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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해돋이 한 때를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킬리만자로의 세 山봉우리는
무엇을 以心傳心合議하는 것일까?
麒麟의 키 만큼한 〈새벽나무〉옆
그 잎을 뜯어먹다 또 사랑 기억하는
까시버시 麒麟의 입마춤이 보인다.
고요하디 고요한 입맞춤을 보인다.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전문(1980)
나로 말하면
子孫福도 괜찮게 있는 편이지
이 몸의 東쪽 아래께를 잘 살피어보게
陸軍少將비스름한 내 아들과
그리고 그 밑에
大尉같은 내 孫子가
쓰윽 버티고 있는 것이 보이겠지?
그러신데,
이케냐와 탄자니아 高原에서
余
를 가장 잘 이해하는 자가
과연 그 누구인 것 같나?
그건 사람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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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도 호랑이도 코끼리도 아니고
다정한 암수컷의 한 쌍 기린 內外야,
그것들은 언제나 해돋이 때면
일치감치 나와서
새벽이란 이름의 높은 나무의
단잎들을 나란히 서 뜯어먹다간
나를 보고는 수줍은 듯 미소하며
아조 조용히 서로 입을 맞대고
뽀뽀도 한다네
―\「킬리만자로山의 自己紹介」중에서(1991)
「킬리만자로의 해돋이 때」는 서으로 가는 달처럼 에 실린 시인데 이 시는 山
詩 에서 「킬리만자로山의 自己紹介」라는 작품으로 다시 변주되어 창작됨과 동시
에 제일 마지막에 실렸다는 점에서 산을 통해 그가 전달하고자했던 시적 메시지
의 궁극적 면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킬리만자로 산의 주변에 머물고 있을 때 시인이 발견한 것은 “할아버지/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세대유전을 닮은 듯한 산봉우리이다.그 산들은 말없이 “以心傳
心合議”라도 하는 듯이 거기 서있을 따름이다.그 해돋이 광경에서 시인은 또 한
쌍의 기린부부가 새벽나무의 잎을 뜯으며 사랑의 입맞춤하는 장면을 본다.기나긴
여행의 일정에서 이러한 광경은 시인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면서 다시 「킬리만자
로의 自己紹介」라는 시로 변주되기에 이른다.
「킬리만자로山의 自己紹介」에서 킬리만자로의 세 봉우리는 미당 자신과 그리고
그의 아들,또 그의 손자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이 몸의 東쪽 아래께
를 잘 살피어보게/陸軍少將비스름한 내 아들과/그리고 그 밑에/大尉같은 내
孫子가/쓰윽 버티고 있는 것이 보이겠지?”라는 구절에는 이심전심으로 침묵 속에
서 합의를 이루는 킬리만자로의 세 봉우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그리고 “케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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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高原에서/余를 가장 잘 이해하는 자가/과연 그 누구인 것 같나?“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다정한 암수컷의 한 쌍 기린 內外“라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麒麟內外“가 바로 미당 부부의 모습 혹은 그 아들 부부의 모습 또는 그
손자 부부의 모습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즉 山詩 의 끝에서 그가 발견한
풍경은 미당과 그 아들과 그 손자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조화로운 삶의 모습
이며 그것은 또한 조화로운 삶속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어느 부부의 모습이다.
결국 미당이 산시 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以心傳心의 合議“를 통
해 서로 생명을 이어가며 조화롭게 사는 우리들의 비근한 삶의 모습이며,그 삶의
태도는 고요한 사랑을 속삭이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아주 평범한 깨달음
이다.이는 일용행사가 도(道)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사실 위대한 깨달음은 인
간의 내적인 마음속에 이미 내재해 있으며,일상적 삶을 가로질러 존재하고 있다.
늘 우리가 접하는 생활세계는 단순하고 범상하며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우주생명의 과정이며 그곳에 사는 개인 역시 따로 떨어진 개체가 아니라 그 안에
무궁한 우주 생명을 모시며 모든 것과 모든 것을 이어주는 매개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미당이 ‘산’이라는 상징체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우주적
생명을 서로 나누고 이어가는 바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그 모습은 때로는 자기
를 죽이고자 한 이에게도 자비를 설파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으로 또는 대를 이어
가며 잃어버린 해를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여인의 모습으로,혹은 아침 해가
돋는 때 서로 새벽나무 잎을 먹으며 고요한 입맞춤을 하는 기린 내외의 모습으로
변화되면서 항시 미당 시에서 그려지고 있었다.이처럼 미당은 산이 들려주는 이
야기를 통해 이성의 역사와 사유로 덧칠해져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본 얼굴을
대면하게 해줌으로써 인간이 잃어버린 원초적 생명의 힘과 보편적 사랑을 재발견
해 주고 있다.167)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질마재 신화 는 시인 자신의 유년시절 고향에로의 정
신적 귀환과 함께 다양한 민간전승이 지닌 세계에 대한 인식을 토속적,민중적 상
167)박순희, 미당 서정주 시 연구 ,성신여대대학원,박사학위논문,2005,pp.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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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력을 발휘하여 시화함으로써 ‘질마재’라고 하는 현실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
여하는 동시에 질마재 사람들을 통해 인간 본연의 삶의 원형을 제시한 것으로 보
인다.또한 떠돌이의 시 부터 80소년 떠돌이의 시 까지는 시인이 청년기부터 간
직해 온 신화적 상상력을 세계 각국의 지리와 민화,전설로까지 그 지평을 넓히는
등 세계 여행을 통한 개인적 체험이나 기행담을 우리의 신화체계 속에 간단없이
용해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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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결 론
본 논문에서는 가장 고전적인 문학 연구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전기
적 비평방법론에 의거하여 서정주의 시세계를 분석하였다.이러한 방법으로 그
의 시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체계적으로 밝힘으로써 시를 통해 볼 수 있
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이는 곧 텍스트의 존재론적인 기반 및
인식의 변모과정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다.이러한 탐색은 미당의 시 세계가 무
엇이냐 하는 정태적이고 개념적인 시 정신을 밝혀내는 게 아니라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형성되느냐 하는 역동적인 변화의 과정을 밝혀내는 것이다.서정
주의 시가 일제시대와 6․25전쟁,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역사적 현실
의 맥락 안에서 형성되어왔음을 고려할 때,시대의 자장 속에서 서정주의 삶과 문
학이 어떠한 변천을 겪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역동적인 시대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는 서정주의 시가 다양성과 풍요로움으로
평가받아온 이유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그런데도 이런 변화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서정주 시의 전체적인(서정주 작품연보 포함 등)연구 논문이
없다.그래서 이 논문은 시정주의 시의 변모과정과 함께 그동안 빠졌던 작품과
작품연보들을 보완하는 작업을 아울러 진행하면서 연구되었다.
서정주 시의 제1단계는 화사집 과 ‘친일시'를 중심으로 한 해방 이전의 시들이다.
화사집 을 중심으로 한 서정주의 초기시들은 원죄의식과 관능적인 육성을 지닌 시세
계로 나타난다.이러한 시세계의 출발은 시 동인지 시인부락 (1936)에서 비롯된다.다
양성의 추구를 시적 지향점으로 삼는 시인부락 은 그동안 한국 문단을 지배해온
프로문학과 건조해지고 형식화된 모더니즘 시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그런 만
큼 시인부락 에서의 서정주의 시적 지향점은 고뇌로 가득 찬 인간문제,삶의 문
제,생명의 문제 등으로 나아간다.따라서 1941년 화사집 시들은 토속적인 분
위기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원죄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읊으며 자의식과 관
능적 욕구에 몸부림치는 젊음과 원죄적 세계관을 드러낸다.이것은 이후 보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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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를 매개로 한,자신의 생애에 근거한 죄의식과 열등감을 문학적 소명의식과
접목시키면서 관능적 미의식을 성취하는 데에 일조한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친일시들은 서정주 시와 시적 정신이 논란의 대상이 되게 된
요인이다.이 시들은 대개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의 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당위
성을 강조하거나 태평양전쟁(1941)을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성전(聖戰)으로 미화한
다.이 시들은 서정주가,한국문학사의 근대성을 비판하고 또한 한국시사의 미래적
방향을 ‘생명’이라는 담론으로 이끌고 가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
고 비판 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어두운 그늘이며,그러하기에 일제 말기 우리
민족에 대한 윤리적 가치의 부재를 보여주고 있다.
