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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4050그린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마바르
20. 선달산(先達山 1,236m)의 추억
- 白頭大幹 북진 20차 (마구령~도래기재 18km)-
가을비에 노란 은행잎이 흩날리는 날,
대간 마루금에 있어야 할 몸이 아파트 단지까지 내려온 단풍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산행
후기 아닌 기록문을 쓴다. 산에도 가지 않는 놈이 후기를 쓴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
이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노트북 자판을 두들긴다. 북진,
남진하면서 두 번이나 걸었던 구간이고 폭설로 탈출까지 했던 추억이 많은 곳이지만 대간
마루금이 아닌 집에서 거짓부렁으로 글을 쓰려니 글머리가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있다가 할 수 없이 카메라를 둘러 메고 집을 나섰지만 이것 역시 손
에 잡히지 않는다. 불현듯 지난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또 하나의 코리안 루터를
개척하려다 실종된 박영석 대장의 말이 생각난다. 박 대장은 원정을 떠나기 전 캠프에서
「산악인은 산으로 가야 산악인이다. 탐험가는 탐험을 가야 탐험가다. 도시에 있는 산악
인은 산악인이 아니다. 나는 죽는 그날까지 탐험을 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털어
놓았다 한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한다」는 영원한 산악인 박영석 대장은 우리 곁
을 떠나갔지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찾아내려는 그의 도전 정신은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
백두대간을 비롯하여 미답(未踏)의 길을 개척하여 등산로를 만든 선조들과 산악인들의 뜻을
기리며 이번 구간을 시작한다.
근 한달 만에 원래의 순서대로 돌아와 소백산이 끝나는 지점부터 다시 시작한다. 단풍구경
을 위해서 산행 순서까지 바꿔가며 점봉산과 설악산구간을 먼저 갔지만 설악산구간에서는
단풍은 고사하고 하루 종일 비와 안개가 뿌연 장막을 치고 있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우리 아파트 단지 뚝방길
이번 구간은 마구령~갈곶산(966m)~선달산(1,236m)~박달령~도래기재까지 18km로서
거리는 짧지만 산행 난이도는 중급수준이다. 접속구간까지 포함해도 겨우 22km 이다. 오늘
가는 구간을 포함해서 고치령에서 도래기재 구간을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을
이어주는 양백지간(兩白之間)으로 십승지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으며, 구인종어양백(求人
種於兩白)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인재가 많이 나왔던 지역이다.
○ 말을 몰고 넘나들던 고개 마구령(馬駒嶺, 820m)
오늘 산행은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 임곡2교 다리 위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마구령 고갯마루
너머 남대리까지 도로는 포장된 길이지만 노폭이 좁고 경사도가 심하여 버스 같은 대형차량
은 다닐 수 없고, 소형차량만 다닐 수 있다. 그래서 한달 전 소백산 구간을 끝내고 마구령
에서 임곡2교까지 접속구간 3.5km는 히치하이킹(hitchhiking)하면서 내려왔다. 그러나 오
늘은 올라가는 길이지만 걸어서 올라간다. 새벽 시간에 지나는 차도 없거니와 설령 차가 있
다고 하더라도 이른 새벽 비를 맞으며 산길을 오르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고 태워줄 운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몸은 서울에 있지만 영혼은 이들과 함께 올라간다. 구간 거리도 짧고 시간도 여유로우니 천
천히 가자고 했지만 발걸음은 오를수록 점점 빨라진다. 날씨는 푸근하고, 겨울 옷에 우의까
지 걸쳤으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비라도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좋으련만 오를수록 빗방
울이 가늘어져 가랑비만 부슬부슬 내린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1시간만인 4시 30분경에
마구령 고갯마루에 올라섰더니 마구령은 안개와 어듬 속에 잠겨있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와 남대리를 연결하는 마구령은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를 연결
하는 관문으로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하여 마구령이라 하였으며 경사도가 심
해 마치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 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렀다 한다. 고개 넘어 남대리는 옛
날 주막으로 번창했던 곳이다. 이 곳 마구령 지역은 백두대간의 차마고도라 할 정도로 험한
오지지역이라 도적과 호환이 들끓었다 한다. 그래서 하루 밤 묵으면서 휴식도 취하고 같이
넘어갈 일행도 구하기 위해서 묵다 보니 자연적으로 주막이 번창했고, 그 주막거리에는 지
금도 주막이 남아 있다.
마구령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비는 그친 것 같아 우의는 벗고, 배낭 커버만 덮고
간다. 날은 어둡고 안개까지 끼어있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소백산국립공원
경계선인 선달산 아래 늦은목이재까지 5.8km는 별 특색이 없이 밋밋한 구간이다. 마구령
에서 올라선 헬기장 해발고도가 894m이고 그 후 1057봉, 934봉, 해발 966m의 갈곳산 등
고도차도 별로 없는 능선길이지만 탈출로도 별로 없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산간 오지구간이
다. 그나마 늦은목이재까지 500m 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위안이 될 뿐이다.
