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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마지막 바벨론 1부
오늘은 다룰 제목이 마지막 바벨론이라는 제목인데요,
고대 역사를 보면 바벨론이라는 큰 세력이 있었고, 그날 이후로 역사에 어떤 큰 세력이 나타나서 세계를 주무르거나 세계를 다스리는 세력을 바벨론이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아주 고대바벨론이 있었고, 함무라비 왕조라고 하는 그런 왕조는 고대바벨론에 속하고, 주전 625년부터 539년까지 이어지는 86년간 이어졌던 신바벨로니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 교회 시대에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를 영적인 바벨론이다. 이렇게 지칭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가서 보면 역사의 종국사적 종말에 가서, 또 한 번 이 세상 전체를 한 손에 움켜쥐고 온 세계 모든 자유민들의 권리와 인권이 다 여지없이 묵살되면서 마구잡이로 악마적인 능력과 세력과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하는 어떤 그런 세력을 바벨론이라 혹은 짐승이라 혹은 적그리스도라 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그 나라가 마지막 무너지고 깨어지는 장면을 보고 외치기를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이렇게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럼 도대체 종국사적 종말에 세상을 한 손에 틀어쥐고 온 인권을 유린하면서 그 악을 자행할, 정말 사탄의 대행자가 될 만한 그런 큰 세력 큰 나라 큰 바벨론 마지막 바벨론은 도대체 어느 나라를 지칭하는가? 어느 나라가 그 악역을 맡을 것인가? 이런 것을 우리가 지금쯤 생각해 봐야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는 이런 것은 다 상상도 못하고 있고 아예 듣지도 가르치지도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이 문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돌아본 역사와 함께 미래도 잘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시대의 파수꾼 된 사명을 교회가 감당해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이든지 간에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서 어떤 처음에는 극히 작은 매우 작은 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서 이것이 어떤 여론을 만들거나 어떤 힘을 규합하거나 역전 반전을 겪어가면서 그리고 나중에 역사에 두각을 나타내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역사가 마지막으로 치닫는, 그야말로 인류역사가 종국사적 종말로 치닫게 되는 어떤 사건이 어떻게 출발했는가? 그 이야기를 조금하려고 해요.
혹시 여러분이 목사님의 설교나 강의나 교양서적이나 신앙서적에서 ‘드레퓌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드레퓌스,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사람이름인데.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보통 우리 기독교가 조금 어떤 면에서는 편협한데가 있어요. 그 편협이 무슨 편협이냐 하면, 구원과 상관없으면 아예 눈을 감아버립니다. 심지어 성경을 보면서도 우리 구원에 직접 관계가 없으면 무관심 한다든지 무시한다든지 이렇게 건너뛰거나 하는데 그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되고 성경은 정말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장 마지막 절까지 한절도 한 단어도 빼지 말고 제대로 봐야 되겠고, 성경만 봐서는 성경이 잘 안보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서 성경을 보고, 성경을 보면서 역사를 봐야만 역사도 보이고 성경도 보이고. 그래서 역사와 성경이 함께 보이면 과거도 보이고, 우리가 서있는 현재도 이해할 수 있고, 미래가 어떤 미래가 앞으로 전개될 것인지가 그런 것도 내다볼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지금 이야기 시작을, 자꾸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까지 올라가니까 시간이 부족해서 안 되고, 우리 이야기를 어디까지 하려하느냐 하면, 19세기가 저물어가고 20세기를 바라보던 그 시대, 다시 말하면 100년 전 이야기 인데 100년이 좀 더 되었어요. 110년 120년 전 그 때 있었던 한 작은 사건으로부터 우리 이야기를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 그 사건이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이라 하는데, 이 드레퓌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느냐 하면 1894년. 지금부터 얼마 전이죠? 113년 전, 그해 9월 말입니다. 온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온 유럽 전체를 12년 동안이나 그야말로 펄펄 끓어 넘치게 했던 대 사건이 처음에는 조그마한 일로 시작한 거야.
그때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어떤 훔쳐 나왔다하는 익명의 편지 한 장이 프랑스 참모본부 정보부에 입수가 되요. 메모 한 장입니다. 메모 한 장. 독일 대사관의 무관이었던 슈바르츠코펜이라는 사람에게 가는 편지라는 건데, 프랑스의 육군의 기밀사항을 독일에 넘겨주겠다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던 겁니다.
