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전국 4-H 지도자 캠프회
일시 : 1964년 8월 11일 ~ 15일
장소 : 충남 공주농고 앞 금강 변
참석대상 : 4-H 자원지도자. 대학 4-H 연구회원, 농촌지도직공무원, 농촌관련기관 임직원.
참석인원. 200명
후원 : 농촌진흥청, 농업협동조합, 한미재단, 농약.비료.종묘회사, 언론기관.
1.대학 4-H 연구회의 태동
우리나라 4-H클럽이 뿌리내리기 시작할 즈음 지역에서 부원활동이나 지도자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활동을 이어가는 방법으로 학생회 4-H부서를 조직에 포함하거나, 서클 활동을 하게 되었다. 서울 대학교 농과대. 동국대학교 농과대, 서울 농업대학(서울시립대), 고려대학교 농과대, 서울여자대학교농촌사화학과, 건국대학교 농.축대, 경북대학교 농과대, 전남대학교 농과대 ,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다양한 형태의 산발적인 활동을 하였다. 1962년 농촌진흥청 4-H 중앙경진회에 참석한 8개 대학이 모여 연합회를 구성하였다. 이를 계기로 각 대학교에 확산을 위해 노력한 결과 숭실대학교, 중앙대학교, 청구대학교, 중앙농민학교(대학인정학교, 현 국민대학교에 흡수), 원광대학교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2.대학 4-H 연구회의 사업 태동
각 대학 4-H 연구회와 관련 활동을 살펴보는 정도에 머물렀고 경진회 참석 시에 활동 방법에 대한 모색 정도였다. 당시에는 지역단위 4-H활동이 주였기에 대학연구회 중심의 독자적인 사업이 미약했다. 대학4-H연구회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일선 4-H구락부와 연계할 수 있는 길이 중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시립대 경우는 시군, 시도경진대회 시에서 리크레이션, 연시회, 웅변, 과제 지도와 심사들을 지원하였다. 이것은 학교별 활동이지만 대학4-H연구회연합회로서는 다른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일선 4-H자원지도자와 대학4-H연구회원들이 함께 소통하는 방법이다. 여름철 바닷가나 강변, 산속에서 캠프활동을 하는 것이다.
3. 전국4-H지도자 캠프회 개최
1) 개최의 계기
1964년 굴욕적인 한일 회담 반대 학생 시위가 극도에 달했다. 특히 서울의 모든 대학들은 정부와 일본에 대한 규탄 시위로 정상적인 수업이 어려울 정도였다. 1964년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모든 대학은 휴교령으로 문을 닫았다. 나는 농고 졸업 후 2년간 마을에서 4-H를 조직.운영하다가 도박 퇴치 활동으로 부락민들과 집안어른들로 부터갈등을 빗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마을에서 추방당해 서울에서 머물며, 대학을 가게 된 이유다. 휴교령이 내렸는데 시골로 가기도 어색했다. 평소 대학연구회 사업으로 만남과 소통의 기회로 캠프회를 생각했었다. (사단법인) 한국4-H 중앙위원회 홍보부장이며, 한국4-H신문 편집장이시던 황인호 선생님은 나에게는 맨토였다. 상의한 결과 좋은 발상이라고 연구회 사업으로 적당하다는 말씀과 개최 방법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다. 휴교 중이라 대부분 친구들은 서울에 없었다. 그래서 매일 한국4-H중앙위원회(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1가 75번지, 농협중앙회내 별관)에 출석했다.
2) 결행
드디어 결심이 섰다. 휴교령이 내렸으니 이때가 시간이 많아 준비하기가 좋겠다는 생각에 이용선 회장(서울시립대, 제2대 전국4-H연구회연합회장)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경기도 광주군 가락동 과수원이라는 것만 안다. 몇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비포장 길로 하루 종일 걸려 만나서 동의를 구했다. 그길로 연락사무실은 한국4-H중앙위원회(이하 사무실)로 양해를 얻어냈다. 1대연합회장 김준기, 고려대 신경효,정인재, 서울여대 박종희 한정자,오원미, 서울시립대 이용선, 조용이가 주축이 되었다. 특히 신경효, 박종희 조동찬은 시간만 나면 사무실로 모였다. 나는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여 캠프회 준비를 했다. 계획서를 만들고 전국의 대학과 농촌지도소에 참가를 해달라는 협조공문을 발송하였다. 언론사에 홍보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명예대회장은 한국4-H중앙위원회 이진묵이사장으로 하고 , 대회장은 이용선 연합회장, 총무는 내가 맡았고, 준비,진행위원은 이용선, 박종희 신경효, 조동찬이 주로 했다.
