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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폭풍전야
제3장[12.12쿠데타]
3.[하나회]인맥
하나회,[오성회][칠성회]이 모체
육사11기 중심 3공시절 존재드러내
73년 [운필용사건]연루돼 위기 맞기도
군부내 정치군인들...보안사.수경사.특전사 요직차지 청와대 접근
지난5월 김영삼대통령이 [5.18관련 대국민담화]에서 [12.12]을 [쿠데타적 사건]로 규정함으로써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과정]로 세인들은 인식하기에 이른다.
[12.12쿠데타]의 총주모자를 전두환전대통령으로 보아 쿠데타를 주동하는 주요인맥으로 세칭 [하나회]와 [9.9인맥]으로 크게 대별될 수 있다.
[하나회]은 육사11기 가운데 영남출신들이 생도시절 만든 [오성회]와 그들이 위관시절에 회원을 추가해 만든 [칠성회]가 그 모체로, 집권자의 친위세력이면서 [군부내 정치지하단체]라고 보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다.
[오성회]는 육사11기의 전두환(용성), 노태우(관성), 김복동(여성), 박승하(웅성), 최성택(혜성)이 모여 만든 동향출신 모임으로 진해육사시절 유달리 응집력이 눈에 띄는 모임인데, 이들이 졸업후 위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교유관계를 늘려 11기의 또다른 영남출신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등이 가세 칠성회를 구성한다. (오성회의 박승하가 같이 졸업을 못해 박이 탈락하고 3명이 가세해 7명이 된것임)
이들은 61년 [5.16]이후 줄곧 정국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군사정권에서 일정역할을 확보하기 위한 서클을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급기야 63년 2월 전두환(당시 소령)의 집에서 [칠성회]멤버에 박갑용(대령예편.전수경사30대대장), 남중수(대령예편.전에너지관리공단감사), 노정기(소장예편.전필리핀대사)등 3명을 추가, 10명으로 [하나회]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하나회]의 첫 번째 세력화는 63년 3월18일 육사총동창회 모임인 [북극성회]운영위원회에서 11기 운영위원인 노정기의 강력한 추천발의로 노태우(당시 대위)가 북극성회장에 선출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회]는 63년 7월6일 4대의혹 사건으로 육사8기그룹의 김종필계가 궁지에 몰리고 육사5기의 김재춘(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부상하자 육사총동창회의 이름을 빌려 육사8기를 거세하려는 [친위쿠데타]을 기도했으나 북극성회운영위원회에서 반대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소위[7.6사건]이다. 그러나 이사건을 계기로 [하나회]는 육사출신 장교들 사이에 노출된다. 그러니까 [하나회]의 존재가 최초로 알려진 것이 지금부터 30년전의 일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방첩대장이 정승화(12.12당시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박정희)는 민기식 당시참모총장과 정승화방첩대장에게 육사11기들의 불발친위쿠데타의 수사를 지시하고 정방첩대장은 수사를 한후 박의장에게 주동자구속을 건의한다. 이때 만약 정방첩대장의 건의대로 전두환소령(당시중앙정보부) 노태우대위(당시 방첩대) 정호용대위(당시 공보처)등이 구속되어 군복을 벗었더라면 현대사의 비극인 [5.18]은 존재했을까?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춘이 이들을 용서해야한다고 박의장에게 건의, [하나회]은 기사회생한다.
[하나회]는 또 73년4월초[김필용사건]에 연루되어 또한번의 위기를 맞지만(당시 이들을 조사한 보안사령관은 현재 민주당 강창성의원)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서종길 당시 청와대 안보특보(육사1기.대장예편) 노재현 당시 육참총장 진종채 당시 수경사령관 (육사8기.대장예편)등 영남출신들의 비호로 잔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하나회]는 외부로부터 압력과 억압이 심해질수록 내부적으로 심리적 유대감은 더욱 끈끈해진다. 이들이 윤필용구속사건이후 외부적으로 한동안 잠잠했으나, 6년뒤인 79년3월 전두환 당시소장이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후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게된다. 그리하여 79년 10.26을 겪으면서 급속도로 [정권찬탈]을 위한 계획이 진행되는 것이다.
[12.12쿠데타]와 같은 [하극상]은 군사정권하에서는 어느때나 일어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군사정권 자체가 정통성이 없는 [하극상적]인 성격을 항상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0.26이나 12.12쿠데타, 그리고 5.18민중항쟁에서와 같은 학살만행은 이미 61년 5.16군사쿠데타에서부터 잉태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군사정권은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근위부대를 비대하게 하고, 비밀스럽게 친위세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70년대중반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던 2-3개 정도의 직업군인 중심 공수부대가 안보라는 명분아래 일반사병을 포함시키기 시작 7개 여단으로 증설된다.