이른바 간첩 문서 같은 그런 겁니다. 그 후부터 그 편지를 ‘명세서’라고 지칭하게 되는데, 그 참모본부는 이 명세서를 만든 사람, 즉 스파이가 우리 참모본부 안에 우리 내부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만든 사람을 적어도 참모본부 안에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가까이 있는 인물이다라고 단정을 하고 사건초기부터 이미 조사전체를 그르치게 될 선입견을 갖고 이것을 다룬 거예요.
그래서 이 사건 이후로 언론세계라든지 지성인의 세계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바라볼 때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않도록. 정말 맑은 지성을 가지고 객관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그런 어떤 의식이 싹튼 것이 이 사건을 계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프랑스가 자존심 어쩌고 했는데, 이 사건으로 온 프랑스 국민들이 12년 동안 일은 아예 손을 놓고, 이 사건가지고 싸우고 다투고 하기 위해서 아예 직장에도 안가고 그렇게까지 무시무시한 사건이었어요. 그래서 적어도 근대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그런 과정에서 드레퓌스 사건 정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양정도로 반드시 알아야만 근현대사의 키를 풀어나갈 수 있어요. 반드시 이것은 시간이 좀 걸려도 드레퓌스 사건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는가를 공부하기를 바랍니다.
그 명세서 안에 기밀사항이라는 것은 참모본부에서 극비리에 취해진 최신 결정 사항이기 때문에 이것이 독일에게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참모본부가 ‘요정도면 적합한 용의자다’ 하고 한 사람을 찍었는데, 그는 참모본부에서 일하고 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예요. 드레퓌스라는 이름만이라도 기억하도록.
이 사람은 정말 세계사에 어떤 기념비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소개하는 겁니다. 군인 대위인데 이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 이 사람이 유대인이었다 하는데서 문제가 출발합니다. 그의 필체가 ‘명세서’ 간첩문서의 필체와 유사했다하는 것 외에는 아무 근거가 없는데 이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그렇게 이중간첩으로 몰아서 그렇게 정죄해 나갔던 건데,
더군다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유대인 특유의 호기심, 무슨 일이든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고 누구처럼 따져보고 이렇게 했다는 거요. 너도나도 물어보니까 이것 봐라 그때 그렇게 파고들어 물어보더라고 하면서 덤터기를 전부다 드레퓌스에게 씌운 거야. 그래서 항상 이것저것 물어보던 사람인데, 말이 없고 이런 사람이었다가 이 사람이 지목되었는데, 참모본부는 즉시로 그를 스파이 혐의로 몰아서 군사법원에 고소한 겁니다.
단지 글씨의 유사성 하나만 가지고 그렇게 한 거야. 그래서 글씨의 유사성만으로는 그를 간첩으로 몰기가 증거가 불충분해서 불리했던 참모본부가 그 사람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위법적인, 말도 안 되는 짓도 서슴지 않고 자행한 거야. 이것이 프랑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묵살했던 그런 사건인데요, 명세서의 글씨와 드레퓌스의 필체에 대해서 여러 필적감정결과,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참모본부 측의 유리한 감정결과만 취하고, 아니다 하는 것은 여지없이 전부 감춰버린 거야. 드레퓌스와 필체가 일치하지 않는다 하는 사람은 배제하고 일치된다 하는 사람 쪽으로 선택해서 그리고 재판을 했는데, 드레퓌스의 육군사관학교 시절에 그런 불리한 평가 그러한 자료를 다 끌어 모아서 한꺼번에 뒤집어 씌어서 간첩으로 내몰았던 거야. 이것이 반유태주의 인종 차별주의 이런 의식이 갑자기 유럽에서 싹틀 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데, 그런데 도덕성 조사도 허위로 작성하고, 드레퓌스는 전혀 상관없는 첩보문서들의 전부 드레퓌스와 관련 있는 것처럼 조작을 합니다. 조작. 그리고 결정적으로 드레퓌스를 소송할 때 드레퓌스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비밀 자료를 판사들에게만 불법적으로 전달하고 변호사에게는 아무것도 안주고 이렇게. 옛날 사회, 지금부터 100년 전 일이니까.
이런 것은 그래도 유럽이니까 다 기록으로 남고 드러난 거야. 이런 사건이 1894년 12월 이런 허위 조작 속에서 비밀재판으로 치러진 군사 법정이 드레퓌스의 유죄를 만장일치로 선포하고, 피고를 종신유배형과 공개적인 군적을 박탈하고 이렇게 끔찍한 재판을 하고도, 드레퓌스가 불법 재판에 대해서 변명할 수 있는 해명할 수 있는 소명기회도 전혀 주지 않은 채 재판을 끝내 버렸어요. 드레퓌스는 끝까지 자기는 죄가 없다 하고 자신의 결백을 아무리 주장하지만 그 비극적 음모 앞에서 한 개인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력한지.