당시는 전화가 별로 없었기에 모든 것은 우편에 의존하고 소통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기사화와 방송이 되기 시작하니 7월부터 관심들이 뜨거워 졌다. 문의도 많았다. 힘이 났다. 잘해내야 한다는 욕망으로 불탔다. 농촌진흥청은 영화차를 상주시키고 상영을 해주기로 약속했고 한미재단 농업 관련 종묘 농약사들도 도와주겠다는 반응이 있었다. 고려대 황민영 동문은 고향에 내려가 있는데 참석하겠다고 연구회원으로 처음 등록을 했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변동사항이 없느냐고 물어 왔다.
3) 호사다마 뒤 위기
참석하겠다고 열성적이던 지도자들이 연락이 왔다. 농촌지도소에서 대학생들이 개최하는 캠프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 상부에서 지시가 내렸다는 것이다. 깊이는 알 수 없지만 수소문해보니 연일 방송과 신문에 4-H지도자 캠프회가 열린다는데 누가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알아보라고 하였다 . 대학생들이 농촌의 지도자들과 하는 모임이라고 하니 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모양이다. 허탈했다. 진흥청에 연락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개최날짜를 목전에 두고 일어난 상황이다. 가지 ! 농촌진흥청장님을 만나서 항의하고 설득하자! 사무실에 모인 신경효, 박종희 조동찬 세 사람은 중앙청 농림부장관실 옆 진흥청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대학4H담당 김승재 선생(전남농촌진흥원장역임)이 계셨다. 정남규지도국장님 두 분께 자초지정을 묻고 항의 했다. 결론이 나지 않았다. 현신규 농촌진흥청장님을 만나겠다고 버텼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청장님을 뵈었다. 농촌진흥청에서 해야 할 일인데 농촌문제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행사를 막는 이유는 부당하다고 항의했다. 청장님은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 한참 후 내가 책임질테니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고 영화상영차와 직원들이 행사기간 행사장에 상주하라고 지시했다.
4) 풀리지 않았다.
다시 공문을 보냈다. 정상적으로 행사가 진행된다는 것과, 농촌진흥청장님이 잘하라고 허락하셨다고 전했다. 그러나 일선 농촌지도소에서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상부로 부터 끝내 지시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큰 물난리가 났다. 대홍수로 제방이 유실되고 다리가 끊어졌다. 금강변의 캠프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공주농고 운동장과 교실2칸을 학교의 배려로 사용하기로 했다. 캠프사이드에 전국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솥을 걸고 식당을 준비했다. 식사는 서울여자대학 회원들이 맡았다. 박종희 동문이 총지휘를 하고 한정자 오원미 등 회원들이 카레라이스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홍수를 뚫고 모인 회원들이 쌀들을 짊어지고 오시거나 먹을거리 부식들을 협찬해 주었다. 농업 관련 단체들도 협조해주기로 했던 것이 결국 모두 불발되었다. 농촌진흥청이 영화상영차 지원과 한미재단 현금 2000원 공주농협에서 수박 열통의 지원이 전부였다. 참석한 회원들의 회비로 어렵게 행사를 치렀다. 중앙대학교에서는 허정길 동문만 참석했다. 64년에 4-H반을 신설운영하면서 이재오 허정길 두명이 열성적이고 참석하겠다고 신청했음에도 한명만 참석했길레 재오(이재오국회의원)는 왜 안와라고 했더니, 한일회담반대 시위에 앞장서서 심하게 하다가 수배되어 숨어 다닌다는 것이다. 찻길이 끊어져서 돌고 돌아 며칠되어 참석하기도 했다. 뒤늦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당 농촌지도소의 참석을 못하게 함에도 마지막 날 캠프회 종료 태극기 하강식에 겨우 도착한지도자도 있었다. 결국 울음바다가 되었다. 금강물에 지금도 그때의 감정과 눈물이 실려 내려가리라. 결국 캠프회는 정부의 방해를 끝내 풀지 못하고 마감했다.
4. 캠프회의 미숙한 진행과 갈등의 봉합
요사이 같이 캠프회를 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다. 수해로 인해 더욱 힘들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설과 준비의 부족으로 지도자들의 질책을 받았다. 정부의 방해가 순조로운 진행과 준비를 잘 할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진행 요원들은 우리들의 진정성을 열심히 설명했다. 지도자들은 차츰 이해를 하고 스스로 대학회원들과 프로그램을 논의하여 진행을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캠프진행 프로그램을 보완하고 지도자들이 솔선해서 분과토의와 행사를 함께 하기 시작했다. 결국 갈등은 신뢰로 한 몸이 되어 대학생들이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하여 고맙다고 했다. 이것이 지도자와 상호 교류의 기회의 단초가 되었다. 대학4-H연합회 역시 이것이 시작으로 세미나 심포지움 등 행사에 불을 지폈다. 활동의 영역을 넓히는 기회도 되었다. 대학 4-H연구회의 발전과 회원들의 결속의 작은 씨앗이 싹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