또 청와대경호실 체제가 경호실장밑에 현역중장을 경호차장으로, 경호차장밑에 2명의 현역준장이 배치되는가하면 경호실 작전팀은 2개 보병사단병력을 막아낼 수 있는 군체계와 화력을 갖추는등 비정상적으로 군단급의 군대체계가 청화대내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경복궁내에는 청와대를 경비하기위해 수경사소속의 30경비단 33헌병대, 66특전대(공수부대), 55경비대(보병), 22경호대(경찰), 101경비대(경찰)등이 창설 또는 증설되 포진하게되고 수겅사와 보안사, 특전사(공수부대)로 하여금 수도경비는 물론 나날이 드세어지는 학생시위를 진압케한다.
군부내 정치군인들은 자연스럽게 보안사 수경사 특전사를 선호하게되고 정권담당자의 눈에 뛸 기회로 청와대 경호실에 배속된 부대에 가는 것이 소원이 될 수밖에 없다.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전속부관인 11기 손영길소령을 필두로 방첩대, 중앙정보부 등에 배치된 [하나회]소속 정치군인들은 자신들의 [정권야욕]을 실현키 위해 충성을 맹세하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12.12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의 행적은 그에 걸맞게 진행된 대표적 케이스다. 70년대초 김포 1공수여단장(준장)과 그후 청와대경호실 작전차장보를 거쳐 일선사단장을 맡다 79년초 영남군벌들의 후원아래 일약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다.
또 전두환이 제4대단장을 지냈던 청와대경비를 맡는 경복궁내 30경비단은 5대단장 이종구 7대 이대희 9대 장세동 10대 이현우 11대 김상준 12대 이충석 등이며 이들은 모두 [하나회]계보 관리자들이다. 손영길도 전두환보다 먼저 30경비단장을 거쳐갔다.
12.12쿠데타군 핵심멤버중 유학성군수차관보(8기특.중장) 차규헌 수도군단장(8기.중장) 황영시 1군단장(10기.중장)은 [하나회]후원세력이고,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나머지는 거의 [한나회]소속이다.
12.12쿠데타 경복궁지휘부에는 전두환보안사령관의 지휘아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를 비롯, 노태우9사단잔 박준병20사단장(12기.소장) 백운택 71방위사단장(11기.준장) 이학봉보안사대공처장(18기.중령) 장세동30경비단장(16기.대령) 김진영33경비단장(17기.대령)이 진을 치고, 총리공관 봉쇄조는 정동호청화대경호실장대리(13기.준장)와 고명승경호실작전과장(15기.대령)이 맡는다.
정호용50사단장은 12월13일 오전 경복궁지휘부에 가담하고, 정승화총장연행조는 허삼수보안사인사처장(17기.대령)과 우경윤육본범죄수사단장이, 후보계획조에는 성환옥 육본헌병감실기획과장, 최석립33헌병대장, 이종민육본헌병대장이 포진한다.
또 상황점검조는 정도영보안사보안처장(준장)과 허화평보안사령관비서실장(17기.대령)이, 정병주특전사령관과 장태완수경사령관유인조로는 우국일보안사참모장과 조홍 수경사헌병단장(대령)이 맡고, 수경사점령은 신윤희 수경사헌병부단장이 육군지휘부를 체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육본과 국방부는 박희도 1공수여단장(12기.준장)이 맡아 노재현국방장관을 체포함으로써 끝나고, 특전사는 최세창3공수여단장(12기.준장)이 정병주특전사령관을 체포함으로써 점령당하며, 장기오5공수여단장(12기.준장)은 효창운동장에서 대기함으로써 예비부대의 역할을 담당한다.
또 박희도30사단장(소장)은 9연대(연대장 송응섭대령)를 중앙청에 출동시킨후 고대뒷산으로 이동 진을 치고, 노태우 9사단장의 참모인 구차회대령은 9사단 29연대(연대장 이필섭)를 중앙청으로 출동시키며, 백운택의 71방위사단 제2기갑여단16전차대대(대대장 이상규)도 중앙청으로 출동한다.
<정용화기자>
첫댓글 많은걸 알고 갑니다.
감사해요.
나븐놈들
연재글이 무척 기다려 지구요
더 많은 글을 부타 드려도 될까요.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