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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종교 비판
내적해결의 한계
스트레스는 욕구의 좌절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스트레스의 해결이란 욕구를 충족(외적해결, 현실적해결)시키거나 욕구를 포기(내적해결, 심리적해결)하는 두가지 방법외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종교는 내적해결의 과정에서 생겨나고 발전되어 온 대표적인 정신문화입니다.
스트레스를 내적으로 해결할 때, 필연적으로 현실적인 문제는 방치되기 쉽습니다. 이 문제는 한창 민주화운동이 우리사회에서 공감을 받을 때 종교의 본연적 자세를 지키던 사람들이 부닥친 문제와 같습니다. “당장 핍박받고 굶주린 사람이 옆에 있는데 기도만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하는 문제말입니다. 그리고 공(空)과 무(無)를 설하는 불교가 일반인들한테 종종 오해 받는 것 역시 이 문제에 기인하지요. “다 공(空)이라고 하는데 그럼 눈앞에 있는 고통은? 너는 나처럼 고통을 겪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
또 하나 종교적 내적해결에 대한 오해로서 발생하는 문제가 현실적 문제를 주술이나 기도로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종교가 본래 스트레스의 내적해결 기능과 사회에 초자아를 제공한다는 두가지 요소로 존재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주술이나 기도를 통해 현실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주장은 모두 거짓입니다. 만일 어떤 종교지도자가 그 종교행위를 통해 마음의 문제가 아닌 현실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틀림없는 사이비종교입니다.
사실 종교적 언어의 의미를 이해할 때, 종교성이란 바로 스트레스의 내적해결에서 부여되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않으면 이런 문제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적해결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심신을 편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현실적인 해결도 더욱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행위는 때로 우리들의 신체적 질환을 해소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 안정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2차적 효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종교를 믿고 스트레스의 심리적 해소를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잘못 이용되어 종말론에 지나치게 오도되거나, 신체적 질환을 기도에만 의존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기 때문입니다.
종단의 권위화도 비판의 대상
예수 공자 석가 노자와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가 서로 다른 점을 간략히 표현하면 개인과 사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그가 당면하고 있는 스트레스는 보다 절실한 문제로서 다방면에서의 돌파가 시도되며, 사상은 장기간의 사색의 결과 나옵니다. 이 때문에 종종 그들의 언행은 앞과 뒤가 서로 다를 수 있읍니다만, 자아의 든든한 뒷받침을 받기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일관성이 유지됩니다.
예수는 논리적인 일관성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않았다. 예를 들어 어떤 때는 “나와 같이 있지 않는 사람은 나를 적대하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어떤 때는 “우리를 적대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편”이라고 말했다. 어느 때는 “악을 대적하지 말라”고 충고했고, 어느 때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고 선포했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하늘나라의 싸인이기 때문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의 모든 표현은 어떤 사고의 체계가 아니라 싸인에 담긴 메시지였다.(<소크라테스, 불타, 공자, 예수, 모하메드>)
하지만 일단 종교가 되고 종단(宗團)이 형성되면 스트레스해결의 의욕도 저마다 다르고, 생각도 가지가지인 여러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합니다. 자연히 교조가 원래 생각지도 않았던 여러 가지 규율이나 관습(초자아의 강화)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신을 극복할 수 있고 언제나 옳은 일을 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칙에 따르도록 이끌려 갈 수는 있으나 원칙 자체는 이해하지 못한다.”.......그러므로 질서는 권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권력이나 법률이나 처벌을 내세워서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하게 끝나기 마련이다. 위협을 받은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법이나 처벌을 회피하려는 위선을 배우기 때문이다. 큰 효과는 간접적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현재 싹트고 있는 것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든지 격려해야하며 강제적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동 상책)
이 때문에 각 종교는 점차 권위적이 되고, 끝내는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빠지며 그 결과 사람들은 교조(敎祖)가 예상치도 못했던 일들을 교조(敎祖)의 이름으로 자행하게 됩니다. 때로는 교조(敎祖)가 이룩하고자 하는 세상과는 정반대의 세상을 만들어 놓기도 합니다. 종교집단의 이러한 변화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10세기가 되자 마자 유럽에서는 정통 로마 카톨릭 신앙을 모독한 죄를 지은 사랆이나 이단자를 정죄하는 법령이나 칙령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3세기가 되면서 대륙전체에 까지 번져갔다......토크마다 사단으로 불려지는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 이단 심문단은 기습소환과 투옥 비밀재판 등의 극악한 일을 해냈으며, 정보를 얻거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무자비한 고문을 행하였다.....아무도 신변의 안전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고, 종교 재판에 희생된 사람의 수는 몇 천명에 달하지만 몇 건의 종교 재판이 있었는지 그 수를 알아낼 도리가 전혀 없었다. 사유재산을 몽땅 빼앗거나 서적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탄압하는 일은 이 정부 아래 당연한 일이었고 장사를 위한 거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정지상태나 다름 없었다. 상업과 공업은 곧 마비되었고, 15세기에 막강한 세력을 휘둘렀던 스페인은 나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느껴지고 있다.(<세계사 1000장면> 폴 임 1999)
