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여행(3) - 문화선진국 영국을 다시 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29년, 연극 ‘쥐덫’ 62년 연속 세계 최장기 공연중
오랫만에 햇볕을 본다. 영국은 4계절 내내 날씨가 변덕스럽다. 아침에 날씨가 좋다고 하루 종일 그러리라고 생각했다간 실망하기 십상이다. 반대로 아침에 비가 오다가도 어느 새 날씨가 활짝 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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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수시로 내리다 보니 우산이나 방수코트가 생활필수품이 되는 건 당연하다. 우리가 무심코 보통명사처럼 부르는 버버리(Burberry)코트도 사실은 영국의 특정 상표 이름이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방수처리가 잘된 버버리코트는 영국인들에게 가장 실용적인 코트인 것이다. 이슬비 수준의 비가 많기 때문에 굳이 우산을 쓰지않고 그냥 모자 달린 점퍼나 반코트를 입은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영국근무 발령을 받은 직장인가족들의 경우 영국 기후에 적응라느라 약 1년간은 애를 먹는다. 이 기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영국의 참맛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은 하루종일 날씨가 개일 예정이라 한다. 오랜만에 런던 시내나 돌아볼까 하고 집을 나선다. 뉴 몰든(New Malden)역으로 나가 전일승차권(Day Travelcard)을 산다. 수도권 내에서는 열차, 지하철, 버스 모두 하루종일 사용할 수 있는 카드다. 요금은 8파운드(런던 수도권은 거리에 따라 zone으로 구역을 정하고 있는데 1-4 zone까지는 8파운드, 1-6 zone까지는 8.9파운드임. 단, 전일승차권은 출근혼잡시간후인 9시 30분 이후 적용됨)). 차편을 갈아탈 때마다 일일이 표를 끊으면 여행빈도에 따라서는 몇십파운드가 들 수도 있기 때문에 전일승차권을 사면 매우 편리하고 값도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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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몰든역에서 약 30분 걸려 워털루(Waterloo)역에 도착. 먼저 점심식사를 위해 시내 중심가인 소호(Soho) 차이나 타운으로 방향을 잡고 정문 앞에서 176번 붉은 이층버스를 탄다. 워털루다리를 건너 트라팔가 스퀘어 경유, 소호로 가는 버스다. 지하철로 갈 수도 있지만 관광목적이라면 육상으로 이동하는 버스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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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다리를 건넌다. 이 다리가 바로 영화 ‘애수’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추억의 영화에 나오는 곳이다. ‘애수’는 1940년에 개봉된 고전흑백영화로 원명은 Waterloo Bridge. 비비안 리와 로버트 테일러가 주인공이다. 자살을 앞둔 비비안 리가 안개 자욱한 워털루 다리에 서서 로버트 테일러와의 짧고도 깊은 사랑을 회상하는 장면은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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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1939년 9월 3일 저녁, 안개 자욱한 런던의 워털루 다리 위에 한 대의 지프가 멎는다. 로이 크로닌(로버트 테일러 분) 대령. 그는 프랑스 전선으로 부임하기 위해 워털루 역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군인다운 단정한 매무새엔 기품이 넘쳐보였으나, 어딘가 얼굴엔 쓸쓸한 표정이 어리어 있다. 그는 48살이 된 그날까지도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서서히 워털루 다리 난간으로 간다. 난간에 기대어 선 그는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마스코트를 꺼내어든다. 일생을 통하여 언제고 잊을 수 없는 마스코트. 그의 눈앞으로 슬픈 사랑의 추억이 서서히 물결을 이루며 다가온다.
