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관에 소속되어 있는 공노비가 도망치거나 숨어있거나, 혹은 불법으로 양인이 된 자를 색출하던 기관으로 임시관서였다. 공노비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공노비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자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라는 노비 추쇄 기관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권세있는 권력자들이 공노비를 임의로 사노비화하는 문제가 많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간관(諫官) 전백영(全伯英)의 건의로 태조 4년(1395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1479년(성종 10)에 노비추쇄도감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경외노비 26만 1,984명, 역노비(驛奴婢) 9만 581명 등 모두 35만 2,565여명이 집계되었다. <<경국대전>>에는 3년마다 추쇄하고 20년마다 정안을 작성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였다. 한 번 추쇄하는데 최소 3- 4년이나 걸리는 대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건국 후 150년 동안에는 모두 6번의 추쇄가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임진왜란을 전후한 100년간은 신분제도가 약화되면서 한 번도 실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효종때에 와서 다시 실시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국가의 재정적자 때문이었다. 1655년(효종 6)에 국가는 2만석의 재정적자가 났는데 수입은 10만석이지만 지출이 12만석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효종은 등록되어 있는 19만여명의 노비중에 불과 2만 7천명만이 신공을 내고 있음에 착안하여 추쇄를 실시하였다. 이 때 노비추쇄도감사목(奴婢推刷都監事目)의 내용은 ① 할아버지 때 생원-진사과에 합격해 그 자식과 손자가 양인(良人)으로 거짓 행세하고 있는 자는 양인으로 허락한다. ② 아버지 때 생원-진사가 된 자의 자식 또는 아버지는 등과하지 못했으나 아들이 생원-진사가 된 자로서 거짓 양인 행세를 한 자는 대구속량(代口贖良)을 허락한다. ③ 3대 이상 등과한 사람이라도 자수한 자는 위와 같은 은전을 베풀어주고, 자수하지 않고 적발된 자는 누대(屢代)가 지난 뒤라도 천적(賤籍)에 환속한다. ④ 법정 절차를 밟지 않은 면천자는 환천한다. ⑤ 시노(寺奴)가 사비(私婢)와 결혼해 그 처를 속량(贖良)시켰을 경우 그 자녀는 부역(父役)을 따르도록 한다. ⑥ 경중(京中) 각사 노비의 추쇄는 각사의 장관이 이를 책임진다 등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10만명 이상의 실공노비(實貢奴婢)를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불과 1만 8,000여명만 찾아내었다. 그 후에는 각 지방관청에서 3년마다 실시하는 추쇄만 실시했으며 전국적으로 노비추쇄도감은 설치되지 않았고, 1801년(순조1년)에 공노비가 혁파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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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의 연표 - 우왕 138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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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禑王) 14년(1389년)
*1월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와 손잡고 이인임(李仁任)을 비롯하여 축재한 대표적인 사람들을 실각 시켰다. 이인임(李仁任)은 우왕(禑王)을 왕으로 즉위시킨 가장 큰 공신이고, 거의 7-8년간 권력을 장악했었다. 이때 이인임(李仁任) 외에 2명도 제거되었다.
*1월 명(明)나라가 고려의 영토인 지금의 함경남도(咸鏡南道)에 해당하는 동북면(東北面) 지방을 자기네 영토로 환수한다는 통보에 고려는 남녀노소 관리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두려워하였다.
*2월~4월 고려에서는 명(明)나라의 요구에 대한 대응의 문제로 의견이 2가지로 갈라졌다. 국왕이던 우왕(禑王)과 총사령관이면서 집정자인 최영(崔瑩)은 군대를 동원하여 요동(遼東)지방을 공격함으로써 거부 의사를 나타내자고 주장하였고, 이성계(李成桂)와 그를 지지하는 관료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상국(上國)인 명(明)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사대(事大) 예의에 어긋나고 때문에 반대하여 외교사절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이 지방이 역사적으로 고려의 영토라고 납득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고려정부는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동시에 군대를 동원하여 요동(遼東)지방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우왕(禑王)이 부왕(父王)처럼 살해될까 두려워서 최영(崔瑩)의 딸을 비(妃)로 맞이하였다.[영비(寧妃)] 즉 우왕(禑王)이 군대책임자인 최영(崔瑩)을 보호자로 삼은 것이다.
*4월 우왕(禑王)이 요동(遼東) 정벌을 기정사실화 하여 반대여론을 잠재우고 군대를 독려하기 위하여 평양까지 행차하였고 요동(遼東)정벌군이 출발한 뒤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5월 8도 도통사(총사령관) 최영(崔瑩), 좌군 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 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이성계(李成桂) 휘하에는 여진족 추장 출신인 이두란(李豆蘭), 이화(李和) 등이 소속됨에 따라 그들이 거느리는 여진족도 군대로 동원되어 있었다. 이들은 고려군대이지만, 일차적으로 이성계(李成桂)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사병 성격이었다.)와 함께 징병한 총 38000명, 보급부대 11634명 규모의 군대가 요동(遼東)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 때 최영(崔瑩)은 전방에 출전하지 않고 평양에 우왕(禑王)과 함께 머물면서 후방에서 지휘하였다.
*5월 22일 고려 원정군이 압록강 중간에 있는 위화도라는 섬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이성계(李成桂)는 군대를 돌려(回軍) 최영(崔瑩)을 숙청하자고 조민수(曺敏修)를 설득하였다. 실권이 없는 조민수(曺敏修)는 이성계(李成桂)의 제안을 따라 군사를 회군하였다. 이 사건이 군사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다.
*6월 3일 이성계(李成桂)측에서 왕궁을 포위하고 강제로 최영(崔瑩)을 잡아서 고봉현(최영(崔瑩)의 고향)으로 유배하였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가 최영(崔瑩)을 찾으러 수색한 사람이 곽충보(郭忠輔)이다.
