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전도서 개론
주제 :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1) 하고 시작이 됩니다.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아십니까?
“솔로몬”이라는 이름입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전도자로 세우신 데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3:11절에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전도자 자신을 두고 하는 말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타락이라는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전도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타락을 통해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한, “칭의 교리”
를 계시케 하셨다면, 솔로몬의 타락을 통해서는,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
는 것이로다”(1:14) 한, 하나님을 떠난 삶의 무가치(無價値)함을 깨닫게 하여,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12:13) 하고, 사람의 본분(本分)이 무엇인가 하는 참 도를 전해주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솔로몬은 감추고 자신을, “전도자”(傳道者)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셔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本)이 되게”(딤전 1:13, 16) 하심과 같은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솔로몬의 만년(晩年)의 저작
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까지 심히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에게 “부와 영화”를 주신 하나님은 그가 타락할 것을 모르셨단 말인가? “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
은 솔로몬의 “타락”도 허용(許容)을 하신 셈입니다.
권세는 왕이요, 지혜는 추종을 불허하고, 부귀영화는 비할 자가 없었던 솔로몬이 밑바닥까지 타락했던 뼈아픈 경험
이 없었다면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모든 사상(思想)과 욕망과 심리상태를 꿰뚫어보고 있는 “전도서”는 기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① 이런 맥락에서 예표(豫表)의 인물인 솔로몬과, 실체(實體)이신 그리스도 간에는 유사성(類似性)과 상이(相異)성
이 있는 것입니다.
㉠ “다윗의 자손으로 성전을 건축한 것, 지혜가 충만하여 그 소문을 만방에 떨친 것, 인생의 밑바닥까지 낮아진
것” 등은 유사성입니다. 이점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罪)는 없으시니라”(히 4:15) 하고 말씀합니다.
㉡ 그러나 상이성은 솔로몬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시궁창까지 타락하여 인생의 고락을 경험했지만, 우리 전도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인하여, “우리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요,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히 4:15, 빌 2:8) 분이십니다. 주님은 대속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을 체휼하셨으나,
솔로몬은 타락으로 인하여 인생의 허무를 체험을 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자신을 왕이라 하지 않고, “전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전도자(傳道者)라는
말이 7번 등장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부귀와 쾌락” 등을 다 누리다
가 헛됨을 경험한 솔로몬을 전도자로 세우셔서 “전도서”를 기록케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박해자 바울을 들어
서 “로마서”를 기록케 하신 것과 같은 섭리라 하겠습니다.
㉠ 그런데 본문을 관찰해보면 “전도자”라는 말이 첫 장(1:1, 2, 12)과, 마지막 장(12:8, 9, 10)에 각각 3번 씩 집중
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도서를 통해서 말씀하려는 핵심적인 주제가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들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전도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③ 그러면 첫 장의 요지가 무엇인가?
㉠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4) 하는 말씀입니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이란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삶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④ 그러면 마지막 장의 결론은 무엇인가?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本分)이니라”(12:13) 하는 말씀입니다. 전도서는 이 두 마디를 전해주기 위해서 기록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⑤ 그러면 그 중간에 있는 내용(2-11장)들은 무엇인가?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삶의 무가치성, 즉 “헛되고 헛됨”을
진술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을 대할 때에 통찰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전도자 자신의 현재(現在)의 신앙고백과, 그가 타락했을
당시, 즉 불신자의 입장에서 진술하고 있는 과거(過去)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점을 분별(分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전도자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1) 하는 회의론 자가,
㉡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하고
말할 수가 있단 말인가?
⑥ 그러므로 2장에는 전도자가 타락했던 당시를 진술하는 내용이 있는데,
㉠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
들을 많이 두었고,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3-10) 하고 말합니다. 즉 세상 사람 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려보았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얻은 결론이 무엇인가?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2:11) 하고 말합니다.
㉢ 그러면 어찌하여 만족(滿足)이 없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永遠)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3:11)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안식이 없는 삶은 허무(虛無)함뿐이요, 영혼의 갈증은 세상적인 것으로는 채워
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⑦ 이런 맥락에서 전도서에는 “해 아래”라는 말이 29회, “헛되다”는 말이 39회나 등장함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처럼 헛된 인생이 되었는가?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 (正直)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7:29) 하고, 타락의 결과라고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해 아래”라는 말은 자연인(自然人), 즉 육에 속한 자의 삶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헛되다”는 말은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의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삶의 무의미, 무가치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 어찌하여 “해 아래”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이에 빛을 비춰주는 말씀이 로마서에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네 번의
“아래”가 있는데, “법 아래, 죄 아래, 심판 아래, 은혜 아래”(롬 3:9, 19, 6:14)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죄 아래”, 전도서의 표현대로 하면 “해 아래” 살아가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게 하심으로, “은혜 아래” 살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해 아래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해 아래”라
는 일반은총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은혜 아래”라는 특별은총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⑧ 이런 맥락에서 전도서의 구조(構造)를 관찰해보면,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
하라”는 4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 첫째 단락(段落)의 결론은 3: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敬畏)하게 하려 하심인줄 내가 알았도다”
합니다.
㉡ 둘째 단락의 결론은 5:7절인데,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
(敬畏)할 지니라” 합니다.
㉢ 셋째 단락의 결론은 7:18절인데,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합니다.
㉣ 넷째 단락의 결론은 8:12-13절에 나타나는데,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
는 자가 잘 될 것이요” 합니다. 그러면서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敬畏)하지 아니 함이니라” 하고 경고합니다.
㉤ 그리하여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2:1) 하고 권면하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敬畏)
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하는 총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⑨ 그러면 “일의 결국(結局)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
는 것”인가를 형제는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이는 쉬운듯하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없이
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양 말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경외”의 근본은,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가능해지는 것이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뿐이라는 점에 확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인식해야할 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
(7:29) 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斷絶)이 되어 있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화목제물과, 이를 드려
줄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 경외인가는 분명해집니다.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하나님을 경외하노라한 주님 당시의 제사장, 서기관, 장로,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심판을 당하고 멸망을 받았는가? 그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화목
제물과 이를 드려줄 중보자를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을 향해 주님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하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경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질 뿐 다른 길, 다른 방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⑩ 전도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이 한 말이, “진리(眞理)의 말씀이요, 다 한 목자(牧者)의 주신 바니라”
(12:10, 11) 하고, “진리와, 목자”를 말씀하는데, “진리와, 목자”는 누구인가? 이점에서 구속사의 진전(進展)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 말씀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말했습니다.
㉠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가 “왕이요, 목자”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볼 수 없는 하나님이 볼 수 있는 그리스
도로 임마누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라는 말씀을 통해서, “해 아래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헛된 삶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을 참 목자에게로 인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인생이란 시행착오를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機會)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해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온갖 것을 다 소유하고 경험해본 한 전도자의 뼈아픈 충고(忠告)를 통해
서, 읽는 이와 듣는 자로 하여금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또 다른 구원초청
인 것입니다.
⑪ 전도서는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낭독했다고 합니다. 이는 인생 여정이 초막에 머물다가 떠나는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임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 저도서는 하나님 경외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는, “심판”(審判)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 앞뒤와도 같습니다.
㉡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 둘을 함께 말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복음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을 향해서,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