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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풍경
-열여덟번째 장면, 연날리기-
수필가
글 인애가 한방병원 이사장
김덕호
윗 동네 하늘에 연이 날고 있었다. 꼬리연이었다. 두 개의 긴 꼬리를 단 방패연이었다. 500여 미터쯤 떨어진 거리인데도 작지만 쉽게 눈에 들어왔다.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친구들 중에 체격이 큰 민교가 소리쳤다.
“얘들아, 저기 연이 안보이나?
장갑 낀 검지로 북쪽하늘을 가르켰다.
“꼬리연 아이라? 꼬리 되게 기네. 여자 연이네.” 감기 들었다고 두툼한 목도리로 입을 막고 있던 재희가 나지막하면서도 재미있게 말했다. 꼬리연은 암놈이고 꼬리가 없는 몽동연은 숫놈으로 간주하는 풍습에서 나온 말을 빌린 것이다.
“혹시 동글산 부근쯤 되는 걸 보면 장수 짓 아이가? 글마는 지 집에서 일하는 형이란 사람하고 자주 연을 날리곤 하제. 둘이서 연도 잘 만든다 카던데.”
학교와 장수네 집 중간쯤, 교회부근에 사는 봉현이가 보태어 말했다. 동글산은 장수네 고택 바로 뒤에 있는데 동그랗게 생겼다고 해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장수? 게가 누군데?” 영주가 궁금해서 물었다. 겨울방학이 되어 배태 외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가족과 함께 대구에서 다니러온 동년배 여학생이었다.
“왜, 며칠전 성탄절 발표회 때 성경 암송하던 얘 아이가.” 민교의 대답에 영주는 장갑낀 손으로 볼을 감싸면서 고개를 여러번 끄덕거리는 모습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는, “아~. 가가 장수야?” 무언가 궁금했던 일이 해결되었다는 듯이 감쌌던 오른 손을 귀 뒤로 가져가 엄지와 중지를 획 부딪치면서 앞쪽, 친구들 앞으로 다시 손을 가져가 한참을 들고 있었다.
날은 춥고 장갑을 낀 채여서 그렇지 아마도 ‘딱’ 소리가 컷을 것이다. 장수에 대한 얘기를 어느 정도 듣고 있는 듯 했다.
“야들아. 우리 언제 한번 장수를 놀려주자.” 과묵하던 재희가 말하니까 다들 의아해 하면서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전에 언젠가 장수가 재희에게 약올린 적이 있어서 인지 앞장을 섰다. 민교가 날짜를 정하자고 했다.
“그러지 말고 봉현아, 니가 장수네 집과 가깝고 머스마니까 장수하고 약속날짜 잡으면 된다 아이가?” 재희의 제의를 따르기로 하였다.
봉현을 보고는, “놀려준다는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말거래이.” 민교가 신신부탁했다.
해가 주마산 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었다. 얼어있던 운동장에 오래 서있었던 데다 기온이 점차 떨어지고 있어서 한기가 발가락에서 종아리까지 파고들었다.
“니네 할배집에 목도리 두고 왔데이. 잠깐 들렀다 가제이.” 가끔씩은 덤벙대는 민교의 남학생같은 이런 행동을 영주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받아들였다. 그 집은 학교 담벼락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있었다.
봉현이네는 토종닭을 많이 키우고 있었다. 계란을 사러 동네 아줌마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민교네 어머니가 계란 두판을 사들고 사립문을 열고 나서는데 담 모서리를 빠른 걸음으로 돌아 들어오고 있는 봉현이와 맞닥뜨릴 뻔 했다. 민교 어머니가 화들짝 놀랐다. 모서리와 문사이 거리가 짧아 피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얘야, 계란 떨어뜨릴 뻔 했데이. 천천히 다녀야제. 깨지면 니가 물어줄래? 공부잘하제?”
“미안하이더. 장수한테 놀러갔다가 볼일이 급해서 오다보니까 그랬니더. 공부요? 실컷 놀고있니데이. 참, 민교한테 내일 점심먹고 오후에 연화네 집으로 모인다카면 아니더. 전해 주이세이. 살펴 가이시더.” 민교는 오리궁중이 마냥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냅다 뒤안으로 달려갔다.