그 후에 드레퓌스는 아프리카의 기아나의 살피 제도에 악마 섬이라는 섬에다가 유배되었어요. 섬 이름이 디아볼로스예요. 디아볼로스섬 악마섬. 악마의 섬.
그래서 처음에는 그래도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의 아내가 ‘나는 당신의 순결을 믿는다.’ 그의 아내가 믿어주는 그 한마디가 위로가 되었는데, 끝내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의 아내가 곁에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5년 동안 무모한 유배생활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프랑스 혁명의 기치가 ‘자유 평등 박애’ 이런 슬로건을 가지고 나왔던 프랑스가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래서 타락한 인간이란 별수가 없다는 거죠. 영국도 별수 없고, 미국도 별수 없고, 프랑스도 별수 없어요.
이런 식으로 유대인들이 가는 곳곳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 그 대표적 사건이, 다른 것은 언론에 가려줘서 모르는 가운데서 자행되었는데, 이것은 온 언론들까지도, 나중에 언론도 두 쪽이 나가지고 힘 없는 몇몇 언론은 드레퓌스 편을 들고, 힘 있는 언론들은 유대인들을 죽여라. 이렇게 선동을 하는 거야.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원칙은 대체로 다수결이죠?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인데, 여러분 다수가 멍청한 다수가 의로운 소수를 괴롭게 한 역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예수님 사건 아닙니까? 미련하고 악하고 멍청한 다수가 하나님을 정죄하는데 까지 가는 거요. 그래서 이런 것은 우리가 역사 공부를 심도 있게 해봐야 돼요.
그렇게 하고나면 무슨 사건이 터졌을 때, 무슨 일이든지 감정으로 처리하지 않고 냉정하게 생각하면서 공정하게 그야말로 공과 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첫째 감정이나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빈 마음으로 맑은 정신으로 객관적인 관점을 갖고 사물을 다루는 그런 사고 훈련이 필요해요. 우리 민족이. 프랑스 사람과 한국 사람은 상당히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꽤 감정적이고 말이 많아요. 세계상에 제일 말 많은 나라가 세 나라가 있다면, 한나라는 프랑스, 한나라는 스페인, 하나는 한국이야. 한국이 적어도 동메달은 땁니다. 말이 많은 나라예요. 무슨 사건이 터지면 전부다 정치학 박사이고. 그래요 한국이라는 나라는.
프랑스 사람들은 심심해서 창문을 열었는데, 누가 시장 갔다가 온 거야. ‘하이’라고 시장 갔다 온 사람과 인사하면 하나는 창에서 내려다보고 하나는 쳐다보고 한 시간 반 동안 인사해요. 한 시간 반 동안. 하하하. 그렇게 말이 많아요. 그래서 프랑스에서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야. 그런 나라인데 그런 민족사에 정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거야.
어떻게 이런 불법적인 재판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그 당시의 상황을 부연설명하면, 유대인들에 대한 어떤 반유대주의, 이런 것들이 이것도 참 이른바 솔직히 우리얘긴데, 무식한 기독교인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사회를 몰아간 건데, 그 사람들은 뭐라 하느냐하면 ‘너희가 우리 구세주를 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느냐’ 아니 지금이 예수님 못 박히신지 1800년 전에 사람이 죽였지,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전혀 책임이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유대인들 보고 우리 메시야를 너희가 못 박아 죽였다면서 미워하고 박해하고. 그리고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똑똑해요. 왜 똑똑하냐하면 계속 공부를 하니까. 밥 먹는 시간에도 공부하는 시간이야. 하여튼 유대인들은 밥을 세끼를 먹으면 밥 먹을 때 보통 누워서 먹습니다. 눕는다고 해서 배게 베고 눕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이쪽으로 펴고, 팔을 이쪽으로 고이고 빵을 비스듬히 편안한 자세로 해서 먹으니까, 그렇게 먹으면서 아이들과 그날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모든 분야에 그날 하루에 있었던 일은 그날에 소화하고 넘어갈 정도로 자녀들과 가족들이 대화를 해요.
