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우씨 상조오세 제단비문
(丹陽禹氏 上祖 5世 祭壇碑文)
역경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후손에게 끼치는 경사가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나라 많은 성씨 가운데 우씨가 그 하나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우씨는 단양을 관향으로 하여 득성한 이래 어진 조상과 뛰어난 자손이 계계승승 이어 내려왔으며 벼슬이 빛을 발하고 덕택이 나라안에 미치어 벌열가문으로 자리하여 고려시대에 이미 팔대성씨에 들게 되었고 번성을 누리었다.
시조는 휘 현으로 향공진사에 올라 일향의 사표로서 정조호장을 지냈으며 2세는 휘 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서 전법령에 이르렀다.
3세는 휘 인가로 문과에 급제하여 양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개부의동삼사첨의중찬판도평의사사에 추봉되었다.
4세는 휘 잉순이며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5세는 휘 경절로 벼슬이 지도사이시다.
위와 같이 대대로 문한이 뻗어나고 관로가 탄탄하였으며 도덕으로 일컬어졌었다.
이후 예손들이 더욱 번연하여 진신이 위연히 배출하였으니
6세 휘 중대는 문과관지문하시중이고 다섯 아들을 낳았으니
장남 휘 천규는 향공진사고 문하시중이고
차자 휘 천계는 문과 판서이고
차에 휘 천석은 문과 서해도안찰사전리정랑 문하시중이고
차에 휘 천우는 문과 군기윤이고
차에 휘 천성은 문과정랑이며
천규의 자 휘 탁은 우리 유학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세칭 역동선생으로 문과 성균관제주 시호는 문희공이요 역동서원에 향사를 한다.
천석의 장자 휘 칭은 문과 좌대언이며 차자 휘 팽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을 치사하여 문하시중에 추봉되었다.
이하는 낱낱이 기록하기 어려워 이에 그치지만 대과에 급제하신 분이 고려조에 문과 26명이고 조선조에 문과 33명 무과 15명이었으며 국난에 헌신하여 공신록에 오른분이 수십명에 이른다.
참으로 광전유후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시조에서 5세까지의 선조와 그 배위의 묘소가 실전되어 통한해 마지 않더니 예손일동이 숙의하여 시조이하 5대묘소가 단양의 금수산 남록에 모셔져 있었다는 명가차기를 근거로 단양우씨로서는 유서깊은 이 곳 금수산 남록 간좌에 제단을 모으기로 하였다.
이에 평소 위선사업에 독실한 단양우씨 대종회 종묵 동화 양씨가 글을 청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명하기를
선대에서 쌓은 선이 여경으로 열매 맺어 대를 이어 문장도덕 벼슬길도 탄탄했네
실묘통감 한이 되어 유서깊은 금수산에 상조오위설단하여 천만세를 봉향하니 복축컨데 존령께선 평안으로 임하시와 고이고이 잠드시고 명명복도 누리소서.
서기 1998년 무인 입추절
성균관장 경주 최근덕 삼가지음
후손 억기 삼가 씀
단양우씨대종회 삼가세움
출처: 단양우씨 집의공파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