*6월 8일 이성계(李成桂)측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영비(최영(崔瑩)의 딸)을 강제로 잡아내려고 하였다. 우왕(禑王)이 끝까지 이에 저항하면서 “만약 이 왕비를 내보내야 한다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고 하자 회군파들이 우왕(禑王)까지 함께 궁궐을 나가서 강화로 가게 하였다. 당시 우왕(禑王)의 나이는 25세였다.
*6월 9일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 등의 추천으로 우왕(禑王)의 아들인 창왕(昌王)이 9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6월 조준(趙浚이 전제(田制)개혁을 상소하였다.
*역사적으로 고려땅이라고 주장했었는데, 이에 대하여 명(明)나라는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으니, 고려측의 말을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고 한 발 빼는 자세를 보였다. 이때 고려의 주장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고려가 군대를 동원하여 자기들과 전쟁도 불사한다고 하는 태도를 보였으므로, 체면상 그렇게 표현했을 뿐 사실은 고려의 주장을 묵인한 셈이었다. 이 뒤에는 다시는 동북면(東北面) 땅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 적 없었다.
*7월 우왕(禑王) 탄생일에 강화에 고관을 보내어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우왕(禑王)은 강화로 쫓겨났지만 전왕(前王)으로서 최소한의 대접은 받고 있었다.
*7월 명(明)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창왕(昌王)의 왕위 계승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최영(崔瑩)이 감히 중국을 침범하려고 했던 죄를 통보하였다.
*7월 최영(崔瑩)은 충주로 유배되고 조민수(曺敏修)는 불법적인 토지 점거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8월 이색(李穡)(李穡)을 문하시중으로 이성계(李成桂)를 수(守)문하시중으로 임명하는 등 인사개편을 하였다.
*8월 이성계(李成桂)가 병권을 장악하였다.
*9월 우왕(禑王)을 강화에서 여흥(지금 여주. 황려부, 혹은 여흥군)로 옮기고 의복과 안마, 시종하는 시녀, 그리고 환관에게 겨울 옷을 지급하였다.
*10월 정사(正使)는 이색(李穡)(李穡), 이방원(李芳遠)(이성계(李成桂) 5자)으로 명(明)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명(明)나라에서 감독관을 파견하여 고려의 국정을 감독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1월 최영(崔瑩)을 죽이자는 상소를 올렸다.
*11월 우왕(禑王)의 여러 비(妃)들의 공상(供上)(윗 사람이 생활하도록 물자를 공급하는 것)을 중단하였다.
*12월 명(明)나라가 말(馬)과 환관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12월 우왕(禑王)을 왕으로 옹립한 죄로 이인임(李仁任)을 처벌하자는 상소가 올려졌다.
*12월 최영(崔瑩)이 처형당함에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최영(崔瑩)이 죽였음을 통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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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상 |
본문 |
시대 : 1174 인물 : 녹상, 장박인, 조존부, 정중부 신분 : 하급 장교 시대적 배경 1170년 구데타를 계기로 집권하여 출발한 무신정권은 그후 1270년까지 꼭 100년간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이 기간을 각각의 특질에 따라 보통 세 시기로 나누고 있거니와, 처음으로 권력을 잡은 이의방ㆍ정중부로부터 경대승을 거쳐 이의민이 집권하는 명종조 26년간을 성립기라고 한다면, 최충헌 등 최씨 4대가 집권하는 60여 년간은 확립기, 그리고 이후 김준과 임연ㆍ임유무 부자가 집권하는 기간은 붕괴기라고 할 수 있다. 무신란을 일으킬 때의 중심 인물은 정중부와 이고ㆍ이의방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쿠데타에 성공한 후 단행된 명종 즉위년(1170)의 첫 인사발령에서 정중부는 참지정사(2품)를, 그리고 이고는 대장군 위위경 집주, 이의방은 대장군 전중감 집주를 제수받는 등 각각 몇 단계를 뛰어넘어 문ㆍ무의 고위관직을 차지하고 정치를 요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정중부는 온건 세력이었던 데 비해 강경한 입장을 취한 사람은 쿠데타를 모의ㆍ주도했던 뒤의 두 사람이었다. 따라서 실제적인 권력은 이 두 사람에게 장악되어 있다시피 하였거니와, 곧 이어 양자간에 다툼이 벌어져 먼저 이고가 이의방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리하여 권력의 정상에 서게 된 이의방은 정중부 등 온건무장세력과의 타협하에 중방을 중심으로 하여 정사를 펴 나갔다. 그러나 그 역시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 국정을 함부로 하는 한편 정중부와도 사이가 나빠져 명종 4년 12월 조위총의 반군에 대한 토벌군을 출동시키는 혼란 중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명을 받은 종군승 종감 등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이후 정권은 자연히 정중부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정변 직후에 있은 인사발령에서 재상인 문하시중의 자리에 오르고 자파를 채추의 요직에 앉혔다. 그리고는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과 더불어 권세를 오로지하게 되지만, 이들도 또한 횡자가 심하여 내외에 고통을 준데다가 특히 정균이 억지로 공주에게 장가들려 하여 많은 물의를 빚더니 마침내 청년 장군 경대승에게 일시에 살해되는 운명을 맞았다.