이곳 구간은 겨울이 가장 멋있다. 봄부터 낙엽이 떨어지기 전 까지는 숲이 우거져 조망이
전혀 없고 능선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겨울은 12월 초부터 쌓이기 시작한 눈이 이
듬해 4월까지 남아있다. 내린 눈과 바람에 날려 온 눈들이 능선에 허리 높이까지 쌓인다
이런 눈길을 헤치면서 지나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추억이 되기도 있다. 지난번 남진 할
때에도 허리까지 쌓인 눈 길을 남성대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러셀하느라 체력이 소진되어
단체로 마구령에서 탈출한 경험이 있는 곳이다.
○ 갈곳산(966m), 봉황산 갈림길에서
갈곳산(966m) 정상 못 미쳐 선달산과 봉황산(818m)으로 갈리는 봉황산 갈림길이 나타난
다. 이곳에서 곧장 나아가면 대간 능선을 벗어나 영주 부석사로 내려가는 길이므로 대간능선은
이정표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어 가야 한다. 두 길 모두 가보고 싶은 길이지만 한쪽 방향을
선택해서 가야만 한다. 단풍에 둘러 쌓인 부석사에도 가보고 싶지만 선달산 가는 길로 간다.
그러면 내가 살아온 인생 길은 어떻게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을까?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단풍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모두 다 가볼 수는 없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오래도록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이
굽어져 안 보이는 곳까지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길을 택하였다.
그 길은 먼저 길과 같이 똑같이 아름답고
풀이 우거져 사람을 부르는 듯했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은
먼저 길보다 좀 덜하긴 했지만. . . . . . . .
(중 략)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어디선가 한숨 쉬며 말하리라.
두 갈래 길이 숲 속에 나 있어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듯한 길을 택했었는데
결국 그것이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 . . . . .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못한 길)
○ 선달산(先達山 1,236m)에 올라서서
갈곳산에서 내리막을 1km 가량 내려오면 밧줄로 입산을 통제하는 경계선이 나타나는데 여
기까지가 소백산 국립공원이고 이 선을 넘어서면 태백산 권역으로 들어서는 늦은목이재이다.
늦은목이에서 선달산까지는 1.8km로 이번 구간 중에서 가장 긴 가파른 오르막구간이지만
아름드리 금강송이 숲을 이루고 있으니 금강송의 늘씬한 몸매도 즐기면서 오르다 보면 쉽게
오를 수도 있다. 그렇게 선달산 정상에 올라섰지만 사방이 비안개에 잠겨있다.
선달산(先達山)은 말 그대로 무과(武科)에 합격하였지만 점수가 낮거나 아니면 자리가 없어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그 이름 탓인지 모르지만 이름의 유래는 물론 그 흔한
전설 한 마디 없다. 그러함에도 선달산은 백두대간의 이백(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솟아있
어 대간 마루금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또한 가까이로는 서쪽으로 남한강의 최 상류인 남
대천이 어래산을 따라 흐르고, 동쪽으로는 가야 할 옥돌봉과 이어진 대간 마루금을 따라가
면 태백산과 함백산도 보인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조금 전 어둠 속에서 지나온 갈곳산과 부
드러운 구릉이 보인다.
날씨까지 푸근한 선달산 정상에서 삼삼오오 모여 여유로운 아침을 먹는다. 국립공원도 벗어
났겠다 비 온 뒤라 화재 날 염려도 없어 라면까지 끓여서 먹는다. 오늘은 밥 차 운전수도
빠졌고, 바위산 사진 작가도 보이지 않지만 저들끼리 잘도 먹고 잘도 간다. 사진이야 카메
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한 두 사람 빠져도 빠진 흔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지만 밥 차 주인은 하루를 못 참고 그사이 새로운 운전수를 구했는지 굶지않고 밥을
제때에 먹는다. 나는 아직 새 운전수를 모르지만 지난번 배불뚝이 운전수 보다야 훨씬 젊고,
힘도 좋을 것이다. 다음 산행때에는 신,구 운전수간에 결판이 날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항상 같은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정상표지석을 배경 삼아 약간은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 찍히는 포즈는 변함이 없다. 이분들은 앞으로도 같은 표정으로 줄기차게 찍을 것이다.
이래서 함께 가는 대간 길은 즐겁기도 하고, 하는 행동들은 부처님 손바닥이다.
