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커스는 뛰어났고 또한 홈코트인 미네아폴리스 오디토리움에 딱 들어맞아있었다. 신장이 타팀에 비해 높았던 그들 레이커스는 (오늘날의) 기준 코트에 비해 몇 피트가 더 좁은 코트에서 열리는 경기에서 강력함을 보였다.
"그들은 마이칸, 미켈센 그리고 폴라드가 그들의 팔을 쫙 벌린채 좁은 코트에 나란히 서있으면, 아무도 뚫고 지나갈 수 없다고 말하곤 했죠."라고 시라큐스의 서비는 말했다. 팀동료 세이모어는 이에 더해 "그들 세명의 큰 빅 가이들은 모든 코트를 좁게 보이도록 했지요"라고 심지어 말했다.
최초의 백투백 챔피언이 탄생했습니다. 마이칸은 이로써 NBL에서의 2년을 포함해, 데뷔후 프로 통산 4시즌을 연속으로 우승하는 괴물스러움을 선보입니다. 이 당시 레이커스는 오늘날 전술의 기초가 되는 혁신적인 여러 전술을 들고 나오는데 전편에서도 말했지만, 가드 위주의 농구에서 센터 위주의 농구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것은 레이커스가 사용한 트리플타워에서도 알 수 있죠.
1950 NBA Finals: Minneapolis 4, Syracuse 2
- "Lakers: First Champs of Newly Formed NBA"
1949년 우승 이후로도 미네아폴리스 레이커스는 충분히 강하게 보였는데, 1950년 드래프트튼 그들을 거의 언터처블로 만들었다. (드래프트에서 그들이 얻은) 물건들은 텍사스 대학 출신의 5'9"(175cm) 가드 슬레터 '두기' 마틴, 리틀 햄라인 칼리지의 6'7"(201cm) 포워드 번 미켈센, 그리고 이후 NBA커리어 9시즌을 쌓은 미시건 대학의 6''1"(185cm) 가드 밥 '타이거' 해리슨이었다.
세명 모두 재빠르게 스타팅 라인업을 꿰찾다. 오늘날의 관점으로써 보자면 이상한 것이 그들의 등장으로 챔피언팀의 베테랑들 사이에서 불만(자리, 출장시간 등)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준수한 파워포워드 미켈센은 시즌 평균 11.6득점을 기록했고, 리바운드 능력이 출중했다. 마틴은 팀의 속공에 기여했고, 해리슨은 허슬 디펜스 가드였다.
레이커스는 특별했고, 이것은 코치 존 쿤드라와 회장이자 GM 막스 윈터의 기릴만한 공적 덕분이었다. 비록 얼마간의 행운이 작용했지만, 쿤드라는 처음으로 파워포워드와 스몰포워드 포지션 구분을 포함한 선구적인 현대적 팀의 설계자였다. 그는 그의 전략 핵심으로 라인업을 자주 교체했는데, 이후 많은 코치들이 이를 따라하게 되었다.

초대 다이너스티의 감독, 존 쿤드라
다른 위대한 코치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는 복잡하지 않은 공격을 펼쳤고, 조지 마이칸과 짐 폴라드의 로포스트 픽앤롤에 집중하는 것을 택했다. 수비수들이 만일 스위치한다면, 마이칸은 포워드를 상대하게 되고 폴라드는 공을 센터로 던져주고 그가 득점을 올리는 것을 지켜봤다. 만약 수비수들이 스위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재빠른 포워드(폴라드)에게 골대로 쉬운 드라이브 찬스를 내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건 간단하고 작은 플레이였죠"라고 쿤드라는 자랑스레 말했다. "하지만, 아주 성공적이었죠."
이런 로스터의 뎊스를 가진 레이커스조차도 1950년 정규시즌 최고성적을 내달리진 못했고, 그 자리는 51-13패로 시즌을 마친 시라큐스에게로 돌아갔다.

시라큐스의 슈퍼스타, 돌프 셰이즈
원인의 일부분은 리그의 확장이었다. NBL의 6개 잔존 팀들(시라큐스 내셔널스, 앤더슨 패커스, 트라이시티 블랙호크스, 덴버 너기츠, 쉬보이건 레드스킨스와 워털루 호크스)이 BAA로 흡수되어 NBA가 탄생하게 됐고, 17개팀의 리그는 균등하지 못하게 3개의 디비전으로 재편되었다.