연화네 집은 창달린 큰 다락방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은 이층집이라고 했다. 아래층 앞쪽은 툇마루이고 뒤쪽에 방 두개와 부엌이 있었다. 마루 양쪽에는 선반이 벽에 붙박여 세워져 있고 그 위에 기본적인 생필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미니가게인 셈이다. 연화는 아담한 키에 천상 소녀였다. 오빠로 인해 가족의 표정이 밝지 못한 걸 늘 못마땅해 하면서도 학교수업 외에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질 않았던 친구였다.
장수는 신정 때 외갓집에 갔다가 안주머니에 꼬기꼬기 넣어둔 용돈 얼마가 있어서 가게에 모인 친구들 앞에서 기를 펼 생각이었다. 봉현과 같이 미리 도착한 장수는 선반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화약총과 구슬치기 다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약총이라도 총알이 나가는게 아니고 일정한 순간자극을 주면 녹두알만한 크기의 화약이 탕하는 소리와 함께 터진다. 달리기 출발신호에 사용되는 단순기능만 장착한 일종의 장난감 총이다. 누가 더 총소리를 크게 내는지를 내기하는 시합에 사용되곤 했다.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민교와 재희가 낯선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왔다.
“니들 앉아 보거라.” 강냉이를 한 소쿠리 들고 연화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다같이 인사를 드리고, 앉자마자 다들 강냉이로 손이갔다.
“자는 처음 본데이. 누구로?” 시골에 사시는 아줌마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곱고 이쁜 목소리를 가진 분이셨다.
“권오재 어르신 외손녀시더. 대구서 살고있니더 왜.” 어머니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화와 민교가 동시에 말을 받았다.
“지 이름은 영주 입니더, 김영주. 전에 배태를 몇 번 와봤심더. 이번에는 할배가 편찮으셔서 부모님하고 같이 왔심더.” 크지 않은 눈이지만 반짝거렸고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작지만 도톰한 앵두 빛 입술로 조근조근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다 눈을 마주칠 때는 장수가 오히려 쑥스러운지 다른 친구들 쪽으로 눈을 돌리곤 했다.
도시물을 먹은 영주가 대구 주위에서 경험했던 얘기들을 소녀답게 쏟아놓았다. 걸스카우트 생활과 발레공부 얘기를 할 때는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듣고 있었다.
장수 차례가 되었다. 시내 홍수 얘기, 익사할 뻔한 얘기, 불장난 하다가 화재 낸 얘기, 이사 온 얘기를 하다 보니 꽤 시간이 흘렀다.
“여기로 이사 온 후에 겪은 마음고생은 나중에 얘기할란다.” 장수가 말꼬리를 돌리려하자,
“니 얘기 빠른 시일내에 들어보제이.” 영주는 장수쪽으로 더 당겨 앉으면서 자기가 들고 온 보자기를 풀었다. 어쩔까 몰라서 아무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민교와 재희는 알고 있는 듯 했다.
“계란이다. 이건 소금이고···.” 계란 한 꾸러미와 신문지에 싸인 굵은 소금뭉치를 둘러앉은 중간쯤에 내놓았다.
“계란숫자에 비해 소금을 억수로 많이도 싸왔데이.” 계란집 아들 봉현이가 일리있는 말을 했다.
“소금은 말이다, 쓰임새가 다양한 건 다들 알제? 맛을 내고 썩지 않게도 하고 양치질에도 쓰이고 링게루라는 수액도 소금성분이래.” 영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더니,
“되게 중요하고 웃기는 건 남자 아이들 오줌쌀 때 소금이 필요하다는 거야. 히히···.”
장수와 봉현이를 번갈아 보며 약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민교가 둘의 얼굴을 흘낏 보고는 화제를 급히 돌리려했다.
장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듯 했다. 표정을 속일수가 없는 아이였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불쾌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는 뭐라고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되니까 말이다. 빨리 이 자리를 모면하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가자고 제의를 하려는데 민교가 그저께 운동장에서 본 연에 대해 장수에게 물었다. 재희도 거들었다.
“맞다. 집 뒤 동글산에서 연을 띄웠다. 그게 어때서?” 장수가 골이 났는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속마음은 숨길 수 없는 것 같았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이 맞았다.