제1차대전. 전쟁의 소용돌이 속의 어느 날. 워털루 다리 위를 산책하던 25살의 젊은 대위 로이 크로닌은 때마침 공습 경보로 지나가던 사람들과 함께 지하 철도로 피신한다. 그는 프랑스 전선에서 휴가를 받고 나와 있다가 내일로 다가온 부대 귀환을 앞두고, 혹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런던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황혼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그는 핸드백을 떨어뜨려 쩔쩔매고 있는 한 처녀를 도와주고 함께 대피한다. 혼잡한 대피소 안에서 그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그녀의 이름은 마이러 레스터(비비안 리 분). 올림픽 극장에서 공연 중인 올가 키로봐 발레단의 무희였다. 공습이 해제되고 밖으로 나오자, 마이러는 로이가 출정한다는 말을 듣고 "행운이 있기를 빈다"며 조그만 마스코트를 쥐어주고는 서둘러 사라진다.
그날 밤 극장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던 마이러는 객석을 바라보다 뜻밖에 로이의 웃고 있는 얼굴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 놀라움은 이내 기쁨으로 변하여 설레는 가슴을 억제치 못한다. 로이는 사람을 통해서 마이러에게 쪽지를 전한다. 로이의 초대를 받은 마이러는 기뻤지만 그것도 순간, 완고한 키로봐 여사에게 발각되어 야단을 맞고 거절의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친구 키티(버지니아 필드 분)의 도움으로 둘은 몰래 만날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 싹트기 시작한 그들의 사랑은 다음날 로이의 청혼으로 이어지나 참전을 앞둔 로이의 스케줄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전쟁터로 떠나고 만다. 이에 상심이 된 마이러는 전쟁터로 떠나는 로이를 마중하러 워터루 브릿지역으로 나가고 그로인해 공연 시간을 못마친 그녀는 발레단에서 쫓겨나게 된다.
살길이 막막해진 마이라는 직업을 구해 헤매고 다니지만 구하지 못한다. 그러다 로이 어머니를 만나러 나간 장소에서 우연히 전사자 명단에 들어있는 로이 이름을 발견하고 절망에 휩싸인다. 상심하여 떠돌던 마이러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리의 여자로 전략하고 마는데 어느날 워털루역에 나갔던 마이러는 건강하게 살아 돌아온 로이를 귀국하는 군인들 사이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마음이야 오직 로이를 사랑하지만 육체가 허락하지 못하는 몸이 된 마이러는 회한의 눈물 만을 흘리게 되는데. 결국 지난 날에 대한 후회와 사랑을 지키지못한 죄책감으로 행복해야 할 둘의 사랑은 무너지고 마이러는 워터루 브릿지에서 자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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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수’의 한 장면인 안개 낀 워털루 다리는 참으로 아련하고 몽환적이지만 실제 워털루 다리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다리에 불과하다. 보잘 것 없는 곳이라도 시, 소설, 영화 등 예술로 각색되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할 수 있다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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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채링 크로스역, 트라팔가 스퀘어를 지나 레스터 스퀘어역에 이른다. 이곳은 차이나 타운이 위치하고 있는 소호(Soho) 지역. ‘딤섬’을 먹기 위해 신세계(New World) 레스토랑으로 들어선다. 딤섬은 점원이 트롤리에 다양한 음식을 싣고 다니면 손님이 취향대로 골라먹는 식사방식이다. 중국요리 광동식 메뉴 중 하나인 딤섬(點心, dimsum)은 간단한 점심식사를 뜻하는 말로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요즘에는 중국, 홍콩 뿐 만 아니라 영국 등 세계인의 인기메뉴로 각광받고 있다. 그 종류도 만두류부터 스낵류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에 달한다. 우리 가족이 택한 메뉴는 만두, 북경오리, 스프링 롤, 새우튀김, 닭다리 요리, 연잎에 싼 찰밥 등 몇 개를 주문했는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아뭇튼 3명이 맘껏 먹었는데도 49파운드 정도. 여기에 팁 10%를 추가하여 54파운드를 계산한다. 식사후 차이나 타운 거리를 지나 다시 레스터 스퀘어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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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옆에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공연하는 극장 Queen's Theatre 건물이 보인다.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등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꼽히는 레미제라블은 1985년에 초연된 이래 지금까지 29년 동안 연속 장기공연 중인 뮤지컬이다. 29년간 전세계 43개국, 300여 개 도시에서 21개 언어로 공연, 전세계 6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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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의 작품 개발은 원래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원작이 프랑스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고 프랑스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작사가 알랭 부브릴과 작곡가 미셸 쇤베르크가 모두 프랑스인인 만큼 프랑스에서 첫 공연을 올린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을 오늘날의 대중적인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만든 것은 프랑스가 아닌 영국의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와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이다. 