시라큐스는 동부 디비전에 속했지만, 최근에 더해진 NBL팀들, 신생팀인 인디애나 올림피언스로 만들어진 새로운 서부 디비전 소속의 팀들과 그들의 경기 대부분을 치뤘다. 그 와중에 과거 서부 디비전이었던 중부 디비전에서 미네아폴리스와 로체스터는 모두 51-17패를 기록, 동률을 이뤘다. 두 팀 모두 33승 1패의 홈 성적을 가지고 이었는데, 로체스터에서 열린 타이브래이커 경기에서 마이칸이 35점을 기록한 레이커스가 78-76으로 이기면서 디비전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후, 레이커스는 포트웨인과 앤더슨 둘 다 각기 2경기씩만에 스윕하며 파이널에서 시라큐스를 만났다.
대충 봐도 마이칸은 내셔널스에게 난관이었다. 두 팀은 정규시즌 동안 격렬하게 싸웠었다. 시라큐싀 폴 셰이모어는 어떤 한 경기중에 자기 자신이 크게 격앙되어 있었음을 떠올리며 크게 웃었다. 이유는 '빅 조지'의 엘보우에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머리에 거위알만한 혹이 난 채, 플로어에 엉덩방아를 찍었고 그리고 심판은 그런 날 쳐다봤죠."라고 6'2"(188cm) 180파운드(82kg) 가드 셰이모어는 말했다. "나는 일어나서 곧장 조지를 뒤쫓으려했어요. 난 내가 그를 붙잡았다면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마이칸은 그가 가진 팔뚝처럼 위대했어요. 그는 종종 우리의 센터를 죽여놨죠. 그들을 쓰러뜨리며 파울을 이끌어내는 건 예사였죠. 그러고 나선 그들을 일으키곤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겨줬죠."
내셔널스는 파이널에서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졌다. 시리즈는 시라큐스 바로 외곽에 위치한 스테이트 페어 콜리세움에서 열렸다. 마이칸은 그의 평균득점보다 많은 37점을 기록하며 인사이드에서 파워를 내뿜었지만, 내셔널스는 그 때마다 응수했다. 경기 종료 1분여 전, 시라큐스는 66-64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미네아폴리스의 벤치선수이자 후일 NFL의 미네소타 바이킹스의 코치로서 명성을 얻게 되는 버드 그랜트가 동점을 이루는 훅슛을 성공시켰다.
시라큐스는 볼을 돌렸지만, 오픈 찬스가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바삐 흘러가는 도중, 플레이어 코치 알 서비가 알렉스 핸넘에게서 패스를 받아 골대로 향했다. "서비는 자신의 힘으로 경기를 결정지으려 결심했어요."라고 셰이모어는 말했다. "그는 인사이드로 들어갔고, 회심의 언더슛을 던졌어요. 하지만, 그걸 마이칸이 쳐냈지요." 서비는 후에 "마이칸이 파울을 했고, 콜이 불리지 않았다" 하고 주장했다.
미네아폴리스가 볼을 잡았고, 마지막 슛을 위해 코트를 넘어 달렸다. 미시건 대학 출신의 루키, 해리슨이 버저와 동시에 40-footer 슛을 성공시켰고, 레이커스에게 첫승의 영광을 가져왔다. "그는 미친듯이 폴짝폴짝 뛰었어요"라고 코치 쿤드라는 셰이모어와 고등학교 시절 같이 농구를 했던 해리슨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승리의 황홀함 속에, 레이커스는 락커룸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쿤드라는 "마이칸이 자기 스스로 '경기장 내의 연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라고 떠올렸다. 반면에, 마이칸은 '그 이야기가 새게 된 것은 쿤드라 때문이었다'고 매우 강경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이야기는 다음날 시라큐스 지역 신문들에 실렸다.
"다음 날 밤, 모든 팬들은 시가를 피워댔어요"라고 마이칸은 말했다.
"당신이 (그안에 있었다면)플로어 반대편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거에요"라고 쿤드라는 동의했다. "연기가 아주 가득 차 있었죠."
알레르기가 있든 없든, 마이칸은 2차전에서 32점을 넣는 위력을 보였지만 충분치는 않았다. 내셔널스는 91-85로 이기면서 시리즈를 각기 한 경기씩 나누며 동률을 이뤘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이커스가 좋았다. 내셔널스의 홈코트 어드밴티지는 날아갔고, 이제 미네소타로 돌아갈 차례였다.