“영주가 니가 누군지 궁금해 하고 자꾸 묻길래 그냥 아는 대로 얘기했고 니가 연에 관해서는 도사라고 했제. 자 얼른 먹고 일어서제이.” 봉현이도 집에 가서 소죽 끓여야 할 시간이었다. 각자 몫을 먹고는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장수가 봉현에게 물었다.
“영주라는 지지바 말이야. 니하고 내가 소금꾸러 간거 아는 모양인데 혹시 니가 누구한테 얘기해서 가 귀에 들어간거 아니라?”
“내가 왜 그러겠냐? 나도 창피한데.” 봉현의 표정은 진실해 보였다.
“아, 그러면 어떻게 알았제. 마치 놀리려고 작정한거 같잖아?” 장수가 씩씩거렸다.
“그러게. 혹시 니 전에 그 지지바 할배네 집에 소금 꾸러 간적 있제? 봉현이가 어렴풋하게 몇 년전 기억을 갖고 물었다.
“아, 그래. 맞다 맞어. 내가 여기 이사 오자마자 힘이 들어서 밤에 오줌을 가끔 쌌지. 몇 번씩 싸니까 할매가 그 집에 가서 소금 꿔오라고 시켰어.
키를 뒤집어쓰고 갔다가. 막대기로 한 대 맞고 소금을 뿌리더니만 작은 고지 바가지 한가득 소금을 주시길래 받아온 기억이 난다고 했다. 장수는 오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언젠가는 되 갚아줄 거라고 이를 악물었다.
며칠 후 재희 작은 오빠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연날리기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일러주었다. 1월 말일 연날리기 대회가 학교에서 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연날리기는 역사가 오래된 우리나라 전통놀이다. 비교적 저비용의 겨울놀이로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다양한 놀이문화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설날 전후에 대소가나 친구들의 단합이나 친교를 위한 놀이로서 적합했다. 또한 모든 나쁜 기운을 연에 실어서 날려 보낸다는 면에서 적극 권장되었던 놀이였다. 특히 ‘끊어먹기’에서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대로 한턱씩 내는 풍습은 미풍이었다. 끊어진 연이 양쪽의 액땜뿐 아니라 길보도 대신해 준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 형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 진학은 포기하고 농사에 전념하고 있는 친절한 선배였다. 재희 친구라서 평소에도 무척 챙겨주었다.
형네 집에서 같이 만날 날과 시간을 약속하고는 연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넉넉하게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제도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 기분이 별로였는데 마침 기분을 풀어 스트레스를 확 날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전에 약속한 대로 봉현과 함께 재희네 집으로 갔다. 재료를 내놓고 부지런히 만드는 연습을 반복했다.
창호지 반장크기에 가로 세로 2:3 비율로 자르는 일로 시작해 튼튼한 머릿살을 붙이고, 장(귓)살, 가운뎃살, 허리살을 차례로 붙였다. 중간 중간 형이 훈수를 뜨면서 도와주었다. 잘못알고 있는 건 고쳐도 주고 하나하나 점검했다. 머릿살 양쪽 귀퉁이를 약 15도 각도로 연 윗부분이 뒤로 휘어지게 잡아주는 활벌잇줄 그리고 윗줄, 가운데줄, 아랫(꽁숫)줄을 정확한 위치에 잡아매야 했다. 평평하거나 느슨하게 하는 위치를 따져서 전체의 균형을 잡도록 세심한 노력이 필요했다. 8모 얼레는 현이 만들어 주기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직은 날짜가 남았으니까 전에 일꾼 형과 같이 작업했던 대로 질 좋은 창호지와 튼튼한 대나무를 고르는 것과 충분히 말리는 것이었다. 살의 쓰임새에 따라 굵기를 일정하게 맞추어야 하고 전체 중심이 잘 잡히도록 세밀한데 까지 신경 써야 했다.
질긴 실과 거기에 풀칠할 유리가루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뻑뻑하지 않고 부드럽게 연줄을 감았다 풀었다 할 수 있는 8모 얼레를 마련하기로 했다. 대회 참가 연은 방패연으로 정해져 있는 이상 어떤 그림에 어떤 색깔을 넣느냐도 중요했다. 산간지방의 평균 바람세기에 맞추어 연의 크기와 방구멍 크기를 만들지만 그때 주위 상황을 보고 대처하기로 했다.