나라를 일본에 내준 이들은 전형적인 유교적 관료들이었다. 바로 <논어> <맹자> <대학> 따위의 유교경전만이 머릿속에 가득한 관료들이었다. 유교국가의 도덕적 기치는 조선 건국 때나 말기의 대한제국 때나 동일하게 내걸었던 정치적 모토였다. 그리고 힘을 장악한 사대부층은 언제나 도덕과 충 효로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이익과 권력을 탐닉해온 관료들이었다. 그에 비해 일반 시민의 의견이나 여론을 대변할 만한 힘들은 중국과 일본를 서로 끌어들이면서 자기 집단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김경일 1999)
물론 교조 자신들은 비판할 만한 점이 전혀 없었는가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문제의 씨앗 자체는 교조(敎祖)들의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교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성인(聖人)들의 본래의도와 스트레스 해결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서 교조화하고 위선화한 후세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비판
예수는 하나님을 절대선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하나님을 따름(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이드의 충족)을 가르쳤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악을 행함) 멸망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묶고....
모든 다른 선(善)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의 선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가 제시하는 사회(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생존과 직결된(그 사회를 통해 이드를 추구할 수 있다는)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금까지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주관적인 신앙과 관련된 문제로 남아있으며, 그러므로 세상에는 항상 기독교 신자와 이교신자 혹은 무신론자들이 공존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이교신자거나 무신론자는 악의 무리(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므로)이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생존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멸망시켜야 할 상대로 간주됩니다. 이결과 기독교인들은 천수백년간에 걸쳐 종교의 이름으로 이교도와 전쟁을 하고 때로는 자신들의 내부에서도 명확하지 않은 기준을 내세워 사람들을 처형했었습니다. 예수는 악인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때에’ 심판의 날이 와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만, 인간이 감히 참람하게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을 한 것입니다.
역사상 기독교도에 의해 저질러 졌던 수 많은 비극은 어느 인간사회나 나타나기 쉬운, 원칙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권위에 의존하여 사회를 장악하려는 인간적 속성과, 선악의 잣대를 ‘하나님의 나라’로 제한한 예수의 가르침이 어우러져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회 범주가 제한되면, 사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제거해야 할 생존의 경쟁자 밖에 안 됩니다. 예수는 그 이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 사회라는 보다 작은 범주를 뛰어넘어 ‘믿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을 폈지만,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서 스스로를 제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이교도나 무신론자와의 공존, 즉 전체인류사회를 선악의 잣대로 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오직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뿐이며 선악의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유교비판
공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늘 배우려고 노력했으며,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수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므로 사실 공자를 탓하려면 ‘인간으로서의 유한성’을 탓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발언을 공자가 들었다면 분명히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유교는 공자의 원래 사상과는 대단히 다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나라에 들어와서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독재자에 의해 설립된 새로운 관료주의적인 국가가 유교와 연합했다. 국가 권력이 공자의 이념으로부터 새로운 권위를 찾음으로서 유교는 어느 면에서는 공자의 원래 사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공자가 알고 있었던 것은 봉건제 국가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유교를 실제적인 권력과 합세함으로서 새로운 개념을 얻게 되고 유학자들은 관료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계급의 이익을 위해 광신주의 비슷한 새로운 정통성을 주장했다. 유교는 관리양성을 위한 체계가 되었고, 유학파는 국가를 신성시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어용학파로 변했다.
