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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5회 목요철학 세미나
제목: 서양철학의 수용과 한국철학의 개념
연사: 백종현(서울대 철학과)
일시: 1998년 10월 29일 오후 5시
서양철학의 수용과 한국철학의 개념
1. 서양철학 유입과 제기되는 문제
일반적으로 말이란 우리 인간의 어떤 사태에 대한 사색과 경험의 표현 수단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어떤 새로운 말, 새로운 낱말을 갖게 됨은 우리가 새로운 사태에 접했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철학(哲學)’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줄잡아 1세기쯤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서양의 철학 사상이 최초로 한국에 유입된 것은 이미 17세기 초엽 중국을 거쳐 천주교 교리를 중심으로 한 서양 학문이 ‘서학(西學)’이라는 이름 밑에 한국에 전파되면서부터라 해야 할 것이다. 그후 여러 문헌에서 오늘날 우리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원 명칭인 ‘philosophia’의 중국식 독음을 따서 ‘費祿蘇非亞’, ‘斐錄所費亞’ 또는 ‘飛龍少飛阿’라고 지칭하고 있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학문의 본령으로서 철학은 20세기 초(1912년 경) 이인재(李寅梓, 1870-1929)가 중국 책『哲學要領』(日人 井上圓了 저, 中國人 伯雅 역), 『哲學論綱』(프랑스人 李奇若 저, 中國人 陣鵬 역), 『飮氷室文集』(梁啓超 저)을 참고하여,『希臘古代哲學攷辨』을 펴내면서 한국인들에게 소개되었고, 그러니까 그것을 계기로 한국 사회 문화에 ‘철학(哲學)’이라는 말이 정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1) 고대 희랍 철학을 소개 해설한 이 책에서 이인재는 ‘萬象 가운데서 一理만을 연구하여 實用을 찾는 과학과는 달리 철학은 百科의 學으로서 삼라만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이라 설명한다. 또다른 조사 보고에 따르면 보성전문학교 1907년도 교과과정에 ‘논리학’ 과목이 등장하고2), 연희전문학교 1921년도 교과과정에는 ‘논리학’, ‘윤리학’을 비롯해 ‘철학개론(哲學槪論)’이라는 교과목이 들어 있었다 하니3), 이것은 이미 서양 학문의 유입과 더불어 ‘철학(哲學)’이라는 낱말과 그 낱말이 지시하는 내용이 함께 한국 사회에 상당히 유포돼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국 사회 문화가 1세기 이래로 ‘철학(哲學)’이라는 새로운 어휘를 갖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체험을 했음을 말해 준다.
이른바 ‘서양 철학’의 유입에서 비롯한 이 새로운 체험은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단지 새로운 어휘를 갖도록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낱말들로 표출된 사태를 대면케 하고, 그 사태에 대한 사색을 이끌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졌고, 새로운 문제 의식을 불러 일으켰고, 새로운 발상법을 유도하였다. 요컨대 새로운 사상을 배태 내지 형성케 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유래한 새로운 사상 즉 ‘서양적’ 사상은, 사상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위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 그 만큼 한국 사람들의 제반 일상 생활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무릇 우리가 서양 철학이 유입된 이후에 형성된 사상을 ‘새롭다’고 하는 것은, 그 사상이 주제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제기되는 문제를 다루는 방법에서 재래의 것과 눈에 띄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것에 비해 그 주제에 있어서 다르고, 문제를 탐구하는 방법이 다르고, 그 탐구 결과가 새로운 언어로 쓰였는데도, 그것은 여전히 ‘한국인들의’ 사상, ‘한국의’ 철학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 여기서 우리는 ‘철학’이란 대체 무엇이고, ‘한국의 철학’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고, 이른바 서양 철학의 유입이 한국 철학 사상 형성에 어떤 기능을 하였으며, 한국 사회 문화의 전개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한번 쯤 반추해 보아야 할 필요를 발견한다.
