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 지녀
새삼스럽지만 인간에게 자연이 무엇인가를 반추해본다. 지구의 자연은 대략 46억 년 전에 탄생했다. 지구상에서는 태양 에너지 덕분에 숱한 생명체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이런 지구에 마침내 인간 종이 나타났고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발견하면서 인류는 문화를 구축하게 된다.
문화는 어원학적으로 땅을 경작한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수렵과 목축 생활을 하고, 마침내 한 지역에 정착하여 작물을 재배하는 경작 단계로 진입한 것이 문화의 실질적 출발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을 경작하는 단계로까지 이행하게 된 데는 두뇌 발달에 따른 정신의 활동 덕분이다. 그래서 문화의 일차적 의미가 인간의 생존에 알맞도록 땅을 일군다는 것이라면, 이차적 의미는 정신 계발이다. 오늘날 인간의 정신 활동에 따른 유무형의 과정과 산물을 문화로 지시하는데, 이것은 주로 좁게 사용한 이차적 의미의 문화인 것이다.
문제는 문화를 구축한 인간이 그 토대인 자연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를 통해 서구적 생활양식과 제도는 물론 세계관까지도 함께 유포되고 있다. 이런 서구적 주류 전통의 자연관에 따르면 자연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즉, 인간에게 자연은 도구적 가치를 지닐 뿐이다. 도구적 가치 가운데 으뜸은 경제적 가치다. 새만금 갯벌 지역을 보기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이 어패류 등을 채취하여 향유할 갯벌의 경제적 가치로 보이기도 하고 또 간척하여 농지로 만들 때의 농업 경제적 가치로 가늠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골프장이나 공업단지를 설치하는 산업 경제적 가치로 평가할 수 있다. 현대의 정책은 무엇이 최고의 경제적 가치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자연의 운명을 결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반도 전역에 흐르는 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대로 두었을 때의 이용 가치와 대운하로 바꾸었을 때의 경제적 가치가 다르게 평가되어 그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
과연 자연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한 것인가? 1949년에 출간된 ‘모래 군의 열두달’(A Sand County Almanac)이란 책은 다른 생각을 본격적으로 표출했다. 미국 환경운동사에서 바이블로 평가되는 이 책을 쓴 사람은 알도 레오폴드였다. 20세기 초 산림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관습적 태도로 정책을 수행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식량 공급과 레포츠의 일환으로 사슴과 들소를 사냥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산림청의 정책도 이런 경제적 가치를 지닌 동물에게 해가 되는 곰과 늑대를 박멸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곰과 늑대를 보기만 하면 곧바로 사냥총을 쏘아대곤 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밤 황소자리의 별무리가 바위 벼랑 위로 솟았을 때 짝을 잃은 늑대의 울부짖음이 회색 불곰의 화답과 공명하며 멀리 퍼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에게 자연의 조화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레오폴드는 곰과 늑대가 사라진 곳에서 사슴 떼가 훑고 지나간 초원은 황폐화하고 폭우라도 쏟아지면 토양 유실이 급격하게 진행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참나무의 열매는 사슴의 먹이가 되고, 사슴은 퓨마의 먹이가 되며, 퓨마는 참나무 밑에서 죽어 자신의 지난 날 먹이를 위해 도토리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문화적 인간도 생명 공동체의 평범한 구성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생명 공동체의 순결과 안정성 그리고 아름다움의 보전에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옳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행위는 그릇된 것이다”로 압축되는 대지의 윤리를 공표하게 된다. 바야흐로 자연의 탈도구적 가치가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연은 인간에게 새로운 유형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 부상한다. 성경에 의거하더라도 창조주 하느님은 여섯째 날 인간을 탄생시키기 이전에 하늘과 땅을 나누고 또 빛과 어둠을 분류하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자연은 그 자체에 내재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문화적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자연에 손을 댈 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손을 댈 일이 아니다.
-한면희(프란치스코·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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