그렇게 대화를 하고 누워 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저녁 먹고 나면 저녁에 회당에 랍비에게 가서 또 거기서 공부하고 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우리처럼 초등학교처럼 국민교육이 시작된 것이 예수님 오시기 200년 전부터 국민교육이 의무교육처럼 초등학교처럼 공부를 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사람들이 머리가 좋고, 머리가 좋을 뿐 아니라 지난번에 우리가 본대로 음식도 깨끗하게 먹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유대인으로 태어났다하면 기본으로 5개 국어를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항상 살아가다보면 모든 힘과 돈이 다 유대인에게 쏠려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따로 제가 시간을 내어서 인류역사에 각국에서 얼마나 요직들을 유대인들이 차지했었는가? 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 깜짝 놀랄 거예요. 그리고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전부 유대인 피를 가진 사람들이라. 그러니까 다른 민족들이 공부는 하기 싫으면서 유대인이 잘되는 것 못 봐주는 거야. 그래서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너무 어느 정도 박해라는 것은 떠돌이 나라 없이 떠돌다보면 서러움도 당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너무 혹독하게 하니까 무지막지하게, 유럽에 있는 카톨릭이나 기독교나 이런 사람들이 너무 무지막지하게 유대인들을 박해하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힘이 없어 망정이지 힘이 생기면 보복심이 나오는 거죠. 가뜩이나 유대인들이 우리 이방인을 바라볼 때는 하여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 아니면 완전히 가축으로 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부정한, 가축도 부정한 가축, 잡아먹을 수 없잖아. 굽도 안 갈라지고 되새김질도 안 하니까. 가축은 가축인데 부정한 거야. 굽도 안 갈라졌고 되새김질도 안하니까. 먹을 수 없는 고기이고.
그러니까 이런 그렇게 이방인을 무시하는데, 무시하는 것도 얼굴에 안 나타나면 좋은데, 나타나. 워낙 유대인들이 똑똑하고 교만하니까. 그렇게 유대인들이 미움을 받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완전히 감정적인 사건에 휘말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훗날 독일과 프랑스가 항상 전쟁을 해 왔어요. 여러분 유럽의 3대 자존심이 영국, 프랑스, 독일. 이 셋이 영원한 앙숙이라. 평화가 안 돼. 지금 이른바 ‘보볼전쟁’이라 해서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싸우는 건데 이런 싸울 때부터 유대인들이 미움을 받게 됩니다.
여러 전투에 패배한 후에 결국은 프로이센과 강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 강화조약에 배상금을 프랑스가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와 로렌지방 북부 영토 양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프랑스 민족자주권의 침해는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에 큰 충격을 안겨줍니다.
이때부터 지고나면 졌다하면 안됩니다. 보복을 합니다. 준비해가지고. 그래서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복수만을 노리고 있던 프랑스 사회에 민족주의가 서서히 움트기 시작해요. 이 민족주의라는 게 좋은 말인 것 같지만 대체로 나쁜 쪽으로 갑니다. 민족주의가 되면 국수주의 배타주의 이렇게 가요. 그렇게 해서 바로 인종차별로 가는 거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바로 뿌리 깊은 인종차별인 반유태주의가 거기에서 싹트게 되는데, 반유태주의라는 것은 오랜 감정이긴 한데, 그래도 잘 버텨 나오다가, 아니 프로이센 독일에게 져놓고는 분풀이를 유대인에게 하는 거야. 어디 가서 뺨맞고 어디에서 눈물 흘린다고, 그런 것처럼 화가 나니까 유대인을 때려잡으려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에 이 사람들이 드레퓌스에게 감정을 다 쏟아 부어 전부 드레퓌스에게 몰아서 생사람 잡는 재판을 한 거야. 군부에서도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사회 전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참모본부에서 드레퓌스를 주동자로 지목한 인물들이 악명 높은 반유태주의자들 이런 사람이 있어서 자기들이 잘못해서 전쟁에 졌다 하지 않고, 그저 유대인들에게 뒤집어 씌어서 그런 분위기예요.
그러니까 프랑스사람들이 예술적이고 뭐고 하는데, 웃기지마 똑같아. 전부 아담의 자손은 타락한 본성은 다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프랑스에 살고 있어도 유대인들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다. 인정을 안 해주는 거야. 그래서 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니까 극심한 반유태주의 여론에 항의를 받게 되는데 유대인이니까. 당연하다. 사형에 처해야한다. 종신형도 안 돼. 죽여야 돼. 이렇게 여론이 들끓는데, 그런 기사들이 매일 신문에 연이어 게재되니까 그때 언론인들 수준도 그래요. 반유태주의들은 거짓말과 중상모략 추잡한 선동 무고한 사람을 유죄로 몰고 가고 이런 맹목적인 인종차별 앞에서 한 유태인의 유죄판결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라.