2. 외래 사상과 ‘한국의’ 철학
한국이 적어도 2,500년 이상의 문화사를 가지고 있고, 삶의 양식 형성에는 불가불 철학 사상이 관여되기 마련이라면, 한국에는 이미 전통 철학 사상이 있었을 터이고 실제로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무슨 연유로 한국 사회에 낯선 사상이 유입되고 그것이 단지 호기심을 따라 소개되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경쟁적으로 배워 익히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게 되었는가? 한국 사람들은 왜 1세기 이래로 서양의 철학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철학으로 삼고 있는가?
‘철학’이라는 것도 하나의 학문이고, 학문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보편적인 지식의 체계를 일컫는 것이겠는데, 도대체 ‘서양의’ 철학, ‘동양의’ 철학, ‘한국의’ 철학, 또는 ‘조선시대의’ 철학, ‘이율곡의’ 철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남의 철학을 배워 내 철학을 삼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며,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일이며, 그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지칭하는 것이고 보면, 우리는 우선 문자적으로는, 한국의 철학이란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한국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와 제 영역의 통합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 또는 그 결실’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규정이 무난하다면, ‘한국’이 들어갈 자리에, ‘서양’이나 ‘동양’, ‘독일’이나 ‘중국’을 넣거나, 더 나아가서 ‘기호 지방’, ‘영남 지방’ 또는 ‘세계’, ‘인류’를 넣어 ‘~의 철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도, 예컨대 ‘한국 사람’, ‘한국에서 통용되는 언어’, ‘한국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또 이 세 조건 중 일부만 충족시키는 경우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좁게 때로는 넓게 적용될 수가 있을 것이며, 심한 경우 그 기준을 아주 느슨하게 사용하면 ‘서양 철학’, ‘한국 철학’ 따위의 구별이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과연 철학이 국적을 갖는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철학의 국적을 말해 주는 징표는 무엇인가? 우리가 한국 철학을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철학인가?
“어떤 철학의 국적을 결정짓는 것은 그 철학을 배태시킨 철학자의 탄생지도 아니고, 그 철학자가 주로 활동한 지적 단위체나 그가 사용한 언어도 아니다.”4)고 생각해서 “철학은 국가적 성격을 갖기보다는 개인적 성격을 갖는 것”5)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의 생각을 우리는 어떤 수준에서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희랍 사상과 중국 사상, 독일 철학과 영미 철학을 구분해서 말하는 것은 헛된 짓일까?
문화권의 경계라는 것이 먼 빛으로 보기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갈 수록 희미한 탓에 지도에 국경을 표시하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성의 문화를 충분히 의미있게 공간적으로․시간적으로 구분하여 얘기할 수도 있고, 구별되는 대개의 특징을 열거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또한 문화의 한 양상인 철학에 대해서도 물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언제 어디서 살았고 살든 인간인 한에서 상호간에 보편성을 나눠 갖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개인간에 집단간에, 뿐만 아니라 일정 개인이나 집단이라 하더라도 연대별로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어떤 철학도 그것이 철학인 한 ‘원리적 지식 체계’라는 보편성이야 가지고 있겠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했고 하는가에 따라 구별될 수도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구별하고 청년 칸트의 철학과 장년 칸트의 철학을 구분하며, 퇴계 이황(李滉)의 사상과 율곡 이이(李珥)의 철학을 구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똑 같은 정도로 의미있게 한국 철학과 독일 철학을, 그리고 조선 중기의 한국 철학과 현대의 한국 철학을 구별하여 말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고대 희랍 철학의 축이며,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근대 독일 철학의 핵이고,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은 근세 조선의 철학을 대표하며, 열암 박종홍의 철학은 1950/1960 년대 한국 철학의 일면을 분명하게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김재권이 한국인의 한 혈족이라 하더라도 그가 미국 사회 문화 속에서 생긴 학문적인 문제를 미국말로 쓰고 생각하고, 그 결과가 미국에서 화제거리가 된다면, 그의 철학적 작업은 ‘미국적’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독일 철학계를 들판으로 비유할 때, 한국인 백 아무개가 독일에서 독일말로 칸트 철학에서 제기된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했다면, 그의 작업은 독일 철학계라는 들판에 돋아나 있는 들풀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뜻에서 ‘독일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서 한국적인 ‘임[함]-있음’의 문제 시각에서 ‘존재자의 본질-존재’ 해명을 시도했다면, 그의 작업은 ‘한국적’이다. 