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월과오월 이지민 님과의 만남과 지난 추억들 >>
이지민을 처음 만난건 중학교 1학년 때인 1967년 여름이었다.
나는 중학교 입학 전형이 있었던 때라 1년 재수해서 들어간 양정중학교에서
보이스카웃에 입단을 했는데, 그 해 여름에 태릉에서 국제 잼보리 대회가 있었다.
이 곳에서 함께 참가한 이지민을 처음 알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엔 지금의 동해시인 후진 해수욕장에서
한국 캠보리 대회가 열렸는데, 이 캠프에도 이지민과 함께 참가했다.
캠보리 대회 도중에 태풍이 불어오는 사태를 맞아 비바람치는 중에
텐트를 걷으며 묵호의 어느 초등학교로 피난 철수를 했다.
이지민과는 반이 달라서 학교 생활 중에는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단지 보이스카웃으로 함께 캠프에 참가해서 어울렸던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도 만나면 옛날 중학교 시절 보이스카웃 캠프에서 일어났던 기억들을 더듬으며
보이스카웃 지도 선생님의 별명과 우스웠던 말투를 흉내내며 회상할 뿐이다.
우리는 타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같은 양정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지민은 문과반 나는 이과반이라서 또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소풍 갔을 때 각 반 대표로 장기대회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하는 것을 보면서
각 반의 명물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이지민은 소풍 때에 항상 다른 친구와 함께 기타를 들고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지민과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 1학년 겨울방학 즈음이었다.
어느 날 신문에 뽀빠이 이상용 선배가 대장인 '도레미회'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학창시절부터 연예 활동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던 나는 소풍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이지민이 생각났다.
이지민을 찾아가 무조건 함께 '도레미회'를 찾아 가 보자는 나의 제의에
선뜻 의기 투합하여 '도레미회'를 찾아 갔다.
'도레미회'는 청계천2가 청소년 회관에 건전가요 부르기 운동을 하고 계셨던
하모니카로 유명하셨던 전석환 선생님의 사무실에 있었다.
무조건 노크하고 들어간 그 곳에는 뽀빠이 이상용 선배와 김인순, 김만수,
채은옥,영채와혜경, 김현규, 이장희 님을 닮은 원철희, 유심초(유의형),
하야로비(김영진,표화영)가 있었고, 뽀빠이 이상용 선배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도레미 회원들은 나이가 비슷한 선배 동기들이었고,
대개 1973년에 데뷔해서 활동하고 있는 포크 동아리였다.
이상용 선배는 ROTC 포병장교 복무 후 여러 직업을 거쳐 MC로 활동을 시작하던 때였다.
그 당시에는 도레미회 같은 동아리 그룹이 여럿 있었다.
내 기억으론 TBC,동아방송 등에서 스크립터로 활동하시던 전유성님,
문화방송의 홍정표,전영호 님을 중심으로 한 통기타 그룹,
MC로 활동하시던 임성훈 님의 꿀단지 개그클럽..등등이 기억난다.
개그맨으로 활동했던 최미나 선배도 꿀단지 클럽 멤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찐빵집 딸 '한심이'의 정광태 님도 경희대의 '만두요리'박성원과 함께 주가를 올렸였다.
이상용 선배의 제의로 명동에 있는 음악평론가 이백천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르시랑스라는 곳에서 노래를 선 보기로 하였다.
르시랑스는 신을 벗고 들어가는 카페트가 깔려진 응접실같이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었다.
들어가서 잠을 자도 ?獰解?, 무엇을 하던 상관하지 않는 그런 자유스러움이 있었고,
전유성 고영수 이동원 둘다섯 등 한창 인기 있었던 분들을 직접 뵐 수 있는 곳 이었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그런 까페였다.
그 곳에서 이동원 선배를 처음 뵈었고 "빈센트" 노래를 듣고 감명받았다.
둘다섯도 만나 인사를 하게 되었고, 휘문고를 나오신 이두진 선배와는
나의 사촌이 휘문고에 재학 중에 클럽을 만들어 나도 같이 클럽 멤버였기 때문에
휘문고 친구들 얘기를 하면서 가까와졌다.
이러한 이두진 선배와의 인연으로, 일년 뒤 오세복의 미국 이민으로 짝을 잃은
이두진 선배로부터 둘다섯 멤버 되길 요청 받아 이지민을 이두진 선배에게 소개해서
'일기"라는 곡을 취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지민과 "민이와 훈이"라는 듀엣 이름으로 르시랑스에서 부른 곡은
에버리브러더스의 "All I have to do is dream"이었다.
이백천 선생님으로 부터 곱고 화음이 좋다는 평을 들었다.
'도레미회'의 일원으로 처음 방송에 나간 것은 1974년 1월인가 2월인가에
문화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DJ는 여류작가셨던 오혜령 교수님이셨다.
출연 동기는 도레미회 1회 콘서트 홍보 차원에서 도레미회원들이 출연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 방송 시작 전에 일찌기 방송국에 가서 대기를 하였다.
이지민은 기다리는 긴 시간동안에 떨린다고 밖에 나가서 술 한잔 하고 온 기억이 난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방청객 없는 별밤 스타디오에서 첫 방송 데뷔를 했다.
74년 봄에 한국일보 강당에서 도레미회 발표회가 있었고,
그 다음엔 대전 대전여상 강당에서 공연이 있었고, 그 다음이 춘천 공연이었다.