그런데 하필이면 드레퓌스가 걸렸어요. 결국 드레퓌스가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기소되지 않을 수 있는 문제였는데, 그렇게 된 거죠. 드레퓌스의 죄가 뭐냐? 유태인이다 그것밖에 없어요. 아무 근거도 죄도 없이 당한 건데 이런 불법재판 행위에 대해서 반발하고 항의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처음에는 몇 사람 있었다고 몇 사람.
그들은 피고의 종교가 기소의 이유라 하면서 제대로 된 재판을 다시 해야 된다 하면서 몇 사람이 조그마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야. 아주 진실의 목소리가 아주 작은 목소리이지만 이게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결국 종신형을 받은 드레퓌스는 아프리카 기아나에 있는 악마 섬에서 홀로 외로운 길고도 긴 세월을 보내는데, 여러분 어지간하면 독방이라는 것이 길게 하지 않습니다.
한 달 일주일 석 달도 독방에는 안 두는데 여러분 독방에다가 깊이가 5m되는 구덩이에다가 5년 그렇게 해보세요. 아무런 나간다는 희망도 없이 차라리 죽여 버리든지. 몇 번이나 죽음을 삼키고 또 삼키고 이렇게 하면서 참아나가는 거야.
그런데 새로 중앙정보부장이 새로 취임한 ‘조르즈피가로’ 조르즈피가로라고하는 중령이 ‘새파란 엽서’라는 첩보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조사하다가 새로운 정보부장이 우연히 드레퓌스사건의 서류를 읽어보게 되었어요. 뜻밖에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참모본부 장군들은 그 자기네가 저지른 죄가 있으니까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한사코 드레퓌스사건은 그대로 묻어두자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피가로중령을 위험인물이다 하면서 경계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피가로중령은 서서히 참모본부의 음모를 알게 됩니다. 아 이게 순 음모로 내가 고발해도 이게 에스테라지라는 사람이 한 건데,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도 이것은 자기네들끼리 짜고 치는 거구나 하고 두려워하죠.
그래서 자기의 목숨도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도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싸울 것을 다짐해요. 이 사람이 한 말이 ‘제가 어떻게 될지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나는 언젠가 이것을 터뜨려야 된다.’ 이 사람이 당한 일이 제가 겪었던 일과 너무 비슷한 게 많아서 제가 아주 흥미진진하게 정리하고 그랬는데.
그는 용기를 내어서 자신의 친구이면서 변호사인 ‘루이 루블루아’에게 이 사실을 전했어요. 평소에 관심이 많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국회의원에게 이 사실을 전하게 되고, 그러나 이 두 사람만 가지고는 드레퓌스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증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그러던 중에 1896년 11월 10일에 <르마탱>지라는 잡지사가 ‘명세서’ 사본을 그냥 그대로‘ 필체가 그대로 있는 대로 신문에 올린거야. 명세서 필체를. 활자로 찍지 않고 필체 그대로 살아있는 대로 카피해서. 이 신문을 본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 이 사람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프랑스 정부가 명세서를 훔쳐갔기 때문에 사실 그 명세서를 보낸 적이 없었지만 한눈에 그 글씨가 자기와 독일 무관과 내통되어있는 에스테라지라는 이사람 자기의 간첩행위를 드레퓌스에게 뒤집어 씌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알면서도, 그 글씨를 보니까 자기가 늘 내통하고 있는 프랑스 안에 자기가 심어놓은 에스테라지라는 간첩의 글씨가 확 보인단 말이죠. 그렇지만 자신과 거래하는 사람의 이름을 밝힐 수 없죠. 그래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한편, 에스테라지는 신문에 난 자기 글씨를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장교노릇을 하지만, 그는 사실 간첩이기도 하고 과부를 꼬셔서 돈을 사채놀이를 한 나쁜 놈이야.
그래서 자기가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서 뒤집어 씌어서. 그야말로 드레퓌스는 하나의 희생양이죠. 참모본부 역시 자신들의 잘못을 알면서도 군의 명예를 위해서 음모를 꾸민 거예요.
