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국
“명진아! 정신 차려!”
명진이는 엄마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귓등으로 희미하게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 그리곤 이내 몸이 가뿐해지더니 풍선처럼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머리엔 하얀 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얼굴 또한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한 자신이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피를 토하듯 흐느껴 울고 있었고, 아빠는 엄마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상태에서 눈시울을 닦아내며 서있었다.
여동생 아영이도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렸고, 할머니도 병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명진이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남의 일인양 덤덤하기만 했다.
명진이 눈앞에는 눈이 시리도록 하얀 빛의, 그 끝이 까마득하게 아스라한 곧은 길이 펼쳐졌다. 길은 가파른 경사를 이루며 하늘에 닿아있었다.
그때 누군가로부터 하얀 길을 따라 오라는 소리가 울려왔다.
명진이는 하얀 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스르르 올랐다.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듯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 가다보니 누군가가 앞서 가고 있었고, 뒤쪽에서도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었다.
어느덧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일행의 수효가 점점 불어났다.
굳이 살펴보려는 생각이 없었음에도 그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모두들 크거나 작거나 하질 않고 하나같이 비슷한 크기의 몸집으로 흐늘흐늘한 질감의 옅은 푸른 색이 도는 망토같이 생긴 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든 이들의 얼굴이 희게 빛나는 타원형인데, 얼굴 중앙에 두 개의 큰 눈만 있을 뿐 코나 입, 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감정이라곤 전혀 엿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신기하게도 모든 이들의 눈이 모두 곤충의 겹눈을 확대한 것처럼 좁쌀같이 까맣고 윤기 나는 것들로 그득 채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팔도 다리도 보이지 않고 그냥 물 흐르듯이 길을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이었다.
명진이 또한 그들처럼 길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마침내 뾰족한 끝부분이 하늘에 닿을 듯 엄청나게 거대한 세 개의 수정기둥이 우뚝 솟아있는 광장에 다다랐다. 각각의 수정기둥 양 옆엔 덩치도 자못 컸지만, 얼굴 중앙에 큼직한 눈이 하나씩만 있는 괴상한 사람들이 버티고 서있었다.
사람들은 광장에 도착한 차례대로 가지런히 정렬하였고, 그런 사람들 사이를 야구공 크기의 밝게 빛나는 둥근물체들이 무수히 떠다녔다. 둥근물체들은 각기 한 사람만을 택해 그 시선 앞에 머물며, 나아갈 길을 안내하는듯 보였다.
자석에 이끌리듯 둥근물체를 따라 나선 사람들은 세 개의 수정기둥 가운데 어느 한 기둥을 택해 그 앞에 머물더니 잠시 후 흡수되듯 그 수정기둥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간혹 가운데에 위치한 기둥으로 빨려들어간 사람도 있었으나 그 수효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은 왼쪽 기둥으로 빨려들어 갔으며, 열 명 중에 하나 꼴로는 오른쪽 기둥으로 빨려들어 갔다.
모두들 지시에 따라 순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각각의 기둥들이 어떤 기둥이란 것은 느낌으로 알 수가 있었다. 따라서 가운데 기둥으로 가길 원했지, 왼쪽이나 오른쪽 기둥으로 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명진이 눈앞으로 둥근물체가 다가왔다. 상당히 밝은 물체였으나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었다. 둥근물체는 수천 수만 마리의 투명한 실지렁이들이 마치 공처럼 둥글게 얽혀 쉴 새 없이 꿈틀거리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명진이는 둥근물체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오른쪽 기둥 밑이었다.
기둥에 가까이 다가가자 명진이가 사람으로 살아온 10년7개월간의 여정이 눈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태어날 때의 모습과 젖꼭지를 빨고 있는 모습, 걸음마를 배우던 모습과 장난감을 갖고 놀던 모습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런 모습들 사이에 개미 떼를 발꿈치로 지끈지끈 밟아 문지르던 모습도 보였고, 샤프펜슬로 앞자리의 형석이 잔등이를 쿡쿡 찔러대던 모습도 보였다.
짝꿍 은실이의 형광펜을 몰래 훔치던 모습도 보였고, 병철이의 자전거 타이어를 송곳으로 마구 찔러 못쓰게 만들어놓던 모습도 보였다. 길거리에서 주운 만 원짜리로 피씨PC방에서 게임하던 모습도 보이고, 눈귀가 어두운 가게 할머니를 속이고 사탕과 껌을 훔치던 모습도 보였다.
동생 아영이의 돼지저금통을 찢고 그간 애써 모은 돈을 빼앗아 군것질 사먹던 모습도 보였고, 학습지 산다며 엄마를 속여 돈을 탄 뒤 그 돈으로 게임기를 사던 모습도 보였다. 아빠 주머니를 뒤져 돈을 몰래 빼내가던 모습도 보였고, 선생님한테 아프다고 꾀병 부려 조퇴하고는 그 길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던 모습도 보였다.