기독교와 불교처럼 유교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용을 체험했다. 유교가 공식적으로나 일반적으로 용인 되었을 때는 이미 공자의 사상과는 먼 거리에 놓여 있었다. 유교의 역사는 이념적으로는 정통성을 찾고 정치적으로는 양반계급의 지배를 찾는 끝없는 투쟁이었다.......너무나 높은 기대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수세기에 걸친 유교의 타락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타락의 근원을 공자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공자의 사상은 반동적이며, 과거만을 절대화시킴으로서 과거를 고정화하거나 살해해 버리고 미래를 바라보지 않음으로서 모든 창조적이고 진보적인 살아 있는 힘을 마비시킨다고 주장했다.(<소크라테스, 불타, 공자, 예수, 마호메트>)
유교의 이러한 변용을 목도하면 노자가 “도(道)가 없어지자 인의(仁義)를 찾고, 교활한 지혜가 나와서 갖가지 법률이 만들어지게 된다. 육친이 불화하므로 효도를 찾고, 국가가 혼란스러우므로 충신을 찾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공자는 통치자들이 그의 진심을 이해하여서가 아니라 다만 필요에 의해서 불려나가 이용된 것입니다.
유교의 타락이 중국보다 더욱 극명하게 표출 된 예는 다름아닌 우리나라의 조선사회입니다. 주돈이 정씨 형제 주희로 이어지는 정주학을 수입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공자가 본래 ‘모른다’라고 말한 생사의 문제, 인간의 본성, 세계의 질서 등에 대한 대답을 시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논어>에는 보이지 않는 이(理)라는 것을 발명되어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理)가 궁극적 원리를 말한다고 하며, 만물에 통용되는 한가지 원칙은 천리(天理) 혹은 태극(太極)이라하고, 인간의 보편적 본성은 성리(性理), 인극(人極)이라 합니다. 여기까지라면 별 문제가 없어보입니다만, 점차 인간이 해야할 일은 마땅히 성리(性理)를 실현하는 것이라면서 정의(正義)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득을 취하는 행동을 천시하기 시작한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정의란 강상(綱常)의 윤리를 말하니, 즉 초자아를 선으로 하고 이드(이기심, 이익추구)를 버려야 할 악으로 규정했던 것입니다.
이드를 소멸시키려는 시도는 부처의 생애가 증명하듯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처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이후에도 자주 초자아적 가치(윤리 도덕 종교)를 부르짖으며 이드를 천시했을 뿐 아니라 때로 없앨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최근의 예가 공산주의 운동으로서, 초기 이상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보다 더 초자아(도덕)적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공동생산 공동분배’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련과 중국의 변질에서 목격하듯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초자아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도 이드로부터의 에너지에 기인하는데, 이러한 초자아를 가지고 이드를 제거하려 했던 것은 애초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역사의 경험을 살펴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천국이라해도, 그것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이드를 모두 없애버리는(더 이상 인간이지 않는) 신통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유학자들이 인간의 이드를 과소평가했다는데서 성리(性理)실천운동은 이미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의(義)를 중시하고 이(利)를 천시한다는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는, ‘얼어죽어도 곁불은 쬐지않는’ 태도로 폼만 잡으면서 이(利)와 관련한 과학, 기술, 의학, 법학, 정치학 등 실용학문을 천시하는 양반계급을 양산해 내었습니다. 조선후기에 와서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창하는 실학(實學)파 유학이 생겨 나기도 했습니다만, 퇴계를 정점으로하는 성리학의 영향을 조선은 내내 극복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조선사회는 끔찍하게 무기력한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 사회가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활발한 토론과 타협이 있어야하고, 기득권자에 대한 비판이 자유롭게 허용되며 이러한 비판이 기득권자들의 행동에 수정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교조적 권위주의는 사회에 절대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미칩니다. 조선사회에서 의리를 중시하는 유학은 지배계급의 권위를 교조화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절대적 원리로 받아들여진 삼강오륜은 유교사회의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사이를 명백한 계급적 관계로 만들었습니다. 부자유친이나 장유유서 부부유별이 계층적 관계를 표시하는 것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부자(父子) 장유(長幼) 부부(夫婦)는 이기(理氣)와 성속(聖俗)과 동일하게 상하의 관계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상에 속한 사람은 하에 속한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었지요.(‘한국인의 초자아’ 참조)
상자(上者)의 권위를 누리는 것은 대단한 매력이 있었는지, 조선사회사람들은 점차 대등한 관계를 용납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의 한국사람들도 두사람이 만나면 나이를 들어서라도 상하관계를 규정지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 유교의 유산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성향(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 지는 토론을 용납하지 못함)은 마침내 조정안에서 조선의 국력을 오랫동안 허무하게 낭비시킨 당파싸움을 유발시킵니다. 당쟁의 동기는 대개 사회의 개혁이나 국민생활의 향상을 위한 것과 같은 ‘사는 문제’가 아니라 왕실의 규범이나 세자의 책립등과 같은 국민들의 생활과 관계없는 분야에서 인간다움(義)의 탈을 쓴 이드(자파의 득세)의 추구였는데, 이쯤에 이르러서는 공자의 제자를 자처하는 유학자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문제(仁)’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공자와는 전혀다른 길을 걷고 있던 셈입니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역사가 비교적 짧아서 아직 그 부정적 일면이 분출하지 않은 상태라 뭐라 말할 수 없지만(불상을 훼손하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행태에서 싹은 보입니다.), 유교는 몇백년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존재하면서 한국인의 초자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짤막한 글로 우리들의 성격 속에 존재하는 유교 유산을 다 논할 수 없지만, 유교적 ‘상자(上者)의 하자(下者)에 대한 권위의식’은 우리가 청산해야할 대표적 유산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위주의 비판
장구(長久)한 천지(天地)를 바라보고, 다시 자신을 돌아봄으로서 삶과 죽음을 관조할 수 있었던 성인(聖人)들을 선배로 두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극히 적습니다. 이것은 성인과 같이 보고 같이 느껴야 성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자아의 수양(修養)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자아만이 지혜로운 해법을 찾습니다.
