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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 11. 15(일)
■용문 조욱 선생 묘갈비(龍門 趙昱先生墓碣碑)
[시대] 조선
[연대] 1745년(영조21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55cm, 너비 58cm, 두께 31cm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전(篆)] 조익(趙翼) / 이건명(李健命) / 이징하(李徵夏)
[개관]
이 비는 1745년(영조 21년) 경기도 양평에 건립된 조욱묘갈(趙昱墓碣)로 조익(趙翼)이 비문을 지었고, 이건명(李健命)이 글씨를 썼다. 조욱(趙昱 : 1498~1557년)의 본관은 평양(平壤)이고, 자는 경양(景陽)이며. 호(號)는 용문(龍門)이다.
조광조와 김식(金湜)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16년(중종 11년)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화를 입지는 않았다. 천거로 선원전, 순릉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죽은 뒤 3년상을 마치고 용문산에 은거하여 경서의 뜻을 가르쳐 용문선생으로 불렸다. 명종 때 조식(曺植) 등과 현사로 발탁되어 내섬시주부, 장수현감(長水縣監)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이조참의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용문집(龍門集)》이 전해지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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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 용문 조선생묘갈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조익(趙翼)은 짓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이건명(李健命)은 글을 쓰고,
통정대부 행 황주목사 황주진병마첨절제사 이징하(李徵夏)는 전액을 하다.
정암 선생께서는 학술이 발발하지 못했던 시대에 태어나시어 능히 옛날 성현의 학문을 뛰어나게 세우고 유학을 진흥시키고 세상의 도리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온 세상이 기대에 부풀어 삼대의 선치가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불행하게도 간사한 무리들이 헐뜯어 모함하는 사건이 일어나 뜻하지 않았던 화를 당하니 사림들의 지극한 통한이 되었다.
정암 선생이 정학을 제창하여 학문을 크게 일으키니 이에 선생을 따라 학문을 익히는 자들이 많았으나, 그중에서 능히 끝까지 지조를 지킴으로 세상에 이름난 자는 몇 사람에 불과한데 용문선생 조공이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공은 태어나서부터 남과 다름이 있어서 아이 때에 책을 받아서 한두 번 읽으면 바로 암송하였고 시귀를 지으면 시어가 으레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이 십여 세에 재능이 뛰어나다는 명성이 멀리 퍼졌으며 15세가 되기 전에 효도와 우애가 인근 마을에 소문이 나서 효아라는 칭송을 받았다.
19세에 생원 진사 양과에 모두 합격하니 원근에서 듣는 사람들이 그의 재능을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이에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으로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찌 공명만을 일삼아야 하는가?” 하고 드디어 구도의 뜻을 품게 되었다.
조정암과 대사성 김식이 고인의 의리지학을 강의한다는 말을 듣고 이들을 쫓아서 대학과 중용의 뜻을 물어 배웠다. 그 거소에 우암이란 간판을 달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독실히 연구에 몰두하니 정암이 이르기를 “여러 제자들 중에서 구도의 학문을 독실히 하는 자는 조욱과 같은 이가 없다” 라고 하였다.
공이 기묘년 봄에 조 정암의 용인에 있는 별장에서 글을 읽던 중 하루는 꿈에 주자를 뵙고 감격하여 두 절구를 지어서 그 감격의 뜻한 바를 써 붙였다. 그러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사리를 변론하려고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미처 올리기 전에 문생으로 연좌되어 수감되었다가 나이가 어린 까닭에 화를 면하였다.
이때부터 은거할 계획을 가지고 과거에는 뜻을 끊었으며 양심당과 더불어 삭녕의 옛날 전장에 집을 짓고 함께 거쳐하면서 도학을 닦고 연구하기에 형제가 스스로 스승과 벗의 사이가 되니, 남들이 이정에 비교하였다. 양심당의 이름은 성이니 또한 학문에 뜻을 두어 견문이 많았으므로 용문선생과 더불어 명망이 높았다.
공은 중용도와 대역 도를 짓고 호를 고쳐 보진이라 하였다. 이때의 여론은 바른 선비를 보기를 원수와 같이 대함이 더욱 심하였는데 공도 늘 그들에게 지목을 받고 있었으므로 대부인께서는 심히 두려워하시어 과거에 응시하기를 강권하니 부득이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이등을 하였다.
정대에서 격치와 성정으로써 답하니 고관이 생각하기를 이는 기묘의 무리라 하여 떨어뜨렸다. 이때부터 대무인에게 힘써 아뢰어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당을 금하는 것이 점차 풀리니 조정에서 추천하여 선원전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이 연로하였기 때문에 취임하였다.