더구나 그가 다시 한국에서 이 작업을 한국의 문화 의식 속에서 한국어로 계속하여 결실을 본다면, 그것은 한국 철학의 일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이런 정도로 ‘한국 철학’을 규정하고, 다시 물어 보자. 대체 ‘철학’은 무엇인가? 어떻게 돼서 한국 사람들은 1세기 이래 서양의 철학을 접하게 됐고, 왜 반세기 이래 급기야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본뜨고, 그 사상 흐름과 유행에 편승하고 있는가? 대체 이런 판국에 사람들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서 ‘한국 철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우리는 최근 100년 세계 정세에 편입되어 진행되어간 한국의 일반 역사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른바 철학자들은 철학이 제반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자부하나, 사실은 여타 문화 영역을 뒤따라 가는 경우가 더 많다. 1900년대 초에 서양 철학이 한국에 유입된 것도, 당대 한국인들의 철학적 자각과 모색으로부터 그 길에 이르게 되었다기보다는 서양의 제반 문물이 세계 정세의 흐름에 따라 한국에 밀어 닥침으로 인해 서양 문화의 한 가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다가 철학의 학문적 성격과 역할이 제 과학의 맨 뒤에 오면서도 제 과학의 단초와 원리를 추궁하는 것인 만큼, 한국의 제반 학문 세계가, 다시 말하면 표층 문화를 주도하는 물리학, 의학, 천문학, 지리학, 생물학, 법학, 정치학의 세계가 이미 서양적 흐름에 합류했는[휩쓸려 들어 갔는]데, 철학이 여전히 성리학적인․실학적인 아니면 동학(東學)적인 전통만을 이어간다면, 그렇지 않아도 현대에 와서 신통치 않아진 이른바 분과학(分科學)의 근본학으로서의 철학의 역할은 더욱 더 현실과 유리될 수밖에 없다. 현대 한국 사회의 질서와 정의의 골간을 이루는 헌법 체계가 어느덧 유교 원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정신을 떠나 미국 헌법, 불란서 인권선언, 독일 헌법 정신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재래의 법철학, 정치철학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법 원리, 정치 원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미 사람들이 수학적 이성과 자연과학적 실증성에서 합리성의 전형을 보고 있는데, 재래 한국의 어떤 사상을 대안으로 끌어댈 수 있겠는가?
한국에서 당초에 서양 철학의 접수가 자발적이 아니었음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현실 생활과는 전혀 무관하고 철학자가 사회 생활에서 완전히 떠나 있다면 몰라도, 이미 사회 근간이 서양식으로 재편되어 가는 마당에 철학한다는 사람이, 그가 순전히 과거 한국 철학의 역사 연구가이길 지향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재편되어 가는 문화 양상의 근거를 탐구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 운영의 토대인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전통적인 퇴계나 율곡 혹은 다산의 사상보다는 로크나 루소 또는 칸트나 밀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더 필요로 한다. 물론 문화 양상은 중층적인 만큼 표피층에는 새로운 물결이 일어도 심층에는 여전히 옛 물이 두텁게 남아 있을 수 있다. 바로 그 만큼은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서양적 철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한국식 서양 철학, 바꿔 말해 화제는 서양에서 발원했으나 그러나 이미 한국인들 자신의 문제를 다루는 한국인들의 철학, 곧 한국(적) 철학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서양 철학을 수용했고 그리고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로 인해서 한국인들의 철학적 문제가 순전히 ‘서양적’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얘기는 과거 한국인들이 예컨대 삼국시대에 불교 사상을 수용한 것에 대해서도,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성리학을 수용한 것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주류(主流) 사상은 언제나 외래적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상사는 외래 사상 수용사인데, ‘한국 사상’ ‘한국 철학’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과연 외래 사상을 접수했다고 해서 일체의 고유성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일까? 독일 이상주의 철학이 연원을 따지면 희랍 사상이고 기독교 사상이라 해서 우리는 독일 철학을 얘기할 수 없는가? 