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태화관은 여러번 주인이 바뀌면서 권세와 영화의 변천을 목격한 곳이다.
태화관이 있는 인사동 194번지는 구수영(具壽永) (1456~1524)이 살았다.
그는 중종반정때 공훈을 세운 정국공신이다.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인맥을 형성한 그는 세종의 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위다.
그는 부호군(副護軍)·동지중추부사·도총관·지돈녕부사·판돈녕부사를 역임하고 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아부했다 하여 1509년에 파직되었다.
그의 집은 증손자인 구사맹(具思孟)의 소유가 되었다.
거기에는 태화정과 부용정이 있었다.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仁獻王后)는 구사맹의 딸이었다.
인조가 어릴 때 외가인 이곳에서 자랐으므로서 인조의 잠저(潛邸)가 되었다.
영조는 부용당 앞의 연못을 잠룡지(潛龍池)라 하고 친필 현판을 걸게 하였다.
그후 이 집은 안동김씨에게로 넘어가 김흥근(金興根)(1976 ~1870)의 소유가 되었다.
경상도관찰사·영의정 등을 역임한 김흥근이 극심한 안동김씨의 폐단 속에서도
고고한 인망을 받았던 것은 정수동의 도움이 컸다.
정수동이 김흥근의 문객으로 자주 그의 집을 드나들 무렵
남의 돈 2만 냥을 가로챈 사실로 김흥근이 원망을 듣고 있었다.
어느날 김흥근의 집을 찾은 정수동에게 사색이 된 계집종이 달려와
“세살 된 어린 자식이 돈을 삼켜 목에 걸렸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당황하며 물었다.
정수동은 점잖게 아이가 삼킨 돈이 남의 것인지 아니면 자기 것인지를 물었다.
계집종이 자기 것이라 하자 이번에는 몇푼을 삼켰느냐고 물었다.
한푼이라고 하자 정수동은 “아무 걱정 말아라.
남의 돈 2만 냥을 먹고도 아무 탈이 없는데 자기 돈 한푼 먹었다고 죽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말을 방 안에서 들은 김흥근은 그 길로 2만 냥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고
정수동에게 자신의 청렴을 구해주었다며 고마워한 뒤 두고두고 그 말을 교훈으로 삼았다.
그 후 이 집은 헌종의 후궁은 경빈이씨(慶嬪李氏)의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
1908년 서부 반송방(盤松坊) 미동(渼洞)으로 옮겼다가
1911년에 동부 인창면(仁昌面)의 이씨 묘소로 옮겼다.
순화궁을 이전하고 난 후 빈집으로 남아있던 이곳은 이완용의 소유로 넘어갔다.
별장으로 사용하며 본가로 오가던 이 집은 친일파들의 교유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어느날 하늘이 컴컴해 지면서 소나기와 함께 정원에 있는 고목에 벼락이 내려쳐 둘로 갈라졌다.
때마침 이완용의 집을 찾아와 당구를 즐기고 있던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와
조카 한상룡(韓相龍)은 놀라 갈팡질팡하다가 안방 깊숙이 숨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으면서 숨는 아들을 향해
‘벼락이 떨어진 후 도망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 이라고 충고하였다.
낙뇌(落雷) 로 이완용은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으며 장안의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하늘이 대신 천벌을 주었다”며 쑤군거렸다.
소문과 함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완용은 이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때마침 1918년 화재로 소실된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安淳煥)이
인수하여 명월관의 분점격으로 운영했다.
옥호를 태화정(太華亭)이 있는 곳이라 하여
태화관(太華館)이라 하다가 후일 태화관(泰華館)으로 고쳤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미국의 남감리회 여선교부가 인수하게 되면서
1921년 4월 4일 「태화여자관」이란 명칭으로 공식 개관하였고,
사회사업의 장으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태화빌딩’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이곳에 남아 있다.
종로방면에서 인사동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쯤에서 만나는 태화관길 교차점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곧장 이 건물이 보이므로 이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구나 그 앞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고 새긴 제법 큼직한 표지석도 세워져 있어
위치확인에 도움이 된다.
고종임금의 인산일을 앞둔 독립선언의 거사는
당초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장소는 파고다공원 즉 탑골공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민족대표 33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할 경우에 유혈충돌이 빚어질 수 있으므로
군중이 모인 탑골공원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처음에는 이완용이 세를 놓아 여관이 들어섰다가 다시 요리집으로 바뀌었다.
,‘태화관’이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날 당시에는 ‘명월관 지점’이라고도 불렀다.
이 때문인지 사람들은 가끔 태화관과 명월관을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명월관의 분점이었으므로 두 곳은 확연히 구분된다.
조선식 요리집의 대명사인 명월관 본점은 1903년 9월에 처음 생겨났으며,
그 위치는 광화문 네거리인 황토현(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다.
