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히마르 마을의 한가한 모습 >
< 스페인 식민시절 지어졌다는 낡은 성채 >
조용히 물결이 흔들리는 바다 가에는
라 테레자(La terraza)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이 레스토랑은 헤밍웨이가 늘 즐겨
찾아 바다를 바라보고 작품구상과 명상에 잠겼다는 곳이란다.
창문을 열면 파랗고 잔잔한 시원스런 카리브해가 아스라이 보이고
그 물위로 물새가 그림같이 나르는 전망이 아주 빼어난 곳이었다.
건물기초가 물속에 잠겨 찰랑대는 물결소리가 실내 테이불에 앉아 있어도 낮으막히 들리고
멀리서 사르르 불어오는 해풍이 정답게 볼을 어루만져주는듯 싶었다.
헤밍웨이가 여기에 오면 양면 창으로 잘 보이는 이 테이불에 꼭 앉았다고 하는데
이는 한눈에 보이는 시원한 바다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는 이 의자에 앉아 무슨 생각을 그리 하였을까?
< La terraza 레스토랑 건물과 간판 >
< La terraza 내부 모습 >
< 헤밍웨이가 자주 앉았다는 창문가 테이불 >
< 실내에서 창문으로 바라다 본 바다의 모습 >
이 레스토랑에는 많은 사진액자들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대부분 영화 주인공이나
영화 속 장면을 촬영한 것들 이였고 헤밍웨이와 쿠바 지도자 피텔 카스트로와
소설속의 실제 모델인 그레고리오 푸엔테스와 함께한 모습 들이였다.
영화를 촬영할 때 원작자인 헤밍웨이는 이곳에 상주하면서 제작진과 주연배우에게
많은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난한 마을사람들을 위해 주민을 엑스트라로 많이 출연 식혀 주었고
여러모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선해주어 지금도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헤밍웨이에게
그때의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영화에 나오는 실내장면은 이곳 실제 라 테레자 가 아니라
인근에 지어진 세트에서 촬영 되였다고 한다.
영화에 사용 되였던 다양한 자료들은 이곳에 많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엄청난 크기의 참치나 영화 촬영당시 상항이 그려진 초대형 풍경화가 그것이란다.
< 실내벽에 걸려 있는 풍경화와 사진들 >
아직도 마을 언저리에는 마놀린과 닮은 소년들이 뛰 놀고 있었으며 산티아고를 닮은
어부들이 그늘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의 풍경이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소설속의 거리 묘사와 별로 달라지지
않고 시간이 멈춰진 듯 그대로인 것 같았다.
건너편 방파제에는 스페인 식민시절 외부의 침략을 방어했던 성채가
세월에 녹슬 듯 빛바래 옛날의 치욕의 역사를 말해 주었고 거기 고색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을 배경 삼아 사진작가들이 정열을 쏟아가며 작품을 담아내고 있었다.
< 성채옆 방파제에서 정성을 다하여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 >
소설속의 실제모델인 그레고리오 푸엔테스는 이곳에서 헤밍웨이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우정이 각별했던 그들은 목선을 타고 자주 멀리 나가 낚시를
했고 날이 저물어 돌아 올적에는 별을 처다 보고 인생을 이야기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글자를 모르는 푸엔테스를 위해 헤밍웨이는 가끔
자신의 소설을 큰소리로 읽어주는 것을 즐겨했고 그는 들으면서 무척 좋아해 했다는데
이는 알고 모름을 떠나 인간적인 깊은 내면의 인연으로 맺어져 정이 오갔던 모양이다.
푸엔테스는 약 30년간 헤밍웨이를 위해 배를 저어주고 요리를 해주면서
낚시친구가 됐었다 는데 그는 1897년 카나리아 군도 란사로테에서 출생했으며
선원이었던 부친과 쿠바로 여행하다 부친이 선상에서 불의의 사고로 6살 때
고아가 됐다고 한다.
헤밍웨이와 푸엔테스는 1928년 처음 맛났는데 1930년대에 그를 월 250딸러에
보트 관리인으로 고용했으며 1960년 미국으로 귀국할 때 까지
그는 코히마르 푸엔테스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떠나기 전 헤밍웨이는 푸엔테스에게 아바나 교외 저택과 엘 필라를 증여 하였고
그는 이 재산 모두를 곧 쿠바정부에 헌납하여 헤밍웨이 박물관이 되게 하였단다.
< 헤밍웨이의 초상화 >
국적을 초월하여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1960년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이 일어나자 사랑하는 쿠바에 머물고 싶었던 헤밍웨이도 결국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미국 케첨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 하였었다.
그러나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려 병원을 전전하며 평상으로 돌아가려 각 방면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1961년 엽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헤밍웨이가 쿠바를 떠난 후 얼마 안 되여 그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 쿠엔테스는
슬픔과 회한 속에서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아 헤밍웨이의 흉상을 세웠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죽은 후에도 40여년을 더 산 푸엔테스는
2002년 10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노인과 바다“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추억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들려줘야 했다고 한다.
< 그레고리오 푸엔테스가 힘을 모아 건립하였다는 헤밍웨이 동상 >
< 파란바다와 낡은 성채를 배경으로 >
소설을 읽지 않아도 모든 이에게 잘 알려진 “노인과 바다”는 한 우직한 어부의
3일 동안의 일기와 같은 소설이다.
얼핏 보면 아무런 내용도 없고 재미도 없는 단순함에 읽고 나면 허탈 서럽기 까지 하지만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닌 상징성을 음미하며 읽을 경우 많은 각성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 인터넷 애니메이션 작품중에서 그림 4장을 인용 하였음 >
84일이나 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새벽바다로 향하여
배보다 더 큰 고래를 잡게 된다.
3일 동안이나 노인과 사투를 벌인 끝에 고래는 잡았으나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상어에는 힘이 부쳤다.
불굴의 의지로 상어를 죽이면서 고기를 지키려고 했지만 살점은 다 뜯기고
결국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기만을 매달고 돌아오게 된다.
지쳐 돌아온 그에게 소년은 온갖 시중을 다하며 위로하고
오랜 잠에 떨어진 노인은 바로 사자 꿈을 꾼다.
늙었지만 무기력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는 끝까지 목표를 가지고 성취하려고
애 쓰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생의 여정과 같다.
삶이 아무리 비극적이고 환멸뿐이라 해도 인간은 불패자가 되어야 하며
세상은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곳임을 바다와의 싸움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상어로 상징되는 악(惡)에 의하여 패배하는 시련의 경험을 겪지만
용기와 자기 극복으로 과감하게
악과 대결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위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은 고독하고 무기력 하지만 운명적으로 수 없는 난관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고 거기에서 용기와 극기. 그리고 단단한 각오를 갖아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워주는 공감을 갖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