세부 사항 24년에 왕이 화평재(和平齋)로 갔는데 거기에서도 또 자기가 좋아하는 문관들을 데리고 술 마시며 시 짓느라고 돌아갈 것을 잊었으므로 장사(將士)들은 심히 굶주리고 있었다. 그때에 정중부가 소변 보러 나가니 견룡 행수(牽龍行首)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가 따라 나와서 귀엣말로 말하기를? “문관들은 의기양양하여 취하도록 마시고 배부르도록 먹고 있는데 무관들은 굶주려 피로해졌으니 이래서야 어찌 참을 수 있는가!”라고 하니 정중부도 수염을 태운 악감이 있는지라 “그렇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반역의 흉모를 꾸몄다.? 그 후 왕이 연복정(延福亭)으로부터 흥왕사(興王寺)로 갔는데 그때 정중부가 이의방과 이고에게 말하기를? “지금이 거사할 때다. 그러나 왕이 만약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이 기회를 잃지 말자!”라고 하였다. 다음날 왕이 보현원으로 가려고 오문(五門) 앞까지 와서 시신(侍臣)들을 불러 술을 마시었는데 술자리가 한창일 때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장하고나! 여기가 바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로군!”이라고 하면서 오병 수박희(五兵手搏戱)를 시켰다. 이것은 왕이 무관들의 불평을 짐작하고 이런 일로 후하게 상품을 주어 그들을 위무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뢰는 무관이 왕의 총애를 받을까 염려하면서 시기심을 품었다.? 대장군 이소응(李紹應)은 무인이기는 하나 얼굴이 수척하고 힘도 약하였는데 한 사람과 수박희(手搏戱)를 하여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니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후려갈겼으므로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왕과 모든 신하들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으며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福基)도 이소응을 욕했다. 여기에서 정중부와 김광미(金光美), 양숙(梁肅), 진준(陳俊) 등의 낯빛이 변하며 서로 눈짓을 하더니 정중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뢰를 힐난하여 말하기를? “이소응은 무관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째서 이처럼 심한 모욕을 하는가!”라고 하니 왕은 정중부의 손을 잡고 달래서 말렸다. 이때 이고가 칼을 뽑고 정중부에게 눈짓하였으나 정중부가 그것을 중지시켰다. 황혼이 깃들어 일행이 보현원에 접근하였을 때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순검 군사를 모아 두었다. 그리고 왕이 문에 들어가고 모든 신하들이 물러나올 때 이고 등이 직접 임종식과 이복기를 문에서 죽였다.? 이때 한뢰는 친근한 환자의 힘을 입어 어상(御床) 아래로 숨어 들어가니 임금이 대경하여 환자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제지하게 하였다. 정중부가 말하기를? “화근 한뢰가 아직 임금 곁에 있으니 내보내서 죽이게 하라!”라고 하였으며 내시 배윤재(裵允材)도 또한 들어가서 왕에게 내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한뢰가 왕의 옷에 매달려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고가 칼을 뽑아 위협하니 그제야 나왔는데 즉석에서 죽였다. 이때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材)가 이의방에게 말하기를? “이고가 어찌 감히 왕의 앞에서 칼을 뽑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의방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김석재는 다시 말을 못했다. 이렇게 되어 승선 이세통(李世通), 내시 이당주(李唐柱), 어사 잡단 김기신(金起莘), 지휴 유익겸(柳益謙), 사천감(司天監) 김자기(金子期), 태사령(太史令) 허자단(許子端)등 호종 문관과 대소신료 환시들이 모두 살해당하였으며 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처음 거사할 때 정중부, 이의방 등이 약속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우측 어깨를 내어 놓고 복두를 벗을 것이다. 그렇지 않는 자는 모조리 죽이자!”라고 하였으므로 무관들도 복두를 벗지 않은 사람은 많이 피살되었다.? 왕은 크게 불안을 느끼며 그들을 어루만져 주어 그 마음을 안정시킬 의도에서 여러 장령들에게 검(劒)을 주었는데 무관들은 더욱 교만 횡포해졌다.? 이에 앞서서 동요(童謠)에 이르기를? “보현원(普賢院)이 어드메냐! 글자 획(劃) 수만큼 죽이리라!”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중부와 이의방에게 고하기를? “김돈중(金敦中)이 이번 일을 먼저 알고 도망갔다”라고 하니 정중부 등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만약에 김돈중이 서울로 들어가서 태자를 받들고 성문(城門)을 걷어 닫고 끝까지 들여 놓아 주지 않으면서 우리를 반란 두목으로 몰고 체포하겠다고 한다면 일이 대단히 위태로워 질 터인데 어쩌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이의방은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남녘으로 가서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북방으로 가서 거란(契丹) 놈들에게 투신하여 피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걸음 빠른 자를 파견하여 서울로 가서 정탐하게 하였던바 그 걸음 빠른 자가 그날 밤에 김돈중의 집까지 가서 동정을 살피니 고요하고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승선이 어디 있는가?”라고 물으니 “임금을 초종하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곧 돌아와서 보고하니 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일은 이미 성공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도당의 일부를 남겨서 행궁(行宮)을 지키게 한 다음 이고, 이의방, 이소응 등은 곧바로 서울까지 달려가서 가구소(街衢所)에 이르러 별감 김수장(金守藏) 등을 죽이고 대궐로 들어가서 추밀원 부사 양순정(梁純精), 사천감 음중인(陰仲寅), 대부소경(大府少卿) 박보균(朴甫均), 감찰 어사 최동식(崔東軾), 내시 지후 김광(金光)을 비롯한 내직원(內直員) 등을 잡아 죽였다. 또 순검군(巡檢軍)을 인솔하고 그 밤으로 태자궁(太子宮)으로 가서 행군 별감 김거실(金居實), 원외랑 이인보(李仁甫) 등을 죽이고 천동택(泉洞宅)으로 침입하여 별상원(別常員) 1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나서 부하를 시켜 대도로에서 외치기를? “문관의 관(冠)을 쓴 놈은 비록 서리(胥吏)라도 모조리 죽이고 씨도 남겨 두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졸들이 봉기하여 판 이부사로 치사(致仕)한 최포칭(崔褒稱), 판 이부사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 서순(徐醇), 지 추밀원사 최온(崔溫), 상서우승 김돈시(金敦時), 국자감 대사성 이지심(李知深), 비서감 김광중(金光中), 이부시랑 윤돈신(尹敦信), 위위 소경(尉衛少卿) 조문귀(趙文貴), 대부 소경 최윤서, 시랑 조문진(趙文振), 내시 소경 진현광(陳玄光), 시어사 박윤공(朴允恭), 병부 낭중 강처약(康處約), 도성 낭중 (都省郞中), 강처균(康處均), 봉어(奉御) 전치유(田致儒), 지후 배진(裴縉), 배연(裴衍) 등 50여 명을 찾아 내어 죽였다.? 