일년을 머무르다가 순릉으로 옮긴 후 오래지 않아 체직되었고 다시 영릉으로 제수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대부인께서 세상을 뜨시니 드디어 용문산중에 거하였고, 세상에서는 이를 용문선생이라 칭하였다.
배우고자하는 자들이 많이 찾아와 날마다 그들과 함께 경서의 뜻을 강론하였는데 밤이 깊어 등이 다하면 홀로 앉아서 깊은 생각을 하다가 의심되던 뜻을 스스로 깨우치게 되면 반드시 문인과 자제들을 불러서 경전을 꺼내게 하여 이를 시험하는 것이 하루 밤에 두세 번에 이르렀으며 간혹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았으니 경전을 연구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명묘께서 훌륭한 인재를 구하라는 하교를 내리니 조정에서는 성공 수침, 조공 식, 이공 희안, 성공 제원과 공의 덕행을 천거하니, 특명으로 선무랑 내섬시주부에 제수되었다. 명묘께서 정성을 다하던 초기에 세상에 흔하지 않은 예우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양치 못하고 취임하였다.
장수현으로 나아가서는 다스리되 백성을 새롭게 하고 선량한 풍속을 키우는데 힘썼으며 까다롭고 번잡한 것은 제거하고 대체만을 존속시켜 조용하고 번거롭지 않게 하니, 관리들은 순종하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우수한 선비들은 선택하여 모아놓고 가르쳐 이들로 하여금 학문하는 방법을 비로소 알게 하였다.
이웃 고을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도 풍문으로 듣고 찾아오는 자가 또한 많았다.
을묘에 왜구가 거진을 함락하니 주장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살육으로 위엄을 세우고자 하니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다. 공이 홀로 의리로써 논쟁하니 주장이 감격하여 깨닫고 살육을 중지하였으므로 점차로 왜구를 방어하는 책략을 얻게 되니 적이 마침내 퇴각하였다.
이후 벼슬을 사직하고 용문산의 옛 은거지로 돌아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직 의리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힘썼다. 정사년 12월 경인 일에 질병으로 경성 청파리 집에서 돌아감에 다음에 이월 병신 지평 용문산 남쪽 지맥인 축좌 미향원에 장례를 지내니 즉 옛 거처의 뒤쪽이다.
공이 지은 시문이 매우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히 전할 만한 것을 뽑은 것이 십여 권이 있고 또한 그 문신들이 본 받을 만한 언행을 기록한 것이 일권 있다. 그런데 간행되기 전에 임진병화로 불타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다만 절구 약간이 있을 뿐이다.
그 시문은 명성이 자자하였고 필법의 기묘함은 또한 독보적인 것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이것은 모두 여가의 일이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매번 말을 몰고 명산을 유람하는데 원근을 가리지 않았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깊은 산에 들어가 맑은 샘과 돌 사이에서 한가로이 즐기다 임종하였으니 그것은 바름을 숭삼함이 고결하여 때묻은 세속에서 벗어나려 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서 공의 성대한 지질이 다 나타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오직 어려서는 능히 스승을 얻어서 의리의 학문에 몸을 맡기었고 화난에 당하여서도 좌절치 않고 곤궁함에 처하여서도 변하지 않고 일생을 부지런히 살다가 돌아가셨으니, 이것은 지킴의 바름과 얻음의 깊음과 수양의 두터움이 세상에 지극히 신선한바가 되어 남들은 감히 따를 수 없는 바가 되었다.
공이 교제한 벗들은 모두 당대의 현사였으니 청송, 화담, 퇴계, 모재는 모두 친한 친구였다.제현들의 말씀에 “도학에 대한 뜻을 돈독히 하고 성인의 영역이 조성되기를 기약하였다”라고 한 말씀도 있고, “진로를 잡아 공부에 착수하여 끊임없이 전진하였다.”라고 한 말씀도 있으며, “유가의 공부하는 과정을 터득하여 아는 사람은 오직 공뿐이다.”라고 한 말씀도 있었으니, 당시의 친구들 사이에서 추앙받고 인정받음이 성대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다.
