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동마을(편) 옮긴이 웅포향토문화연구회 김영택
고증 일시 : 2012. 2. 24
고증 장소 :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맹산리 서산동 마을회관, 자택
고증자 프로필 : 김주현 (1934년 음12월 28일생 서산동마을 출생)
도진문 (76)
서봉선 (82)
주영산 (
주씨의 족보와 분묘의 연대로 보아 1400년 경 이곳에는 중국에서 배로 주씨 일가가 건너와 점차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진포대첩 후 남궁가와 이가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다음에 약 300여년전쯤 부여 서가와 광산김가가 들어오게 되었으며, 본래는 주씨 가문과 다음의 남궁씨가 성하며 큰 공적으로 00임금이 이를 높이 여겨 용비를 하사하게 되었는데 배로 피포 앞바다까지 운반하다 마을 앞바다(현 마을앞 금강)에서 조난으로 유실 되었으나 썰물에 주씨 가문의 용비는 찾아 세웠으나 남궁 가문의 용비는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를 세운 후 주씨 가문이 점차 쇠퇴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증명하던 족보는 보전하여 왔으나 이마저 1970년대 큰 화재로 소실 되었으며 현재는 한 집만이 살고있으며 주씨의 용비와 분묘만이 과거의 성대함을 전하고 있다.
남궁씨도 잠시 성대하다 쇠퇴하며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한기의 분묘만이 뒤동산에 남아있는게 현실이며, 한때는 마을주민이 100명이 넘었으나 점차 줄어 현재는 50여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다.
지명의 유래로는
본래는 같은 한 마을로서 살아 오며 가호가 점차 늘어나면서 편의상, 현 동산동은 새말모퉁이, 양지편, 서당골, 그리고 현 서산동은 동아시, 서아시, 시미기 등으로 나뉘어 불리어 내려왔으나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산을 중심으로하여 동편에 있다하여 동산동이라 불리워져 내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마을은 금강문화로서 그야말로 갈대문화와 산해진미가 넘쳐나는 풍요로운 마을이며 주민들은 1950년대 초반까지 곰개장1,6일을 보았으나 그 후 잎포(갓개)장과 함열2,7장을 보다가 이제는 익산 북부장과 함열장을 주로 이용하고 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앞 금강에 갈대밭(갈바탕)이 있어 갈대가 매우 소중한 소득원이었다고 하며. 갈대를 활용하는 갈꽃빗자루, 갈 자리, 갈 체반 등을 마을 내 여러 움(작업장)에서 공동 작업을 하여 1960년대 초반까지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갈은 당시 중요한 물자로 취급하여 한 때는 허가없는 유통을 금하기도 하였다, 이 마을에도 일부 배가 정박하여 생선을 객주가 통째로 사서 상인에 팔거나 젓갈을 담기도 하였다.
마을의 동남쪽에 서당골이라 하는데 어원과 도진문님(76)의 이야기로 보아 큰 서당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가재골이라 하는 곳에서는 가재가 많이 났다 하는 곳으로 위치로는 현 ***에 위치한다.
그 후 1970년대로는 새마을사업을 하며 지붕개량과 마을길을 넓혔으며, 아낙네들이 사랑방에 삼삼오오 모여 밤 잠을 줄여가며 홀치기(시보리 : 일본 옷감에 예쁘게 염색하기 위하여 틀의 바늘에 북에 실을 감아 홀메침)를 하여, 그 수익으로 생활비로 사용 하였으며 학비도 조달하여 훗날 교육자와 장교 등 많은 인재들을 낳게 되었으며, 주민들은 금강의 퇴적작용을 활용하여 논으로 개간하여 소득을 점차 올려오다 1980년대에는 땅펄이라 하여 대대적으로 개간하여 최고의 경작지로 사용하여 왔으나, 지난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사업으로 편입되어 잃게 되었다.
마을 뒤편 산에는 일제강점기에 금을 케어간 금광굴의 흔적이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있으며, 금 방아간 터(금돌을 분쇄하고 이루던 터)로 샹골이라(현 맹산리 000번지) 하는 곳에 있었다. 김주현 장로님(79)과 도진문 집사님(76)
슬픈 이야기로는 병자년 19??년 여름 호열자(콜레라)라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피난을 떠났으나 이웃마을과 갈등이 심 하였으며 또한, 많은 이가 목숨을 잃게 되어 지금도 여름이면 같은 날 제사가 많다. 또한, 1950년대 군산 통학선 조난으로 당시 마을의 피어나는 인제들(중, 고생)을 한꺼번에 잃은 아픔도 있다.
마을 어귀에는 옛 부터 주민들의 식수원이자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소통의 장이 되었던 샘(井)이 있었는데 건강에 좋은 황금물이 난다하여 황샘이라 불리웠으며 오랜 세월의 변화로 현재 이 곳에는 전봇대가 세워져 있으며, 또 한 곳은 유동준님댁 앞(맹산리 000번지)에도 우물이 있었으며 이 두 우물은 가뭄이 심하면 물이 말랐고, 동산동에 위치한 00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의 우측에는 용의 머리 부분이라 하여 용모재로 불리는 작은 재가 있으나 백재로 공사에 잘리게 되었고, 그 뒤 편으로는 작은 저수지인 서산재가 있고, 마을 뒤편 조앙골에는 일정 때 금을 출토 해 갔던 동굴들의 흔적이 지금도 몇 군데는 남아 있으며 오늘 날 까지도 각종 산나물과 버섯 등이 많이 나며 생태계가 잘 보전되고 있는 생태마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