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은 분야에서 시민과 주민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행정의 멋과 맛』
趙南俊 月刊朝鮮 부국장대우(njc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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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가만히 있어도 四方에서 찾는 사람
高建(64) 前 서울시장은 이상한 존재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그의 이름이 거론된다. 권력과의 관계, 家門과 지역적 배경,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고 오히려 불리하다면 불리한 쪽이다. 그래도 그는 항상 예비후보群에 든다. 그가 나서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 스타일도 못 된다.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는 쪽이다.
그런데도 서울시장 감이 없으면, 서울시장 후보로, 국무총리가 궐위되면 국무총리로, 대통령 감이 아쉬우면 대통령 후보로 언론에 擧名(거명)된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에서 盧武鉉 대통령후보의 代案(대안)으로 몇 사람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만일 한나라당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아마도 그쪽의 代案으로도 그가 떠오를지 모른다.
高建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런 예는 이번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제3공화국 시절, 그는 朴正熙 대통령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새마을담당관과 대한민국 3大 局長 자리라는 내무부 지방국장을 거쳐 37세에 전남지사로 발탁됐다. 당시 야당이던 民政黨 국회의원과 사무총장을 지낸 高亨坤씨(전북 옥구)가 부친인데도 말이다.
5?7에 반대해, 사표를 내고 칩거한 그를 5공화국은 여러 번 설득하여 불러내 장관을 시켰고, 盧泰愚 정권은 서울시장에 임명했다. 한보철강 사태로 어려움에 처한 金泳三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金大中 정권은 사양하는 그를 설득해 民選(민선)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해 갔다.
청렴하면서 엄정한 人事로 인심 안 잃어
본인은 조용히 책이나 읽으며 살고 싶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또 어떤 상황이 벌어져 그를 강제로 불러내는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뻔하다. 그에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高建은 호쾌함, 사내다움, 보스기질, 비장함, 화려함, 이런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조용하고, 사색적이며, 文人 기질이 있다. 그는 경기高와 서울大 정치학과를 나와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엘리트다. 대부분의 엘리트는 유능하면 부정직하고, 정직하면 근면치 못하고, 근면하면 교만하다. 그러나 高建은 그런 경계를 넘은 인물이다.
그는 청렴하다. 청렴하면 인정이 없다. 그도 인정이 없다. 공무원에게 인정이 있으면 인사가 공정치 못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그는 엄정한 인사로 부하들로부터 불평을 사지 않았다.
서울市長 재직時 업적을 듣고 싶다고 청하여 지난 8월6일, 공직을 그만둘 때마다 사용하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의 개인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官選 2년, 民選 4년, 6년간 서울시장을 지내셨습니다. 서울에 대해 도사가 되셨을 텐데, 「高建의 서울論」을 듣고 싶습니다.
『아주 복합적인 도시죠. 수도의 인구는 全인구의 10%가 적정선이라고 합니다. 서울은 20%가 넘는 초과밀 도시고, 그러면서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다이내믹한 도십니다. 600년이 넘는 세계 最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서울처럼 광대역 통신망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도시도 드물 거예요. 거기에 30분간 차를 타고 나가면 등산이 가능하고 시내 한복판을 거대한 江이 관류하는 아름다운 도시죠. 300명 이상 모이는 국제회의가 2000년의 경우 74회나 열렸을 정도로 국제적인 도시이기도 합니다』
傳統 살린 국제화 도시가 서울市의 갈 길
―다른 나라 首都를 많이 돌아다니신 것으로 아는데, 그곳과 비교해서 서울의 특징과 장단점을 설명해 주십시오.
『서울은 2期 지하철(5~8호선)을 완성하면서 세계 5大 지하철 도시가 됐어요. 비교대상을 지하철 길이가 긴 런던 뉴욕 파리 東京으로 한정해 볼 때, 천연환경은 단연 1위죠. 앞에서도 말했지만 山川이 수려하고 접근이 용이하니까. 전자행정(e-government) 수준도 1위요. 우리는 99% 전자결제를 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전자결제 한번 하는 데 30분 이상 걸립디다. 서울은 분지라 나쁜 공기가 빠지지 않아서 대기오염이 잘 돼요. 늘 이 부분을 신경써야 합니다. 파리의 축적된 문화적 향기는 벤치마킹 대상이고, 뉴욕과 런던은 서울이 배워야 할 국제금융 노하우가 쌓인 곳입니다』
―서울이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인간적인 환경도시, 600년 역사를 살리는 한국적 문화도시를 겸해서 대륙과 태평양 경제권을 잇는 주축도시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다행히 서울은 인천공항, 松島(송도) 신도시 등과 함께 수도권 物流중심으로 발전시킬 국가역점 사업권에 포함돼 있어요. 여기서 서울市가 할 몫을 찾아야겠죠』
―재임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한 가지만? 많은데 어떻게 한 가지만. 하하』
―그럼 몇 가지 말씀해 보세요.