제2단계는 귀촉도 (1948), 서정주 시선 (1956)을 중심으로 한 시들이다.이때
의 시들은 초기시의 서양적인 사상인 ‘원죄의 업고에 대한 육성의 몸부림’과는
달리 유현(幽玄)하고도 오묘한 동양적인 사상과 정서에 눈을 돌려 자연과 대화
하는 참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를 동일하게 추구하고 있었다.원숙한 자기
성찰과 달관을 통해 동양적 사상으로 접근하여 화해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
제3단계는 신라초 (1960)와 동천 (1968)을 중심으로 한 시들이다.이때의 시들
은 주로 신라정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서정주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6․25
동란 중 삼국유사 와 삼국사기 등을 읽고서 발견하였다는 신라정신은 고유의 샤
마니즘과 ‘유․불․도’의 삼교 포함설의 세계로 영원성에 대한 회귀의 갈망으로 나
아간다.영원주의는 영생에 대한 개안과 현세의 인간적 질서,즉 인정과 의리를 바
탕으로 한 것이다. 신라초 (1960)는 바로 이런 인간의 대지적 사랑에 근원을 두
고 있다. 동천 (1968)또한 신라초 (1960)때보다 더 많은 불교적 관심과 신비주
의를 보여준다.
제4단계는 질마재 신화 (1975)부터 90년대 말기까지의 시들이다. 질마재 신화 의
시들은 주로 토속적이고 주술적 샤마니즘의 정서를 드러내며,시의 형태는 산문시
나 자유시로 바뀌게 된다.그리고 떠돌이의 시 (1976), 서으로 가는 달처럼
(1980), 산시) (1991), 80소년 떠돌이의 시 (1997)에 이르러 서정주는 숙명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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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의식’을 확립하는 것으로서 자기 정체성의 완결을 시도한다. 떠돌이의 시 의
행태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열린 세계를 개척해 가고자 하는 노마드
(Nomad)적 주체로서의 면모가 다시 한번 확인되는 지점이기도 하다.서정주는 실제
여행을 통해 ‘떠돌이’로서의 초월의 경지를 ‘산’으로 상징화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보았듯이 1933년 첫 작품인 「그 어머니의 부탁」이 동아일보 에 발
표된 이래 시인부락 과 화사집 의 육체적 생명성인 서양적 사상, 귀촉도 , 서정주
시선 의 한(恨)과 안정적 정서인 동양적 사상 , 신라초 의 불교사상과 역사성, 동천 의
정신적 승화에로 수직적 이행이었으나 후기에는 떠돌이의 시 (1976), 서으로 가는 달처
럼 (1980), 산시 (1991), 80소년 떠돌이의 시 (1997)등에서 시인의 정체성과 인륜의
보편성의 문제와 인간의 삶에 대한 수평적 인식의 견지로 나아가고 있다.대체적
인 자연계의 아름다운 현상으로 그 사상이 옮겨가는 서정주 시의 변모과정은 언어 미
학적 의미(율격,이미지,상징),종교적 의미,미적 특성,나아가 민족어의 구현 등을 특
징으로 한다.특히 주목할 것은 근대 내지 서양적인 것과 결별하고 불교사상과 영
원주의 즉 동양적,민족적 세계로 넘어가는 존재론적 측면이다.이러한 측면은 일
제 말기의 친일의 논리,해방 후에는 한(恨)과 관련된 민족문학,그리고 6․25전
쟁 이후에는 자연에의 동화라는 시세계로 전개되는 동안에도 관련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본고가 지향하는 서정주 시의 총체적이고 통시적인 연구 방법은 그동안
일관된 논의의 틀을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연구들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한계를 보
완할 뿐 아니라,그의 시를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아울러 서정주의 작품과 「작품연보」를 확인한 결과,미발굴 작품(자료2,서정
주 전집 미발굴 산문 참조)과 「귀촉도」등 58편(시46,수필4,산문8)모두가 「서
정주 작품연보」에는 누락되어 있음을 확인하고,이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누락
된 자료들을 발굴,보충하여 따로 부록에 실어두었다.특히 우리 문학사에서도
연구된 바 없는 그 시대 풍속을 이야기한 미발굴된 산문은 앞으로 귀중한 연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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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텍스트 및 기초자료
(......)
《부록》
〈자료1〉서정주 연보(1915-2000)
1915.5월 18일 全北高敞郡富安面仙雲里578에서 徐光漢의 장남으로 출생
1922-1924마을의 서당에서 한학 수업
1924全北부안군 浦公立普通學{校에 입학, 6년 과정을 5년 만에 수료
1929상경하여 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입학
193011월 光州學{生運動주모자 4명 중의 하나로 57명의 퇴학자와 함께 퇴학 당하여 구속되었어
나,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 유예되어 석방됨
1931高敞高等普通學{校에 편입하였으나 이내 권고자퇴(해방후 中央․高敞二校모두 名譽交友의 대우를 받고 있음)
1933朴漢永대종사 門下生으로 입문하여,동대문 밖 開運寺大圓庵內中央佛敎專門講院에 입학
1935교장인 朴漢永대종사의 권고로 中央佛敎專門學{校에 입학
1936東亞日報新春文藝에 詩 壁 으로 당선,가을,上校休學{,11월《詩人部落》편집인 겸 발행인
(同人으로는 金東理․ 李用熙․吳章煥등)
1938方玉淑과 결혼
1939滿洲로 가 糧穀株式會社間島省延吉市지점에 경리사원으로 입사,겨울에 龍井출장소로 전근
1940봄에 귀국 還鄕,高敞邑盧洞에서 장남 升海출생
1941夫人升海와 함께 上京,東大門女學{校교사 부임,첫 詩集花蛇集출간(南蠻書庫刊)
1942부친 사망,그에 따르는 遺産정리
1946第二詩集歸蜀道(宣文社刊)출판,부산 東亞大學{校전임강사
1948봄에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입사 후,문화부장에 전임,
정부수립과 동시 문교부 初代藝術課長(서기관 3급 甲),11개월 후 휴직
1949정부 수립 후 韓國文學{家協會창립과 동시에 詩部委員長으로 취임
1951전주 戰時聯合大學{강사 겸 全州高等學{校교사
1952-1953光州朝鮮大學{校부교수
1953환도와 함께 上京
1954藝術院회원(창립 이래 현재까지),文學{分科위원장 역임.
1954-1960서라벌예술대학교수,東國大강사
1955미국 亞細亞財團自由文學{賞수상,第三詩集 徐廷柱詩選 출간(正音社刊)
1956-1960韓國文學{家協會최고위원
19572월 4일 차남 潤,서울 孔德洞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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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第四詩集 新羅抄 출간(正音社刊),東國大學{校교수
1961시집 新羅抄 로 5.16文藝賞수상
1962MelicentHuneycutt가 처음 英譯
19635월 5일 장남 升海姜銀子와 결혼,10월7일 장손 居仁출생
19651월 작가인 장남 升海渡美(滯美中),韓國文人協會副理事長
1966大韓民國藝術院賞受賞
1968第五詩集冬天출간(民衆書館刊)
1972 徐廷柱文學{全集 全5권 간행(一志社刊)
1973《現代文學{》에 장편소설 碩士張耳笑의 散策 2년간 연재
1974故鄕인 全北高敞의 禪雲寺입구에 <未堂詩碑>건립(高敞라이언스 클럽 주관)
1975第六詩集 질마재 神話 간행 (一志社刊), 徐廷柱肉筆詩選발행(文學{思想社刊)回甲記念詩
畵展개최(전국 대도시에서)
1976淑明女子大學{교에서 名譽文學{博士學{位받음,第七詩集 떠돌이의 詩 출간(民音社刊)
197711월 韓國文人協會長취임.11월에 세계일주여행 출발,1978년 9월에 귀국
19789월 東國大學{長취임,許世旭譯의 徐廷柱詩集 이 자유중국에서 黎明文化事業公司版으로 간
행되었음
19798월 東國大學{校敎授職을 정년퇴임(호적에 한 살이 더올려 가입되어서 이렇게 되었음).