이때 왕은 더욱 두려워서 정중부를 데려다가 병란들을 종식시키려고 하였으나 정중부는 그저 “예, 예”라고만 하면서 확실한 대답은 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즉시 이고와 이의방을 응양 용호군 중랑장(鷹揚龍虎軍中郞將)으로 임명하고 기타 무관에게는 즉 상장군은 수사공 복야(守司空僕射)로, 대장군은 상장군으로 진급시켰다.? 정중부 등이 왕을 환궁하게 하였는데 환자 왕광취(王光就)가 동료들을 모아 가지고 정중부 등을 토벌하려고 기도하다가 한숙(韓淑)이 그 계획을 누설해서 정중부 등이 왕을 수행하던 내시 10여 명과 환자 10명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정중부는 왕을 협박하여 군기감(軍器監)으로, 태자를 영은관(迎恩館)으로 옮겨 두었다가 드디어 왕을 거제현(巨濟縣)으로, 태자를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하고 왕의 어린 손자(太孫)를 죽였다.? 왕의 사랑하는 궁녀 무비(無比)가 청교역(靑郊驛)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는 것을 정중부가 죽이고자 하였는데도 태후가 간청해서 죽음은 면하고 왕을 따라갔다. 병부시랑 조동희(趙冬曦)가 기업을 연장시킬 터(延基地)를 보러 서해도(西海道)로 갔다가 사변이 생긴 소식을 듣고 동계(東界)로 가서 군대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려고 철령(鐵嶺)까지 왔으나 맹호(猛虎)가 길을 막아서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데 역도의 추격하는 기병(騎兵)이 와서 체포되었다.? 정중부는 조동희(趙冬曦)가 과거에 탐라 평정의 공이 있다 하여 먼 곳으로 귀양 보내기로 하였는데 간수(看守)하던 자가 갑자기 죽이고 시체는 물에 던져 버렸다.? 정중부 등은 또 내시 소경 최현을 죽였고 소경(小卿) 최춘, 원외랑 최치(崔値)를 귀양 보냈다. 또 죽인 문관들의 집을 허물어 버리고자 했으므로 진준(陳俊)이 이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원수로 여기던 자는 이복기, 한뢰 등 4∼5명이었는데 이번에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만도 이미 심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 집까지 모조리 헐어 버린다면 앞으로 그 처자들은 어디에 의지하여 살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이의방 등은 듣지 않고 병정을 풀어서 부숴 버렸다. 이때부터 이것이 무관들의 상습으로 되어 만약 원수 진 사람만 있으면 덮어놓고 그 집을 헐어 부수곤 했다.? 그 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군사를 영솔하고 임금의 아우 익양공(益陽公) 왕호(皓)를 맞아다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정중부 등은 또 임금이 사랑하던 환자 왕광취, 백자단(白子端) 행신(倖臣) 영의(榮儀), 유방의(劉方義) 등을 죽여서 저자에 효수(梟首)했으며 기타 환시(宦寺)와 총행만이복기, 한뢰 등 4∼5명이었는데 이번에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만도 이미 심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 집까지 모조리 헐어 버린다면 앞으로 그 처자들은 어디에 의지하여 살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이의방 등은 듣지 않고 병정을 풀어서 부숴 버렸다. 이때부터 이것이 무관들의 상습으로 되어 만약 원수 진 사람만 있으면 덮어놓고 그 집을 헐어 부수곤 했다.? 그 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군사를 영솔하고 임금의 아우 익양공(益陽公) 왕호(皓)를 맞아다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정중부 등은 또 임금이 사랑하던 환자 왕광취, 백자단(白子端) 행신(倖臣) 영의(榮儀), 유방의(劉方義) 등을 죽여서 저자에 효수(梟首)했으며 기타 환시(宦寺)와 총행만 믿고 교만 방자하던 놈은 거의 다 죽였다.? 의종(毅宗)은 일찍이 3개소에 사제(私第)를 건축하고 그를 관북택(館北宅) 천동택(泉洞宅), 곽정동택(藿井洞宅)이라고 하였는데 그 집에다 재산을 축적해서 거만(巨萬)에 달했다. 이때에 와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가 모두 나누어 점거했다. 정중부는 서해도 군(郡), 현(縣)을 자기 관향(貫鄕)인 해주에 속하게 했고 이의방은 자기의 외향(外鄕) 금구를 현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배치했다.? 명종(明宗)이 즉위한 후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았다가 곧 중서 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진급시키고 또 문하평장(門下平章)으로 올렸으며 공로를 평정하여 제1등 공신으로 정하고 그 화상을 벽상에 그렸다.? 그때 모든 무관이 중방(重房)에 회합하고 문관으로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전부 불렀다. 이고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자 하였으나 정중부가 제지하였다.? 이에 앞서서 수성사(壽星祠)를 건축할 때에 병부낭중 진윤승(陳允升)이 공사를 감독하였는데 군사들이 돌을 운반해 오면 일일이 저울에 달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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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출신 상장군 |
본문 |
유형 상장군 상장군은 고려의 중앙군 관제인 2군 6위 각 부대의 사령관이다.
문신VS무신 고려는 문신과 무신을 구분하였지만, 문신 중심의 사회였기에 무신은 차별을 받았다. 문신은 문학적 유학적 실력을 인정받아 관리가 되었지만, 무신은 과거에 무과(武科)가 없어 무술실력이나 용기와 힘을 가진 사람을 무신으로 진출시켰다. 이들은 하층출신이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해서 학문적 문학적 능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심지어 글자를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기개넘치고 질박한 무신들의 모습 이러한 사람들이 무신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용기와 힘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개가 넘치고 몸이 날쌨으며 체격이 좋고, 말을 타고 칼을 쓰고 활을 쏘는 등 뛰어난 무술 솜씨를 보였다. 또한 무인답게 질박 하고 직설적인 면모를 가졌다. 진준, 두경승은 이의 단적인 예이다.