대회 시에는 평소에 하던 대로 바른 몸가짐과 얼레질, 튀김과 통줄을 적절히 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번에는 ‘끊어먹기’에 참가하기에 꼬리 없는 방패연으로 하고 단순히 태극마크 그림만 넣기로 했다.
금년 1월 셋째 주에 열리는 교회 초등부 졸업 발표회 겸 졸업식은 특별했다. 지도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이 매우 열정적이셔서 ‘꿈이 큰 소년 요셉’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하이라이트였다.
새로 부임하신 전도사님이 대학시절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하셨던 분이라 몇 명 안되지만 졸업생 전부가 출연자가 되었다. 주인공이 요셉이고 열한명의 형제, 야곱과 어머니들, 파라오왕, 보디발 내외, 간수장 등 다양한 배역이 필요했다.
주인공은 남학생 중에서 여러 평가기준을 토대로 선발된 최종 두 명이 정해졌다. 봉현과 장수였다. 교사들과 상의 끝에 초등부 학생 전체를 상대로 비밀 자유투표를 하기로 정했다고 전해주셨다. 당연히 후보 두명도 순종하기로 했다. 이 얘기가 나왔을 때 오히려 장수는 주인공의 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나 교사들은 공정하게 하는 과정이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설득을 해오셨다.
잠깐 둘이 인사 한마디씩 하는 시간이 있었다. 장수는 착하고 믿음이 더 좋은 봉현에게 투표해 달라고 호소하면서 양보했다. 그러나 결과는 한표차로 장수가 맡게 되었다.
영주는 방학기간 동안 배태에 있으면서 교회와 친구집에서 자주 만나다보니 조금씩 친해졌다. 영주에겐 투표와 발표에 자격이 없지만 선생님들이 특별히 보디발의 아내 역할을 맡겼다. 밝은 표정에 웃으면 초승달이 살포시 내려와 앉은 것 같은 눈을 갖고 있어 애교스러운 점이 부각된 듯 했다.
2주간 연습이 강행되다보니 배역상 장수와 영주는 어쩔수 없이 직접 만나야만 했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와 수년간 왕실경호대장 보디발의 저택에서 노예로 일하던 중에 은밀하게 그의 아내가 요셉더러 불륜을 요구해오자 요셉이 단호히 거절하는 장면이 가장 돋보여야 했고 또한 이를 잘 소화해야만 했다.
대사를 잠시 까먹었거나 자연스럽지 못할 때는 오히려 박수로 격려를 받았고 칭찬도 많았다. 영주가 장수의 옷자락을 붙들고 밤거리에 놀러가자는 요구에 장수가 옷을 벗고 도망가는 장면은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끝내 거절하자 거짓 누명을 뒤집어 쓴 채 구금되어 모범적인 감옥생활을 한 끝에 해박한 지식과 남다른 지혜로 대국 이집트의 미래 경영진단을 인정받아 국무총리까지 오르는 장면은 승리는 정의 편에 있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며칠 뒤 설날이 되어 가족 친척 일가 세배는 오전 중에 끝내고 동네 어른들을 뵈러가는 길에 재희네도 세배드리고 나오려는데 재희방으로 안내되었다. 뒤이어 작은 오빠가 들어오길래 연날리기 예비연습 날짜와 시간을 약속했다. 이집저집 다니면서 받아먹어 배가 잔뜩 불러 다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재희 동생들과 세뱃돈 액수를 비교하면서 자랑하는 시간을 잠깐 갖었다.
재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야, 니 오줌싸개냐? 영주네 집에 소금 꾸러 갔다며?” 평소 진지하던 친구가 적나라하게 말한 것도 그렇고 그것도 여러 명 앞에서 꺼낸 건 분명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누가 그러디?” 이사 나오자마자 실제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겠지만 진짜 친구라면 알더라도 비밀을 지켜주는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 재희가 장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침묵했다.
안되겠다 싶어 이참에 민교네 집으로 갔다. 민교는 없고 할머니만 계셔서 세배하고는 곧바로 일어섰다. 당시에는 두메산골에 백색은 고사하고 청색전화도 없었던 시절이다. 직접 가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영주랑 둘이서 어디론가 다니고 있거나 영주네 집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영주네 집은 차 한 대가 겨우 다니는 길에서 30m쯤 들어가는 부지연장집이다.