『퇴임 직전 기자들과 회식을 했는데, 기자들이 요즘 게이트, 게이트 하는데 왜 서울은 게이트에도 못 끼었느냐고 해. 그래 내가 아, 담장이 있어야 게이트가 있지 그랬어요. 시장에 취임하면서 담장을 다 허물었거든. 물리적인 담장뿐 아니라 행정의 담장도 허물었단 말이지. 그게 부정과 부패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투명행정 시스템이오. 서울을 더 이상 伏魔殿(복마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어졌어요.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아서 유엔이 공식으로 회원국가에 서울 성공사례를 보급 중이래요.
내가 임명직 시장일 때, 겁도 없이 길이 160㎞나 되는 지하철 5~8호선 2期 지하철을 시작했잖아요. 그걸 民選 때 완성시켜 세계 5大 도시에 들어가게 됐어요. 안전사고 방어율 100%야. 사고가 없었어. 쓰레기장에 우뚝 선 상암경기장이 세계적 명소로 떠오른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주말에는 15만여 명의 시민들이 찾아온다죠?』
腐敗방지 시스템은 유엔이 와서 벤치마킹
―상암경기장과는 인연이 많으시죠?
『임명직 시장 때는 쓰레기를 내다버렸고, 국무총리 때 여기에 경기장을 짓기로 결정했으니까. IMF로 경제가 어려웠지만, 월드컵 때 IMF를 극복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의미가 있었어요. 姜德基 시장직무대행에게 말했더니 재정이 어렵다네. 내가 서울市와 남이 아니잖아요. 李永鐸 행조실장을 불러 지원대책을 마련토록 했죠. 그 결과 서울市는 별도로 750억원의 특별지원금을 받아서 상암경기장 외에도 噴水(분수)가 나오는 월드컵 공원까지 만들었습니다. 쓰레기매립장 활용의 세계적 모델 케이스요』
―아까 자랑하신 시스템 구축에 대해 더 상세히 알고 싶습니다.
『甲이라는 사람이 건축허가를 신청했다 칩시다. 신청인은 PC방이나 동사무소 컴퓨터를 통해 접수여부를 확인합니다. 그러면 접수가 됐다, 담당자는 누구다, 담당자 전화번호도 나옵니다. 궁금하면 전화해 보게요. 현장조사 중이다, 국장결재 났다, 서류 찾아가라 하는 서류 진행속도가 실시간으로 공개되는 겁니다. 감사관실은 그것만 체크하면 돼요. 투명하게 민원행정을 진행하니까 부정이 원천봉쇄되더라구요. 갤럽에 의뢰해서 조사시켰어요. 초기엔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적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분야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13~38%가 나왔는데, 1년 후 똑같은 조사를 했더니 6%로 격감했습니다. 시민들의 평가를 받아 구청별로 부패지수도 매겼어요』
―강남구가 한동안 반발한 바로 그것이군요.
『그래요. 심하게 반발했는데, 그러면서도 열심히 노력했나 봐요. 지금은 강남구의 순위가 많이 올라갔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전국이 벤치마킹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엔이 서울市에 와서 구체척인 프로그램 등을 배워갔어요. 유엔은 부패지수가 높은 라틴 아메리카, 동남아 등지에 보급하겠다는 거예요. 서울市가 6개 국어로 메뉴얼을 만들어서 보내주고 試演(시연)도 해주고 그랬어요. 세계적으로 굉장한 일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시민평가 시스템이란 것은 무엇이죠.
『돈 받지 말라는 소극적인 거죠. 적극적으로 서비스를 더 열심히 하라는 것이 시민평가 시스템입니다. 지하철, 상하수도, 청소 등에 대해 갤럽 같은 제3의 전문기관에 의뢰해서 고객만족도를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거야. 그 점수를 관련자에게 보여주고 넌 왜 60점밖에 안 되지? 저쪽은 69점인데. 그러니까 이건 市長이 감독수단을 시스템화한 거야. 감독을 시민에게 맡긴 거지. 예컨대 시립병원하고 일반 종합병원하고 막바로 대비시키고, 아파트 짓는 도시개발공사와 현대에서 짓는 아파트하고 막바로 대비를 시켜요. 서로 경쟁시키라고. 서비스 수준이 올라가지 않을 수 없죠』
勞使간 신뢰를 다졌더니 지하철 파업이 없어졌다
―지하철 파업이 없어진 것도 좋은 제도를 도입한 덕이라면서요?
『서울지하철공사 勞組가 民努總(민노총)의 핵심기지지. 임명직 市長일 때도 연중행사로 파업을 했잖아요? IMF로 구조조정을 해야 하겠는데, 반대하더니 1999년 4월19일 파업에 돌입했어. 내가 암스테르담과 자매결연을 하러가서 봤는데 北歐, 네덜란드에서는 간척정신을 갖고 勞使政(노사정)이 사회적 합의점을 찾는 폴더(간척지)모델이 있었어요. 勞使政이 믿을 수 있는 전문가를 선출, 그들에게 1년 내내 상의를 하게 하는 거야. 합의하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해.