우연찮게도 삼일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명월관은 그 이름을 한껏 날렸던 것이다.
바로 태화빌딩으로, 오른쪽 옆에는 커다란 바위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고 쓰여 있다.
문을 열고 빌딩 안으로 들어가면 1층 로비에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민족대표들의 그림이 있고
그 옆에는 ’독립만세‘라고 쓰여진 백범 김구 선생님의 친필이 걸려 있다.
태화빌딩 바로 옆 하나로 갤러리 입구를 자세히 보면 ‘서울의 중심석’이 표시돼 있다.
지하 갤러리로 들어가면 층계 바로 아래 팔각형의 돌기둥과 하마비 하나가 서있는데,
이것이 바로 1896년 고종 때 세워진 서울의 중심표석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양(서울)을 도읍지로 삼고,
서울의 중앙점인 인사동 194번지에 지표석을 세웠다.
왕족의 사위(구수영)집으로 시작되어
헌종때 귀빈 순화궁 김씨가 거처하면서 순화궁으로 불리었고,
한일합방 직후 이완용 소유의 명월관 지점으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미국의 남감리회 여선교부가 인수하게 되면서
1921년 4월 4일 「태화여자관」이란 명칭으로 공식 개관하였고,
사회사업의 장으로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느 때는 잠잠하다가도 해마다 3월만 되면 유달리 주목을 받는 공간이 있다.
우선은 ‘탑골공원’이 그 하나이고, ‘태화관’이란 곳도 곧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모두가 삼일만세운동의 역사 현장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탓이다.
예전의 흔적은 벌써 사라졌지만 태화관은 인사동 안쪽에 있던 요리점이었다.
지금은 ‘태화빌딩’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이곳에 남아 있다.
종로방면에서 인사동길을 따라 오르다가 중간쯤에서 만나는 태화관길 교차점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곧장 이 건물이 보이므로 이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더구나 그 앞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고 새긴 제법 큼직한 표지석도 세워져 있어
위치확인에 도움이 된다.
고종임금의 인산일을 앞둔 독립선언의 거사는
당초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장소는 파고다공원 즉 탑골공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민족대표 33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전날 별도의 모임을 갖는 자리에서
이들은 느닷없이 거사장소를 변경하기로 결정했던 까닭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할 경우에 유혈충돌이 빚어질 수 있으므로
군중이 모인 탑골공원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세운 변명치고는 꽤나 구차했던 듯하다.
그 대신에 선택된 장소가 바로 인사동의 태화관이었다.
탑골공원과 매우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 고려된 듯 하지만,
스스로 요리집이라는 폐쇄된 공간으로 비껴난 점은 크게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이 아닌가 한다.
어쨌거나 요리집 태화관이 삼일독립선언의 역사적 장소로 귀결된 것은
이처럼 민족대표 33인의 변심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태화관이란 곳이
다름 아닌 친일귀족 이완용의 집터였다는 사실이다.
경술국치의 당사자이며 매국노의 대명사인 그가 살았던 장소에서
독립선언의 회합이 있었다는 것은 비록 우연의 결과였긴 하지만 자못 역설적으로 들린다.
태화관이 있던 곳에는 원래 조선 헌종의 후궁이던 경빈 김씨가 생전에 살았던 ‘순화궁’이 있었고,
1907년 6월에 경빈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당시 궁내부대신이었던 이윤용(이완용의 형)이 재빨리 이곳을 차지하였다가
1911년 초에 이 집이 이완용에게 다시 넘겨진 내력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 이완용의 집은 서소문 밖 약현(지금의 중림동)에 있었으나
1907년 고종 퇴위 때 격노한 민중의 습격으로 불타버리고 그 뒤로는
남산 아래 저동 일대를 전전하고 있는 차였다.
그가 순화궁으로 들어와서 산 것은 3년 가량이었다.
그리고 1913년 말에 옥인동에 대저택을 세워 이사를 나간 이후에도
이완용은 여전히 집주인의 신분을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곳에 요리점이 들어선 것은 1915년 무렵이다.
처음에는 이완용이 세를 놓아 여관이 들어섰다가 다시 요리집으로 바뀌었다.
,‘태화관’이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날 당시에는 ‘명월관 지점’이라고도 불렀다.
이 때문인지 사람들은 가끔 태화관과 명월관을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명월관의 분점이었으므로 두 곳은 확연히 구분된다.
조선식 요리집의 대명사인 명월관 본점은 1903년 9월에 처음 생겨났으며,
그 위치는 광화문 네거리인 황토현(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다.
우연찮게도 삼일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명월관은 그 이름을 한껏 날렸던 것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양(서울)을 도읍지로 삼고,
서울의 중앙점인 인사동 194번지에 지표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