레미제라블 뿐 아니라 캣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등 세계 4대 뮤지컬이라고 불리워지는 뮤지컬들이 모두 영국 출신 캐머런 매킨토시의 작품이다. 그는 뉴욕타임즈에 의해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이 있으며, 강력한 극장 제작자" 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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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화적 저력은 특히 연극 ‘쥐덫(The Mousetrap)’에서도 알 수 있다. 영국의 추리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을 원작으로 런던 세인트 마틴 극장(St Martin's Theatre)에서 공연해 온 이 연극은 1952년 10월 6일 왕실 초청으로 초연된 뒤 2014년 현재 무려 62년 연속공연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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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간 같은 배역을 4,575회 맡아 기네스북에 오른 배우가 있는가 하면 62년 동안 변함없이 무대에 오른 소품 등 수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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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는 윈스턴 처칠이, 2002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관람했으며,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는 1992년 40주년 파티에 참석해 이 작품에 대해 "영국이 어떤 나라인지, 영국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말했다고 한다. 월-토요일 연속 오후 7시30분부터 약 2시간 30분 공연하며, 화요일 3시, 토요일 4시 추가공연도 있다. 지금까지 25,000회가 넘는 공연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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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에 세계 최장기 공연이라는 글귀와 함께 ‘이번 공연은 25,468번째입니다(This performance is number 25,468)’이라고 쓰여진 벽보판이 보인다. 홈페이지(https://www.the-mousetrap.co.uk)를 보면 2015년 1월 3일까지 예약도 받고 있다. 요금은 16.6-45파운드. 오페라나 뮤지컬과는 달리 ‘쥐덫’은 추리연극이기 때문에 비영어권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지않은 공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놀랄만한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영국인들의 자부심은 바로 이와같은 문화적 저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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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 ‘메피스토펠레’가 공연된 적이 있다. 국립오페라단이 이탈리아 작곡가 아리고 보이토(1842~1918)가 남긴 유일한 오페라 ‘메피스토펠레’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각색한 작품이다. 무려 100명이 넘는 배우와 합창단, 웅장한 무대장치 등 선진국 오페라 무대에 버금가는 공연이었다. 영국 등 선진국에서 다양한 공연을 본 적이 있는 필자 입장에서도 놀랄 만한 규모였다. 그런데 공연기간은 10월 20일, 22일, 23일, 하루 1회씩 불과 3일. 관객동원에 한계가 있어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도 실망스러운 공연기간이었다. 이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배우 등 관계자들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준비했을까를 생각하면 자괴감마져 들 정도이다. 국립오페라단 공연이라 수지계산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해도 너무하다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대학가 소극장 공연 중에는 제법 오래 흥행에 성공한 공연도 있고, 1년 내내 다양한 공연이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메피스토펠레’ 오페라 하나 만 가지고 우리의 문화수준을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장기공연이라 하면 기껏 1-2년 정도를 말하는데 ‘레미제라블’ 29년간, 더 나아가 ‘쥐덫’의 경우 무려 62년간 매일 연속공연을 한다는 건 우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선진국이란 단지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고 모두 선진국이 되는 건 아니다. 경제 뿐 아니라 문화 수준, 사회질서 등이 함께 균형을 맞춰야 진정한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영국 등 유럽의 과잉복지가 국가경영을 어렵게 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참으로 많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