그래서 우리도 서울모델을 만들자고 했지. 서울시 산하의 6개 투자기관 노조대표와 서울시가 먼저 합의점을 찾고, 안 되면 서울모델에 조정을 신청해. 전문가 집단에게 합의를 맡기는 겁니다. 이런 완충장치와 협의시스템이 가동되니까 파업을 안하는 거지. 올해 파업 안 한 것은 대단한 성과야. 월드컵 직전, 서울시 산하 6개 노조위원장은 無파업을 선언했어. 노동계 전체가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그렇게 좋은 제도가 왜 다른 분야에서는 적용이 안 될까요.
『학자들은 다 알고 있어. 사실 勞使政위원회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거야. 그런데 작동이 잘 안 되는 거지. 우리(서울시)는 작동이 잘되는 거구. 요는 약속이 지켜져야 해.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해』
―그것도 지방자치의 强點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서울市長이 누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면 그렇게 재량권이 있겠어요?
『서울시가 사용주의 입장에서 조금 못마땅한 데가 있더라도 서울모델에서 결정하면 따르니까 성공한 거지』
―토요 데이트란 뭡니까.
『데이트라면 즐거워야 할 텐데 사실 고민스런 데이트요. 이름도 내가 데이트라고 지었는데. 시장 만나자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주로 집단 민원인들이죠. 그래서 그 사람들의 신청을 받아가지고 매주 토요일 하루는 그 사람들만 만나는 거요. 혼자서 만나는 것은 아니고, 시민단체 대표, 여성단체 대표, 언론인 대표, 부동산 평가사, 도시계획전문가와 함께 만나서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거요. 그렇게 해서 市政에 반영시키지. 4년 임기 동안 166회를 했어요. 공휴일, 외국출장일을 빼면 거의 매주 한 셈이죠』
―우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경우도 있죠?
『바로 그거야. 우선 열심히 경청을 해. 그러면 반은 해결이 돼. 할 얘기는 다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다했다, 그걸로 50%는 누그러져. 나머지 50%는 같이 고민해. 그러면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거야. 그 과정에서 해결되는 일이 많아. 한 30%만 해결하면 80%는 끝나는 거야. 300여 건의 고질적 민원이 그렇게 해결됐어요』
시민들이 싫어해도 밀어붙일 일은 밀어붙여야
―데이트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국무회의에 갔다오는데, 비서실에서 다급한 경비전화가 걸려왔어요. 집단민원인들이 정문을 막고 있으니,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거요. 아무리 급해도 시장이 뒷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고, 정문에서 내려서 군중 속으로 걸어갔어요. 시민들이 에워싸더군. 시장이 안 만나준다고 해서 시위한대요. 그래서 매주 토요일이 시민들 만나는 날이니까 신청하고 가라고 했더니 수천 명이 자진 해산합디다. 서울大 행정대학원 교수가 집단 민원 해결방안의 케이스 스터디로 발표했다고 하더군』
―서비스측면에서는 그런데, 시민들이 싫어하더라도 방향이 틀렸다면 올바르게 끌고 가야 하는 일도 있어야 할 것 아녜요.
『당연히 그래야지. 예를 들면 추모공원은 해야지. 상암경기장에 퍼블릭 코스 골프장을 만든다고 난리들을 쳐도 그건 관철시켰잖아. 지금 잔디 씨 다 뿌렸어』
―퍼블릭 코스는 선착순이죠?
『그렇지. 옛날 뚝섬 경마장에 퍼블릭 코스 만든 거 내가 했잖아. 또 뭐가 있나. 아, 탑골공원이 있네. 3?운동의 발상지라 일본인 등 외국관광객이 많이 찾는 데니까 성역화해야 하겠는데, 노인들이 계시니가 안 된단 말야. 옛날처럼 불도저식으로 노인들에게 오지마시오 하면 이건 굿 거버넌스가 아니잖아. 그래서 먼저 노인들이 갈 곳을 만들었지. 지하철 안국역 근처에 하루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무료급식소를 만들었어요. 거기 가면 없는 게 없어. 바둑, 장기, 당구같은 오락기구는 물론이고, 진찰, 치료까지 해줘.
해야 할 일은 반드시 관철시킨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지. 옛날처럼 밀어붙이기로 강행하는 건 아냐. 최종적으로 강행할 땐 강행해야지. 그래도 강행하기까지는 계속 대화하면서. 골프장도 대화 때문에 1년 늦어졌지. 합의는 안 됐어. 그러나 이해의 폭은 어느 정도 넓혔지. 거기는 반대하고, 우리는 추진하고 그렇게 가는 거지』
―民選 서울시장을 「서울시청장」이라고 卑下하는 말도 있습니다. 官選시장 때와는 달리, 인사문제를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어려움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과거와 비교해서 市長 하는 맛이 어떻던가요.
