達入朝 上與四后會食 達乃上之胞妹也 上思之而召也 骨花大母薨 嘗與骨夂作骨花經 進之 年七十五
5월 서로 과노(瓜盧)와 삼달(라)(彡達)가 입조하였다. 왕과 4후가 모여 식사를 함께 했다. (삼)달(라)는 왕의 같은 어머니의 여동생이다. 왕이 생각하여 부른 것이다. 골화대모(骨花大母)가 죽었다. 일찍이 골치(骨夂, 골화의 모)와 함께 골화경(骨花經)을 지었다. 75세의 나이에 수명을 다하였다.
*골화(A.D.142 ~ A.D.216)는 생몰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七月 以邊倍爲紇古祠主 命新其宇 而享牛徒
7월 변배(邊倍)를 흘고사(紇古祠)의 주(主)로 삼았다. 그 집을 새롭게 짓도록 하고, 우도(牛徒)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를 행하였다.
九月 伊飡索斗卒 斗善文章能吏治 時稱能斗 其子女亦皆美 而善文辭鄕歌 扶余姬天乙生紫井女紫乙 賜米
9월 이찬 색두(飡索)가 죽었다. (색)두는 뛰어난 문장가로, 능숙한 수령의 치적이 있었으며, 이때 사람들이 ‘능두(能斗)’라고 칭하였다. 그 자녀들 역시 뛰어나, 글과 말, 향가(鄕歌)에 능하였다. 부여의 계집(첩실) 천을이 자정(紫井)의 딸 자을(紫乙)을 낳아, 쌀을 내려주었다.
十二月 如老伊伐飡 粉生稟主
11월 여노(如老)를 이벌찬으로, 분생(粉生)을 품주로 삼았다.
五年 正月 上巡行六部察民 飢寒者恤之
5년(AD217년) 1월, 왕이 6부를 순행하여 백성들을 살피고,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구휼하였다.
二月 阿瑟羅太守臼臣卒 子寬公代之
2월 아슬라(阿瑟羅)태수 구신(臼臣)이 죽어 아들 관공(寬公)이 대신하였다.
三月 命將軍大解開大嶺
3월 장군 대해(大解)에게 명하여 대령(大嶺)을 개통하도록 하였다.
妙德公主生上女妙亥 上洗之
묘덕(妙德)공주과 왕의 딸 묘해(妙亥)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野人來獻土物 請文師二人 藥師二人
야인(野人)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문사 2인과 약사 2인을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아달라이사금 3년 기사와 마찬가지로, 신라와 야인사이의 경계인 대령의 개통식에 선물을 보내는 기사이다. 신라본기는 야인을 왜인으로 적고 있으나, 내물이사금기에 왜인을 야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야인은 열도 왜의 한 종류로 보인다.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5년 기사
5년 봄 3월, 죽령이 개통되었다. 왜인이 예방해왔다.
五月 甘文太子旭方 爵阿飡 尙福福河公主
5월 감문(甘文)태자 욱방(旭方)에게 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복복하(福福河)공주를 주어 높이었다.
七月 凉雨來旬
7월 차가운 비가 열흘동안 내렸다.
十月 伐休妻紫凰生上女宝凰 上洗之
10월 벌휴(伐休)의 처 자황(紫凰)이 왕의 딸 보황(宝凰)을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長昔伊伐飡 倉歌稟主 邊旱右部執書
장석(長昔)을 이벌찬으로, 창가(倉歌)를 품주로 삼았다. 변한(邊旱)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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