이어서 同校大學{院特遇敎授가 됨.
1980세계여행기인 떠돌며 머물며 무엇을 보려느뇨? 二卷을 同和出版公社에서 발행
第八詩集世界紀行詩集 西으로 가는 달처럼… 출간(文學{思想社刊)
10月,中央日報社가 주는 文化大賞本{賞個人賞을 받음
1981미국 뉴저지의 《QuarterlyReview ofLiterature》誌에 여름호 世界詩選 에 58편이 번역 수록 되
었음.역자는 뉴욕 코넬대학교 교수인 David,R.McCann氏
1982第九詩集한국역사시집 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간 날들의 詩 出刊(小說文學{社刊).
일본의 冬樹社에서 金素雲,白川豊,鴻野映二의 日譯으로 朝鮮タンポポの歌 (朝鮮민들레꽃의
노래)출간.
閔{熹植譯의 佛譯詩集 LaFleurrouge (붉은 꽃)을 룩셈부르크의 Euroeditor社의문고판 (No.16)으 로 발행
19833월 東國大學{校명예교수가 됨
5월 未堂徐廷柱詩全集 출간(民音社刊)
5월 第十\詩集 안 잊히는 일들 출간(現代文學{社刊)
19843월 第十\一詩集 노래 출간(正音文化史刊)凡}世界韓國藝術人會議理事長취임.제2차 세계여행을 부
인 방옥숙 여사와 함께 다녀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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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경기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로 취임,대한민국 예술원 원로회원
1986서울 時事英語社에서 英譯詩集 Unforgettablethings (안 잊히는 일들)발행.
역자는 DavidR.McCann氏.
일본 東京의 角川書店에서 日譯詩集 新羅風流 발간 譯者는 鴻野映二,白川天임.
1987프랑스 파리의 생제르멩-데-쁘레(Saintgermain-des-pres)社에서 佛譯詩集 PoemesDuvagabond
(떠돌이의 詩)發行.譯者는 金華榮.
1988스페인의 마드리드대학교출판부에서 스페인語譯詩集 Juntoalcrisantemo (菊花옆에서)發行.譯者는 金
顯揚
西獨본의 <Bouvier>社에서 獨逸語譯詩集 Lyranatapgelbute (石榴꽃)發行.譯者는 趙華鮮第十\二詩集
팔할이 바람 출간(혜원출판사 刊)
1989美國콤롬비아대학교출판부에서 英譯詩選集 SelectedpoemsdoSoChongju (徐廷柱詩選集)發行,譯者는 DavidR.
McCann氏
19911월 第十\三詩集 山詩 출간(民音社刊)
4월 徐廷柱세계민화집 (全5권)출간(民音社刊)
10월 未堂徐廷柱詩選集(全2권)출간(民音社刊)
1993第十\四詩集 늙은 떠돌이 詩 출간(民音社刊)
1997第十\五詩集 80소년 떠돌이의 詩 출간(시와 시학사刊)
200012월 24일 향년 85세로 별세.고향인 전북 고창에 영면
200012월 26일 대한민국 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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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서정주 전집 미발굴 산문(2편)
(1)鄕土散話
① 네名의少女있는그림
아주 할수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이제는 다시 돌아올수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같이 스
러진것들의 形象을 불러이르킨다.귓가에와서 아스라히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들을,머-언 유명
(幽明)에서처럼 그 소리는 들리여 오는 것이다.한마디도 그 뜻을 알수없다.다만 느끼는건 너이들
의 숨ㅅ소리,少女여.어디에들 安存하는지,너이들의 呼吸의 훈집으로써 다시금 돌아오는 내 靑春
을 느낄따름인것이다.少女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든것인가?오히려 처음과 같은 하늘우에선 한마
리의 종다리가 가느다란 피ㅅ줄을 그리며 구름에 무쳐 흐를 뿐,오늘도 구지 다찬 내 前程의 石門
앞에서 마음대로는 處理할수없는 내 生命아 歡喜를 理解할따름인것이다.
섭섭이와 서운니와 푸접이와 순녜라하는,後悔하는 네 개의 形容詞와같은 네名의 少女의 뒤를 따라
서 午後의 山그림자가 발피우는 보리밭새이 언덕길우에 나는 서서있었다.붉고 푸르고 흰 傳說속
의 네개의 바다와같이 네名의 少女는 네빛깔의 저고리를 입고있었다.
하늘우에선 아득한 고동소리.…… 순녜가 가르쳐준 上帝님의 고동소리.…… 네名의 少女는 제마닥한
개씩의 바구니를 들고 허리를 구푸리고,차라리 나물을 찾는것이아니라 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씬나물이나 머슴둘레,그런것을 뜻는 것이아니라 머언머언 고동소리에 귀를 기우리고있는것이었다.
後悔와 같은 表\情으로 머리를 숙으리고있는것이었다.그러나 나에게는 자피이지아니하는 것이었다.
발자취소리들 아조 숨기고 가도,나에게는 붓잡히지 아니하는것이었다.담담히도 오래가는 내음새를 풍
기우며 머슴둘레 꽃포기가 발길에 채일뿐,쌍긋한 찔레덤풀이 앞을 가리울뿐 나보다는 더 빨리 다라나는것
이었다.나의 부르는 이름소리가 크면 클수록 더 멀리 더 멀리 다라 나는 것이었다.
「여긴 오지 마.……여긴 오지 마.……」살포오시 우슴지우며 水流와같이 네 개의 水流와같이 차라리
흘러가는 것이었다.한줄기의 추억과 치여든 나의두손 역시 하늘에는 종다리새 한 마리가 ―\ 이런
것만 남기고는 조용히 흘러가며 속삭이는 것이었다,여긴 오지 마…… 여긴 오지 마……,少女여 내
가 가는날은 돌아오련가.바다에 내가 아조 가는 날은 돌아오련가.막달라의 마리아처럼 두 눈에는
반가운 눈물로 어리여서,머리털로 내손끝을 스치이련가.내가 가시에 찔려 아파할때는 그러나 네
名이 少女는 내옆에와 서는것이었다.내가 찔레ㅅ가시나 새금팔에 베여 아퍼헐때는 어머니와 같은
손구락으로 나를 나시우러 오는 것이었다.새끼손구락에 나의 어린 피방울을 적시우며 한名의 少女
가 걱정을 허면 세名의 少女도 걱정을 허며,그 노오란 꽃송이로 문지르고는 빠알간 꽃송이로 문
지르고는 하든 나의 傷처기는 어찌 그리도 잘났는것이었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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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 정해 정도령아
원이 왔다 門열어라
빨간 꽃을 문지르면
빨간 피가 도라오고
푸른 꽃을 문지르면
푸른 숨이 도라오고
少女여 비가 개인날은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어데서 쉬는 숨소리기에 이리도 똑똑히 들리이는
가.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싶은가.몇포기의 씨거운 멈둘레꽃이 피어
있는 낭떠러지아래 풀밭에 서서 나는 단하나의 精神이되어 네名의 少女를 불러 일으킨다.少女는 역
시 나를 지키고 있었든것이다.내속에 나리는 비가 개이기만,다시 그 언덕길우에 돌아오기만 어서 病
이 났기만을,그 옛날의 보리밭길우에서 언제나 언제나 지키고 있었든것이다.내가 가는 날은 돌아
오련가?