무신난 이후의 움직임 무신난 이후 이들은 낮은 위치에 있다가 진출한 유형이여서 완악하여 불법적으로 재물을 늘렸으며, 사람을 해치는 것을 즐겼고, 함부로 힘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도 보였다. 이영진, 최세보, 박순필, 조원정, 이의민 등은 이의 단적인 예이다. 고의화 대정이 되다 성품이 침착하면서도 체격이 뛰어났고 기운이 장사였다. 이러한 조건으로 군졸로 진출한 후에 승진하여 하급 무신인 대정이 되었다.
이자의의 난을 딛고 공신에 책봉된 고의화 체격이 컸고 기운이 장사였던 그의 침착한 성품이 빛을 발한 것은 이자의의 난에서였다. 당시 선종의 아들인 헌종이 나이가 어려 즉위하자, 왕의 어머니이자 선종의 둘째 부인인 태후가 정치를 마음대로 하여 정국이 어수선했다. 그러자 선종의 셋째 왕비의 오라비 이자의는 누이가 낳은 아들 한산후를 현종 다음의 왕위에 올리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눈치 챈 선종의 동생인 숙종이 재상 소태보에게 이자의 제거를 명령하자, 소태보는 상장군 왕국모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을 호위하게 하였고, 왕국모는 고의화를 시켜 이자의를 죽이고 그 일당을 유배 보냈다. 반란을 꾀한 이자의의 제거에 직접적인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10여년 만에 상장군이 되었고, 은퇴하면서 공신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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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개관 - 정치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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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당시의 중앙 정치기구는 태봉의 관제를 이어받아 광평성(廣評省), 내봉성(內奉省), 순군부(徇軍部), 병부(兵部)가 중심이었으나, 성종(成宗) 때에 3성6부의 체제로 정착되었다.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은 백규(百揆) 서무(庶務)를 관장하는 재신(宰臣)과 간쟁(諫諍), 봉박(封駁), 서경(署經)을 담당하는 랑사(郞舍)로 구성되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이 수상이 되었다. 상서성(尙書省)은 중서문하성에서 결정된 정책을 집행하였으며, 이호례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6부를 거느렸다. 그러나 실제 행정은 6부가 직접 국왕의 명을 받아 시행하는 체제여서 상서성의 기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중서문하성과 함께 중요한 정치기구였던 중추원(中樞院)은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담당하는 추신(樞臣)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선(承宣)으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담당한 삼사(三司),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탄핵 규찰하며 서경권을 가진 어사대(御史臺),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사관(史館)을 비롯한 여러 기관이 업무를 분장하였다.
정치권력은 왕과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관료인 재추(宰樞)에게 집중되었다. 왕은 6부와 직접 명령하고 상주를 받는 체제였고, 재추(宰樞)는 도병마사(都兵馬使-군사회의)와 식목도감(式目都監-법률회의)에서 합좌하여 중요한 국사를 논의 결정하였을 뿐 아니라 6부의 판사를 겸직하여 집행권도 장악하였다. 그러나 낭사와 어사대는 이들을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정치권력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관리가 되는 길은 과거와 음서의 두 가지가 일반적이었다. 과거는 제술과 명경과와 잡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3년마다 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무과(武科)는 예종(睿宗)때 일시적으로 실시된 적이 있으나 곧 폐지되고, 공양왕(恭讓王) 때에야 다시 실시되었다. 과거에는 양인이면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나, 실제로 과거를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은 관료나 향리의 자제들이었다. 음서는 부조(父祖)의 음덕으로 관리가 되는 방법으로, 5품 이상 관원의 아들 한 명은 관리가 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관원(官員)은 종1품에서 종9품까지 29계의 문산계(文散階)를 띠었고, 규정에 따라 승진되었다.
과거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기 위하여는 교육을 실시하여야 했다. 이미 태조(太祖)때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세웠고, 992년에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개경에 국자감을 세운 데 이어 지방에도 주학(州學)을 두어 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이러한 관학 이외에 개경의 12공도(公徒)와 같은 사학도 발달하였다. 이들 학교에서는 유학(儒學)과 기술학(技術學)을 가르쳤다.
군사조직은 중앙의 경군(京軍)과 지방의 주현군(州縣軍)으로 구성되었다. 경군은 2군 6위로 편성되어 왕의 호위와 개경과 국경의 경비를 담당하였으며, 그 지휘관은 상장군(上將軍) 대장군(大將軍)이었다. 병종에 따라 정용(精勇) 보승(保勝) 등으로 구분된 천 명 규모의 령(領)이 부대 편성의 단위였고, 경군은 모두 45개 령(領)이었다. 군인은 초기에는 군반씨족 출신의 전문군인이었으나, 곧 농민 가운데서 뽑게 되었다. 군인에게는 군인전이 지급되어 생활기반이 되었다. 주현군은 지방관의 지휘를 받아 치안과 방어 공역(工役)에 종사하였으며, 정용 보승 일품군(一品軍)으로 구분되었다. 국경지대인 양계의 주진에는 상비군인 주진군이 배치되었다.
지방은 군현제(郡縣制)에 의해 중앙집권적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전국을 5도(道)와 양계(兩界)로 구분하고, 경(京) 도호부(都護府) 목(牧), 군(郡), 현(縣)과 특수 행정구역인 향(鄕) 소(所) 부곡(部曲)을 두었다. 또한 군사상의 요지에는 진(鎭)을, 교통상의 요지에는 진(津), 관(館), 역(驛)을 설치하였다. 군현 이상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군현(屬縣)이 훨씬 많았다. 군현에는 호장 부호장 등의 향리(鄕吏)가 지방관을 보좌하여 실무를 담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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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주성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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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기 : 1231년(고종 18) 8월 15일~29일
전투지역 : 평북 철산군 철주성
전쟁상대국 : 몽고
관련유적 : 서림산성, 쌍충사
고려 고종 18년(1231) 8월 15일부터 29일까지 고려군과 몽고군이 철주성에서 벌인 전투.