어느 날 에스테라지를 잘 아는 증권 브로커가 드레퓌스 형인 ‘마티외’라는 사람을 찾아왔어요. 에스테라지 소령의 글씨가 명세서의 글씨와 똑같다는 사실을 알려주고는 드레퓌스 형이 되는 마티외는 곧바로 에스테라지를 고발해요. 고발했는데, 당국에서는 조사를 하는 척 하면서 안 해버려요. 한통속이니까. 전부다.
이때부터 신문을 통해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데 아까 말씀드렸죠? 프랑스 온 국민이 편이 갈라져서 12년간 싸웠다고. 신문이 나오면 평소에는 몇 천부밖에 안 나가는데, 20만부씩 팔려나가는 거야. 온 국민이 신문보고 싸우고. 또 보고 또 싸우고. 날 새면 또 싸우고. 연속극 중에 연속극이야.
대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났는데, 대부분의 신문은 참모본부를 싸고돕니다. 드레퓌스사건을 다시 재판하는 것은 군부나 프랑스 전체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하면서 이런 것 전부다 유대인 조직이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군의 위신과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군대와 관청에서 일하는 유대인을 모조리 쫓아서 이 땅에서 유대인만 없애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나온거야.
차가운 이성으로 이 문제를 대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맹목적인 인종차별주의에 휩싸여서 이 문제를 대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드레퓌스라는 사람을 양심으로 동정하고 지지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 약한 거야. 너무 힘이 없어요.
여러분 여러 수백 수천 명이 달려드는데 혼자서 그 외로운 싸움을 싸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재판은 공정히 하라 그런 말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래서 군사법원은 재판을 열어서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진짜 진범에게다 무죄를 선고해요. 군사 법정이. 그리고는 오히려 엉뚱하게도 군사기밀을 누출했다 해서 피가로 중령을 체포해 버렸어요. 이런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갈수록 더 산이죠?
이때, 전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가 프랑의 지성인이요 프랑스의 양심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에밀 졸라.’ 에미를 졸라대. 하하하. 불효막심한 사람이죠? 조를 걸 졸라야지 애미를 조르면 어떡해. 하하하.
그 사람이 쓴 유명한 글이 <나는 고발 한다>. 온 유럽 온 세계 전체를 발칵 뒤집히게 했던 고발장이 ‘나는 고발한다.’는 건데,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을 겁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 한다.’ 꼭 한번 읽어보세요.
군사법원의 이 뒤집힌 판결은 여러 유럽 신문들의 비난을 받을 뿐 아니라, 프랑스를 정반대로 대립된 두 파로 분열시키는데, 재심요구파와 재심반대파. 그러나 재심요구파의 수와 힘은 아직도 초라합니다. 다시 말하면 드레퓌스의 앞날은 아직도 깜깜합니다. 아직 이야기가 많이 남았습니다. 하하하.
이때 그 유명한 한 사람이 나오는데, ‘데오도르 헤르츨’ 이사람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로 갈려고 하는 거거든요. 이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대인 중에 유대인 피를 타고난 오스트리아 저널리스트입니다. 이 사람이 이 사건을 지켜보다가 정말 나라가 없어서 서러워서 못살겠네 하고 처절하게 통감하고는 ‘시온으로 돌아가자.’
다윗의 도성 그 시온으로 돌아가자 하는 이른바 시온주의 운동이 데오도르 헤르츨, 다시 말해 유대계 오스트리아 저널리스트에 의해, 이 드레퓌스 사건 때문에 데오도르 헤르츨이라는 사람이 큰 충격을 받고 우리가 돈 아무리 많이 벌어도 안 되고,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안 되고, 우리끼리 아무리 단결해도 우리 땅이 없으니까 결국은 이런 설움은 끊임없이 당하겠다. 통렬히 비통한 마음을 갖고 이 사람이 자기 사비를 써 가면서 온 유럽을 돌면서 유럽에 있는 유대인 지성인들에게 만나서 이른바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유대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는 겁니다. 19세기 후반 동유럽 중유럽에서 시작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에 있는 시온 산 약속의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나오는 거죠.
그 앞에도 더러 16세기 17세기 18세기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설움을 당하다가 당하다가. 돈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돈이 있어도 안되는 거야. 땅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아무리 정치 잘 못한다 해도 우리나라는 사랑해야 돼요. 정부는 미워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지만 반국가는 안 됩니다. 반정부는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갈아치울 수도 있어요. 잘못하면, 반정부는 있을 수 있지만 반국가적인 행위는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 국가라는 게 큰 집이죠. 나라는 나의 집이예요.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애국자가 돼야 해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나라가 없으니까 아무데가도 타인이야. 타향이야. 어딜 가도.