② 씨름의 적은 揷話
음력 四月부터는 海棠花꽃이 핀다.海棠花는 가시가 도든 나무우에서 핀다.이글이글 타는 모래
밭우에 五六月의 더운 구름이 모일 무렵이면 海棠花는 드디어 노오란 열매를 맺는다.
海棠花나무 새이로 보면,한쪽에는 언제나 바다가 보인다.바다ㅅ물은 ―\ 그러나 海棠花를 적
시우러 밀려오지않고 멀리서 움즉이는 것이 보일따름인것이다.노오란 海棠花열매를 따서 까면은
속에는 꺼칫꺼칫한 털이 그득히 드렀다.한번 손에 무치면 좀처럼 잘 떨어지지않고,땀흐르는데를 글
그면 밤에 잘때에도 근지러웁다.시거운 시거운 海棠花열매,살구가 다아 떨어져버렸을때에는 살구
나무 밑에서 서성거리다가 드디어 셋째와 나는 앞장 불모래ㅅ벌에 가서 海棠花열매를 따서 모흔
다.海棠花열매를 따모흐다간 오빠시벌때에게 대구리를 쏘인다.텅텅 부은 알대구리를 안ㅅ고 셋
째와나는 아퍼서 운다.
아픈기가 가시일때는 둘이 안ㅅ고서 씨름을한다.죽어라고 씨름을 한다.누가 대체 상씨름이냐.
누가 대체 상씨름이냐.넓은 넓은 모래ㅅ벌 저쪽의西南方問에 솟아 있어서 午後면은 遮陽을하여주
는 黃土山의 엷은 그리매.세상에 씨름하기를좋은 곳이 제 아무리 많다하여도,질마재 앞장불 모래
ㅅ벌보담 더 좋은곳은 없을것이다.每年秋夕이 오면,앞장불 모래벌에서는 씨름판이 열렸다.무슨
차일(遮日)하나도 치는 일없이 準備라고는 上씨름에게 주는 소한마리 나락 몇섬,그리고는 近洞의 男女老少가
모이여서 圓陣을 치고 힘센놈이 나오기만 힘센 놈이 나오기만 기다리는 것이었다.씨름이야기가 났
으니 말이지 씨름판이 얼릴나면은 벌서 한달전부터 마을에서는 야단인 것이다.어떻해서라도 자기
네마을에서 上씨름을타와야한다고 洞里마닥이 법석인것이다.이길 샘들은 어찌 그리도 센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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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힘이 越等한 者가 없을때에는 사람을 놓아서 먼데가 사오기까지하는것었다.사다가앉히고는 酒色을
禁케 하고 닭고기 도야지고기로 珍味만 골라서 먹이는 것이었다.이렇게 해서 사온者中에 아니 이건 먼
데까지 가서 사온건아니었지만,떠받드러 앉혀논 者가 ―\ 인제차츰 이야기하겠지만 實로 배ㅅ쌀이 곱으라질
일이 한번에 생겼었다.秋夕이 올려면 아직도 二十\餘日이 남었었스니까 아마七日그믐께「질마재」머슴들
사이에서는 벌써上씨름ㅅ감을 고르니라고 餘念이 없을때였다.키가 九尺이되고(좀誇張이나)몸ㅅ집이 깍
지ㅅ동같은(물론 誇張이나)壯漢하나이 홀홀單身으로 마을에 들어와서,이마을에선 단한가호뿐인 선봉이네
술집에 投宿하였다.큰 食놋器에 담은 밥을 연거푸세그롯이나 먹고 숟갈 뜨는 솜씨라든지 젓갈질하는 폼이,
아무리보아도 범상한 물건이 아니드라고,「노새」라는 別名을 듣는 머슴이 숨을 죽이고 달려와서는 亭子나무
밑에모여있는 마을의 壯丁들에게 報告하였다.그러잔어도 걱정이든참이었다.他力을 빌려서라도 기어
히 이기고 싶은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선봉이네술집으로 몰려갔다.
가서들보니,아닌게아니라 힘께나 쓰게생겼었다.솟뚜껑같은 손이며,옆으로 찌저진 봉의 눈이며,
房웃묵에 늘편히 자빠저서는 초저녁부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것이 과연 上씨름ㅅ감이였다.「여보시
요 老兄.일어나시요」이런일이면 사족(四足)을 쓰고 덤비는 億萬이가 공손헌두손으로 上씨름ㅅ감의 어깨
를 흔들어깨였다.「엉이」하고 기지개를 피며 일어나는 몰골이 정말로 훌륭하였다.億萬이가 다시 자
기의 姓名三字를 通한후에 어디서 오셨느냐고 무르니까 「퉁영이지러.영남통영 모르나」하고 반말로 넘기는 말
투까지가 머-언 嶺南에서 하눌이 점지하야 보신내 사람일시 분명하였다.수굿이 눈을 아래로 깔고,
그 많은힘을 조금도 풍기여보이지않는 것까지가 確實히 그러하였다.되였었다.가시지말라고 반드리
러 앉히고는 이튼날부터 닭고기 숭어 지회는 물론이요 아조益祚네암도야지까지 깨끗이 한마리잡어
다놓고 새벽에는 치우실거라고 삼베홋이불에 심지어 나종에는 대추마을까지 마을에있는 것中에서
좋은것이란 좋은것은 모조리 골라먹이면서 날마닥 壯丁들은 問安을 드리는것이었다.
아침에 좀 누어있기만해도 잠ㅅ자리가 편치않었느냐,어디가 아프시냐,차라리 그 人蔘을 좀 사
다가 다려먹이자고하는 사람까지있었다.秋夕날이 드디어 왔다.씨름판에는 본래 사람이 많이꾀이
는것이지만,이해에는 더구나 嶺南서온 壯士를 볼려고 二十\里三十\里밖에서까지 밥을 싸가지고 온
사람도있었다한다.나는 마침 그날사말고 진한 학질로 아무리 나가려해도 할머니가 종시 놓아주질
않어서 가보지못했으나 들은바에 依하면 嶺南서온 壯士는 그날 玉色모초조끼에 삼팔저고리,冬柏
기름을 약간 무처서 고드래상투를 맺고,億萬이 益祚들에게 護衛되야 앞장불 모랫벌로 엉금엉금 걸
어가는폼이 믿을수 없는말이나 선봉이 마누라가 다아 춤을 삼키드란 것이다.
(선봉이 마누라는 벌서 四十\에 가까웠으나 兩眉間에는 제법 찬란하였든모양인借日의 흔적이 아직도 남
아있고,술장사는 술장사나 마음이 굳기로 有名헌 女子였다.)
그러나,또 들은바에依하면 헐수없는여석은 嶺南서온 壯士였다.애기씨름이 끝난후에 初合에 양념으로
한번 넹큼 들어갔다.나오시라니까 「하무,하지러」하고 들어가드니 발한번 부처보지못하곤 쿵-하고 떨
어지드라는것이다.뺏뺏마르고 엉성하여서 「고순도치」라는 별명을 듣는 松峴里催서방한테 쿵-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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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떨어지드라는 것이다.떨어저서는 딩굴딩굴 좀체 이러나지도않드라는것이다.
선봉이네안해가 보았으면 뭐라고했을라는지,性急}한 壯丁中몇사람은 「저놈잡어내오라」고 소리
쳤으나 나종에는 하 기가막혀서 돈닷兩을 손에 쥐여 억지로 질마재를 넘겨보냈다는 것이다.나종에
들으면 統營에서온 갓(笠})장사였다는 것이다.