『간섭을 안 받고 소신껏 일할 수 있다는 것과 임기가 보장돼 있어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점이죠. 하지만 구청장들이 말을 잘 안 듣고 집단이기주의가 악화한 것은 사실입니다. 副구청장 인사같은 것은 개선돼야 해요. 구청장의 추천에 의해 시장이 임명하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은 구청장들끼리 합의가 안 되면 인사교류가 안 되게 돼 있어요. 직무 懈怠(해태), 예를 들면 주차단속을 제대로 안 한단 말야. 그런 것은 광역단체장이 代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든지 해야지』
『서울시장 불출마』는 30번 公言
―임명직 시장 때 高시장이 임명한 구청장들도 7~8명 되는 것 같데요. 그들에게서 인간적인 섭섭함을 느낀 적은 없었나요.
『다 잘해요. 서초구청장(趙南浩)이 추모공원 문제로 좀 그랬는데. 목이 걸려 있으니까 도리없는 모양이데요』
―서초구청장이 성품상 그럴 분이 아닌데.
『선거 끝나고 월드컵 준결승 때, 全구청장들을 초청했어요. 그 자리에서 서초구청장이 「죄송합니다, 제 입장이 있어서요」 그러더만. 하하하. 그래서 내가 「이해합니다」, 그랬어』
―여러가지 면에서 「성공한 시장」이라고 할 만하고, 민주당에서도 후보로 내세우고 싶어했다는데 왜 그만뒀습니까. 진짜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공인이 공언한 것은 지켜야 한다, 이 말이야. 내가 서울시장에 나올 때의 辯이 임명직 시장 때 못다한 일, 예컨대, 지하철, 내부순환도로, 부정부패 추방 등을 추진했는데, 그걸 마무리해야겠다고 말했어요. 그뒤에 매년 세 번씩 아홉 번 국정감사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국회의원들이 물어보는 거야. 또 나올 거냐. 그래서 이만저만해서 시장이 됐는데, 일이 다 끝났으니까 안 나올랍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재출마 안 하면 뭐 할래, 그러더만. 하하하』
―대통령 출마 안 하겠느냐, 그 말이죠. 그게.
『시의회에서 여러 번 비슷한 약속을 했고, 매년 몇 번씩 있는 언론과 인터뷰 때마다 또 있지. 대충 세어보니까 한 30번 된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안 나온다고 공언을 했는데 어떻게 나와요』
―진짜 이유는 서울시장 선거에 나오려면 서울시내 45개 지구당에 몇억씩 돈을 줘야 하는데, 줄 돈이 없어서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시장 나오려면? 구청장 나오려면 그렇다는 거겠지』
―구청장 나오려면 당연하구요, 시장 나오려 해도?
『그러면 내가 지난번에 몇억씩 줬단 말야? 그 돈 주고는 못 하지. 줄 돈도 없고』
―그런 말을 얼핏 들었습니다.
『경선이야. 경선이 문제구만』
―어디에서 보니까 별명이 「행정의 達人」이라고 쓰여 있던데요.
『그건 張裳씨처럼 대답해야겠네. 비서가 그렇게 써놨어. 하하하』
행정의 要諦는 시민을 편하게 해주는 것
―행정의 要諦는 무엇인가,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시민들 편하게 해주는 거 아냐? 시민들이 잘하는 거는 뺏지 말고 시민이 더욱 잘하도록 도와줘야지. 그런데 행정이 간섭하는 것들이 많잖아. 시민이 잘하는 것을 못하게 한다든지 그런 게 있거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시민을 행정의 客體로 생각하면 안 돼. 주체라고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행정의 고객으로는 생각해야지. 한 걸음 더 나가면 官과 民이 같이 행정의 주체가 돼야 해. 말하자면 파트너십을 가지고 협력해서 공동목적을 달성해야지. 그게 행정의 要諦야. 요즘에 말하는 굿 가버넌스야』(高建 前 시장은 지체부자유자와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정식으로 手話를 배워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시장님은 필시 대통령이 돼야겠네요. 왜냐. 교육부는 교육을 규제하고, 통산부는 수출을 규제하고, 중소기업청은 중소기업을 규제하고. 정부조직이 있으면 그 분야는 잘 안 된다는 말이 있거든요. 시장님처럼만 하면 우리나라 엄청 잘되겠어요.
『큰 정책방향은 정해야지』
―정책방향 정하는 거하고 간섭하는 거하고는 다르죠.
『총리들이 무슨 일 해요? 중간적 존재로 있다가 가는 거지. 그래도 난 뭔가 남겨야겠다 생각해서 규제개혁기본법을 만들었잖아』
―「달인」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닐 테고, 행정의 「참 맛」을 알기 시작한 것은 언젭니까.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시민이나 주민들을 감동시키고, 거기서 보람을 느낄 때, 그게 행정의 맛이고 멋이란 말이야. 그걸 언제 느꼈느냐. 몇 번 있었어요. 처음은 전북도 식산국장이 됐을 때야. 그때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이라는 걸 했어요. 백합 양식사업을 하는데, 지선(현지) 어민들은 품삯 받는 일꾼 노릇밖에 못 해. 기업型 어민만 배를 불리더라고. 그래서 種貝(종패)가 생산되는 현장에서 지선 어민들에게만 採捕權(채포권)을 주고, 바로 委販(위판)을 했어. 옥구군 일대가 전국 백합 種貝의 70%를 생산할 때야. 그랬더니 전국의 백합양식 어민들이 전부 옥구로 몰려와 종패를 사가요. 내초도라는 섬에 이층집이 들어섭디다.