공의 휘는 욱(昱)이며 자는 경양이니 그 선대는 평양(平壤)이다. 9대조 인규는 고려 충렬왕을 도와 공이 있었기 때문에 평양백에 봉하여 졌고 시호는 정숙이며 그 자손들이 대대로 큰 벼슬을 하였다. 증조부의 휘는 득인이니, 장예원팔결사로 부인은 삭녕 최씨이다. 부친의 휘는 수성이니, 정주판관이요. 부인은 종실인 이씨로 춘향군 이래(李徠)의 따님이다. 배위는 청송심씨이니 청성군 순경의 따님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원빈, 홍빈은 모두 요절하였으며 공빈은 현감으로서 아들 셋을 두었으며, 인빈은 봉사로써 4남 2녀를 두었는데, 지금은 모두 이미 죽었으며 증손 약간이 살고 있다. 그 증손중 한사람인 문형이 묘갈에 관한 일로 찾아와 명을 지어 달라 요청하였다.
일찍이 듣건데, “용문선생은 도학이 높고 숨어 산 군자이다.”라는 말은 들었으나 그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그 문인들이 기록한 글을 보고 마음으로 크게 흠모하는 정성이 지극히 깊어진다. 그리하여 삼가 그 학문과 행동에 관한 대략과 세계의 순서와 자손에 관한 것을 모아서 묘서를 단장하고 오래도록 전하게 하고 저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 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정기를 받음은 청탁 간에 갖가지로 다른데,
그 청탁에 연유하여서 현우가 있게 되느니라.
아아! 선생의 품성은 스스로 아름다워서,
청년시절에 생원 진사에 오르시니 명예가 뭇 선비들을 감동시켰네.
그러나 스스로 만족치 않고 학문을 사모하였도다.
진정한 거유가 세상에 빼어나 의리의 학문을 제창하여,
천명을 스승으로 모시고 귀의하시어 날마다 요지를 들으셨도다.
바야흐로 잘 인도하심을 바라면서 그 재능을 다하리라 생각했는데,
참소하는 무리들 끝이 없어서 드디어 화의 근원이 되었도다.
뭇 현인들이 화에 걸려들어 옥이 부서지고 난초도 꺾였기에,
분함이 북받쳐 애도하시니 그 글월 심하게 애절했도다.
드높이 날아서 멀리 가시길 삭녕 평야의 한 구석에 하셨나니,
음흉들이 양도를 할퀴어서 하늘과 땅이 부새하게 되고
현인들께서 숨어 살게 됨은 시대가 진실로 그러함이로다.
졸졸 흐르는 샘의 물이요, 창창히 우거진 운림이로다.
원망도 아니 하고 번민도 아니 하며 곤궁한 생활을 달갑게 여기면서,
오직 서적으로 하는 일 삼으시어 한결같은 뜻으로 잠심하셨도다.
멀게는 공맹의 도 희망하시고 가까이는 성리학을 흠모하시어,
부지런히 늙은 것도 잊으면서 늙음이 이르러도 나아갔도다.
드높은 산마루를 우러르듯이 배우는 무리들이 운집하기로
부지런히 가르치시니 여러 제자 재능대로 배워갔도다.
일찍부터 도학이 있는 분과 사귀어 독실하게 믿고 지성으로 복종하니
곤궁도 능히 옮겨 놓지 못했고, 재산도 능히 빼앗지 못했도다.
깨끗한 몸으로 높게 행하여 도를 지키며 죽음을 기다렸나니,
백세의 먼 훗날이 되도록 탐욕도 청렴해지고 태만도 흥기하리.
용문이란 산은 산마루가 높직한데 살아서는 여기에 숨어 계셨고
죽어서도 여기에 묻히었기에, 여기 돌에 새겨 두노니
천추까지도 알 수 있으리라.
현감은 아들 셋을 두었다. 맏이 응생은 1녀만 두었으니 후사가 없다. 다음으로 계생은 양심당 순빈의 후사로 갔고, 종인 과천현감 호의 아들 지륵으로서 다시 후사를 이었다. 지륵의 아들은 기루요, 손자는 중정, 중익이요. 중정의 계자는 서규이다.
셋째인 영생의 아들은 황으로서 동몽교관인데, 선생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 교관의 아들은 방언이며, 손자는 중형, 태형이다. 중형의 아들은 인상이고, 태형의 아들은 구상, 봉상, 호상이다. 봉사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맏이 진생의 계자는 문환이고, 계손은 방질인데, 현감이며, 아들은 중태, 손자는 관휴 이다.
둘째 형생은 현감으로 있다. 서자로 문승이 있으며, 손자는 국보이다. 셋째 익생은 사남을 낳았으니, 문달, 문종, 문형, 문혁이다.