③ 客舍東대청에서 피리불든靑年
半島의地理에 조끔만 仔細헌분이면,질마재란곳은 모르겠지만 全羅北道興德쯤은 대개짐작할것
이다.客舍東대청이라함은 그 興德에서 옛날에 縣監이 執政할때 쓰이든 刑場으로서,지금은 그 全
部가 헐리였지만,나의少年時節에는 아무도 살지않는 陰험한 빈집이 한 채 있었다.南山변두리에
있어서 가마귀만 와 우지질뿐 어린애가 아니라도 무섭ㅅ증이 드는 그러한 位置에 있는 집이었다.참
東쪽으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우우혀니 욱어진 대수풀밑에 소얼찬이 큰 連塘이 있었다.우리 姨母
네집이 興德에있는 관계로,나는 어렸을때 어머니를 따라서오기도하고 나혼자 오기도하고 一年에 서
너번식은 이興德에와서 며칠식 놀다가 갔다.질마재에서는 二十\里가 가까웠다.아마 거진 첫여름있었을
것이다.내가 興德姨母네집에왔다가 偶然히 宗九라는 사람을 머언비트로나마 보게된것은,아마 나무마다
속잎이 도들무렵이었을것이다.어린거름으로 넘어오기에만 반나절이 더걸리는 질마재모퉁이에서
진달래꽃은 못보았으나 낫두견이 소리를 들었든 記憶이 있으니까.늦봄이 거진 기우를무렵이었을
것이다.그 얼굴이 약간 얽어신 姨母네집에서 太古라는 이름을 가진 머리채를 츠렁츠렁 따어느린 참
어여쁘든 우리姨從兄과 둘이서 놀기가 나에게는 다시없는 행복이었다.무슨 미련인지 後에 太古는 不
幸히도 문둥이가되어 客地에 誤死한바되었지만 少年太古는 베여먹고 시풀만치 참으로 어여뼜어다.
姨母의 눈을 避하야 뒷안에 가서 太古와나는 아직 도토리만큼식밖에 자라지 않은 시디신 풋살구
를 조끼호주머니로 하나씩 그득 그득히 따담아가지고는 길거리로 山으로 개울가로 벌에벌군데로 다
아 뛰어다니며 노는것이었다.그리고 다니다가 우연히 간곳이 客舍東대청이었다.建築이라야 별
보잘것도없는 恒茶飯헌옛날의 瓦家-花崗巖의 階段을 너대깨 올라가서 종이가 다찢어진 窓門을 열면
횡하니 너롭기만한 널판자들이 깔려있는것이었다.거진 해질무렵이었다.우리는 차마 들어가지는않
고 門만 열어보고는 되 돌아서서 南山밑으로 돌아다니며 토끼똥,꿩깃같은 걸 주스며놀았다.裵阜집이
보이는 西쪽언덕에 아마 해가 꼽박 저물무렵이었다.뛰어다니다가 자빠져서 무릅을 깬 太古는 정갱이에 한
줄기 피를 그리여가지고 솔나무밑으로 댕기며 傷처기에 特效가있다는 곰팽이버섯을 찾고,나는 사실
인지 아까먹은 풋살구에 배가 아퍼서 그냥 바위우에 쌍을 찌푸리고 앉어있었다.재빠른 부엉이가
東대청뒷수풀에서 울고 있는것이었다.부엉이 소리를 손꼽아 세고있을라니까 어디서 누가 퉁수를
불고있는것이었다.무엇때문에 사람들이 퉁수를 부는것인지를 몰랏든 나는 듣고있을라니까 그저 무
서울 뿐이었다.
맨먼저 보이는건 깜아케 흔들리는 대수풀이었다.그속에서,혹은 그대나무들의 매디매디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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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수소리는 들리는듯하였다.「성(兄)!......성!......」나는 좀 振勵하는 목소리로 太古를 불렀다.곰팡이 버
섯은 하나도 줏지못하고 내부름소리에 쪼차오는 太古에게 퉁수소리가 들린다는 말을하였드니,「응,
―\ 에이 벼엉싱.그까짖게 무서우냐?宗九퉁수소리가 무서우냐?」라면서 사람이 부는것이니 宗九
라고하는 자기도 잘 아는 사람이 부는것이니 가보자고하였다.나는 병신소리가 듣기실어서 마지못
해 따라서갔다.먼저 우리의 人跡을 숨기기爲하야 花崗巖의 階段을 맨발로 올라가서,太古가 指示
하는대로 (숨을 크개 쉬지말고)門틈으로 구버다보니까 사람은 사람이었다.상투가 크으다랗게 솟
아 보이는 젊은사람이였다.얼굴은 잘 記憶이 안나나 눈이 무척 큰듯한사람이었다.한번 움즉여보
는일도없이 돌부처처럼 壁欄干에 기대여서서 그냥 불기만 하는것이었다.
지금 생각하자면 한五分동안쯤,우리는 門에서 눈을 떼이지않고 피릿소리가 아니라 그 宗九라는
사람이 움직이는지 안움직이는지 그것만을 기다리고있었다.드디어 나는 자꾸 치운기운이 드러서
兄의 옷소매를 가만히 자바다리여 집으로 돌아왔다.저녁에 姨母에게 宗九의 퉁수소리 들었다는말
을하였드니 姨母는 내말에는 대답도않고,그때 놀러왔었든 마을 안악네에게 ―\ 「참 별 비러먹을녀
석도 다있어라우.姓氏도 번듯한녀석이 항상 재인놈들허고마는 놀고,제에미가 고사리ㅅ낫 뜯어서 먹
고 살다가 죽은것도 不足해서 예편네는 또 오죽이나 굶겼으면 도망갔을라고,.....항상 그놈의 피린
지 급살인지만 불면 배가 부른지 몰라」하고는 「하도 듣기싫여서 저이 三寸를 同生들이 집에 있지
도 못하게 하니까 밤마닥 귀신도 안무서운지 東대청마루ㅅ바닥에 가 지랄을 허고는 거기 쓸어저
서 잔단다」하고,마즈막으로 나에게 일러주는것이없다.
나도 그때는 姨母와 同感이여서 「비러먹을여석」이라고 생각하였다.그러나 後에나도 音樂이라든
가 예술이라든가하는것의 價値를 나대로는 조끔 알게되어서 그러니까 물론 그때는 벌서 太古도
誤死한후에 姨母네집에 들렸다가 偶然히 들으니,宗九는 드디어 興德에서 살지를 못하고 홀몸이
어데론지 쫓기어가 갔다고 한다.
宗九는 확실히 아직도 어디에 쌀어서 피리를 불고있을것이다.宗九와같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었을理는 萬無한것이다.
國語で進め大東亞
新時代 (1942년 7월호)
(2)故鄕이야기
① 신장사 蘇生員
흔히 볼 수는 없는일이나,半島人의 얼굴을 일일이 점검(點檢)하고 지내가면은 「흥 이건 정말 土
種이로구나」하고 느끼어지는 사람이 萬에하나쯤은 아니 적어도 十\萬에 하나쯤은 반듯이있다.有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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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前에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의 形體와는 判異하게 다른 사람들이 터-o비인 山골째기에서 땅강아
지나 오랑캐 곰들을 벗으로 칙뿌리나 뒤저먹고 살고있었든 것이라고 생각할수는 없을까.척 한번
보아서 어쩐지 그렇게만 느끼어지는 사람이 어찌다간 있다.(이건 或나의 感官의 誤解일른지도
모르겠으나)신장사 蘇生員도 웬일인지 그렇게만 보여지는 사람中의 하나이였다.(물론,이것은 후
에 우연히 그렇게 생각해본것이고, 蘇生員을 늘 面接하든 나의 少年시절에는 그저 異常하여서 말
할수없는 一種의 神秘感만을 느끼였을 뿐이였으나)중ㅅ줄에도 이르지못하는 짝달막한 키에 후리
후리한 몸ㅅ집이 언듯 보면은 없는것같으나 均형은 째여있고,노오란 노오란 쉬염을 가슴 우에까
지 따어 느렸으나 숫이 만치도못하고,절머서도 늘거서도 나이는 한 四十\으로만 보여지는,꼬집어
주면 앞으다고는 할것같으나 한번 우러본일도 없는것같은 面貌,-抽한筆致로는 도모지 說明할길
이 없으나 허잘것없는것이 壽는 할것같은 蘇生員이였다. 蘇生員은 또 무슨 血脈의 부름으로 그의
안해와같은 안해를 차저낸것인지.역시 적은키에 후리후리한 몸ㅅ집 솜솜이 얼근얼골에 벙그러진
잇발.무슨 돌맹이 가루를 먹은듯한 音聲이 나는것이,봄에도 火爐ㅅ가에만 앉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蘇童이라는 아들이 단 하나 있을 따름이였다.蘇生員은 밤이나 낫이나 신만 삼었다.