자아가 미숙한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것은 권위입니다. 예수 공자 석가 노자가 죽은 뒤에 한결같이 특별한 존재로 ‘권위화’ 된 것은 이들 가르침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따라오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람과, 사회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사람과는 재능이 서로 다릅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 유교 불교 도교의 후기 지도자들은, 지도자라고 해도 자신들의 스승이 가르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연히 스승과 그 자신의 위치를 권위있게 만들고, 그 권위에 의존하여 교단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아의 미숙함 때문에 생겨나는 권위가 어떤 사상에 부여되어 의문이나 토론을 불허하는 상태가 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자아는 더욱 위축되고 미숙해지며 다시 더욱 권위를 찾으려 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중세유럽과 조선사회의 권위주의가 그 사회를 어떻게 저조하게 만들었는지 보면 알거니와, 우리 주위에도 자아가 미숙한 사람이 더욱 권위에 의존하려 한다는 실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선(善)이란 것은 특정한 범주의 사회이익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예로 사랑이란, 남녀 간에서는 그 자신들의 이드추구이고, 부모자식 간(부모애)에서는 한 가족의 이드추구며, 민족 안(민족애)에서는 민족의 이드(생존)추구이고, 인류안(인류애)에서는 인류의 생존추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고 진정한 선(善)은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생존이며, 이런 점에서만 초자아적 가치(도덕 법률 종교)가 의미있을 뿐입니다. 만약 어떤 도덕이나 종교적 가르침이 이런 본질을 망각하고 오히려 생존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면, 그 사회는 쇠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권위도 그것이 삶이 방편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자아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위선이 될 뿐입니다.
불교비판
배불론은 중국에서 승려가 왕자나 양친을 공경하지 않고 인륜을 무시한다는, 예경(禮敬) 문제, 중화(中華)가 이적(夷狄)의 부처를 예배하는 데 대한 부조리를 역설하는 이하론(夷夏論), 또는 부역(賦役)을 면제받은 승려가 늘어남에 따라 국가 재정이 위태롭게 된다고 하는 경제론 등이 중심이 되어 4세기 동진(東晋)시기에 발생하고, 그 뒤로 오랫동안 비선비악(非善非惡)이라는 초도덕(超道德)의 입장을 반대하여 도덕의 입장을 고수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계속됩니다. 이러한 배불론자들의 주장속에 불교의 문제점이 다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자아는 본래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발달시켜온 성격부분이며, 사회생활은 ‘사회적 인간’으로 지칭되는 인간의 필수적 생활형태이니까 초자아 역시 제거할 수 없는 인간 성격 중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악(이드)은 물론 선(초자아)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하니까 선(善 즉 초자아)을 추구하는 유학자들과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스트레스의 해결만을 주요 과제로 삼아 철저히 독립하고자 하는 자아와, 높은 이상을 실현하려는 초자아 간의 충돌입니다.