문제의 발원이 남에게 있다 하더라도, 문제 의식이 수반되어 그 문제가 이미 자기 문제가 된다면, 그 문제 해결 방식과 결과도 상당 부분 자기 것이 된다고 보는 게 온당하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에게 서양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한국 철학의 일부이다. 기자(記者)적 관심에 의해 단지 소개되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한국적 문제 의식과 문제 해결의 관심에서 한국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고 변용된 ‘서양’ 철학은 그 만큼 ‘한국의’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 사람들이 오랜 동안 중국 철학사상을 수용하다가 난데없이 서양 철학을 떠들게 된 것은 ‘한국의’ 제 문화 양상이 어느 사이 서양화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한다. 1세기 이래 당초에 한국 사람들이 그것을 평가하고 선택할 겨를도 없이 서양 철학이 유입되고,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오늘날의 한국 철학 형성에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단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의 주체성 결여에서라기보다는 한국의 문화, 적어도 표층 문화 전반이 서양화하는 탓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철학하는 사람들이 주체성도 없이 어제는 중국 철학에 오늘은 서양 철학에 ─ 그것도 독일 철학, 불란서 철학, 영미 철학 등 이른바 강대국 문화권의 철학을 번갈아 가며 ─ ‘사대주의적으로’ 쓸려 들어간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오히려 오늘날 한국에서 ‘주체적으로’ 철학하는 사람은 ‘서양’ 철학을 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람들이 아프리카 (탄자니아나 니제르)의 철학 혹은 아라비아의 철학은 거의 수용하지 않고, 중국 철학이나 서양 철학을 수용한 것은 그것이 ─ 수동적으로 세계 정세에 따른 일이든, 능동적인 문화 향상 전략의 일환이든 ─ 한국의 제반 문화․학문 영역에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고, 그 가운데서 자신들의 삶을 꾸려 갈 수 있는 원리를 어느 면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니 말이다. 과거 한국 사람들에게 수용된 ‘중국’ 철학이 이내 자기의 철학이 되었듯이, 그와 같은 정도에서 그리고 같은 의미 연관에서 현대에 한국 사람들이 수용하는 ‘서양’ 철학은 이제 현대 한국인들 자신의 철학의 일부가 되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한국 사람들이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히려 유감스러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 철학 사상의 유입이라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탐구 대상으로 부각된 철학적 문제들이 다분히, 종래 탐구의 연장선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갑작스레 정치적 외세(外勢)에 실려 한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에게 부과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 철학사 주류의 관점에서는 19세기 말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에게도 서구 철학 사상이 유입됨으로써 한국인들도 고립된 변방적 삶에서 벗어나 세계사의 대류에 합류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한국 철학 사상을 통사(通史)적으로 볼 때, 한국 철학 사상사는 19/20세기 간에 단절과 전환이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단절은 한국 철학 사상의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였다고 언젠가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일단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의 힘과 자생력을 잃고 ‘세계 주류’라는 이름 아래 우리에게 밀려 들어오는 서양 강대국에서 힘을 얻은 사상을 수입하여 주석․해설하는 따위의, 사상의 주변을 맴도는 일에 한 세기 내내 종사토록 하였다. 그 결과 한국은, 비록 외형적으로 정치적 식민 상태는 벗어났음에도 철학 사상적으로는, 포괄적으로 말해 정신 문화적으로는 더 오랜 동안 식민 상태에 놓여 있다.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 살든 ‘인류’라고 묶여질 수 있는 그 만큼은 보편성을 가질 터이므로, 철학적 문제와 해결 방안도 그 범위 만큼은 보편적일 것이니, 바로 그 영역 내에서는 굳이 외래 사상이니 자생적 사상이니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화의 제 양상과 그에 수반하는 철학적인 문제들 가운데는 국가 단위의, 또한 시대적인, 특수성이 있기 마련이므로, 한국 사람들의 사상이 그런 특성을 갖지 못한다면 기본적으로는 ‘한국인들의’ 사상이랄 것도 없는 것이며 그럴 경우 그것이 한국의 문화나 세계의 문화 향상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역의 사상이 다른 지역의 사상과 단지 ‘다르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것이 특별히 좋다고 내세워져야 할 것은 없으나, 그렇다고 “요즈음 세계 일류 국가에서는 이런 철학 사상이 풍미하며, 이런 철학적인 문제가 각광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런 것을 탐구할 필요가 있고, 해야만 한다”는 이유에서 외래 사상을 추종하고 수용함으로써 보편성을 유지하는 그런 사고 활동을 ‘우리의’ 사상이라고 내세우기는 더욱이 어렵다.