이 해 8월 10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낸 몽고의 원정군은 용주를 경유하여 철주성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고려에서는 철주방어사 이원정과 병마판관 이적이 몽고군이 기병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군민들과 군사 약 2,500명을 평지에 위치한 철주읍성에서 철주성으로 이동시키면서 방어에 대비하였다.
철주성은 철주읍성에서 북쪽으로 35리 지점에 위치한 산성으로서, 철주를 방어하는 주요한 요새였다. 철주읍성에 무혈 입성한 몽고군은 곧 철주산성에 대한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몽고군은 철주와 그 인근 고을과의 통로를 차단한 후 철주산성을 포위하고 8월 15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매일 2, 3차에 걸쳐 보름동안 계속된 몽고군의 공격에 대해 고려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하였지만 전투가 장기화됨에 따라 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고 무기도 모두 소모되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마침내 8월 29일 몽고군의 치열한 공격 끝에 동문이 돌파되어 이원정과 이적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결국 철주산성은 함락되었다.
이 전투는 제1차 고려·몽고 전쟁에 있어 몽고의 주력군과 고려의 방어군이 보름 동안에 걸쳐 장기적으로 맞붙은 전투로서, 비록 고려군이 패배하였지만 몽고군의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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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사대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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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1차 침입과 고려의 외교 정책 - 거란의 사대요구
거란(契丹) 성종(成宗)은 10월에 동경[東京; 요양(遼陽)] 유수(留守) 소손령[蕭遜寧; 이름은 항덕(恒德)]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호칭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 침략을 단행하였다.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거란(契丹)군은 봉산군(蓬山郡)을 쳐 고려의 선봉군인 윤서안(尹庶顔)을 사로잡은 뒤에 사신을 통해 글을 보내어 고려 군신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이 때 거란(契丹)이 고려를 침범한 이유는 두 가지 였다. 첫째는 송(宋)과 중국내륙을 놓고 결전을 함에 앞서 고려와 송(宋)과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한걸음 나아가 고려를 거란(契丹)에 복속시킴으로써 송(宋) 정벌에 전념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하기 위함이었으며, 둘째는 고구려의 계승권을 가진 거란(契丹)이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장악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고려가 개척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하류 동쪽지역인 평안도 일대의 땅을 장악해서 고려의 도전을 사전에 봉쇄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契丹)군은 안융진(安戎鎭)(安戎鎭)전투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자, 전략을 바꾸어 싸우지 아니하고 항복을 받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에 앞서 거란(契丹)의 침입에 대비하여 고려조정은 강,온 양론으로 나뉘어졌다. 처음에는 거란(契丹)의 항복요구에 응하여 서경이북의 땅을 할양하고 절령(岊岺)으로 경계를 삼자는 할지강복론(割地降服論)이 강했으나, 중군사 서희(徐熙)와 전민관어사(前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의 강력한 반대로 할지론은 봉쇄되었다. 그 사이 고려측의 답변을 기다리던 거란(契丹)이 재차 남하하여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으나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의 요격으로 실패하여 남진을 멈추었다. 이에 중군사 서희(徐熙)는 소손녕(蕭遜寧)이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거듭 항복요구만 해오는 태도에서 화해의 가능성을 탐지하고, 안융진(安戎鎭) 승리를 계기로 화해사(和解使)로 나아가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하겠다고 성종(成宗)에게 자원하였다. 그리고 그가 협상을 성공리에 마치자 양국은 협정을 맺고 사태는 수습되었다. 이 협정의 결과 고려는 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받들며 ② 고려의 고구려계승권을 거란(契丹)으로부터 승인받고 ③ 강동(江東) 6주, 즉 압록강 동쪽 280리에 있는 흥화진[興和鎭; 의주(義州)(義州)],용주[龍州; 용천(龍川)],철주[鐵州; 철산(鐵山)],통주[通州; 선천(宣川)],곽주[郭州; 곽산(郭山)],귀주[龜州; 귀성(龜城)] 등을 영유하게 되었다. 한편 거란(契丹)은 ① 형식적이나마 고려를 복속시켰으며 ② 고려와 송(宋)과의 외교단절에 성공하고 ③ 거란(契丹)과 송(宋)이 결전을 할 경우 배후에서 고려가 기습할 걱정을 덜게 되었다. 따라서 거란(契丹)은 제 1차 침략의 목적 중에서 첫째 목적인 고려의 사대(事大) 및 여(麗),송(宋)(宋)동맹(同盟)의 파괴라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둘째 목적인 고구려계승의 명분을 빙자한 고구려 옛 영토의 점유에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여(麗),요(遼)전쟁의 결과로 고려는 실리를 얻었고 거란(契丹)은 명분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서(徐),소(蕭)협정 후 고려는 성종(成宗) 13년(994) 4월에 박양유(朴良柔)를 봉표사(奉表使)로 삼아서 거란(契丹)에 파견하여 거란(契丹)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거란(契丹)에 끌려간 고려인 포로를 석방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역대의 숙원이었던 압록강 이동의 고구려 옛땅을 회복할 수 있게 되자, 성종(成宗)은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군살르 거느리고 강동(江東) 6주지방의 여진(女眞)족을 몰아내고 장흥[長興; 태천(泰川)의 동쪽] 및 귀화(歸化)의 두 진과 곽주와 귀주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후에도 다시 서희(徐熙)로 하여금 여진(女眞)을 공격하게 해서 안의진[安義鎭; 안주(安州)],흥화진[興和鎭; 의주(義州)(義州) 동쪽]과 통주[通州; 선천(宣川)의 동북쪽],맹주[孟州; 맹산(孟山)의 동쪽] 등지에 성을 쌓았다. 