그래서 유대인들이 돈이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돈만 있어도 안되는 거야. 그런 체험을 근 1600년 1700년 AD70년부터 흩어나가서, 아니면 BC721년이나 BC586년 이때 흩어져 나가서 적어도 길면 2600년 짧게는 1700년, 이런 세월동안 나라 없는 서러움을 겪으니까, 이제는 힘도 있고 돈도 있고. 힘만 모으면 숫자도 있고 하니까 힘만 모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시온 산으로 돌아가야 된다. 이런 생각들을 끌어 모으는 거예요.
한편 18세기말에 계몽운동은 유대인들이 서양의 세속문화에 동화되도록 유도했지만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나중에 이야기할 텐데, 거기에 동화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제정러시아의 유대인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 호베베 시온이라는 말은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 하면서 모임을 점점 결성하면서 유대 농민들 기술자 이런 사람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누가 가겠다고 하면 여비도 주고 서로 보내주는 거야. 서로 힘을 모아서.
이런 시오니즘에 대한 정치적 영향을 준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 데오도르 헤르츨 이사람 이름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켜서 지금 역사의 마지막 말세지 말에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를 1896년에 썼고요. 1896년 드레퓌스 사건을 목도한 직후에 쓴 거예요. 그리고 <오래된 새로운 땅> 이라는 책도 쓰고, 시오니즘을 촉진하는데 드레퓌스 사건의 발단과 경과를 지켜보던 헤르츨은 시온주의가 태동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드디어 1897년에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시온주의 회의를 공식적으로 개최해요.
그때에 장기간에 걸쳐서 나라를 세운다 했는데, 나라를 세우는 정도만 의논한 것이 아니라 보복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유럽 땅에서 카톨릭과 기독교인들에게 서러움 당한 것을 어떻게 철두철미하게 딱 10배씩 갚아주자. 10배씩. 우리가 받은 고난의 10배씩은 갚아야 된다. 그러면서 ‘의정서’를 만들게 됩니다. 의정서. 그게 이른바 ‘시온 의정서’예요. 혹은 ‘자이온프로토콜’ 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단지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밖으로 내놓는 것이고, 내면에는 나라를 만들뿐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까지 서럽게 만든 이방나라 가축들을 싹 진멸하고 세계 전체를 유대인이 어떻게 정복할 것이냐? 이런 꿈을 키우는 거예요.
그래서 연설문이라든지 안내책자라든지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하는데, 20세기를 들어와서 1905년도 러시아 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14년에 이미 팔레스타인에 9만 명 정도가 모여들었고, 이 가운데 1만3천 명 정도의 이주자들이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다시 주창되었고 그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는데, 이 시온주의자로서 ‘C.A.바이츠만’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되죠? 바이츠만 박사. 와이츠만이라고도 하고 바이츠만이라고도 해요.
그리고 엔소콜로라는 사람이 1917년 11월 2일에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 민족 국가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받는 이른바 '벨푸어 선언'이라고. 벨푸어 선언을 얻어내는데 주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바이츠만이 나중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거죠.
그리고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정착촌을 건설하고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고 그 다음에 문화생활과 히브리식 문화생활 레위기대로 하는 거죠? 그리고 히브리어를 교육을 해요. 히브리어를 계속 강화합니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는 유대인수가 공식적으로 10만 8천명에 달하게 되고 1933년쯤 되었을 때 23만 8천명으로 늘어납니다.
아랍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가 되는 것을 굉장히 우려하게 되는 거야. 따라서 시오니즘과 지원한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게 되고, 1929년과 1936년 1939년에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오니스트 히브리인들의 요구 둘 다 들어줘야 하는데, 이것을 허용하면서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괜히 그때 독일이 이른바 3B정책이라 해서 독일이 중동에다가 힘을 넓히는 꿈을 키우고 있었고, 영국은 3C정책이라 해서 역시 자기들도 이만큼 우리 거다 하면서 서로 충돌합니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사이에 자연히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서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했는데 답이 없고, 국제 연합에 일임하고 손을 떼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1947년 10월 27에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 및 유대국가로 두 나라가 함께 살도록 그렇게 조처를 내립니다. 각각 분할할 것을 제안합니다.
드디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까 우리가 말한 데오도르 헤르츨이 드레퓌스 사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시작한 것이 나라를 만든 거예요.