실뱀장어 양식사업도 마찬가지야. 뱀장어 새끼인 실뱀장어를 잠자리채 같은 것으로 떠서 일본에 수출해. 그걸 일본사람들은 양식해서 굉장한 수입을 올렸지. 그런데 그것도 지선 어민들은 수출업자에게 고용돼 일당밖에 못 받아. 그것도 지선 어민들에게만 어업허가를 해줬어. 그제서야 어민들이 제값을 받는 거야. 일당이 아니라. 그런데서 행정이란 이렇게 하는 거로구나 하는 것을 배웠어요. 새마을담당관 때 治山(치산)녹화 사업계획을 수립해서 6년 동안 시행한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朴대통령은 관심표시로 부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때가 朴正熙 대통령 때인데, 朴대통령은 언제 처음 뵈었습니까.
『그때는 항공로가 반드시 東京을 거쳤어요. 東京에서 서울을 오려면 처음 거치는 곳이 경남 울주군 농서면하고, 경북 월성군 외동면에 걸쳐 있는 동대본산이라고 가장 높은 산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일본 쪽은 파란데, 한국 쪽은 새빨개요』
―비교가 되니까, 더 보기 흉했겠습니다.
『창피하죠. 朴대통령이 특명을 내렸어요. 저기 좀 綠化하라고. 그래서 새마을담당관이던 내가 십장노릇을 했지. 물기를 머금게 하려고 특수사방사업을 했어요. 그때 용어로 「심박기」라고 했는데, 철근이 들어간 콘크리트 水路(수로)를 만들었어요. 그걸 성공시켰더니 월간 경제동향보고 때, 보고하라고 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했지. 그때 처음 뵌 거죠. 두 번째는 治山녹화 10개년 계획을 브리핑할 때입니다』
―시장님께서 어느 분 자제다, 그걸 朴대통령이 알고 계셨나요.
『몰랐을 걸요. 아버지(高亨坤)는 내가 식산국장 때 국회의원을 그만두셨으니까』
―朴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습니까.
『청와대 본관에서 治山녹화 10개년 계획 브리핑을 하는데, 원래 예정시간이 오전 10시였습니다만 어찌하다 보니까 10분 늦었어요. 있을 수 없는 결례지. 경호실장이 거기 있었으면 조인트 나갔을 거야. 하하. 들어갔더니, 대통령 이하 총리, 장관 이하 전부 기다리고 있잖아. 등에서 땀은 나고 떨리기는 하지, 죽겠더군. 브리핑 차트에 治山녹화의 중점방안을 딱 석 줄만 썼어. ①국민造林, ②속성造林, ③경제造林. 그랬더니 소리는 안 들리지만, 대통령이 어! 저놈 봐라 하며 고개를 드는 것 같애. 눈이 반짝반짝 하면서. 그제서야 아, 이제 됐구나 안심이 되고 브리핑을 끝냈어요.
원래 계획상으로는 40분이면 끝나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2시간40분이 걸렸어. 대통령께서 물어보시고, 내가 대답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흘러나갔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고. 기억나는 것 하나가 대통령의 덧니야. 10대 속성수 중에 은사시나무라고 있어요. 은사시나무 얘기가 나오니까 대통령께서 척하니 받아요. 「그래, 내가 5사단장 때 일인데, 산에 오르면서 은사시나무 줄기를 꺾어 지팡이 삼아 짚고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필요가 없어져서 땅에다 박아뒀어. 며칠 후 가봤더니 순이 돋아나 있더라고」 그런 말씀을 하시며 씩-웃으시는데 덧니가 보여요. 긴장에서 풀려나 침착해져선지 세밀히 보이더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대통령께서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며 부하의 일에 관심을 표시하는구나. 실무자가 꺼벅 죽을 거 아녜요. 감동하는 거지. 부하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이죠』
서울시에는 「朴正熙기념도서관」이 더 어울린다
―朴대통령에게 『각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신 적 있어요?
『뭐 그럴 건이 없었던 것 같애. 지방국장 때 한 달에 한 번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했는데, 새마을사업이 안건의 전부야. 문제점과 건의사항을 말씀드리긴 했지. 그러면 그 자리에서 장관들에게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주쇼」라고 바로 지시를 하셨어요』
―지방국장이 보고해요?
『그럼. 지방국장이 해요. 새마을운동 총책임자였거든. 종합청사에서도 지방국장만은 장관용 엘리베이터를 탔으니까. 거기서 장관들 만나면 나에게 별 부탁을 다 했어요』
―朴대통령에게서 받은 교훈은 없나요?
『참 사생활이 검소해. 농촌 근대화와 가난극복에 대한 의지와 집념, 그리고 끈질긴 노력이 돋보였어요』
―그런데 정부가 짓기로 한 朴正熙대통령기념관은 왜 이름이 「박정희 기념 도서관」으로 바뀌었나요.