이렇게 압록강변의 요지에 각각 성을 쌓은 다음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를 두어 거란(契丹)의 내원성(來遠城)과 마주보며 도강(渡江)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처럼 거란(契丹)에 대한 서희(徐熙)의 외교적 성공과 민활한 영토개척 노력의 결과로 고려는 중국대륙에 대한 군사,교통의 요지인 압록강 하류유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거란(契丹)에 제 1차 침략을 받아 군략상 또는 외교상 자주국가로서 떳떳하게 대항함으로써 강동(江東) 6주를 얻게 된 고려는 송(宋)을 버리고 거란(契丹)과 친밀한 외교(사대(事大)의 예)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太祖) 이래로 야만족으로 낮추어 보아 왔던 거란(契丹)과의 외교관계를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성종(成宗)은 거란(契丹)에 봉표사(奉表使)를 보낸 두 달 뒤인 6월에 원욱(元郁)을 송(宋)에 밀파하여 전년의 거란(契丹)의 침범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구원병을 청하여 여(女),송(宋)이 당합해서 거란(契丹)을 공격해 들어갈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송(宋) 태종(太宗)은 송(宋)의 대거란(契丹)전쟁이 소강상태에 있는 데다가 여(麗),요(遼)투쟁에 개입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것은 지난 성종(成宗) 4년[985; 송(宋)태종(太宗) 옹희(雍熙) 2] 5월에 송(宋) 태종(太宗)이 장차 거란(契丹)에 빼앗긴 연운(燕雲) 16주(州)를 회수하기 위한 전쟁을 계획하고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밀파하여 출병할 때 협공을 청했다가 고려의 회피로 무산되었던 것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성종(成宗)은 송(宋)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거란(契丹)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송(宋)의 원병거부 회신을 받은 고려 성종(成宗)은 이주정(李周楨)과 이지백(李知白)을 거란(契丹)에 파견하여 특산물을 바쳐 양국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소년 10명을 선발하여 거란(契丹)에 유학시켜 거란(契丹)의 말과 글을 배우게 하였다. 이 유학은 양국간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단인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거란(契丹)에 대한 효율적인 대비수단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성종(成宗)은 또 조지린(趙之)을 거란(契丹)에 파견하여 혼인을 통한 유대강화를 제안하니, 거란(契丹)은 이를 받아들여 당시 거란(契丹)의 부마이며 동경유수로 있던 소항덕(蕭恒德)의 딸을 고려에 출가시켰다. 성종(成宗)에 이어 즉위한 목종(穆宗)은 곧 합문사(閤門使) 왕동?(王同?)을 거란(契丹)에 파견하여 즉위사실을 알리었고, 한편 거란(契丹)도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 야율적열(耶律迪烈)을 고려에 파션하여 전왕인 성종(成宗)의 생일[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였다. 또 그 이듬해 10월에 거란(契丹)은 우상시 유적(劉績)을 고려에 파견하여 목종(穆宗)에게 상서령을 더하여 책봉하기도 하였다. 이후 목종(穆宗) 재위 12년간도 고려와 거란(契丹)은 활발한 교류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보여진(女眞)다. 서(徐),소(蕭)협정의 결과, 고려가 비록 거란(契丹)에 대해 정삭과 예를 취하고, 적대적 태도를 삼가했지만, 이것은 북진정책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실리추구를 위한 전략 변화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고려측은 압록강 동쪽의 280리 고토를 회복하게 되어 영토확장과 서여진(女眞) 진압 및 고려와 거란(契丹) 사이의 환충지대를 갖는 실익을 거두게 되었다. 사실 이 때 고려가 대륙국가에 대해 사대(事大)의 예를 취한 것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행해졌던 일반적인 외교방식의 하나로 약소국가가 강대국가에 대하여 적의없는 존경의 표시로 행하던 하나의 외교적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때로 상대국을 바꾸어 사대(事大)의 대상을 삼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고려가 그때까지 오랑캐의 나라로서 대해 오던 거란(契丹)인에 대해 사대(事大)의 예를 취하게 된 것도 그리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고려가 강동(江東) 6주를 차지하게 된 것은 거란(契丹)과의 토쟁에 있어서 대단히 큰 수확을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려가 강동(江東) 6주에 군사적 거점을 구축하여 서북면의 여진(女眞)을 기미할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여진(女眞)과 거란(契丹)의 통로를 차단함으로써 대여진(女眞) 회유와 기미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대거란(契丹) 방어와 외교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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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령전투 |
본문 |
시 기 : 1231년(고종 18) 9월 13일~14일
전투지역 : 황해도 봉산군 동선령
전쟁상대국 : 몽고
고려 고종 18년(1231) 9월 황해도 봉산군 동선령 일대에서 몽고군과 고려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이 해 8월 10일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의주)를 공격하여 11일 항복을 받아낸 몽고의 원정군은 함신진을 교두보로 하여, 군대를 남로군·북로군·본군의 3개로 재편하였다. 이때 정주(靜州)-용주-철주-선주-곽주-정주(定州)를 거쳐 청천강을 넘어 안북부로 진출하였던 남로군은 9월 14일 황주를 거쳐 개경으로 향하여 동선령 북쪽 15리 지점까지 진출하였다. 동선령은 봉산과 황주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개성-평주-봉산-황주-서경의 길목에 있어 동선역이 설치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군 채송년을 북계병마사에 임명하여 몽고군의 남진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고려군은 9월 13일 봉산 북쪽 10리의 동선령에 도착하여 동선령과 그 북방의 두이봉·마산·사인관 일대의 고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몽고군은 정찰기병을 파견하여 이 같은 사실을 탐지하고 8,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이봉·마산·사인관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갑자기 기습공격을 당한 고려군은 장군 이자성·노단 등이 부상을 입는 등 순식간에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이때 동선령의 중군이 출동하여 몽고군을 공격하였으므로 몽고군은 후퇴하였다.