실낫같이 자는時間과 크으다란 대롱에 입담배를 피우는 時間外에는 언제나 신만 삼았다.아니 蘇
生員에게도 밖에 나오는 時間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건 있다가 이 애기하겠다.질마재 七十\
戶의 男女老少의 신발을 한결같이 만드러 신끼는것만으로도 蘇生員은 充分히 훌륭하였다.柴錢열다
섯닙식만 주면은 누구의 신발이건 삼어서 골박어서 만드러주는 것이였다.秋夕名節이 2.3日쯤 남어서
새 신발을 마추려가는게 내겐 어찌 그리도 즐거웠든 것인지.아버지에게 승락을 얻어서 蘇生員네
집에 내려가면은 먼저 반가히 마저주는건 털이 노오란 누렁이였다.키와 몸뚱이에 비해서는 유난
히도 큰 꼬리를 흔들면서.나의 돈반(三錢)을 미리 들고온 손을 마구 할터주는 것이였다.
蘇生員네집 窓문을 열고 드러가면 먼저 뵈이는건 房한가운데 天井을 떠받고 섰는 과히 적지않
은 기둥이였다.집이 西쪽으로 기우러지는것을 막으려는것으로.그러니까 外樣으로 보면 蘇生員네
집은 약간 옆으로 자라난 버슷같었다.아닌게 아니라 집웅우에는 가느다란 버섯도 많이 나 자랐다.
「꽃신을 삼어 주례?」하고 蘇生員이 골을박든 손을 잠깐 멈추고 내게 무르면,「왕글 꽃신을 삼어
주례?」허고 蘇生員네 (마누라)가 역시 그 石粉을 마신듯한 목소리로 火爐ㅅ가에서 내게 재처뭇는양
은,夫婦라고 하기보다는 어디 머언 淸國뽕나무정이 같은데에(거기를 그때 나는 제일 먼곳이라
드렸으므로)나란히 자란 무슨 버섯같은 植物비슷하였었다.蘇生員에게는 또하나 異常한 버릇이 있
어서,각금 허리띠의 灰色주머니 속에서 깜아케 때에저른 생(生)을 끄내어서는 청성으로 질근질근씹어
먹는 것이였다.그 먹는時間으로 따저보면은 하로에 아마 스무번쯤은 그렇게 하는것이였다.이걸 보고있노
라면, 마을에 가끔오는 白髮이 허이여튼 생장사 老總角이 聯想되는것이였으나,생긴품이 소생원은
생장사와도 아조 다른 사람이였다.이러한 蘇生員네 房에 한참만 그대로 앉어있으면 어데선지 물컥
물컥 노린내가 나고,壁에 걸려있는 메투리,육날메투리 신ㅅ골망태,박아지짝 거미집,이런것들이 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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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만나보이고 죽엇으면 죽었지 나는 이런 버슷속같은 房에서는 한時도 살수없다 생각하는 것이였다.
겨드랑에서 나는것인지 이랫두리에서 나는 것인지 異常한 노린내가 蘇生員에게서는 어찌도 풍기이는
것이였든지.역시 나는 뭐니뭐니해도 우리아버지나,아저씨들처럼 밖에 나가서 밧도갈고 김도매고
벳쟁이 소리도 듣고사는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였다.밖에 나오면 벌써 蘇生員의 하눌은 아니였었다
(이것도 후에 생각하면 나의 誤解였든 모양이나.)집집이 대추남겐 풋대추가 붉게 붉게 물드려저잇
고,돌무덱이 풀섭에서는 벳쟁이가 툭 툭 뒷발로 무엔지 차고 날러다니면서 찍찍찍찍 머언 하눌나
라에서처럼 우러대는것이였다.하로는 (秋夕도 지내간후의 어느날)「귀염다래」에있는 할아버지山所에 아버지
를 따라서 省墓를 갔섰다.省墓하는 절이 다아 끝난후에 똥이 마려워서,혼자 외진 골짜이로 빠져
나와 어느 바위밑에서 쭈그리고 앉어 있을라니까,어데서 어떻게 알고 온것인지 蘇生員네집 누렁
이가 식식으리고 내 여폐와서는 떡깔나무 잎사귀를 한옹큼 쥐고있는 내손ㅅ등을 할트러 뎀비는
것이였다.이러서서 나는 四面을 살피였다.누렁이가 왔음에는 蘇生員네집에서 누가 반듯이 그近處
에 와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이든 까닭이였다.어쩌면 奇特하게도 蘇童이가 명감이나 山포도를 따
러와 있는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그러나 蘇童이가 온것은 아니였다.禪雲寺라는 절
로가는길의 낭떠러지 선바위아래,이러섰다가는 엎드리여 절을하고,절을하고는 다시 이러서고, ―\
이러한 즛을 쉬지않고 되푸리하는 사람이 있는것이 솔나무새이로 히끗히끗 보이여서,가보니까 그게
蘇生員이였다.먼빛으로 볼때에는, 蘇生員에게도 무슨 절할 墓ㅅ등이 다있어서 우리처럼 省墓를
왔는가 생각했드니,밧짝 옆에가서 보니까 墓ㅅ등이 있는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선바위(立岩)에다
대고 그렇게 至極히도 절을했썼는 것이였다.닭이 물을 마시듯,하늘 한번 우러러보고는 절을하고,
절을하고 하는것이였다.누런 쉬염이 햇빛에 유체 누리게 보이는 것이였다.무슨 願이 있섰든것인
지,或은 별다른 願도없이 절하는 우리와는 다른 特別한 習性이였든지,그건 알수없으나,그후에도
2․3次나는 이 선바위아래 절을하는 蘇生員을 볼 수있었다.그러나 蘇生員이 다른일로 밖에 나
오는것을 나는 별로 본 記憶이 없다.
② 선봉이네
선봉이네에게는 진한 꽃 자주저고리를 입었으면 어울렸을것이다.그러나 항시 수수한 흰저고리
만 입고 다니는 것이였다.四十\이 다된 선봉이네의 여쁜 곳을 똑접어서 말하라면 나는 곳 대답할수
는 없다.하여간,몸이나 키가 보퉁 녀자보다는 큰편이었다.手足도 큰편이었다.퉁퉁한살이 찐게아
니라 香맑고 밝은 다귀우에 오히려 간단히 붙어있었다.잘된 男子를 생각케하는 대문이 있는 女
人이였다.늘 든든히 땅을 드디고 뚜벅뚜벅 거러가는걸 보면 정말보단은 훨씬 커보이였다.잇발은 유
난히도 가즈런히 ―\ 그러나 조금도 잘지않는것이 얍고 좀 큰편인 입설속에서 어떤때에만 보이는
것이였다.행용은 구지 다처 있었다.히기보단은 푸른 잇발이였다.푸른빛은 또 너머나 수치지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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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밑에 약간 넓어보이는 이마와 얼굴에도 있었다.굵다란 손까락의 손톱끝에도 눈매에도 있었
다.
눈썹이 그리 지트지않은게 얼굴에 어울렸다.기-드란 속 눈썹 밑에서 말할때에도 생각은 머먼곳만
을 바라보는,눈에 어울렸다.아무도 쉬히 가까이 할수없었다.어머니와 같이 우리 모두가 거기가
서 쉬일수있는 모습을 진히고 있었다.어쩌다가 술국이는 쥐게되었는지 조끔도 술장사 티라고는
없는 女人이였다.
