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 한하운 눈 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기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 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양 걸음걸이 몸맵시 하며 틀림없는 저 ······ 누구라 할까 ······ 어쩌면 엷은 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보지? ······ 〈시 스케치〉 "나는 문둥병의 선고를 받던 날, 그 순간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주검보다도 무서운 절망에 허탈해 버렸다. 절망의 수 십 년 세월 속에 세상 사람들이 제멋대로 규정한 인간 추방의 잔학성에 인간 폐업의 서식조건(棲息條件)을 박탈당한 산송장으로 싸워 나온 서글픈 생존자라 할거다." 시인 한하운은 그의 명저 『나의 슬픈 반생기(半生記)』에서 나환자에 대한 몰지각한 인간들의 학대를 피로 쓴 글로 절규했다. 13살 때 처음 나병이 발병하여 자신이 문둥병임을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 충격은 주검 그 자체이며, 사형선고였다. 시인 하운의 본명은 한태영이다. 함경남도 분전령 산맥과 함관령이 마주 선 빼어난 절경과 구릉 아래 고저녁한 둘레의 너른 들녘이 주위를 감싼,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1919년 음 2월 24일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시 편을 우리가 읽고 있으면, 한순간 엄청난 두려움과 전율과 함께 이상하리 만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다. 그것은 시인 하운의 파란 많은 일생 속에 뒤엉켜버린 기구한 운명의 네 여인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할 수 없는 천륜의 태(胎)에 감겨 일평생 문둥이 자식을 구하려다 눈 감지 못한 채, 저 우주 속 떠나버린 한(恨)많은 어머니가 그 첫째요, 두 번 째는 소년 시절 운명처럼 만나 하운의 영혼을 일생동안 지배한, 시「여인」속의 첫 여자 R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하얀 목련꽃 같이 맑고 소소한 여학생으로, 언제나 장미꽃 피는 행복의 옥좌에 여왕처럼 모시고 사랑하고 싶었던 여인'이다. 영원한 자신의 여자로 여겼던 R은 훗날 문둥이 하운이 천리 먼 길을 걸어 대구 어디 그녀가 산다는 산다는 풍문에 의지해 찾아 가, 골목 한쪽 숨어서 지켜본, 이미 타인의 아내가 된 통곡과 피눈물을 안겨준 이승에서 못 다 이룬 한 맺힌 사랑의 주인공이다. 하운의 또 한 여자는 문둥병 발병 후 방황과 좌절과 정신의 황폐 속 헤메던 젊은 날 북경 유학 시절 만난 S라 불린 아가씨였다. 젊은 아가씨가 몸을 열고 보여준 관능과 쾌락의 절정은 인간 하운에게 감각적 생도 있음을 일깨워 준다. 생기 발랄한 이 아가씬, 하운이 나병임을 알고 그 충격에 그만 음독 자살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북경 시절 모든 비극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하운. 어머니의 나병에 대한 지극 정성과 첫 여자 R의 헌신적 보살핌도 아랑곳없이, 거울 속 하운의 얼굴은 바로 문둥이의 문드러진 얼굴로 변해버린 놀라움에 끝없는 자살 충동에 헤맨다. 이런 참혹한 비극과 극도의 자기분열과 공포 속에서도 하운은 시작(詩作)의 끈만은 놓지 않았다. 만약 하운에게 있어 시와 그 시의 영감을 끝없이 솟구치게 한 영원한 정신적 여인 R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그토록 섬뜩한 인간 실존의 명시들을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운의 극단적 자기분열 양상도 차츰 수그려 들 무렵, 어머니의 죽음과 해방의 환희, 민족 비극인 6,25동족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시인에게 있어 인간 도살장의 현장을 극명히 목격하게 했으며, 그토록 사랑하던 저 숭고한 여인 R과의 영원한 이별로 이어진다. " 꽃이 식물 최고의 시라면, 사랑이란 인간 최고의 시다. 그리고 R이야말로 나의 최고의 시다."고 외쳤던 시인 한하운. 눈 덮인 삼팔 선을 목숨 걸고 넘은 것도, 피붙이 하나 없는 서울 바닥을 돌며, 쓰레기통과 쓰레기통을 뒤지며 짐승처럼 겨울을 난 것도, 오로지 사랑하는 R을 만날 수 있다는 그 희망 때문이었다. 아! 인생은 한낮 꿈이다. 모든 것이 자고 일어나면 너무나 싱겁게 끝나있는 우리의 인생은, 정말 장자의 말처럼 일장춘몽(一場春夢)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 한하운은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말 것을 외쳤다. 이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 시인 한운운에게 과연 이 시대 생존한 우리가 해줄수 있는 것은 뭘까. 그것은 아마 죽어서도 찾겠다는 저 비극의 사랑 속 사라져간 여인 R이 숨쉬고 있는, 그의 명시 「여인」을 시낭송 무대로 꾸미면 어떨까. 그의 시비가 남해 수평선 속 잠기는, 그 숱한 나환자의 한많은 인생 통곡이 스며있을 저 서러움의 섬, 소록도면 어떨까. 노을이 지는 저녁 무렵, 아름답고 소박하고, 서럽고 쓸쓸한, 감정이 밀물처럼 일렁이며 파도에 떠 왔다 떠나는 그 굴곡진 선율이 폐부에 가득 들어차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2번 「로망스」가 8분 12초 동안 울려 퍼지면, 하운과 여인 R도 하늘 위 구름에 앉아 두 손을 꼭 잡고 들을 수 있을까. 여류 1인 시낭송가가 저물어 가는 대자연의 하루를 풍만하게 할 이 무대는 거추장스런 모든 인간 격식은 생략된 채, 땅위의 삶이 가장 서러웠던 나환자들을 관객으로 초대하면 제일 좋겠다. 물론 시인 한 하운의 고달픈 생을 끝까지 곁에서 지켜준 그 이름 모를 마지막 네 번 째 여인의 숭고한 넋도 이 시 낭송 무대에 귀히 모셔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