문달의 아들은 방원, 방우요. 방원의 아들은 중구요, 방우의 아들은 중화이다. 문종의 아들은 방준이며, 손자는 중려이다.
문형은 현감인데, 아들은 방휴, 방식이요. 방휴의 계자는 중석이다. 문혁은 현감인데 아들은 방헌, 방징, 방규이다.
넷째 겸생의 아들은 문망이요. 손자는 광선이다. 광선의 아들은 중린, 중상, 중렴이요. 중린은 부사인데, 아들은 시태, 시현이요. 중상의 아들은 시달이며, 중렴의 아들은 시섬, 시형이 있다. 시섬의 계자는 필주이다. 시형의 아들로는 익주와 필주가 있다.
숭정기원후 98년 신축년에 추가로 적다.명이 이루어진후 숭정기원후 26년 갑오에 선생의 옛 거주지에 사림에서 제사지낼 곳을 세웠고, 60년후 갑오년에 왕명으로 용문서원이라 사액되었고, 또 26년만인 경신에 왕명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그 후 50년만인 을축년(영조 21, 1745년)에 사헌부 대사헌 김진상은 추가로 기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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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 龍門趙先生墓碣銘」
有明朝鮮國龍門趙先生墓碣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趙翼 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李健命 書」
通政大夫行黃州牧使黃州鎭 兵 馬 僉 節 制 使 李徵夏 篆」
靜菴先生生於偏荒學術未明之時, 能以古聖賢之學卓然樹立, 以興起斯文、挽回世道爲己任, 擧世顒然, 庶幾見三代之治也。 不幸讒搆竊發, 遂罹奇禍, 爲士林至痛。 方其倡明正學, 從而學者衆矣。 而其能守以終身, 名於世者有數人, 龍門先生趙公是其一也。公生有異質, 兒時受書, 一再讀卽成誦, 作句語輒驚人。 年十餘, 才名已遠播, 而未成童, 以孝友聞, 隣里稱之爲孝兒。 年十九, 登生、進兩試, 遠近聞者莫不慕其才, 而乃慊然謂人之生世, 豈但以功名爲事遂有求道之志。 聞趙靜菴及金大司成湜講古人義理之學, 乃從之學, 聞《大學》、《中庸》之旨, 扁其居曰愚庵, 日沈潛硏究, 至忘寢食。 靜菴嘗曰: “諸子中求道之篤, 無如趙某云。” 己卯春, 讀書于靜菴龍仁別墅。 一日, 夢見朱子, 寤而作兩絶, 以寓其志。 及禍作, 欲上疏辨理, 搆草未上, 坐門生繫獄, 以年最少脫禍, 使其疏上, 禍將不測, 而以未及上爲恨。 自此有隱居之計, 絶意科擧, 與兄養心堂築室于朔寧舊業, 同處講磨, 兄弟自爲師友, 人比二程焉。 養心諱晟, 亦志學多聞, 與先生幷有重名。 公作《中庸大易圖》, 改號爲葆眞。是時, 時論仇視正士益甚, 而公常在指目中。 大夫人深以爲懼, 力勸赴擧, 不得已一赴得擧第二。 及庭對, 以格致正誠爲言, 考官意是己卯之黨而黜之。 自是力陳于大夫人, 不復就試。 其後黨禁稍解, 以廷薦除濬源殿參奉, 爲親老就之。 居一年, 換順陵, 未久遞。 後又除英陵, 未久, 辭疾而歸。 及大夫人下世, 遂卜居于龍門山中, 世稱龍門先生, 學者多歸之。 日與講論經旨, 夜深燈盡, 則獨坐沈思, 至於疑義有自得處, 則必呼門人子弟, 抽出經傳以驗之, 一夜至二三, 或達曙不寐, 其究心經傳如此。 及明廟下求賢之敎, 朝廷薦成公守琛、曺公植、李公希顔、成公悌元及公, 德行以聞, 特授宣務郞、內贍寺主簿。 以明廟礪精之初, 被不世之遇, 不辭而就之。 出知長水縣爲治, 以新民善俗爲務, 去苛擾存大體, 靜而不煩, 吏順民安。 擇士子之秀者, 聚而敎之, 遂始知爲學之方, 至於旁邑之士, 亦多聞風而至者。 乙卯, 倭寇猝至, 陷巨鎭, 主帥蒼黃失措, 唯以殺戮立威, 人皆股慄, 公獨以理爭之, 帥感悟止其殺, 稍得禦寇之策。 