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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기원 1 세기 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1. 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기원 1 세기 이후로 기원 3, 4 세기까지의 한강 이남 곧 남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초창하여
새로 일어선 때요 , 압록강 이남 곧 중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다 쇠미해지고 , 압록강 이북 곧 북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도 거의 기울어져서 , 가라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 부여의 두 나라들이
다 기록할 만한 일이 별로 없고 ,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강대한 나라로 여러 나라 중에 크게 떨쳤다 . 그러나 대 주류왕 이후
연대가 삭감됨에 따라 사실도 모두 빠져서 그 사적 ( 史積 ) 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고 , 이제 지나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와 선비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한두 사항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
2.고구려 대 支那(지나)의 관계
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 ( 漢 ) 과 다투더니 , 기원 1 세기경에 한의 외족
( 外族 ) 에 왕망 ( 王莽 ) 이라는 괴걸 ( 怪傑 ) 이 나와서 , 1)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볍 ( 井田法 )
을 실행하고 , 2) 한 문화 ( 漢文化 ) 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 말하자면 지금의 중화민국
( 中華民國 ) 이전에 지나는 수천 년 동안 왕조의 변역과 군웅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마는 , 기실 을의
세력이 갑의 세력을 대신할 때에 , 민중에게는 한때 , `요역 ( 요投 ) 을 면제하고 부세 ( 賦稅 ) 를
감해준다 ( 省요役薄賦稅 ) '하는 6 장의 혜정 ( 惠政 ) 으로 고식적 ( 始息的 ) 인 편안을 주다가 ,
오래지 않아 다시 옛 규 정을 회복하여 폭 ( 暴 ) 으로써 폭을 대신하는 극이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고는 일컬을지언정 ,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 이는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이제 정전설 ( 井田說 )
발생의 경과와 왕망의 약사 ( 略史 ) 를 말하기로 한다 .
정전설은 지나의 춘추시대 ( 春秋時代 ) 말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 ( 기원 전 5 세기경 ) 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 당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 ( 專權 ) 을 하여 , 사치가 극에 이르고 , 전쟁이 끊일 날 없어서 , 부세가 날로 높아가고 ,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땅을 아울러 가져서 인민의 생활이 말할 수없이 곤란하였으므로 ,
유약 ( 有若 ) · 맹가 ( 孟軻 : 孟子 )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균설 ( 土地平均說 )
--- 정전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
그들의 말에 의하면 , “지나의 하 ( 夏 ) · 상 ( 商 ) · 주 ( 周 ) 3 대가 다 정전제 ( 井田制 ) 를
행하였는데 , 정 ( 井 ) 자 모양의 9 백 묘 ( 묘 ) 의 땅을 여덟 집에 나누어주어 한 집이 1 백 묘씩을
경작하고 , 그 나머지 l 백 묘는 공전 ( 公田 ) 이라 하여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 ( 公用 )
에 바치게 하고 또 각자 경작한 1 백 묘에서 소출의 10 분에 1 을 공세 ( 公稅 ) 로 바치게 하여 이를
십일세 ( 什一稅 )라 일컬었다 .”고 하고 ,
“선대의 성왕 ( 聖王 ) 은 다시 나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시대가 되매 , 제후와 왕들이
그 백성에게서 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 정전에 관한 문적 ( 文籍 ) 까지
없애버렸다 .”고 하였다 .
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 공산제가 있었음을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다 같이 공언하는 바이니 , 지나도
그 태고에 균전제도 ( 均田制度 ) 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 有若 · 孟軻 등 ) 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눈으로 보고 혹은 전해듣고서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고 ,
그들이 자인한 바와 같이 자기네의 옛 문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 (八家同田 ) 이 아니고 사가동전 ( 四家同田 ) 이니 , 지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쳐 있는 기자형 ( 器字形 ) 의 고전 ( 故田 ) 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데 ,
그 세제는 10 분의 1 을 취하는 `십일세 ( 什一脫 ) 가 아니고 , 20 분의 1 을 취하는 입일세
( 卄一脫 ) 였다 . 맹자가 , `맥 ( 貊 : 곧 濊 貊 ) 은 20 에서 1 을 취한다 ( 貊 二十取一 ). '고 한
말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
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고치고 20 분의 1의 세제를 10 분 의 1의 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는 , 자존적 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꺼려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 ( 遺制 ) 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 ( 夷貊 ) 이라 일컫고 ,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 ( 公洋傳 ) · 곡량전 ( 穀梁傳 ) 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 “십일 ( 什一 ) 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 맥 ( 大貊 ) · 소맥 ( 小貊 ) 이다 ( 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 ). ”라고 하고 , “맥 ( 貊 ) 은 오곡이 잘 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는데---백관 ( 百官 ) ·
유사 ( 有司 ) 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20 에 1 만 받아도 족하다 ( 貊 五穀不生 唯?용生之 -
- -- - -無百官有司之養 故二十取一而足 ). ”고 하였다 .