『청와대에서 申鉉碻 추진위원장, 행자부 장관, 權魯甲씨 등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어요. 그 자리에서 내가 그랬어요. 기념관은 生家 쪽에 세워지는 것이 더 어울린다, 서울에 있으려면 도서관이 좋겠다,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공성격을 가진 도서관이라면 서울시도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내 주장이 받아들여져 공원內에 짓기로 한 겁니다』
―일부에서 기념관 건립을 반대해서 도서관으로 한 것은 아닌가요.
『반대한 쪽은 기념관이든, 기념도서관이든 다 반대한다는 것이었고. 서울시로서는 정부가 예산을 확보한 공식 사업인 만큼 자료도 전시하고 보관이 가능한, 그리고 서울시에 가장 모자란 공공시설인 도서관을 짓는 것이 합당하고 故人의 뜻에도 맞다고 봤습니다』
―5공화국 때, 두 번 입각하여 全斗煥 대통령을 모셨는데 언제 처음 알게 됐어요.
『그분이 경호실 작전차장보 때 일 거야. 내가 전남지사 때 남해화학 준공식에 朴正熙 대통령이 참석하셨지. 楮島(저도)에서 휴양하시다가 경남 하동을 거쳐 전남으로 들어오셨어요. 그때 한발이 심했지. 그런데 행사날 전남 남해안 일대에 비가 내렸어. 그래서 내가 「각하, 단비를 가져오셔셔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아, 글쎄 말이야. 전남 道界에 들어서니까 비가 내린단 말야. 갈 땐 가져가야겠어」 그러세요. 내가 「각하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거기도 새로 또 내려주시지요」 일종의 조크였는데, 그날의 대화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더라고. 그때 全대통령은 경호실 작전차장보였어. 작전차장보는 대통령 가실 곳을 사전답사하고 경호계획도 가다듬고 해야 하거든. 그때 처음 상견례를 한 셈이었지』
YS와 DJ 캠프에서 한 번씩 영입 시도
―그분은 한마디로 어땠습니까.
『기억력이 비상해요. 그리고 합리적으로 얘기하면 잘 받아줬어요. 1987년 6월 명동성당 사태의 일이 기억나요. 내가 내무부 장관 때인데, 명동성당에 무장경찰을 투입해서 농성자를 연행하자는 의견이 많았지. 내가 반대했어요. 올림픽이 얼마 안 남았는데 국가의 이미지가 손상된다. 만일 바티칸에서 한국상품 불매운동이라도 벌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건의했어요. 다행히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어. 그 이후 6?9로 이어진 거야. 만약 그때 강경책을 썼다면 6?9도 없었을 거고, 나라의 운명도 달라졌을지 모르지』
―盧泰愚 대통령 때, 서울시장을 하셨잖습니까. 그만두신 직후, 수서문제가 터졌는데, 계속 시장직에 계셨으면 수서문제가 잘 해결됐을까요.
『그때 서울시는 한보에 땅을 주면 절대 안 된다고 결론이 나 있었어. 다만 주택조합원들 가운데는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거다, 실태조사를 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파트 입주권을 준다든지 해서 구제하자,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지. 이미 당시 金學載 도시개발국장에게 지시해 놓고 있었어』
―金泳三 대통령 말기에 국무총리가 되셨는데, 그 당시 金대통령이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시장님을 차출했다는 說이 나돌았는데?.
『說은 무슨 說. 사실이 그랬지. 이렇게 됐어. 내가 1990년 서울시장을 그만뒀잖아. 1994년에 명지大 총장으로 갔어요. 다음해 權魯甲씨가 이 사무실로 찾아왔어. DJ의 뜻인데 1995년 民選 1期 서울시장 후보로 나를 영입키로 했다며 출마를 해달라고 그래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했지. 첫째 명분이 없다, 둘째 돈이 없다 등등. 일주일 후인가 또 왔어. 權魯甲씨가 내가 한 다섯 가지 이유를 그대로 반복하며 설득하더라고. 그래서 아버지가 반대하고, 내가 대학에 간 지 며칠 안 됐으니 학교에 미안해서 안 된다고 했어.
그런데 1년 후에는 YS한테서 연락이 왔어. 총선을 앞두고 朴燦鍾씨를 영입했다고 신문에 났을 때였을 거야. 朴燦鍾, 李會昌, 나, 그렇게 세 사람을 영입하려고 했대. 어떻게 하면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나, 생각하며 청와대에 들어갔어. 한 시간 티타임을 가졌는데, YS가 예상했던 대로 말을 꺼내. 옛날 같으면 안기부에서 명단을 정하고 그랬는데, 과학적인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내가 직접 정하고 있노라며 높은 순위로 전국구 국회의원을 공천할 테니 와서 좀 도와달라는 거야.
준비해 간 대로 답변을 했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문제냐고 그래. 대학총장도 公人이라면 公人인데, 제가 학교와 학생들에게 「정치를 하기 위해 중간에 떠나지 않는다」는 공언을 했습니다. 공인이 공언한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아, 공인이 공언한 건 지켜야죠, 그래』
각료 해임제청권 허락받고 총리직 수락
―그것으로 익스큐즈가 됐습니까.
