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창원 내동리 감(甘)씨 집성촌의 초갓집 중에서도 빗물이 줄줄 새는 집에서 4형제 중 둘째로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가장인 우리 아버지는 멋쟁이였다.
외출 때는 항시 백구두에 눈이 부시는 하얀 백바지에 포마드로 머리를 뒤로 넘기고 반짝반짝 윤을 내고 활보하셨다.
동네에서 한량으로 소문나신 아버지는 자신의 집 지붕에 물이 새든 양식 도가지에 쌀이 떨어지든 개의치 않으셨다.
동내 여자들로부터는 멋쟁이라고 칭송받았는지 모르지만 우리 어린 4형제에게는 어머니를 지지리도 고생시킨 원성의 대상에 불과한 분이었다.
평생 자식을 위해 고정 직업을 갖지 아니 하셨던 우리 아버지가 살아 생전 잘한 게 한 가지 있었다.
농사 일을 죽기보다 하기 싫던 차 해군의 하얀 베레모에 반해 무작정 해군에 입대한 것이 인생 역전이 되었다. 해군 입대 얼마 후 발발한 6.25 사변에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과 조우하여 빗발치던 포격에 간신히 살아 남아 나중 무공훈장과 함께 6.25참전 용사로 국가유공자 신분이 되었다.
이후 아버지의 노년 생활은 매우 행복했다. 병원치료와 약국의 약 처방은 무료에다 참전용사 수당에다 노인연금을 받아가며 국가유공자 신분을 맘껏 과시하다 3년 전 사망 후에는 대전 현충원 가장 명당 자리에 안치되어 영면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망 후에도 국가유공자의 유족으로 어머니에게 자격이 부여되어 이번 4월 초에 별세까지 보훈청의 장기요양급여지원으로 자식에게 단 한 푼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고 좋은 요양원에서 편히 눈을 감으시고 일사천리로 아버지 곁에 합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훈청에서는 우리 4형제 중 누구에게 선순위 유족 지정을 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공문이 오늘 도착했다. 가만히 있으면 장남에게 모든 혜택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선순위 유족에게는 생활조정수당을 위시 의료지원, 대부지원, 제가복지서비스 지원, 장기요양급여 이용 지원 등의 다양한 혜택이 있다. 하지만 우리 집안 장남인 형은 부모를 가까이에서 모신 셋째 동생에게 선순위 유족으로 지정할 것을 제안하였고 우리 형제 모두 기꺼이 찬동하였다.
가까운 동 사무소에서 선순위 유족 지정 협의서 제출시 필수 서류인 인감증명서를 발급 후 길을 나던 중 선순위 유족 지정 문제로 극심하게 다투다 우리 행정사 사무소까지 찾아와 해결을 호소한 한 민원인이 떠올랐다. 아들과 며느리가 부모를 모시다 사망 후에는 나이가 더 많은 누나가 선순위 유족 욕심을 버리지 못해 양보하지 않고 집안 전체가 콩가루가 되도록 반목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너무나 평화적으로 동생의 승계를 도와주고 있는 우리 집안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면서도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념이 떠올랐다.
국가유공자이셨던 우리 아버지는 가셨지만 우리 어머니를 법적 유족으로 온갖 혜택을 받게 하여 묘지까지 걱정없게 하더니 그 혜택이 이제 살아 생전 가까이에서 모신 내 동생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국가유공자 등록 업무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 행정사 전문 직업인으로서 주변 모두에게 고하고자 한다. 국가를 위해 군 복무 중에 부상을 입고 전역 후에도 고통을 받고 있다면 반드시 국가유공자 신청부터 해 놓고 보자고.. 그리고 안되면 될 때까지 싸워보자고...이 좋은 제도를 왜 내버려 두냐고..
2022년 4월 중순의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부산 금정산 자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