1948년 1949년에는 바로 이스라엘과 아랍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전쟁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정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더 많은 땅을 빼앗듯 차지하는 그때부터는 이스라엘은 건들면 더 커져요. 아랍이 가서 괜히 집적거리면 더 커지는 거야. 지금 이 시간까지.
다시 우리 이야기를 드레퓌스 사건으로 되돌아가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드레퓌스는 어떻게 됐느냐?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 이후 50년 지난 후에, 벨푸어 선언 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목표를 달성하게 됩니다.
그 후 20여년에 걸쳐서 세계에 흩어져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재정적 지원을 계속합니다. 유대인에게는 돈이 많으니까. 그냥 팍팍 밀어주고 팔레스타인에 가 있는 사람은 떵떵거리며 사는 거야. 아랍사람들은 거지같이 못살고 유대인들은 그렇게 똑똑하니까. 자기들이 얼마나 감격한 땅, 많이 걸린 사람은 2787년 만에 돌아온 것이고, 민족사로 볼 때.
어떤 사람은 1700년 만에 돌아온 그런 식으로 자기 조상이 언제 떠났었는데,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밟았다. 우리조상 누군가가 떠난 후로 몇 년 만에 우리가 이 땅을 밟았다. 후손된 우리가.
그 감격으로 그 땅에 흙이 없는 돌산에는 차로 흙을 실어 부어서 과일나무를 심는 거야.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땅을 사랑하는 정성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야. 우리가 가보면 순 돌짝 밭이고 황무지이고 빈들이고 광야고 사막이고 흙먼지고 그런 땅인데 그러나마나 자기들은 이게 최고예요. (2부에 계속.)
[정리]
◎ 알프레드 드레퓌스 : 1859.10.9 ~ 1935. 7. 12
◎ ‘역사와 성경’을 함께 볼 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보인다.
◎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
- 1894년 9월 : 프랑스 정보국이 독일 대사관에서 훔친 편지를 입수
- ‘스파이가 우리 내부에 있는 것 같다’
- 사건 초기부터 선입견을 가지고 조사 시작
- 당시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유대계 프랑스의 육군 장교로 참모본부에 포병대위로 근무중
- 1894년 12월 : 비밀 군사재판에서 만장일치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선고
- 비밀 군사재판에서 피고를 종신 유배형, 공개적 군적 박탈
- 아프리카 기아나 악마 섬에 유배
- ‘어떻게 이런 불법적인 재판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 반유대주의(유대인을 박해하고 차별하는 운동과 이념) 감정 고조
※ 유럽의 3대 자존심 : 영국, 프랑스, 독일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 프로이센의 지도하에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
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 일어난 전쟁,
. 1871년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의 대부분을 할양하였다
※ 민족주의 : 민족주의는 본래 매우 비합리주의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으로 민족에 기반
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는 민족의 정신 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
※ 민족주의 ⇒ 국수주의 ⇒ 배타주의
- 드레퓌스의 죄? 유대인이다!
- 1896. 11. 10 : <르마탱> 프랑스 일간지에 명세서 사본을 게재
- 군사법원에서 에스테라지(진범)에게 무죄 선고
※ 에밀 졸라
.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프랑스 소설가
. 대표작으로는 <나는 고발 한다>, <목로주점>이 있으면 드레퓌스 사건 때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 데오도르 헤르츨
. 헝가리 출신의 오스트리아 유대인 작가.
. 오스트리아 빈의 <신자유주의> 통신원으로 파리에 체제 중 드레퓌스 사건을 보고
유대인의 단결을 결심
. 시오니즘 운동의 보급을 도모하였고 제1회 시오니스트 대회를 주최하였다.(1897)
※ 시온 의정서
: 시온의정서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있었던 1차 시오니스트 모임의 회의록으로
유대인이 주도하여 세계단일정부를 구성하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실천방법을 적은 문서
※ C.A. 바이츠만
. 러시아 출생, ‘이스라엘 공화국 건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오니즘 운동의 지도적
정치가, 화학자.
. 제1차 세계대전하의 영국에서 폭약제조에 쓰이는 아세톤의 대량생산법을 개발함
. 영국 정계 사람들과도 친교를 맺어 ‘벨푸어선언’을 발표하게 하는데 성공
. 1949년 이스라엘 정부의 정식발족과 더불어 초대 대통령에 추대됨
-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
- 1917년 벨푸어 선언 : 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영국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정한 외무
장관 아서 벨푸어의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