우리가 진정으로 ‘한국의’ 철학을 얘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의 노고의 결실이 세계 문화 수준을 이끌만한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한국적인 문제 ─ 예컨대, 서양 존재론의 번역․해설이 아니라, ‘이다’-‘있다’의 구조 분석이라든지, 한국에서 계사(copula) 구조의 탈락 현상 해명이라든지, 동서 문화의 접점에서 생긴 ‘이성’ 내지 합리성‘ 개념의 새로운 정립이라든지,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 지점에서 사회 운영 원리나 세계 평화의 원리 모색이라든지, 유교 윤리와 기독교 윤리의 혼융의 어려움 극복과 같은 ─ 상황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독일적인 문제나 미국적인 문제 가운데 단지 특정 지역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 것이 많은 것처럼, 한국적인 문제들 가운데는 그것이 타지역 사람들에게 현안 문제로 의식되지 않았을 뿐 근본적으로는 인류 공동의 문제인 것이 많이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철학적 통찰은 한국의 철학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계 문화에 다양성을 주어 인류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철학의 성립은 그 주석의 소재가 800년 전의 고려 불교 사상, 400년 전의 조선 유교 사상이냐, 200년 전의 독일 철학, 현대의 미국 철학이냐에 따라서 좌우된다기보다는 그 문제 의식과 탐구 자세 그리고 연구 방법과 연구 결실이 인류 문화의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나 한국적 특수성을 담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3. 서양철학의 수용과 ‘철학’ 개념 형성
당초에 우리가 그것을 자발적으로 찾지 않았음에도 세계 역사의 흐름을 타고 서양 철학 사상이 유입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서양 철학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은 우리 근세 문화사 500년만의 대 사건이었다. 현대 한국의 거의 모든 문화 영역에서도 그러하듯이, 그것은 우리의 학문 개념, 합리성의 개념을 바꾸고, 무엇보다도 이전의 우리 언어 생활에는 없던 많은 말들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도록 하였다.
우선 ‘철학’이라는 간판어가 새로 등장하였고, 이 간판어 아래에 쓰여진 큼직 큼직한 말들, 예컨대 형이상학(形而上學)․논리학․윤리학 등뿐만 아니라, 주관․객관, 이성․지성[오성]․감성, 정신, 실체, 실재․현상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말들이 새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새로운 용어․새로운 개념들은 거의 모두 한자어로 이루어졌고 그것도 대부분 일본식 한자어로 당시 일본 문화의 수준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6) 서양 철학 사상의 유입 초기에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일본인의 중개로 한국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물론 같은 한자 문화권에 있으면서 일본이 먼저 서양 사상을 번역 수용한 사실과, 서양 문물이 한국 사람들에게 막 유입될 바로 그 무렵에 한국이 1세대 넘게 일본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통치 아래에 놓였던 사실에서 연유할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서구 철학 사상의 유입이 한국 사람들의 새로운 사상 형성에 미친 영향을 살필 때는, 일본식 개념의 개입이 여기에서 한 역할과 그것의 합당성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사상을 담고 있는 개념들이란 일단 한번 일정한 방식의 언어로 표현되고 나면, 언어가 일반적으로 갖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선입견 내지는 고정관념을 일으켜 문제 의식이나 문제 영역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상례이니 말이다.
이 자리에서는 우선 우리 작업의 최상위 표제어인 ‘철학(哲學)’의 형성 내력과 그 의미의 합당성을 따져 보기로 하자.
