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문영공(휘 恂) 시제가 2014년 11월 28일 안양시 관양동 문영공재실에서 봉행되었습니다.
전날인 11월 27일 제학공파 시제를 마친 영묵 문영공회장님, 태옥제학공파회장님, 태선제학공파수도권종회장님, 용두님, 필자(항용), 용항님 등은 용항님 승용차로 안양 재실(경모재)에 약 6시 경 도착하였습니다. 현지에는 재영 문영공종회 재무님, 익원공파 성회님, 관리사옥의 익원공파 재영님 등이계셨고, 이어 안렴사공파 선회님이 오셨습니다.
재실 대문의 신주소
재실 내부
재실 내부 벽면의 백범 사진과 백범의 문영공 재실 방문 기념 사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음 날 시제 준비에 바빴습니다. 이때 재실 안에 현액되어 있는 <경모재> 현판에 대해 서자(書者)가 누구인지에 대해 모두 궁금해 했습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추측만 난무합니다. 작년에도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미궁 속으로 남기고 말았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경모재 현판
그런데 이는 다음날 익원공파 만길사무국장의 고증 발언으로 일단 해결되었습니다. 익원공파 후손으로 전라북도 고창이 고향인 보정 김정회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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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亭 金正會(1903-1970) 소개
익원공파. 자는 중립(中立), 호는 보정(普亭)이다. 190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610-2번지에서 태어났다. 영모당(永慕堂) 김질(金質)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회천(晦泉) 김재종(金在鍾)이다.
김정회(金正會)는 어려서부터 종조할아버지 항재(恒齋) 김순묵(金純黙)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약관에 경사자집(經史子集)[중국의 옛 서적 가운데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諸子), 문집(文集)의 네 부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에 두루 통달하였다. 1929년 27세 때 한갓 시골 선비로 옛 것만을 고수하고 새로운 학문을 배우지 않는 것은 시류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하여 29세 때 경학원(經學院), 즉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학원에 입학하여 청나라에서 수입된 학문을 익히면서 국내의 석학들과 밤낮으로 학문을 연마했다. 또한 당시 서화로 이름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문하에서 글씨와 그림을 익혀 일가를 이루어 1938년 전일본문예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으며, 1940년 전일본국전(全日本國展)에서 「풍죽(風竹)」이 특선으로 입선되었다.
1934년 고향집 만수당(晩睡堂)에서 도산보통학교를 개교하였고, 다음해인 1935년 아버지가 희사한 대지에 새로 학교를 지어 그 곳으로 옮겼다. 1941년 39세 때 경학원 강사로 선임되었다. 1945년 일제가 물러나고 광복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혼란한 정치상을 보고 다시 귀향하였다. 이후 집안의 노비들을 불러 전답을 나누어 주고 왕등도로 들어가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194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55년과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작품이 거듭 입선하였다. 1970년 68세의 나이로 죽었다.
저술 : 『연연당문고(淵淵堂文稿)』 10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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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현판에 제작년이 무술년(1958년) 10월로 적혀 있었는데 이는 경모재 재실을 상량(아래 사진)한 바로 그 연월입니다.
상량문--단기 4281년(1958년) 무술 10월 7일. 미시(오후 1시-3시) 상량.
보정께서는 1903년 출생이니까 56세에 이 글을 쓰신 것이고 12년 뒤에 졸하신 것 같습니다. 당시 님께서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서예와 서화가 입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실 때입니다. 재실은 이후 1962년 4월 15일에 준공되었습니다.
그런데 2일 후인 2014년 11월 30일, 아무래도 확증을 얻고 싶어 안동 충렬공 시제에서 만난 만길사무국장님에게 3가지를 여쭈었습니다.
1) <경모재> 현판 글씨가 보정 김정회의 글이라는 근거는?
2) 혹시 김정회님의 해서체 글씨를 알고 있는가?
3) <경모재> 글씨체와 유사한 김정회님의 글씨를 보았는가?
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답이었습니다. 이것도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로 남았습니다.
