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을 회고할 때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전쟁참가로 말미암아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5천여 명의 고귀한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재조명하여 바른 역로 각인시켜야 되겠다는 것이 내가(채명신장군) 회고록을 펴내는 가장 큰 이유이다. "비뚤어진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비뚤어져 보인다"는 외국의 속담을 들먹일 필요 없이 우리에게도 그와 비슷한 교훈은 얼마든지 있다.
2000년 12월 15일 군사평론가협회가 주최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재조명"에 관한 학술 세미나에서 동국대 강정구와 성공회 대학 한홍구는 주제 "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민간인 침상"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그 빛과 그림자"을 각각 발표 하였다.
강정구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침략전이며 파월 한국군은 미군의 용병이며 파월 한국군이 고의적이며 조직적으로 베트남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또 그 당시 월남 정부를 괴뢰정부라고 정의했다.
한홍구는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얻은 국가이익이 다른 파병국에 비해 헐하며 불평등한 것이었고, 파병 목적도 박정희 독재권력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논쟁의 시발은 "한겨레 21 통신원이라는 구수정 여인이 공산 베트남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확인했다는 내용인데, 그 글을 강정구는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발표하였다.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5년 12 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딩성 퀴논시에 있는 몇 개 마을에서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작전아래 12세 어린이 22명 여성 22명 임산부 3명 70세 이상 노인 6명, 즉 대부분 노약자인 양민을 학살했다.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심 8개월의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 살배기 어린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 쳤으며 남은 몸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머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하 두 살배기 아이의 목을 꺽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부태웠다. 그리고는 열두 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한국군들이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체포하면 남자와 여자를 나눴다. 남자는 총알받이로 데리고 나갔다.
여자는 군인들 노리개감으로 썼다. 희롱하고 강간하는 것은 물론 여성들의 가장 신성한 부분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국군인들의 민간인 학살 행위는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 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었고,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불에 던져 넣고 여성드을 돌아가며 강간하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고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시사 시키는 것 등이었다"
강정구가 한국군이 월남 양민을 학살했다고 인용한 구수정 여인의 글은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내가 맹호사단장을 겸직하고 있을 때인 1965년 12월 22일에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터무니 없는 내용이다.
이 글 첫 줄부터 사실과 다르다." 빈딩성 퀴논시에 있는 몇 개 마을" 이라고 했는데, 퀴논시는 우리 전술책임지역 밖에 있는 월남군 제 22사단 관할이다. 그 내용은 당시 한국군과 월남인 간의 이간책을 쓰고 있던 월맹군측과 베트콩들의 악선전 내용과 같다. 그 이간책은 당시 북한에서 파견된 심리전 요원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것도 확인했던 사실이다.
어찌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구수정과 강정구는 자기 나랑 군대의 만행이라며 확인도 안 된 내용을 사실이라고 학술회의에까지 들고 나와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들이 태어나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교육까지 시킨 뒤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 준 조국 대한민국에 그토록 거침없이 칼질을 해도 좋은 것인가.
마침 그 학술회의를 주관한 군사평론가 협회 회장인 박경석 장군은 그 구수정의 글과 그것을 주장한 강정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조연설로 답했다.
박 장군은 1965년 12월 22일 당시 맹호사단 제1진 재구대대장으로 그 지역 인접 일대를 전술책임지역으로 하여 작전을 지휘했던 바로 당사자이다. 기조연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과 국제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전쟁규칙과 전쟁에 관한 각종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국제법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침략전쟁이다" "용병이다""양민학살이다"를 정의 내리는 행위는 마치 돌파리 의사가 암환자 수술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주월 한국군의 각종 통계에 따르면 세계 여러 전쟁, 특히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이나 월남군에 비해 민간인 희생이 가장 적었다는 것이 연합군이 공유한 공식통계라는 것을 참작하기 바란다.
세계대전을 비롯 6.25 전쟁을 포함한 모든 전쟁에서 민간인의 희생이 전투 당사자인 군인의 희생보다 월등히 많다. 그러나 주월 한국군만은 그 통계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공인되었다.
그 요인은 바로 이자리에 참석하신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과 채명신 장군의 훈령"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하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에 충실했던 휘하 장병의 인도주의 실천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지휘했던 제 1진 재구대대도 수많은 전투를 겪는 동안 민간인 희생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느다. 포탄이나 실탄을 군이만 주이도록 고안된 기발한 발명품이 나오지 않는 한 민간인 희생은 막을 방법이 없다. 그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학살이 아니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전쟁이란 응징과 보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비극이다.
미국이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타을 투하해 무고한 시민 수십만명을 죽였다. 그래서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의 오래 전부터의 숙원이 아닌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수십만명의 희생자를 낸 일본이 양민학살이라고 미국에게 항의하지 않았던 그 이유와 배경을 살펴야 한다.
그 수십만명으로 하여 수백만이 더 희생될지도 모를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는 데 의미와 명분을 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의 적은 월맹군과 베트콩이었는데 베트콩은은 그들이 주장하는 양민이다. 노인도 있고 여자도 있고 어린이도 있었다. 전장에서 상대가 적대행위를 할 경우 그 상대를 사살하는 행위는 정당바위이며 합법이다. 베트남전쟁과 같은 게릴라전에서 더욱애ㅣ 피눈물을 흘려가며 양민보호에 임했던 나와 내 전우들을 학살의 주범으로 모는 행위는 분명 이적행위이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