이 女人의 이야기를 적을수있는게 나는 기쁘다.조우히 생각을 기우리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三月
의 陽光이래 冬柏꽃나무 밑에서 우두커어니 서있든꼴이다.밖에 나타내이지는 않으나 머언 바다를
바라보며 아마 속으로는 어찌했으면 조홀찌를 모르든 모양이다.
나루ㅅ목으로 가는 언덕아래 갈가에있든 선봉이네 술ㅅ집엔 뒤뜰에 소얼찬이 너른 傾斜진풀빛
이 있었고,두그룬지 세그루의 冬柏나무가 거기 있었다.어느 三月이든지 선봉이네집 마당에서 아
버지가 누구와 싸우다가 많이 마쳤다고하여서 從兄과둘이 아버지를 찾으러갔었다.가보니 아버지는
겨우 이빨이 두개가 빠즈셨을뿐,마진 것은 오히려 저편이여서 從兄은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도라가
고,나도 갈라고 하니까 뒤한冬柏나무 밑에서 선봉이네가 「정주야」하고 나를 부르는 것이였다.숭
거운 싸움이 무척은 심심하였든 모양이다.
어디서 사왔는지 성성한 능금두개를 나에게 주며,따뜻현데 여기 앉아서 기다리다가 「너이 五寸」
배드러오는것이나 보고가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였다.冬柏나무우에선 빩앍안 冬柏꽃이 크으드란
女人이 머언바다를 내여다보며 눈을 끔적이는 새이만큼 새이를두고 조용히 조용히 落花하는것이였
다.나는 무심코 도라다니며 그것들을 주서보았다.모아서는 선봉이네에게 갔다주었다.두손으로 그
득히 갔다주어도 선봉이에의 손바닥으로론 하나밖에 되지않었다.조용히 앉어서 한손을 빌리며 오
래간만에 가느다란 입술을 벌려 우서보이는 것이였다.아무말도 없이 힌 치마에다 끄리는 것이였
다.선봉네의 항시 쉬여있는 두손과 좀 넓은듯한 손톱들이 오히려 나는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였
다.
선봉이는 항시 낚시질만 다녔었다.아조 치운겨울과 비나리는날만 除하고는 거이 매일과같이 南
領낭떠러지 밑에가서 살찐 숭魚를 낙거 날렀다.낙거다가는 회를만드러 대개는 혼자서 술을 마시
는것이였다.선봉이는 좀처럼 病이나는 일이 없었다.그전에 어디서 刑吏를 하였단말도있고,東學{
討伐隊를 따라 다녔다는말도 있고,하여간 마을에서 銃놀줄아는 사람은 선봉이뿐이라는 風聞이 있
었다.나이는 나의 記憶에 남은걸로는 四十\五六歲,귀밑에서붙어 보기조케 자라난 검고도 꺼칫꺼칫
한 쉬염을달고,아직 피가 듯는듯한 얼굴이 젊어서는 꽤 단단하였든 모양이였다.선봉이內外가 우
리마을에 드러오기는 아마 내가 떡아기쩍이거나 그 보담도 좀먼저였을것이다.언제 드러왔는지는 본
記憶이안나나 본래 그들이 질마재 사람들은 아닌 까닭이다.질마재에 드러올때에는 소반한닙도 없이,
큰놈이라는 아들하나만을 데불고와서,나종에 자기들이 술ㅅ집을 하게된 그집에 留宿하고 몇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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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세사람의 밥을 사먹었다는 것이다.돈은 몇百兩이나 가지고 왔든지 나종에 그집과 세간을 모
조리 사버렸다는 것이다.선봉이네 內外가 남달리 誼가조케 지낸다는 말도,그러하고 誼가틀려서
싸운다는 말도,나는 한번도 드러본일이없다.안해는 안해대로 술 국자를 안들때는 머언 바다만
내여다보고,남편은 남편대로 낙시질만 다니는 것이였다.도대체 밥먹을 때外에,선봉이네 內外가 나
란히 앉어있는것을 보기는 퍽 드문일이였다.절대로 한번 겸상을 하여보는 일도없이 따로따로의 상ㅅ가
에 앉어서 「국이 좀 숭겁네」하고 끄린술꾹이 좀 숭겁다고 선봉이가 말하면,「간장을 드릴까요」하고 妻
는 그저 간단히 바더넘길 뿐,간장병을 손수갖다주는일도 숭거운 쑥국에 그걸 처주는일도 절대로없었
다.그러타고 선봉이가 화를내는일도 절대로 없었다.그러나 그러치 않은경우가 꼭하나 있었다.그건
좀처럼 앞어서 누어본 일이 없는 선봉이가 病이 날때였다.잘해야 1年에 한번쯤 선봉이가 알른病은
대개 무슨 形體도모를熱病이였다.흔이 그건 여름이였다.
그러잔혀도 붉은얼골이 유체 버얽어케 달아가지고,여튼 홋니불을 쓰고 房아랫목에서 선봉이가 알
코 있을때는 안해는 平時와는 완연히 딴사람이 되는것이였다.
웬일인지 자기의 얼골도 약간 붉어져가지고는,―\ 異常한일이나 선봉이가 病을 아들데에만 선봉
이네 안해의 얼골에는 花氣가 도닷다.―\ 마을 아는집으로 도라다니며 접시꽃뿌리와 앵속殼을 구
해오는 것이였다.접시 꽃뿌리를 끄린물을 사기대접으로 하나 그득히 들고 드러와서는 선봉이의 머리
맡에 공손이 앉어서 곱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훌륭한 그의 손으로 선봉이의 이마를 고요히 짚으며
가만히 소곤거리는것이였다.「좀 이러나서 잡수아보시오 에」손수 그릇을들고 입에다가 마시어주며,「어찌서
그러시오 애?어찌서 그리라우?」혼잣말처럼 물어보면서,역시 양볼은 붉어가지고 선봉이가 完快하야
이러나기까지는 그옆을 떠나지 아니하는것이었다.그것은 행용,우리들의 안해에 비겨본다면 안해以
上의 誠實이였다.좀 仔細히 볼줄아는 사람의 눈에는 一種의 義務와같이 보일수도 있는것이였다.그
러나 선봉이가 아조났으면 선봉이의 안해의 얼골에서도 붉은桃花빛이 슨러지는 것이였다.그리고는
如前의 狀態로 도라가는 것이였다.이러한 夫婦새이에 子女는 어떻게해 三男이나 둘수있는 것이였
든지,―\ 그러나 移徙을때 데불고 온 「큰놈」外에도 딸하나와 아들하나를 질마재에 와서 나헛다.
역시 子女에게는 充實한 어머니였다.선봉이네 內外에게는 大凡}아래와같은 逸話가 있었다.간단
히 말하면 선봉이는 선봉이네 안해의 本{夫가 아니였다는것이다.本{夫는 딴곳에서 살고 있었다는것
이다.甲午年이라든가,―\ 乙未年은 아닐것이고 아마 甲午年이라고 들은 것 같다.
시방 선봉이네 안해의 本{夫는 東學{黨}이라든가 무에라든가 무슨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
턴 하여간 좋지못한 一團을 따라다녔었다고한다.들은바에 依하면 한 二十\名쯤 指揮했다는 말도
있다.그게 공교롭게도 그때 마침 淸人들과 合勢하야 東學{을 討伐하러나왔든 선봉이들의 分隊에게
잡힌배되어 날만 밝으면 낭떠리지 아래에다 내세우고 銃殺의刑을 밧게 되었다고한다.그 날 밤 이
였다.한名의 少婦가 討伐隊의 陣地를 찾어왔었다.구지 다친 입술가에는 구든 決意가 보이였었다.