후한서 부여 · 옥저 등의 전 ( 傳 ) 에 ,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기름지고 아름다워오곡이 잘 된다
( 土地平?---肥美---宜五穀 ). ”고 하였고 , 위략의 부여 · 고구려 등의 전에는 , “그 벼슬에는 상가
( 相加 ) · 대로 ( 對盧 ) · 패자 ( 沛者 ) 등이 있다 ( 其官 有相加對盧沛者 ). ”라고 하였으니 ,
맹씨 ( 孟氏) · 공양 ( 公洋) · 곡량 ( 穀梁 ) 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볼 것이다 .
조엽 ( 趙曄 ) 의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에는 “하우 ( 夏禹 ) 의 정전 ( 井田 ) 이 조선
( 본문의 州愼 ) 의 것을 모방해서 행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
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의 계급을 타파하려 한
운동이 아니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의 계급을 설복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자는 것이므로 민간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
진시황이 여러 나라를 토멸하여 지나를 통일하고 지나의 모든 재부 ( 財富 ) 를 독점하여 , 아방궁
( 阿房宮 ) 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2 세에 망하고 , 8 년의 큰 난리를 지나 한 ( 漢 ) 나라가
일어나매 ,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온 귀족과 토호 ( 土豪 ) 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 계급이
훨씬 줄고 , 인구도 난리통에 많이 줄어들어 농토 부족이 근심이 없었으므로 ,
문제되어오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잠잠하였으나 , 2 백 년의 태평세월을 지나면서 인구는 크게
번식하고 거농 ( 巨農 ) 과 대상 ( 大商 ) 이 발생하여 , 부자는 여러 고을의 땅을 가진 이가 있는
반면에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사회 문제가 학자나 정치가의 사이에 다시
치열하게 논란되게 되었다 .
그래서 혹은 한전의 ( 限田議 :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 ) 를 내어 인민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 혹은 주례 ( 周禮 ) 란 글을 지어 , 이것을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
( 周公 ) 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
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 ( 帝室 ) 은 쇠약해지고 , 외척 ( 外戚 ) 왕씨 ( 王氏 ) 가 대대로 대사마
( 大司馬 ) · 대장군 ( 大將軍 ) 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 왕망이 대사마 ·
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 ( 平帝 ) 와 유자영 ( 孺子영 ) 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 ( 新 ) 이라 하였는데 , 왕망은 설로 앞에서 말한 1) 정전제의 실행 2) 한문화 ( 漢文化 ) 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 자였다 .
그래서 주례 ( 周禮 ) 를 모방하여 온 지나의 정전 구획 ( 區劃 ) 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서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뇌물하여 , 인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 .
이보다 앞서 흉노가 남 · 북 둘로 나뉘어져서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웅거하여 한과 대항하였
으나 남흉노는 몽고 남부에 웅거하여 한에 신복 ( 臣服 ) 하였는데 , 이때에 왕망의 사신이 남흉노의
선우 ( 單于 ) 낭아지사 ( 囊牙知斯 ) 를 달래어 `두 글자 이상의 이름은 중국 문법에 어긋나니 ,
낭아지사란 이름을 고쳐 `지 ( 知 '라 하고 , 흉노란 `흉 ( 匈 ) '자가 순하지 못하니 `항노 ( 降奴 ) '라
고치고 , 선우란 `선 ( 單 ) '자 가 뜻이 없으니 복우중국 ( 服于中國 ) 이란 뜻으로 `복우 ( 服于 ) '라
고치라 .'고하였다 .
낭아지사가 처음엔 듣지 않다가 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한이 준 흉노선우 ( 匈如單于 ) 낭아지사의 인문
( 印文 ) 을 버 리고 왕망이 새로 주는 항노복우지` ( 降奴服于知 ) '란 인문을 받았다 . 그러나 왕망이
다시 생각하기를 남흉노가 관할하는 부중 ( 部衆 ) 이 너무 많으니 혹 후일에 근심이 되지 않을까 하여
, 그 부중을 12 부로 나누어 열두 복우 ( 服于 ) 를 세우라고 하였다 . 그러니까 낭아지사가 크게 노하
여 드디어 왕망에게 대항하여 싸우기에 이르렀다 .
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는데 , 요동에 조서를 보내고 , 고구려현 ( 高句麗縣 ) 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가 패하여 소수(小水),
지금의 태자하 ( 太子河 ) 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 · 포로 등을 끌어모아 고구려
현이라 일컬어서 ,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 ( 高句麗候 ) 라
일컬은 것이었다 .
그 고을〔縣〕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함을 꺼리므로 강제로 정발을 행하니 ,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서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이 되어 약탈을 하였다. 왕망의 요서대윤(選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 왕망이 대장군 엄우 ( 嚴尤 ) 를 보내 그 고을의 후 ( 候 ) 추 ( 騶 ) 를 꾀
어다가 목배어 장안 ( 長安 ) 으로 보내고 싸움에 크게 이겼음을 보고하니 ,
고구려현을 하구려현 ( 下句麗縣 ) 이라 고치고 조서를 내려 여려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긴 기세를
타 조선의 여러 나라와 흉노의 여러 부족을 쳐서 한화적 ( 漢 化的 ) 시설을 재촉하였다 .