급히 걸어가는데 영주네 외삼촌과 세배꾼 몇이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외삼촌이 장수가 왔다고 크게 소리를 치니까 방문이 빠끔히 열리면서 영주 남동생이 좁은 틈새로 확인하고는 누나에게 전달한 모양이다. 조금 있더니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뛰어나왔다.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태연하게 세배드릴 방으로 안내되었다.
“ 건강하게 오래 사시소. 할배요.” 영주네 외할아버지와 다른 어르신들에게도 세배를 드렸다.
“그래. 과세는 편히 했느냐? 어르신들은 만안하시냐?” 선비풍의 답언이었다.
“세배값 여기있다.” 누런봉투를 두손으로 받았다.
당시 누런 봉투가 귀했고 손가락에 전해온 감각으로 봐서는 기본액수 이상임이 틀림없었다. 많이 주시는 이유는 뭘까 궁금증이 일어나는데 영주가 뒷방으로 불렀다. 민교와 영주 여동생들과 같이 얘기하고 있었다. 영주와 민교의 표정을 살펴봐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니들 내일 점심먹고 재희네로 온나.” 영주가 바로 나가려고 하는 장수를 나가지 못하게 막으면서 말을 던졌다.
“상 봐오는데 앉아래이. 와카노?”
“나 집에가서 소죽 줘야된다.” 방문을 열고 주위 어르신들에게 인사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빠져 나왔다. 남아있던 민교와 영주는 서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연날리기 대회가 꼭 일주일 남았다. 대회가 기다려지고 기대가 되었다. 정월 초 이튿날 오후에 재희네로 갔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서였다. 형하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형이 현재는 재학생이 아니라서 참가자격이 없지만 졸업 전에는 입상도 하고 연 전문가로 대우도 받아왔다. 지난번처럼 형 앞에서 시범을 보여 나갔다.
“장수야, 니 작년에 ‘높이 날리기’에서 2등한 것으로 아는데 맞나? 그럼 이번에는 ‘끊어먹기’에 참가 할 거라고 했제?” 재차 확인차 물어왔다.
“좀 떨리기는 해, 형. 지난번에 요령을 알려 줬잖아. 형이 도와주는데 최선을 다해야제.”
이번 대회에 방패연만 사용해야 하고 연놀이의 종류로는 끊어먹기와 높이 띄우기, 재주부리기 중 한 종목만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대회 진행은 오전에 선수가 직접 연을 만들고 오후에 날리기와 겨루기가 있을 예정이었다.
끊어먹기 요령에 대해 얘기하던 중 영주가 민교와 재희와 함께 왔다. 졸업반 친구들이 모여서인지 못 다한 요령을 얘기하고는 자기 볼일이 있다고 하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형, 고마워. 보답하께.”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을 표하자,
“뭘, 꼭 일등해야 된데디. 니는 할끼다.” 장수 두손을 꼭 감아쥐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형과 마무리 얘기를 하는 동안 재희는 눈치있게 부엌으로 가더니 재발리 상을 만들어 나왔다. 재희가 상 주위에 잔 네개를 감주로 차례대로 채워나갔다. 장수에게 마지막으로 잔을 채우면서 오빠한테 많이 배웠느냐고 물어왔다.
살얼음이 떠있는 감주를 한 모금 마시고 싶어 잔을 드는데 붕대감은 오른쪽 검지에 일제히 눈을 고정시켰다.
“손가락에 붕대는 왜 맺노?”먼저 영주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꺼냈다. 잠시 입을 꽉 다문채 눈을 감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전에 놀림을 받은 걸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내 얘기 안들리나?” 다시 재촉했다. 그리고는 셋이서 서로 굳은 표정으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랫줄을 매기위해 공춧구멍을 뚫다가 실수해서 송곳에 찔렸다. 왜 묻노?” 장수가 퉁명스럽게 내 뱉었다.
“억수로 걱정되서 안카나?” 내 속마음을 모르고 맞받아치는 말을 하는가 생각했다.