다아 술에 떨어져서 자고,홀로 깨여있는 선봉이에게 少婦는 업드리여 뵈는것이였다.「甲乭이의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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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여 주옵시요.저를 대신 죽이시고 제 男便甲乭이의 목숨을 구하여 주옵시요……」淸人들과 같이 얼
근히 마신술이 骨수에밴 선봉이의 눈에 먼저 보이는건 범연치안흔 그의미모(美貌)이였다.이렇게해
서 本{夫를살린 선봉네는 선봉이를 따라서 질마재에까지 왔든것이였다.해마닥 사니라면 나이는 또
한 제대로 느는것이여서,나에게는 능금두개를 주든때에는 벌서 三十\이 훨씬 지내였었고,至今은
五十\이 넘었은 年세일텐데,不幸히 年前에 作故하였다.
「新時代」(194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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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서정주작품연보 미수록 목록 58편(시 46,수필 4,산문 8)
발표년도 작품명 게재지
<시 46>
1934 어촌의 등불 학등(8월)
〃님 〃
1936 정오의 언덕에서 조광
1937 慶州詩사해공론(4월)
1938 수 대 동 시 시건설(6월)
〃부흥이 〃
1939 엽 서 비판
〃부 활 조선일보(7월19일)
1941 가시내 남만서고
〃와가의 전설 〃
〃단 편 〃
1943 귀촉도 춘추(32호)
1946 백옥루부 수산경제신문(6.10)
〃통곡 해동공론(12.1)
〃석굴암.관세음노래 민주일보(12.1)
1948 그날 예술조선(1월)
〃눈 평화일보(2.24)
〃곰 새한민보(2.중순호)
〃듸의 頌歌(송가) 평화신문(2.17)
〃논개 민족공론(9월)
〃목화 귀촉도 선문사(4.1)
〃춘향유문 민성 (5월)
1949 八月十\五日에 경향신문(8.15)
1951 一線車中에서 전시문학독본
(김송 편)계몽사
1954 상리과원 현대공론(2월)
1955 단편초 협동46호(2월)
〃향수 문예예술(7월)
1956 학 미당서정주시전집 91면
〃내리는 눈밭속에서 미당서정주시전집 102면
1960 古調壹 신라초 1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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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년도 작품명 게재지
1960 古調貳〃 124면
〃해 〃 119면
〃숙영이의 나비 〃 126면
1966 동천,여행가 예술원보(12월)
〃옛 성현들의 말씀대로 월간문학(6월)
1968 마흔다섯 동천 민중서관(11.30)
1975 七夕 질마재신화 일지사(5.20) 미당서정주시 전집 323면
〃외할머니의 뒤안 튓마루 질마재신화 일지사(5.20) 미당서정주시 전집 286면
1976 내가 타는 기차 떠돌이의시 민음사(7.25)
1979 나의 시 한국문학(7월)
〃서경 신동아(10월)
〃세계 떠돌잇 길에 나서며 한국문학(7월)
1980 선운사동구 한국문학총서
1982 東夷(동이) 미당서정주시전집 572면
〃월명스님 미당서정주시전집 638면
〃풍 류 미당서정주시전집 570면
<수필 4>
1943 스무살 된 벗에게 조광97호(9월)
1948 나무그늘 민족문화(10월)
1955 신라인의천지 협동47호(4월)
1982 내 시를 읽는 독자에게 소설문학(1월)
<산문 8>
1935 속 필파라수초 동아일보(11.5)
1938 배회〈램보오의 두개골〉조선일보(8.13)
1942 질마재의 근동야화<승운이와 가치> 매일신문(5.13)
〃질마재의근동야화<밋며누리와 근친> 〃
〃질마재의근동야화<동체와 그의 처> 〃
〃향토산화 신시대(7월)
〃고향이야기 〃
1950 묘윤숙 선생에게 해성제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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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1943-1944)
연도 작품 제목 게재지(월일자) 비 고
1943 崔遞夫의 軍屬志望朝光(9월)
희곡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
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1944 玉樓夢(연재) 春秋(3월․10월) 번역소설( 〃 )
<희곡>
연도 작품 제목 게재지(월일자) 비 고
1974 永遠의 미소 文學{思想(4월)
희곡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
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傳記>
연도 작품 제목 게재지(월일자) 비 고
1949 李承晩博土傳三八社
희곡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
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민화집>(참고장르임)
연도 작품 제목 게재지(월일자) 비 고
1991 《서정주세계 민화집》간행 민음사(1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 -미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수록
<設門>
연도 작품 제목 게재지(월일자) 비 고
1967 期待되는 大統領像세대(4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
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시>1933-1982(285편)
연도 작품제목 게재지(월일자) 비 고
1933 그 어머니의 부탁 東亞日報(12월 24일)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수록
1934
서울가는 純이에게 東亞日報(5월 8일)
冬柏學{燈(6월)
西쪽하늘을 맡겨두고 왔거마는 學{燈(9월)
가을 東亞日報(11월 3일)
비 내리는 밤 東亞日報(11월 23일)
어촌의 등불 學{燈(8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님 〃 (〃) (1997.6.15)-미수록
1935
생각이여 學{燈(1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새벽 誦呪 東亞日報(3월 30일) (1997.6.15)-수록
〈자료4〉장르별 서정주 작품 연보(1933-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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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壁(新春文藝當選作品) 東亞日報(1월 3일)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감꽃 東亞日報(8월 9일)
문둥이 詩人부락 1호(11월호)
1936
獄夜詩人부락 1호(11월호)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대낮 詩人부락 1호(11월호)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絶望의 노래 詩建設1호(11월호) 미당시전집 ,민음사(2001.2.5)-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미수록
花蛇詩人부락 2호(12월호)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달밤 詩人부락 2호(12월호)
房詩人부락 2호(12월호)
정오의 언덕에서 조광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미수록
1937
입맞춤 子午線1호(1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앉은뱅이의 노래 子午線 1호(1월) 서정주시연구 -수록
흐르는 불 詩建設2호(9월호) 미당시전집 ,민음사(2001.2.5)-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미수록
慶州詩사해공론(4월) 미당시전집 ,민음사(2001.2.5)-미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미수록
1938
門批判(3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바다 四海公論(10월)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수록
母獏(10월) 〃
處女像朝光(11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여름밤 詩건설 6호(12월호)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수록
수대동시 시건설(6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부흥이 〃 서정주시연구 -미수록
1939
地歸島朝光(3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수록
雄鷄詩學{(3월)
雄鷄(上) 詩學{(3월)
自畵像詩建設7호(10월)
高乙那의 딸 朝光(5월)
풀밭에 누어서 批判(6월)
봄 人文評論(11월)
엽서 비판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미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수록
부활 조선일보(7월19일)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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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대낮 新撰詩集(2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수록
麥夏新撰詩集(2월)
입맞춤 新撰詩集(2월)
서름의 江물 朝光(2월)
밤이 깊으면 人文評論(5월)
桃花桃花人文評論(10월)
西風貝武文章(10월)
1941
滿洲에서 人文評論(2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수록
멈둘레꽃 三千里(4월)
실구꽃 필때 文章(4월)
干潮春秋(7월)
가시내 남만서고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미수록
와가의 전설 〃
단편 〃
1942
거북이 春秋(6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수록
여름밤 조광(7월)
〃
감꽃 조광(7월)
1943
航空日之國民文學{(10월) ※詩(日本{語雜誌試作의 詩)
귀촉도 춘추 32호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미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1945 꽃 民心(11월)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및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6.15)-수록
1946
밤 開闢(1월)
〃
門열어라 鄭도령아 朝鮮週報(1월)
서귀로 간다 民心(3월)
牽牛의 노래 新文學{(6월)
피-윤봉길의 날에 동아일보(4.30)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백옥루부 수산경제신문(6.10)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미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국학자료원(1997.6.15)-미수록
통곡 해동공론(1946.12.1) 미당시전집1 ,민음사(2001.2.5)-미수록
육근웅 서정주시연구 ,석굴암 관세음 노래 민주일보(1946.12.1) 국학자료원(1997.6.15)-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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