이에 조선 여러 나라 , 북부여 · 고구려 등의 나라가 왕망에 대항하여 공수 ( 攻守 ) 동맹을 맺고 ,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노하여 왕망이 이에 대조선 · 대 흉노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리고 사람을
징발하여 전 지나가 소란해졌다 .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
가난한 사람들도 떼를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므로 ,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 ( 光武帝 ) 가 한나라를 중홍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 ( 儒留王 ) 31 년의 일로 기록하고 , 후·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
( 延丕 ) 로 하였으나 ,
이는 삼국사기 의 작자가 1) 고구려 고기 ( 古記 ) 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 ( 公案 ) 이 있음 을 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 2)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
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 에 ,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 에까지 갔다고 함은 , 저들
사대노 ( 事大奴 ) 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 `고구려후추 ( 高句麗候騶 ) ' 5 자를 `
아장연비 ( 我將延丕 ) '의 4 자로 고친 것이다 ( 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인 듯도 하다 . 그러나 유류왕은 분명히 왕망
보다 백여년 전 인물이고 , 한서에 말한 고구려는 분명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 설혹 참말로 연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왕 시대 고구려 사람은 아닐 것 이다 ).
그러니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 · 문자 ·종교·정치 ·풍속·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 한문화
( 漢文化 ) 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
결과가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마는 , 전해내려온 연대가 오래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서 , 한나라의
유교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고 ,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만든 것이지마는 ,
조선의 인명 · 지명 등 명사 ( 고대에는 모두 우리 말로 지은 명사 ) 뿐 아니라 ,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거나 다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 할 가망이 없으니 ,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 하불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 구태여 `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 ( 漢人 ) 이고 , 고구려의 본 이름은 `가우리 '요 , 고구려 ( 高句麗 ) 는
그 이두자인데 ,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 ( 句麗 ) 혹은 고구려 ( 高句麗 ) 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늘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 얼토당토않은 글자를 가져다가 `항노 ( 降奴 ) '라 `
하고려 ( 下高麗 ) '라 함이랴 ? 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
3.鮮卑(선비)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걷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 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 ( 內外興安領 )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 2 편 제 3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 하나논 `오환 ( 烏桓 ) '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 ( 邑落 ) 을 나누어 사는데 ,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 ( 大人 ) 이 있고 , 읍락마다 부대인 ( 富大人 ) 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 의 명자 ( 名子 ) 로 성을 삼으며 ,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 하고 ,
늙은 사람을 천대하며 ,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 ( 信標 ) 를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 ( 扶芬奴 ) 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 다른 한부대는 부분 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
선비가 그 소혈 ( 巢穴 ) 을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을 삼았다. 오환은 한의 무제(武帝)가
위우거 ( 衛右秉 ) 를 토멸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 ( 右北平 ) · 어양 ( 뺑陽 ) · 상곡 ( 上용 ) · 안문
( 確門 ) · 대군 ( 代那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 ( 直匠省 ) · 산서성 ( 山西省 ) 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
그 뒤 소재 ( 昭帝 ) 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 ( 곽光 ) 이 훗날의 걱정
거리가 될까 하여 ,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 흉노의 호연제선우 ( 壺衍제單于 ) 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 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
한이 3 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 그 참혹함이 또 한 심하였다 .
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 고구려의 모본왕 ( 募本王 ) 이 이를 기회로 하여 ,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 ( 襄平城 ) 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흘 ( 烏列忽 ) 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 ( 遼東郡 ) 을
지금의 난주 ( 難州 ) 에 옮겨 설치하고 ,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 ( 蔡동 ) 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 금백 ( 金帛 ) 으로 선비의 추장 ( 酋長 ) 편하( 偏何 ) 를 달래어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 ( 歆志분 ) 을 살해하게 하니 ,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 마다 2 억 7 천만 전 ( 錢 ) 을 고구려 · 선비 · 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이 되었다 .
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 몸이 아플 때에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를 삼고 ,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를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베어 죽여 ,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
시신 ( 待臣 ) 두로 ( 柱魯 ) 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 그 친구가 말하기를 ,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 .” 하였다 .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폐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 ( 太祖王 ) 이다 .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 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지마는 ,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 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 고 ,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
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
태조왕 3 년 ( 기원 55 년 ) 에 요서와 10 성을 쌓았으니 ,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 후한서 동이열전 ( 東吏列傳 ) 에 ,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 ( 右北平 ) · 어양 ( 漁陽 ) ·
상곡 ( 上谷 ) · 태원 ( 太原 ) 등지 를 침략하다가 채동 ( 蔡동 ) 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다 다시
항복하였다 . ”고 하였으나 , 세출전 ( 歲出錢 ) 2 억 7 천만 전이 채동전 ( 蔡동傳 ) 에 기록되어
있으니 , 이는 세공 ( 歲貢 ) 이요 , 은신 ( 恩信 ) 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