『됐어. 그러고 나서 또 1년이 지난 거야. 1997년이 됐어. DJ 요청도 한 번 사양했고, YS의 요청도 한 번 사양했으니, 공평하게 됐다 생각했어. 얼마 안 있어 한보철강 문제가 드러났어. 그때 청와대에서 또 호출이 왔어요. 「나라가 참 어렵다. 국무총리를 맡아달라」는 거야. 내가 그랬어요.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의 召命을 받는 것은 개인적인 영광입니다. 그러나 내 능력으로는 벅찬 일이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좀더 유능한 인재를 물색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나라를 구하는 일인데. 代案(대안)도 없어」 그러세요. 세 번을 고사했어요. 그러나 막무가내야. 그래서 몇 가지 조건을 내놓았죠. 각료의 해임제청권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래야 내각을 통할할 수 있습니다, 그랬어요.
며칠 후 개각을 발표하는데, 경제부처만 갈았더라고. 그래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저는 한보문제를 검찰이 어떻게 수사하느냐에 국민의 신뢰가 달려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安又萬 법무부 장관을 그대로 두고서는 신뢰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해임제청을 한 거지. 「그럼 누가 좋지?」 그래요. 「제 생각엔 崔相曄씨가 어떨가 싶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더라고. 마침 집에 있어서 대통령과 통화가 됐어요. 「선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선거주무장관인 내무부 장관도 갈아야 할 줄 압니다」 했더니, 「언제 개각을 또 해. 바로 해버리지」 하며 「누가 좋아」 그래요. 내가 두 사람의 이름을 댔더니 姜雲太씨로 낙점하고 바로 집으로 전화를 걸어요. 마침 姜씨도 집에 있더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야』
―金賢哲씨 구속은 누가 건의한 것인가요.
『金賢哲씨는 소문이 좋지 않았어요. 국무회의에서 내가 그랬죠. 「중수부장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신뢰받는 수사를 하라」고. 바꾸라는 얘기지. 검찰총장(金起秀)을 갈아야 하겠지만, 임기가 있잖아. 그래서 崔炳國 중수부장이 인천지검장으로 가고, 인천지검장이던 沈在淪 수사통이 온 거야. 金賢哲씨가 그렇게 구속된 거요. 대통령에게는 文鐘洙 수석이 보고하여 양해를 구하도록 했고』
―총리 재임 중 IMF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총리로서 무슨 역할을 하셨습니까.
『경제를 알고 모르고가 문제가 아니라, 총리는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라인에서 빠져 있어요. 부총리와 경제수석이 대통령과 직접 연결돼 있어. 잘못돼 있는 거지. 고쳐져야 하는데 아마 지금도 그대로일 거야. 그래서 내가 할 일이 없나 궁리하다가 금모으기를 처음 시작했어. 국무회의에서 지시를 하고 曺海寧 내무부 장관을 통해 전국 새마을운동 부녀회장에게 부탁했지』
『지역싸움의 선봉장 노릇은 안 하겠다』
―1998년 국민회의에 입당하셨잖아요. 누구 권유가 있었나요.
『그때 黨대표로 있던 趙世衡씨한테서 전화가 왔어.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서울시장 감으로 영입하기로 했다, 그래요. 시간을 좀 달라고 하고 YS에게 보고를 드렸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당론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니까, 반신반의하시더만』
―언제 처음 DJ와 대화를 나눠보셨습니까.
『국무총리 때지. 총리가 되면 각당 대표를 예방하잖아. 서울시장으로 공천을 받았으면 獨對(독대)를 했을 거 아니겠는가, 생각하는데 그런 일 없었어. 시장에 당선되고 나서 청와대에서 대통령 내외 초청으로 처음 만나 1대 1 대화를 나눴어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하면서 DJ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가지고 계셨을 법한데 어떻던가요. 만나보니까.
『상당히 박식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 뭐 그런 느낌이었어. 아주 박식해』
―최근 청와대 측근의 부정부패 사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게 불가사의야, 불가사의』
―그분의 지적 능력이라든가, 판단력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참 불가사의야. 측근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張裳씨가 총리서리로 임명받을 때, 총리직을 제안받지 않으셨습니까.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 자리만 빼고 안 해본 자리가 없습니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高대통령』이라고 부른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어느 政派에서 만일 대통령후보로 추대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1년반 전, 권력의 핵심에서 의사타진이 왔습니다. 그때 입장을 정리했어요. 다음 선거는 치열한 지역전쟁이 될 거다, 그런 싸움의 선봉장이 되지 않겠다, 그랬어요. 그런 결심이 지금도 변함이 없고. 그리고 친구들이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그럼 내가 가만 있나. 화를 내겠지』
―군대는 왜 안 가셨습니까.