이어 일행은 내일의 축문과 지위를 검토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영공의 관직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行奉議大夫 寶文閣大提學 三重大匡 判三司事 上護軍 上洛君 諡文英公府君>란 기록입니다. 이것은 몇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산신 축문(2013년 축문)
첫째, 공의 품계를 <三重大匡>으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공이 몰할 당시인 1321년(충숙8)에 시행된 품계제도에서 정1품은 <三重大匡>, 종1품은 <重大匡>이었는데 공의 당시 관직은 판삼사사(종1품)였고 품계는 <重大匡>이었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공의 묘지석이었습니다. 당일 재실에 전시되어 있던 묘지석 복제본을 함께 보면서 모두 확인하였습니다. 참고로 공의 생몰년은 1258년(고종45)-1321년(충숙8)입니다.
묘지석-2008년 묘지석 발굴 당시의 전면 모습
묘지석 상단의 관직명 부분-<高麗國 重大匡 上洛君 金公 恂 墓誌>라 기록됨
다음, <行 奉議大夫>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튿날 제례 봉행 후 집에 돌아와 아무래도 궁금하여 <行奉議大夫>를 심도 있게 살피고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공의 최종 품계와 관직 : 공은 1312년(충선4)에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을 봉해지고, 1321년 (충숙8)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 그 해 8월에 또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다가 그 달 21일에 노환으로 별세하심(향년 64세). 후에 문영(文英)이라 증시(贈諡)받음, (-고려사 열전. 555p--558p 부분 압축 인용)
1) <奉議大夫>는 고려조와 조선조, 어느 때에도 사용하지 않은 품계명으로 잘못임
2) 판삼사사(종1품)는 <重大匡>의 품계이고, 보문각 대제학(종2품)은 당시 <광정대부(匡靖大夫), 또는 봉익대부(奉翊大夫)의 품계인데 봉의대부는 어느 것에도 맞지 않음.
3) <行守法>에 따라 <行奉翊大夫>를 잘 못 썼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음. 그러나 이것도 행수법에 따른 관직 기록 서식에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음.
행수법이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초부터 조선조까지 사용한 것으로 본래의 품계보다 높은 관직인 경우는 <行>, 낮은 관직인 경우는 <守>를 씀.
이 <行守法>에 따른다면, 공은
(1) 1312년 중대광(종1품)의 품계에 오르고 상락군에 봉군되었고,
(2) 1321년 중대광의 품계에 맞는 판삼사사가 되었으며,
(3) 그 해(1321년) 8월에 또 보문각 대제학(종2품) 상호군(정3품)을 받았기에
이 품계와 관직에 따라 작성해 볼 수 있음. 참고로 행수법에 따른 표기 방식 원칙은 아래와 같음.
(1) 최고 품계명을 적음
(2) 行(낮은 관직), 守(높은 관직)를 적음
(3) 낮거나 높은 관직을 적음.
따라서 이에 따라 공의 맨 마지막 관직명을 적는다면,
<重大匡 判三司事 行寶文閣大提學 上護軍 上洛君 諡文英公府君>으로 써야 하는데 이 원칙에도 맞지 않음.
4) 축문에 사용하는 고인의 품계와 관직명은 고인의 최종직을 쓰기 보다는 최고의 품계와 관직명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공의 축문에는 대제학(종2품), 상호군(정3품)을 기록함.
5) 상기 축문을 언제부터 사용해 왔는지 알 수 없음. 다만, 1942년 공의 묘소 발견 이후부터는 틀림 없이 사용해 왔다고 추정 됨
6) 안동김씨 대동보(기미보. 1979년 간)에는 공의 묘지명을 소개하면서 <重大匡 判三司事 寶文閣 大提學 上護軍 金恂墓誌銘>이라 기록함.
이에 여러가지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공의 품계와 관직 기록에 대한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안해 봅니다.
1. 최고직만으로 기록할 때 : <高麗國 重大匡 判三司事 上洛君 諡文英公府君>
2. 판삼사사를 받은 뒤 곧 겸직으로 보문각대제학과 상호군을 받은 것으로 볼 때 : <高麗國 重大匡 判三司事 兼 寶文閣大提學 上護軍 上洛君 諡文英公府君>
앞으로 더 궁구할 과제로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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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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