우리가 오늘날 대학 수준에서 하고 있는 이른바 근대 학문들이 거의 모두 그러하듯이, ‘哲學’이라는 것이 서양 학문의 한 가지로서 19세기 말 개항기에 우리 문화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으며, 마침 밀려오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실려 우리 사회에 퍼지게 됐고, 그런 연유로 ‘哲學’이란 용어부터가 서양어 ‘philosophia'의 번역어로서 그것도 일본인 번역자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의 이름과 함께 등장했다7)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서양 철학의 근원, 따라서 오늘날 세계 철학의 근원이기도 한 고대 희랍 사상에서 유래하는 ‘philosophia'는 본래 무엇을 의미했고, 그것의 번역어로서 ’哲學‘은 어떤 의미 연관, 어떤 함축을 가질 수 있는가? ‘哲學’이라는 말의 연원을 밝히면서 어떤 이는 일본의 니시 아마네가 “‘필로소피아’를 주염계(周濂溪)의 『通學』에 나오는 ‘聖希天 賢希聖 士希賢’의 희현(希賢)의 정신과 통한다고 생각하여 ‘희현학(希賢學)’으로 하다가, 그것이 너무 유교적 색채가 짙다고 생각되어 哲學이라는 명칭으로 확정했다(1872년)”8)고 설명하고, 어떤 이는 니시 아마네의 책 『百一新論』(1866)에 오늘날의 의미로 ‘哲學’이 처음 등장한다9)고 설명한다 . 이들의 말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추정하건대 처음의 번역어 ‘希賢學’이 같은 뜻의 ‘희철학(希哲學)’으로 바뀌었고, 이것의 축약어로 ‘哲學’이 쓰인 것 같다. 일본의 서양 철학 연구사를 서양에 소개한 한 일본인 학자의 서술에 따르면, ‘哲學’은 일본인들이 명치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일 때 더불어 수입되었는 바, ‘philosophia’라는 명칭이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希哲學’(Ki-tetsu-gaku)으로 번역되다가 1870년대에 ‘哲學’으로 축약되었는데, 그것은 “‘希哲學’이 발음하기가 어려운 탓이었을 것”이라 한다.10) 일본 사람들의 어감에서 ‘希’는 ‘바라다’, ‘기대하다’, ‘드물다’, ‘성기다’ 등의 뜻 외에도 ‘의욕하다’, ‘추구하다’ 따위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고, ‘哲’은 여기서 ‘밝음’(밝다, 밝히다)을 넘어 ‘앎’[知] 혹은 ‘밝은 지혜’[明智]를 뜻할 터이니, ‘希哲’이란 ‘지혜[혹은 참된 지식]를 추구함[사랑함]’, 곧 ‘philosophia’의 직역이고 여기에 지식 체계인 ‘학문’, ‘배움’ 그리고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인 ‘학교’의 의미를 지닌 ‘學’이 추가되어 ‘希哲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보겠다.
우리가 위와 같은 일본 학자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philosophia’의 번역어로는 ‘希哲’만으로도 이미 충분할 것이고, ‘學’의 덧붙임은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希哲함’이나 그것의 성과도 하나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學’이 추가되었든, 혹은 ‘수학’, ‘물리학’ 등처럼 일정한 지식 체계에는 ‘학’을 붙임이 자연스러워 그러했든 일단 ‘希哲學’이라는 번역어가 형성되고 이로부터 ‘哲學’이라는 간략어가 생겼다면 ― 그것이 발음상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서이든 아니면 다른 연유에서든 ― 우리는 ‘哲學’이란 ‘希哲’이라는 원의를 가진 말이라 생각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들이 ‘哲學’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일본어로 사용함을 뜻한다. 또는 적어도 한국 사람들은 이 ‘哲學’이라는 작업의 간판을 계속해서 일본인들이 이해한 것 그대로 사용함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哲學’을 반드시 ‘希哲學’의 준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훨씬 더 오래전에 형성된 우리 문화 전통에서 우리는 희랍어 ‘philosophia’의 개념에 적합하기도 하고 그 개념의 형성 배경과도 부합하는 적절한 어휘를 찾아 ‘哲學’에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11)
고대 희랍에서 ‘philosophia’라는 추상어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 보면, ‘지혜를 추구하는 (자)’[philosophos]․‘지혜를 추구하다’[philosophein]라는 구체어가 먼저 생기고 ‘지혜의 추구’ 곧 ‘philosophia’가 나중에 생겼다는 여러 사람의 문헌 연구 결과가 있다.12) 지혜를 추구하는 자의 지혜를 추구하는 활동의 결실이 ‘지혜의 추구’라는 지식 자체 내지는 그 지식의 체계일 터이니, 말의 형성이 사태의 추이에 상응하는 좋은 예로 보인다. 그러니까 ‘philosophia’란 ‘philosophos’의 ‘philosophein’ 활동 자체 혹은 그 활동의 결실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13) 그러면 ‘philosophos’란 어떤 자를 말하는가? 이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 가운데 하나에서 우리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은 다음과 같은 귀절을 발견한다.