그동안 살면서 저질러왔던 온갖 나쁜 짓들이 잊고 있었던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눈앞에서 전개되었다.
명진이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가슴이 두 방망이로 두드려대듯 요동쳤다.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자신이 지은 죄에 걸맞는 그 어떤 벌이 주어지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이려는 순간, 양 옆에 서 있던 두 괴인이 명진이를 번쩍 들어 힘껏 내던지는 것이었다.
명진이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뱅글뱅글 도는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밝은 공간으로 내던져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누워있던 바로 그 병실 안이었다.
명진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꼭 감은 얼굴이 여전히 창백해 보였다.
곧 이어 병실 안의 정황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옆의 침상에 누워있고, 할머니는 엄마의 이마를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아빠와 아영이는 잠시 자리를 비웠던지 보이지 않았다.
명진이는 강한 자석에 빨려들 듯 자신의 육체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그 즉시 명진이는 심호흡과 함께 몸을 벌떡 일으키곤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 엄마 어디 아파?”
할머니는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더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니, 너…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죽었다고?”
“…….”
“할머니, 나 안죽었어. 봐, 이렇게 멀쩡하잖아.”
할머니는 한동안 눈을 비벼댔다. 그리고는 명진이에게로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아이고, 내 강아지. 이게 어찌된 일이고?”
“할머니, 엄마 어디 아파?”
“니 에미가 아프긴 왜 아프니? 니가 죽은 줄로만 알고 저렇게 기가 빠져 누워있는게지.”
“근데, 내가 왜 누워있었지?”
“기억 못하겠니? 오토바이에 치어 머리를 다쳤잖니?”
“머리를?”
“그래, 거의 이틀간 사경을 헤매다 한 시간 전에 숨을 걷었잖니.”
“그럼, 내가 죽었다가 도로 살아났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할매가 놀라자빠진게 아니더냐.”
“아빠와 아영이는 어디 갔어?”
“응, 그게…. 곧 돌아올 거야.”
그때 아빠와 아영이가 병실로 들어섰고, 엄마도 이상한 낌새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앉았다. 모두들 침대에 걸터앉은 명진이를 보더니 꽤나 놀란 표정을 짓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명진이는 자신을 빙 둘러싼 가족들에게 좀 전에 자신이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근데 참으로 신기해. 내 몸이 갑자기 붕 뜨더니 죽은 듯이 누워있는 내 모습과 아빠, 엄마 그리고 할머니랑 아영이까지 내려다보였어. 그리곤 하늘까지 뻗어있는 하얀 길을 따라 간거야.
한참 가다보니깐 얼굴엔 눈만 있고 귀나 코, 입도 없는 사람들이 파란 옷만 걸치곤 여기저기서 나타난거야. 그들과 함께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갔는데, 세 개의 커다란 유리기둥이 나타나고 그 유리기둥 속으로 사람들이 빨려들어가더라고….”
“야가 정신을 잃더니만, 그새 염라국에 댕겨온 모양이로구나.”
할머니는 명진이가 본 것이 염라국이 틀림없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왼쪽 기둥으로 빨려들어가고, 또 일부는 오른쪽 기둥으로, 그리고 어쩌다 한두 명이 가운데 기둥으로 빨려들어가던데?”
“그러니까 지은 죄가 크고작고에 따라 들어가는 문이 다른가보구나.”
명진이는 오른쪽 기둥 앞에 서서, 자신이 지은 죄를 파노라마를 통해 본 것만큼은 차마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나도 반짝이는 공을 따라 어떤 기둥 앞에 섰다가 기둥을 지키는 괴물한테 쫓겨났어. 그리곤 다시 이곳으로 온거야.”
“정말 다행이다. 안그랬음 명진이 영영 못볼뻔했잖아.”
엄마가 명진이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담, 명진아. 그 괴물이 염라대왕인가 보구나.”
“눈이 하나뿐인걸. 그리고 덩치도 엄청 컸고, 또 기둥마다 두 사람씩 있었어.”
“그럼 저승사잔가 보네? 그렇다면, 그 세 개의 기둥이 무얼 뜻할까?”
“그러니까, 에미 말이다. 그 세 개의 기둥은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을 뜻하는 것일게야.”
“그러니까 오빠야.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몬쓰는 거야. 그치 엄마?”
아영이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엄마의 동의를 구했다.
명진이가 다시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담당의사선생도 영문을 몰라했다.
“이상하네요. 분명 머리를 크게 다쳐서 뇌출혈로 사망신고까지 내렸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니…. 엠알아이MRI 검사를 다시 해봐야겠네요.”
엠알아이 검사소견 또한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함몰된 전두엽과 두뇌피질에 넓게 퍼진 울혈이 어느새 말끔하게 치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 염라대왕께서 우리 명진이가 아직은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며, 다시 세상으로 내려보내셨나 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명진이에게 있어 그것은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었다. 따라서 그날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마냥 소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