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구의 사랑이야기 – 故장영희 마리아 선생님
9월 8일 내 영명축일, 2학기 들어 학교 수업 꼭 두 번 하고 나는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고, 두 달 가까운 병원 생활은 녹록치 않았지만 가장 문제거리가 백혈구 수치였다. 강도 높은 방사선치료 때문에 백혈구 수치가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면역력 감소로 고생했는데, 퇴원한 지금까지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적어도 3,000이상이 되어야 항암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는데 내 백혈구 수치는 겨우 2,000을 넘나든다.
그러니 백혈구 미달로 벌써 6주째 항암치료가 미루어지고 있다. 백혈구 수치를 올리기 위해선 무조건 단백질 많은 육류를 먹으라는 의사 말대로 고기를 많이 먹으니 몸은 불어 임신 초기같은데, 백혈구 수치는 요지부동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백혈구 수치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걸 아는 상민이에게서 이메일이 왔다."선생님, 제가 인터넷 찾아보았는데요. 백혈구 수치는 단백질 많이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트레스 받지 않고 마음이 기쁠 때 올라간대요.
백혈구의 사랑이야기도 있어요. 백혈구는 우리 몸에 침입자가 들어오면 절대 무력을 쓰지 않고 더러운 것도 미운 것도 가리지 않고 가만히 껴안는대요. 백혈구에게 안긴 침입자는 백혈구의 사랑에 감동해서 저항없이 없어지구요. 적혈구도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 산소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자기가 갖고 있는 산소를 몽땅 다 주고 자기는 며칠 안에 죽는대요. 그래서 백혈구는 사랑으로 감싸고 적혈구는 자기가 지닌 모든걸 나눠주고...
그래서 우리 몸이 건강할 수 있대료. 선생님 꼭 빨리 낳으세요. 선생님 빨리 낳으시라고 제가 요새는 묵주기도까지 해요."
백혈구의 사랑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심 은근히 켕겼다. 백혈구처럼 남을 감싸주는 마음, 적혈구처럼 내가 지닌 모든걸 나눠주는 마음, 그런 마음이 모자라 백혈구 수치가 오르지 않는 건지... 선생의 본능으로 상민이가 '나으세요'를 '낳으세요'라고 하는 것도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나는 답을 썼다.
"그래, 고마워. 그런데 너 서강대생 맞아? '병이 낫다'와 '아기를 낳다'를 구별 못해? 휴대폰 덕으로 새치기로 들어온 것 아냐?"
늘 핀잔주고 눈 흘겨도 성격이 좋아 화를 내지 않는 상민이의 답이 걸작이었다.
"선생님, 이제 곧 대림이잖아요. 그리고 선생님 세례명이 마리아구요. 선생님이 예수님 낳으셔야 우리가 예수님 만나죠. 그래서 선생님 꼭 낳으시라 구요... ㅎㅎㅎㅎ"
웃을 수밖에... 맞다. 기쁜 우리 주님이 오신다. 적혈구처럼 가진 것 다 내 주시고 백혈구처럼 모든 것 감싸주시는 주님이 내게 오신다. 아, 엔돌핀이 오르고, 백혈구 수치가 팍팍 오르는 게 느껴진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실 때는 분명 제가 백혈구 수치에 합격, 첫 번째 항암치료를 받았을 겁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신부님, 수녀님들, 동료 교수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학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 감싸시는 사랑의 백혈구 같은 우리 주님 오시는 성탄 축하합니다!
첫댓글 소아마비의 몸으로 미국 유학 후 서강대 영문학 교수로 맑고 밝은 삶을 사시다가 가신 장영희 마리아님의 귀한 글이 들어와 나누고 싶습니다...... 영문학을 하신, 고인의 부친과 함께 일찌기 우리나라 영어교재를 만든 귀재이셨지요...
장영희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러 간 적 있어요.
전 한번도 만난 적은 없었어요... 표정이 넘 밝지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