賊退, 卽解印歸龍門以隱, 因與世絶, 惟以窮理敎人爲事。丁巳十二月庚寅, 以疾卒於京城靑坡里第。 明年二月丙申, 葬于砥平龍門山南支丑坐未向之原, 卽舊居之後也。其所爲詩文甚多, 抄其可傳者爲十卷, 又其門人所記言行可法者爲一卷, 未及鋟梓, 失於壬辰兵火, 今所存只絶句若干首而已。 其詩文膾炙一時, 筆畫之妙, 又稱獨步, 然此皆其餘事也。 性好山水, 每匹馬遊覽名山, 不問遠近。 及晩而入深山, 游泉石間以終, 其雅尙高潔, 絶出塵俗, 然在公非爲盛節也。 唯其能早自得師, 委己於義理之學, 臨禍難而不挫, 處窮困而不變, 孜孜一生, 死而後已, 此其所守之正、所得之深、所養之厚, 爲世所至鮮, 而人不可及者也。 所交皆當世賢士, 聽松、花潭、退溪、慕齋皆其執友也。 諸賢之稱之, 有曰: “篤志道學, 期造聖域。” 有曰: “得路着工, 進進不已。” 有曰: “誠得儒家工程, 唯公而已。” 可見當時朋友間推許之盛也。公諱昱, 字景陽。 其先平壤人。 九世祖仁規, 佐高麗忠烈王有功, 封平壤伯, 諡貞肅。 子孫世爲大官。 曾祖諱得仁, 掌隷院判決事, 妣康津安氏。 祖諱揚門, 成均館典籍, 妣朔寧崔氏。 考諱守諴, 判官, 妣宗室李氏, 考春陽君徠也。 配靑松沈氏, 漢城府左尹靑城君順經之女也。 有四男一女: 元賓、孔賓、仁賓、鴻賓。 元賓、鴻賓皆夭。 孔賓, 縣監: 仁賓, 奉事。 女適某人而夭。 孔賓有三子一女。 仁賓有三子二女, 今皆已死。 有曾孫若干人。其曾孫門衡以墓碣來請。 翼夙聞龍門先生爲學道隱居君子, 而未得其詳, 今見其門人所爲狀, 竊深景慕。 謹摭其學問行義大略及世次子孫以遺之, 俾揭諸墓, 庶傳于久遠云。 銘曰:
人生受氣, 淸濁萬殊。 由其淸濁, 而有賢愚。 於惟先生, 稟賦自美。 靑年泮壁, 譽動群士。 不自爲足, 學慕爲己。 眞儒挺世, 倡明義理。 歸依函丈, 日聞要旨。 方冀善誘, 思竭其才。 讒人罔極, 遂成禍胎。 群賢罹網, 玉碎蘭摧。 憤惋悲悼, 其辭孔哀。 飄飄遠逝, 朔野之隈。 群陰剝陽, 天地其否。 賢人之隱, 時固然爾。 絶跡世間, 入山愈深。 洋洋汝水, 蒼蒼雲林。 不怨不悶, 窮困是甘。 惟事簡編, 一意沈潛。 遠希洙、泗, 近慕洛、濂。 孜孜忘老, 老至駸駸。 高山仰止, 學者雲集。 勤勤敎育, 群飮充腹。 早親有道, 篤信誠服。 窮不能移, 禍不能奪。 潔身高蹈, 守道俟死。 百世之下, 貪廉懦起。 龍門之山, 嵂崒巒岡。 生於是隱, 死於是藏。 刻石于玆, 可識千霜。<끝>
[주해]
[주01] 質 : 《龍門集・墓碣銘》에는 “稟”으로 되어 있다.
[주02] 忘 : 底本에는 “忌”로 되어 있다. 《浦渚集・長水縣監龍門先生趙公墓碣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3] 敎 : 底本에는 “數”로 되어 있다. 《浦渚集・長水縣監龍門先生趙公墓碣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4] 誠 : 《浦渚集・長水縣監龍門先生趙公墓碣銘》에는 “識”으로 되어 있다.
[주05] 諴 : 底本에는 “誠”으로 되어 있다. 《浦渚集・長水縣監龍門先生趙公墓碣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6] 之 : 底本에는 “門”으로 되어 있다. 《浦渚集・長水縣監龍門先生趙公墓碣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07] 巒 : 底本에는 “蠻”으로 되어 있다. 《浦渚集・長水縣監龍門先生趙公墓碣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문강공 용문 조욱 묘 /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7
▲문강공 용문 조욱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