『안 간 게 아니라 못 갔습니다. 1961년 12월 考試에 합격하고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4?9, 5?6으로 이어지는 특수상황 아래서 직장에서 밀려난 많은 병역기피자들이 입대를 하는 통에 대기인력이 잉여상태였습니다. 그러다 공무원 임용이 됐고, 영장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보충역으로 편입됐어요. 1998년 5월 병부청장이 국회 국방위에 보고한 자료를 보니까, 당시 징집대상자가 35만 명인데, 영장이 발부된 下令(하령)이 18만 명, 나처럼 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未下令(미하령)이 17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5ㆍ17 때는 계엄확대 반대, 사표 내고 칩거 중이었다
―1980년 5?7 때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한동안 출근하지 않았는데, 공직자로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의 사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그 얘기는 꼭 한 번 진상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석유외교차 중동 순방길에 나선 崔圭夏 대통령의 귀국 일정에 맞춰 정무수석으로서 건의서를 작성했습니다. 「과도기간을 단축해서 정치일정을 투명하게 밝힐 것과 계엄령의 시한을 명시하고 개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죠. 5월16일, 崔侊洙 비서실장을 통해 이러한 건의를 한 후,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죠. 잠시 시위가 수그러들었던 5월17일 토요일 오후, 청량리에 사시던 부모님 댁에 잠깐 가 있는데, 당시 중앙일보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成炳旭씨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청와대 지시로 軍이 이화여대를 덮쳐 전국의 대학생 대표들을 연행해 갔다는 것입니다.
부리나케 청와대로 돌아와 보니 별을 단 지프차들이 나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비서실장이 수석들을 불러모아 「군부가 건의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해요. 완전히 軍政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그러니까 정무수석인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고 내가 건의한 것과는 전혀 반대방향이었어요. 비상계엄 확대를 위한 국무회의에 배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나는 이때 평생 처음으로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덩어리를 느꼈습니다. 나는 그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바로 軍政을 의미한다고 판단했고, 군정은 절대로 찬성할 수 없기 때문에 국무회의 배석을 거부하고 곧바로 사표를 써서 私信과 함께 비서실장에게 전하도록 부속실장에게 주고, 장위동 집에 칩거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아무 일 없었으나, 이틀 후부터 광주에서 사태가 심각하다는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어요. 金壽煥 추기경께서도 전화를 주셔서 「高지사가 청와대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셨어요. 2~3일이 지나니까 「내가 군부에 연행돼 연금돼 있다」는 정보가 나돌았대요. 그래서 내가 신문사 정치부장, 청와대 출입기자 등에게 전화를 걸어 「그건 아니다, 5?7 조치에 반대하고 사표를 냈다, 집에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칩거 중인데 정부에서 대학동기인 徐錫俊(당시 총리실 행조실장)을 보내 사표 번의를 종용해 왔어요. 거절했습니다. 국무회의 결과는 물어봤습니다. 金玉吉 문교부 장관과 李漢彬 부총리만 질문이 있었고,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다음엔 崔대통령께서 연락을 해오셨어요.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번의하고 나와서 도와달라고 하십디다. 「각하, 저는 할 일이 없습니다. 사표를 수리해 주십시오」 그래도 아무 말씀이 없어요. 그래서 타협안으로 정부산하 국토개발연구원의 고문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는 정무수석 때 경호실 대령으로 있던 高明昇씨가 찾아와서 국보위를 발족하는데 상임위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해 왔어요. 「나는 행정밖에 모른다」며 거절했죠』
퇴임 후에야 진짜 시장된 기분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은 뭡니까.
『집으로 전화가 오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라」고 했거든요. 그 당시 저의 행적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분이 몇 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만, 일부러 찾아다니며 해명할 수도 없고…』
―글이 전문가를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정식으로 글쓰기를 공부했습니까.
『대학 때 문학서클이 있었어요. 미네르바와 에로스를 합쳐 「미네로스」라고 했는데, 이화여대생들과 공동서클이었지요. 거기서 집사람도 만나 결혼하게 됐고』
―퇴임 직전, 을지로 OB타운 기념 술자리에서 시민들로부터 사인공세를 받았다는데 어떤 기분이었나요.
『시민 여러분에게서 받아마시다 보니까 많이 취했어요』
―퇴임하고 나니까 홀가분하시지요.
『퇴임 후에야 진짜 市長이 된 기분입니다. 현직에 있을 때는 시험삼아 지하철을 타도 설마 시장이 지하철에 탔겠나 싶은지, 「당신, 高시장 많이 닮았소」 하는 분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퇴임하고 지하철을 상용하니까, 주윗분들이 금방 알아봐요. 다가와서 「그동안 수고 많았다」며 위로해 주는 분도 계시고』
高建 前 서울시장은 高亨坤(96)-張貞子씨(작고) 부부의 2남1녀 중 둘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기자, 연희전문겳Ъ섦?교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1947~1959), 전북대 총장(1960)을 거쳐 1963년 전북 옥구에서 6代 국회의원(民政黨)에 당선됐다. 학술원 회원.
형 錫尹(74)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2회 고시행정과와 3회 고시사법과 합격했다. 상공부에서 공업국장, 무역국장을 지내고 1964년 변호사를 개업, 현재 세일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 밑으로 李敭河 수필에 나오는 「경이와 건이」의 경이 있었으나 어려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