사회 지도자(왕과 집권층)의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교는 환영할지언정, 도덕과 법률(초자아, 선)을 벗어버려야 할 대상으로 보는 불교는 골치아픈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역사상 수 없이 반복되었던 법란의 이유이며 끝내는 쇠퇴하고만 불교의 운명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진 것은 선종불교이고, 실은 종파에 따라 매우 다양한 사상을 가지기 때문에 불교가 다 초자아를 거부했던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신라에게 통일의 이상을 제시해 주었고, 그 방법과 수단을 준비할 수 있게 하였다. 화엄의 이상은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통일 평화에 있다. 한 사람의 개인도 소외시킴이 없고, 하나의 물건도 허비함이 없도록하는 가운데 하나의 전체가 이루어지고(總卽別 別卽總 總中別 別中總), 그 개별적인 것들은 각각 그 특유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서 비로서 전체의 동질성을 이룩할 수 있으며(同卽異 異卽同 同中異 異中同), 또 하나의 전체가 그것이 민족이건 국가이건 완전히 성취되어지기 위해서는 그 전체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이 자기 주장을 절제하고 억제하여야한다는(成卽壞 壞卽成 成中壞 壞中成) 통일의 근본원리가 바로 화엄(華嚴)에 의해 추출되고 원효에 의해 강조된 것이다.(<한국의 불교사상∙해제> 이기영 1983)
바람직한 초자아를 가지는 사회가 얼마나 강해지는지 신라의 삼국통일이 증명합니다. 신라는 원효라는 천재스님의 탁월한 화엄해석에 힘입어 군민(君民)이 일치단결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지리멸렬한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강해지는 것은 유교 혹은 기독교적 초자아 보다는 오히려 원효의 화엄정신 같은 초자아를 구축할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래 불교가 반초자아적이기는 하지만, 화엄의 이러한 초자아적 전통은 서산(西山)이나 사명(四溟)같은 조선조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도교비판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했을 때 노자가 “너는 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절대적인 윤리관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정의와 인(仁)은 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노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공자가 인간사회에 근거한 인간 중심의 선악관을 가지고 있다면, 노자는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여 자연(自然)으로 이루어지는 생명활동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초월하면 만물의 근원을 보다 잘 볼 수 있겠지만, 인간적 삶의 실천적인 면이 약해집니다. 이때문에 노자가 현세도피적이라거나 ‘부정의 철학자’라고 비난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도교의 문제점은 유교에서와 같이 노자자신보다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대인에 의해 생겨납니다. 도교는 철학학파인 도가(道家)와는 달리 기복적 방술(方術)이 크게 성행하여 방술에 의존해서 생활상의 문제(스트레스)들을 풀어가려고 하였습니다. 도교가 우리나라에서 성행한 고려시기는 불교가 그 중심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 영성(靈星), 산신(山神), 무속(巫俗) 그리고 도참(圖讖)이 크게 유행한 시기로, 이런 시대적 성향은 불교까지도 변화시켜 고려불교를 기복중심으로 만든 시기이기도 합니다.
명경(明鏡)이나 호부(護符)를 차면 재앙을 막는다든가, 언제 목욕을 하면 치아가 튼튼해진다든가 하는 식의 불합리하고 근거없는 믿음을 미신이라고 부릅니다. 미신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이에 의지해 봤자 정신적으로는 조금 위안이 되겠지만 그것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특정한 날에 목욕을 하는 것이 튼튼한 치아를 만들어 줄 수 없으므로 그것이 ‘약한 치아’라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방법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나 내세의 구원을 믿는 고등종교가 미신과 다른 것은 그러한 신앙행위가 자신이나 사회에 해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어떤 신앙이 인간의 삶에 해롭지 않다(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하지 않는 해결’을 말합니다.)면 합리적이지 않은 믿음이라도 용납된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사회에 해를 끼치는 신앙은 미신이거나 사이비로 낙인 찍혀 배척됩니다. 이렇게 모든 선악의 결정은 인간(혹은 사회)의 삶에 이로운가 해로운가로 판단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종파간의 이단논쟁이 종교내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를 수용해야할 해당 사회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안에 각 교파가 교리해석(스트레스의 심리적해결방법)을 둘러싸고 서로 이단이라고 주장하지만, 신흥 교파라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신앙행위만 하지 않는다면 몰몬이 미서부에서 자리잡은 것처럼 교리가 어떻든지간에 주류 종파로 등장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백백교나 오대양사건 처럼 살인이나 자살의 방조 등으로 사회적 연대에 해를 끼친다면 교리가 어떤 논리를 가지고있든 간에 용납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인류멸망의 비밀을 캔다든가 하는 식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한 사회에 어떤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는가(사회 구성원의 스트레스를 무리없이 해결하여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가)이지요.
도교를 비판할 수 있는 주요 근거는 도교가 ‘문제의 원만한 해결’일 수 없는 기복적이고 주술적방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도교가 아닌 기독교나 불교라 하더라도 기복적인 요소가 있다면 이러한 비판은 모두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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