“나 부아통이 폭발직전이다. 건드리지 마라, 니들. 내친구 맞나? 이 지지바들아. 친구 흉이나 보고 돌아다니고. 남의 사적인 얘기를 숨겨주기는 커녕 속닥속닥 옮기기나 하고, 간사하게스리. 사나이 자존심은 생각하지도 않고. 니들과 끝장이다. 나 오줌싼적 있다 왜? 니들은 한번도 안쌌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불이나게 재희네집 마당을 벗어났다. 개울을 따라 올라오면서 방황하는 내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해서는 연날리기 대회에 차질이 없도록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다시금 굳게 다짐했다.
대회 전날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회 차질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조바심이 났다. 평소보다 일찍 여물을 쑤고 닭 모이를 주기위해 뒷마당 창고에서 짚뭇 세단과 딩겨 한 소쿠리를 얹어서 안고 흙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순간 별이 보였다. 머리가 번쩍하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야야, 이제 정신이 드나? 가족들이 죄다 내 주위를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이껴? 내가 왜 여기 와있지? 머리가 띵하네.” 창고에 갔다가 내려오는 건 기억나는데 그 다음부터 필름이 끊겼던 모양이다.
입원실이었다. 왼쪽 다리는 깁스를 하고 있었다. 왼쪽발목 가까운 경골 부위가 금이 갔다고 했다. 내일 대회가 걱정이었다. 꼭 참석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 할까봐 안달이 났다.
늦은 저녁 죽을 한 숟갈 받아먹었더니 토했다. 뇌진탕이었다.
“나 내일 대회 참석해야 되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아버지가 들으시고는 현재의 상황을 자초지종 설명하셨다. 지금 밖에는 대설경보가 발효되어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는 것과 따라서 내일 대회는 무기 연기 되었다는 학교의 소식을 전해주셨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얘기 도중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 일찍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집채만큼 쌓였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일주일을 족히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불편한 심기가 도사리고 있는 듯 했다.
겨우 죽 몇 숟갈을 먹고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였다. 졸업반이긴 해도 개근상 타려면 오늘은 대구 가야 할 텐데, 영주를 머릿속에 떠올렷다. 내가 왜 이러지, 이젠 친구로 만나지 않겠다고 해 놓고 영주를 걱정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찾아왔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깜짝 눈을 떠 보니 영주였다. 억지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아무말도 없이 고개를 창쪽으로 돌려버렸다.
“장수야. 내가 잘못했다. 얼마나 아프노? 내가 대신 아프면 안되겠나?” 내 오른손을 두손으로 꼭 감아 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며칠전에 니가 화낸 건 당연했다. 내라도 니 입장이라면 더 대단했을 거다. 니에 대해 또 다른 면을 생각하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 줄래?” 어느새 내 손등 위로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영주쪽으로 반쯤 돌려서 흘끗 쳐다보았다. 위 눈꺼풀을 내린채 눈시울에 맺혀있는 눈물이 전기불 반사로 반짝이고 있었다.
“친구끼리 그냥 넘어가도 될 걸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삐쳤지 뭐. 이렇게 눈이 억수로 내리는데 병문안을 다 왔냐? 니가 걱정이다.” 장수의 대답에 영주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 입구 의자에 부모님이 가다리고 계셔. 눈이 와도 가야 된다고 성화셔. 어제 데릴러 오셨지 뭐냐. 이렇게 아픈 걸 보고 가서 어떡해?”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먼거리이기 때문에 학생의 신분으로 자주 다닐 수가 없었다. 졸업식을 하고 십일간의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교통불편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걸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천상 여름방학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빨리 나아야 돼. 니가 여러 가지로 고민과 갈등이 많다는 거 느끼고 있다. 내가 니편에 서 줄끼다. 편지 할께.” 장수의 양손을 쥐었다가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빠이빠이 손짓을 한 후 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눈과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운 표정을 보이고는 헤어졌다.
비록 연날리기 대회가 무산되어 소원은 풀지 못했어도 더 소중한 걸 얻은 초등학교 마지막 방학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를 싸매주고 지쳐있던 심신을 위로해주는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는데서 최고의 겨울이었다.
첫댓글 박사님의 어릴적 개구장이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누구나 이런 소중한 추억이 있을텐데 돌아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
글을 너무 옆으로 길게 쓰셨네요. 많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뵙지 못했지요..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에고...또 그리 됬네요.불편드려 죄송~~~즐감해주셔서 셰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