선달산에서 박달령까지 5.1km 구간은 선달산을 내려서자마자 나타나는 암릉 구간만 지나면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이 능선은 경북 봉화군 몰야면과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을 구
분하는 도경계선이기도 하다. 영월군 김삿갓면은 원래는 하동면이었으나 2년 전 방랑시인
김삿갓을 기리기 위해서 김삿갓면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일생을 죽장 하나로 세상을 유람했
지만 그도 결혼을 한 일이 있었다. 결혼 첫날 밤, 가슴 두근거리며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김삿갓이 갑자기 일어나서는 붓을 들고 아래와 같이 시 한 수를 적어내려 갔다고 한다
모심내활(毛深內闊), 털이 깊고 안이 넓어 허전하니
필과타인(必過他人), 필시 타인이 지나간 자취로다.
새신랑의 의아한 행동에 눈을 살며시 뜨고, 김삿갓이 써놓은 시를 읽어본 색시가 이불
속에서 그대로 팔을 뻗어 붓을 잡고서 내려쓰기 시작했다.
후원황률불봉탁(後園黃栗不蜂坼)
뒷동산의 익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저절로 벌어지고
계변양유불우장(溪邊楊柳不雨長)
시냇가의 수양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난다.
글을 마친 신부는 방긋 웃더니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가 써놓은 글을 본 김 삿갓
은 신부를 다시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의 처녀성을 의심하는 글도 글이지만
이를 해학적으로 주고 받았으니 이들이야말로 천생연분이다. 이를 두고 음담패설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면 몸은 어느 사이 박달령에 도착해있다.
○ 옥돌봉에 올라서면 수령 550년 된 늙은 철쭉이 반기고
박달령 고갯마루에는 태백산의 산신을 모시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같은 말이지만 고치
령에는 산신각(山神閣)으로 되어 있지만 같은 뜻이라고 한다. 옛날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고
개로 매년 사월 초파일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박달령에는 정자도 있다. 이런 오지 고갯
마루에 세워진 정자, 누가 이용하는지 모르지만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박달령에서 옥돌봉까지 약 3km 구간은 제법 가파르다. 1015봉에 올라서면 가야 할 옥돌봉
이 눈앞에 보이지만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능선 길은 11월 초겨울인데도 날은
왜 이렇게 더운지 알 수 없다(같은 날 서울의 기온이 25.9도로 104년 만에 가장 더웠다고
하니 이곳에서는 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더군다나 겨울 옷까지 입었으니 팔을 걷어도 소
용이 없다.
하체부터 상체로 열기가 뿜어져 올라온다.
참다 못하여 옥돌산 오르는 신갈나무 숲 벤치에서 하나 둘 옷을 벗는다.
앙상한 나무와 같이 벌거숭이가 된다.
먼저 천문대장이 시범으로 반팔 런닝셔츠 차림이 된다.
이어서 정다운 대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소매 런닝셔츠 차림이 된다.
그 옆에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아줌마들이 헤벌쭉거리며 웃고 있다. 대장이 벗었으니 다른
남성 대원들이야 당연히 벗었겠지만 여자 대원들도 벗었는지, 또 바지까지 벗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숲 속에 같이 있었던 그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또 한 사람 사진사도 안다.
런닝 패션쇼도 시들해지자 다시 옷을 입고 옥돌봉에 올라선다. 옥돌봉은 옥이 안 난 곳이
없고 선경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하여 옥돌봉으로 불리고, 한자로는 옥석산(玉石山 1,244m)
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이름과 딴판으로 옥돌봉은 사실 볼 것이 별로 없다. 주변을 압도하
는 높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 경관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오늘 같은 날은 안
개까지 잔뜩 끼여있다. 단지 한가지 위안거리는 우리같이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에게
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백두대간에서 문수지맥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돌봉도 철쭉이 피는 5월 중순에서 6월 초까지는 철쭉으로 유명해지는 곳이다. 도
래기재를 향하여 내려가는 내리막은 철쭉 터널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한다. 정상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수령 550년 된 철쭉 고목나무 부근은 철쭉 군락의 절정이다. 한 눈에도 굵은
가지가 사방으로 넓게 뻗어 범상치 않은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초겨울이라 꽃이 핀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산림청에서는 이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주
변에는 하얀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다.
여기서 오늘 구간의 날머리 또래기재까지는 약 30분 거리다. 8시간 만인 12시경에 도래기
재에 도착했더니 먼저 도착한 대원들은 양말 벗고, 바지까지 걷어 올리고 더위를 식히고 있
다. 오늘이 여름인지 겨울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20차 구간을 가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보냈다.
그러나 대간 4기 대원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상상 속에서 함께 걸었다.
이 글은 상상으로 지나간 마구령에서 도래기재까지의 산행후기다.
감사합니다. (끝)
(붙임)
위 사진들은 거보님과 비둘기님 사진입니다. 감사합니다
2011.11. 5
Mabre 마바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