“파이드로스여, 그를 지혜 있는 자[sophos]라 부르는 것은, 내가 보기엔 너무 높 이 올라간 것 같고, 그런 말은 신에게나 적용하면 적절할 것 같네. 그러나 지혜를 추구[사랑]하는 자[philosophos] 혹은 그 비슷한 말로 부른다면 [그 자신에게나, 사 태 자체로 볼 때나] 보다 더 합당할 것 같네.”14)
플라톤이 전해 주는 이런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따르자면, ‘philosophos’란 지혜[참된 지식] 자체를 이미 가지고 있는 자[sophos]라기보다는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며, 그에 이르려고 애써 노력하는 자, 이를테면 구도자(求道者)쯤을 지칭하겠다.
‘philosophos’의 본디 뜻이 이러하다면, 그것을 우리가 ‘철인’(哲人)으로 납득하는 것은, 비록 중국에서 발원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식으로 수용 전개된 유가(儒家)적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음내키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所欲 不踰矩] 자, 그는 분명히 신인(神人)이며 성인(聖人)이다. 이런 성인 공자(孔子)의 으뜸 제자 10명을 ‘십철’(十哲)이라 칭했고, 이에 버금가는 제자들을 또 골라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일컬었으니, 철인(哲人)은 현인(賢人)보다도 한 발짝 더 도에 가까이 다가간, 그러나 완전히 도에 이른 성인은 아직 아닌, 그래서 도에 이르려고 애써 노력하는 자를 이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철인(哲人)’은 그러니까 쉼 없이 인간이 걸어야 할 길[正道]을 추구하고 우주 만상의 이치를 찾는 자이며, 이런 그의 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의 작업을 사람들은 일찌기 ‘도학’(道學)이라고 혹은 ‘이학’(理學)이라고 불렀다. 이제 우리가 이 ‘철인의 학문[哲人之學]’ 곧 ‘도학’ 내지 ‘이학’을 서양 문화의 ‘philosophia’에 대응하여 ‘철학’(哲學)이라 고쳐 부른다 해서 그 본래의 뜻이 일실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대인의 학’[大人之學]을 ‘대학(大學)이라고 줄여서 부르듯 또한 어법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다만 과거의 ‘지혜의 학’이란 그 탐구 대상 영역으로 볼 때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제 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을 어우르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이제 1세기이래 우리가 모색하는 ‘철학’은 탐구 대상의 면에서나 탐구 방법의 면에서 (分)科學들과는 구별되는 총체학(總體學)이자 근본학(根本學)으로서 (경험적) 자료에 의한 지식 체계가 아니라 원리적인 지식의 체계로 이해돼야 할 것이다. 서양의 학문 전개사에서도 ‘필로소피아’가 그런 의미 변화를 겪었듯이, 우리의 ‘철학’ 개념도 학문 전개의 제 국면에 따라 넓게 쓰기로도 하고 좁게 쓰기로도 한다면, 두 개념은 서로 충분히 잘 어울릴 것이다.
이런 이해에서 우리가 ‘哲學’을 ‘希哲學’의 줄임말이 아니라 ‘哲人之學’의 줄임말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의 내용에는 전통적인 도학(道學)․이학(理學) 뿐만 아니라 서구 사상의 유입과 더불어 점점 뚜렷하게 의식된, 자연과 인간 삶의 제 원리에 대한 반성적 탐구 노력 곧 신학․자연철학․윤리학과 같은 여러가지의 형이상학, 논리학․인식론, 사회철학․법철학․정치철학․과학철학․언어철학 등과 같은 제 과학의 원리 연구가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백종현,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 철학과 현실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