9월 14일 몽고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몽고군은 목책을 불태우고 고려군의 진지로 돌입하였으나 고려군의 용감한 활약으로 많은 몽고군이 죽임을 당하자 몽고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퇴각하였다. 고려군은 퇴각하는 몽고군을 추격하여 타격을 가함으로써 몽고군은 더 이상의 남진을 포기하고 진로를 북으로 돌려 정주까지 퇴각하였다. 동선령전투는 몽고군과 고려군의 주력군이 최초로 맞붙은 전투로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군은 퇴각하는 몽고군을 추격하여 고려 북계의 군사적 거점인 안북부(안주)까지 북상할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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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겨루기 내기가 금지된 사연 |
본문 |
몽고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 볼모로 잡혀갔던 어린 충목왕이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8살로, 어머니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하여 오랜 세월 혼란을 겪는 동안 국가의 기강은 문란해져 있었고, 백성들도 도박이나 유희를 즐기는데 시간을 허비하였다.
당시 택견은 궁중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크게 성행하여, 군사들의 무재로써의 역할도 하였으나, 점점 도박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유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박에 진 자들이 이긴 자들에게 칼부림이나 강도짓을 하기도 하였고, 재물과 여자를 탐하는 자가 늘어남에 따라 사회엔 혼란이 가중되었다.
급기야 충목왕 때 부터는 수박으로 내기를 하는 자들을 단속하여, 수박 경기로 재물 내기를 하는 자는 곤장 1백대를 내리고 이를 금지한다는 령을 내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무예에 능했던 귀족 자제들에게 벼슬을 주었던 제도도 없애 버리고, 끝내 수박경기를 불법화시키기에 이르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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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 강화와 무신정권의 종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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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정구너의 종말, 최의의 죽음 최의는 60여년 동안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최씨 집안의 네 번째 집권자였다. 갈수록 뇌물로 관직을 사려는 소인배들이 최의 주위에 들끓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몇몇 대신들이 모여 대책을 논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생일 축하 자리를 마련하여 최의를 불러내 암살하였다. 이렇게 김준과 임연 등 최씨 정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대신들이 세운 최의 암살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수십여년에 걸쳐 지속되던 최씨 무신 정권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권력을 탐낸 임연, 김준을 암살하다 최의가 죽은 후, 김준은 원종을 도와 고려 왕실 복원에 힘을 쏟았다. 허나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임염은 최의를 죽이고 나면 그 권력을 손에 넣게 될 줄 알았는데, 김준이 자신과 전혀 다른 뜻대로 움직이고 있으니 거슬리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임연과 아들 임유무는 김준을 암살하고 김준의 빈 자리를 꿰어 차고서 원종을 폐위시킨 뒤 권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원종은 자신을 도와주던 신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다시 그 힘을 잃고 쫓기듯 몽고로 피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종의 복권, 임연의 죽음 고려 조정에서 원종을 축출시키고 다시 강화도에서 항전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몽고에서 강하게 임연을 압박해 왔다. 몽고 사신의 협박에 결국 임연은 원종을 복귀 시키고 개경으로의 환도를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결국 모든 기회를 놓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된 임연은 억울한 마음에 화병을 얻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혹시나 몽고가 자신이 원종을 폐위시킨 일로 책임을 물어 추궁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해 하는 걱정까지 병이 되어 겹치자,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엄마 있지 않아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임유무의 죽음, 마침내 무신 정권의 막이 내리다 몽고 군사를 이끌고 귀국한 원종은, 임연이 죽자 다시 본격적으로 개경 환도를 추진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그 아들인 임유무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원종과 조정 대신들은 고심 끝에 임유무의 목에 현상금을 내 건 밀지를 그의 진영 안에 은밀히 보내었고, 뜻을 모른 몇몇 무관들은 임유무의 목을 베어 입궁했다. 임유무의 죽음으로 백 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고려를 좌지우지하던 무신 정권은 마침내 그 막을 내리게 되었고, 원종은 드디어 강화도를 나와 개경으로 환도하는 데 성공한다. 배중손의 삼별초, 저항을 계속하다 임금을 비롯한 주요 대신들이 강화도에서 빠져 나와 개경으로 환도하자, 몽고도 이에 크게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사태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지휘관이던 임유무를 잃고 잠시 혼란에 빠져 있던 삼별초가 새로운 지휘관의 지도 아래 계속해서 몽고에 대항하여 항전할 뜻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저항을 계속하며 강화도에서 진도로 그 거처를 옮기며 저항을 계속 하였다. 배중손의 죽음 삼별초에게 날아븐 비통한 소식은 바로 고려 조정에서 삼별초 토벌을 위한 군대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고려의 조정에서 파견한 군대라니 삼별초의 심정은 참담하였다. 진도에서의 전투에서 그들이 새 왕으로 옹립한 승화후 온이 몽고 장수 홍다구의 손에 죽고, 삼별초의 사령관 역시 홍다구의 칼에 숨을 거두면서 진도는 함락되었다. 김통정의 마지막 저항, 끝내 진압된 삼별초 살아남은 삼별초들은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결국 고려 몽고 연합군이 다시 결성되고 이들이 탐라로 총공격을 펴니 제 아무리 죽을 각오를 하고 항전하던 김통정과 삼별초라 하더라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전투 중 김통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남은 이들은 모두 포로가 되면서, 탐라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이던 삼별초는 끝내 고려 몽고 연합군에 의해 3년 간에 걸친 투쟁의 최후를 맞았다. 이로써 길고 긴 대몽 항전은 그 끝을 맺었고 고려와 몽고위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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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417&mode=content&query=%C3%D6%C0%C7&dircode=0
소감: 이번숙제로 인해 기말고사 공부는 된것같지만 너무 어려웠다. 그이유는 선생님께서 똑같은것이 겹치면 안된다고 하셔서 모든 학생들것을 살핀후 겹치는것을 종이에 적어서 힘들엇습니다.그리고 중간에 검색을 했는데 없는것이 있어서 좀 불편했다. | | |
첫댓글 저랑 겹치는게 있군요 수정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몇초 차이로 그런것이니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