오디토리움의 스케줄 충돌로 인하여, 레이커스는 (지난 시즌에 이어 또다시) 이웃한 세인트폴로 경기를 옮겨치러야 했다. 그렇게해서 경기가 열린 4월 14일과 16일에 레이커스의 프론트코트는 91-77, 77-69로 승부를 결정짓도록 이끌었다.
5차전은 '시가(cigar)' 연기로 가득찬 스테이트 페어 콜리세움으로 돌아왔다. 셰이모어는 12점을 득점하고, 폴라드를 집중적으로 마크하며 그를 6점으로 묶었다. "난 그에게 바짝 붙었고, 미들에서 막혀있던 마이칸과 같이 그는 아무데도 갈 수 없었어요."라고 셰이모어는 폴라드에 대해 말했다. 마이칸은 28점을 기록했지만, 시라큐스는 83-76으로 승리했다.
내셔널스는 그들의 싸움을 결정짓는 6차전을 위해 미네아폴리스로 향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레이커스는 홈인 미네아폴리스 오디토리움에서 플레이오프 단 한경기도 진 적이 없을만큼 언스토블했다. 우선은, 초창기 프로농구의 전형적인 규정미비 사례지만, 코트가 몇 피트 작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효과적이었죠."시라큐스의 돌프 셰이즈는 레이커스에 대해 말했다. "우린 항상 그들과의 경기가 힘이 들었어요. 만약 조지에게 더블 팀이 가면, 미켈센이 비어요. 그리고 폴라드가 드라이브인을 할 수 있었죠. 그리고 조지는 위대한 패서(passer)"
서비는 "그들은 '마이칸, 미켈센 그리고 폴라드가 좁은 코트에 그들의 팔을 쫙 벌린채로 나란히 서있으면, 아무도 뚫고 들어갈 수 없다'고 자주 얘기했죠." 라고 말했다. 셰이모어는 레이커스의 프론트코트에 맞서 열심히 플레이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웃었다. "그 세명의 빅 가이들은 모든 코트를 좁게 보이도록 했어요. 미켈센은 짐승이었구요"

트리플타워, 미켈센 - 마이칸 - 폴라드
내셔널스의 6차전 전략은 셰이모어를 폴라드에게 붙이는 거였고, 그는 그걸 해냈다. 하지만 마이칸은 계속 파괴적이었고, 40점을 기록했다. 결국, 경기는 연속되는 싸움판으로 흘러갔다. (경기에서)흥분의 대부분은 주먹싸움을 일으켰다. 셰이모어는 폴라드와 싸웠고, 가버는 마틴과 붙었고, 가버는 또 돈 칼슨과 엉켰다. 심판들은 서비를 3쿼터에서 퇴장시켰으며, 4쿼터에선 레이커스의 4명이 파울아웃을 당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레이커스는 110-95로 승리하며 그들의 2번째 챔피언십을 트로피 진열장에 장식했다. 마이칸은 시카고와 미네아폴리스에서 2번의 NBL 타이틀을 포함해, 4연속 챔피언팀의 센터가 되었다. 그러나, 두꺼운 안경과 곱슬머리의 아이(마이칸)는 이제 성장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홈구장 타겟센터 입구의 마이칸의 동상
옆의 사람은 미망인 팻 마이칸
피버's Comment
역사상 첫 연속우승팀이 된 레이커스입니다. 레이커스의 코치였던 쿤드라는 지금도 통용되는 혁신적인 농구 전술을 들고 나왔습니다.
이 시즌은 17개팀이 3개 디비전으로 나뉘어지는 불균형적인 시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각팀당 경기수도 제각각입니다.(ㅡㅡ;;) 위에서 보다시피 시라큐스는 64경기를 치뤘고, 레이커스는 68경기를 치뤘지요. 이것에 대해 각 팀들이 아무 불만이 없었는지 궁금쿤요.
놀랍게도 레이커스의 벤치 선수였던 선수가 NFL 미네소타 감독이 되었습니다. 참, 신기하고도 이해가 안 가는 군요. 농구선수출신인데 미식축구감독이 되다니...
그리고 이 시즌 파이널의 백미였던 '시가 연기로 가득찬 경기장'... 켁켁. 이거 완전 동네 피시방 죽돌이들 옆에서 담배연기마시면서 겜하는 미흡연자의 기분일 듯 합니다.
아직도 리그가 메이저스포츠로는 미흡하단 사실을 알 수 있죠. 매번 일정문제로 충돌이 되면 팅기는게 NBA 파이널입니다. ㅜㅜ
첫댓글 조지마이칸, 마이칸 드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