춘천 공연에서는 춘천지역 언더가수로 활동했던 김민식을 만나게 되고,
서울로 와서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김민식은 그 후 "나의 사람아"로 인기를 얻게 되고
쉘부르 스테이지에 서면서 함께 어울려 다녔다.
74년은 도레미 회원들과 어울려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해였다.
'도레미회' 대장이셨던 뽀빠이 이상용 선배의 집은 상도동 종점에 있었다.
그러니까 숭실대학교 앞 큰 길가 건물 2층에 있었다.
'도레미'회원들이 함께 놀러가서 사모님도 뵙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난다.
대학 2학년 때인 74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기타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노래보다도 다른 길을 모색하고,
이지민도 친구인 여자멤버와 짝을 이루고 무교동의 어느 라이브 무대에 섰고,
나는 TBC라디오 음악 프로 "팝송다이얼"의 DJ를 맡게 된 김인순 님과 잠시 어울리다가,
학교 1년 선배며 보이스카웃 때 알게된 선배와 같이 "빙그레"라는 듀엣으로,
윤형주 선배가 사회를 보았던 KBS TV "젊음의 행진"과
이상용 선배가 진행했던 "팝스 투나잇"등에 출연하면서 제각기 활동하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74년 연말에 이두진 선배에게 이지민을 둘다섯 멤버로 소개하게 되었고,
이 두진 선배의 용산역 근처 아파트에서 몇 곡 맞추어보고는 둘다섯 멤버가 되었다.
75년은 이지민이 포크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해였다.
둘다섯 멤버로 주로 명동 "로즈 가든"에서 밤 일도 하면서
TV 및 라디오 방송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고, 동창 선배들과 동료,
친척들의 친분을 통한 포크계의 여러 가수들과 친분을 넓히는 시기였다.
75년 그해는 대마초 사건, 명동 사보이호텔 난투극 사건들이
있었던 해로 기억된다.
개그맨 임하룡 님은 신사동 사거리 "사계절"이란 까페에서 오리춤 개그맨으로 인기를 끌고있었고,
김학래님 정광태님, 박성원님,이홍렬 님등이 활발한 방송 활동을 할 즈음인 이 때부터
개그 쪽도 독자적인 계보를 이루기 시작한 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동창 친구들은 유일하게 밤무대로 돈을 벌고 있었던
이지민이 출연하던 명동의 "로즈가든"을 자주 찾아 갔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 한 밤중에 술취해서 어울렸던 친구들과 골목을 지나가는 택시를
발길질 하기도 하고, 육교 위에서 업소에서 받은 돈(개런티)을 뿌렸다고 하는 일화도 있고,
대마초 사건 때엔 업소에서 노래가 끝난 후 이두진 선배와 함께 끌려 갔다가 오기도 했다.
그 후 76년에 이두진 선배의 활동 중단으로 둘다섯이 해체되어,
이지민은 평소 가까이 어울렸던 '하야로비'김영진 선배와 함께 듀엣하면서
'사월과오월'이라는 그룹 이름을 백순진 선배로 부터 물려 받아,
77년에는 사월과오월 3기 멤버가 되어 "장미"를 발표하였고,
가요 톱텐 순위 1,2위를 다투는 힛트 곡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이지민의 데뷔 동기와 발자취였다.
대학 다니면서 둘이 같이 통기타 부대에 몸 담으며 연습 때문에
거의 매일 같이 이지민의 집을 찾았다.
이지민의 집은 한남동이었고 나중에 면목동으로 옮겼다.
이지민의 집에 가면 맘씨 좋으신 어머님과 예쁘게 생긴 여동생이 있었다.
아버님은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셨고 상당히 엄하게 보이시는 분이셨다.
그러한 집안에서 연예 활동을 계속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이지민은 아버님의 잔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사월과오월로 '장미'를 발표하고 2-3년 뒤에
건설회사에 취직하여 사우디로 가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지민이 취직을 하고 얼마 안지나서 사우디로 간 뒤부터는 소식이 끊기게 되었다.
내가 기억나는 이지민의 성격은 무척 단정하고 약간 까탈스럽기도 하고
느긋한 면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지민의 집에서 외출을 할 때면 여자 화장하는 것처럼 준비 시간이 무척 길었다.
깔끔한 여고생들이 깨끗한 교복에 흰칼라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리듯이,
항상 새로 드라이하고 주름없는 옷을 골라 입었고, 또 마음에 안들면 다른 옷을 꺼내고,
어떤 때에는 골목길을 한참 내려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갈아입고 나온 적도 있었다.
식성은 미식가 기질이 있어서, 양은 많지 않았으나 입맛이 까다로운 면을 보였다.
하루는 중국집 옆을 지나가다가 " 야..짜장 맛있겠다..짜장 한그릇 먹고 갈까?" 하면서
같이 들어 가서는 한 두입 먹더니 " 맛이 없다..못 먹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식성도 좋고 몸도 염려스러울 정도로 부풀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마른 체형이었다.
30년전 이지민과의 에피소드를 기억해 내려니 기억이 가물가물 한 것이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지민과의 옛추억을 써서 보내달라시는 가요평론가 이백천 선생님의 숙제로
지난 날을 기억하며 이상의 글을 작성했지만, 반 쪽의 기억이고, 나와 이지민,
그리고 함께 어울렸던 동료 선배들의 기억들이 합쳐져야 완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메모리스에서 여러 친구들과 선후배가 모여 여유롭고 화기애애하게
지난 추억들을 더듬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