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미국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신(新)보수주의(Neoconservative)’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보수주의는, 좀 단순화하면 미국이 대외관계에서 너무 일방적이고 카우보이처럼 구는 것 아니냐”는 국제사회의 우려에 대해 오히려 “카우보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2001년 1월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특히 그해 가을 9·11 테러가 터진 뒤 신보수주의는 미국 대외정책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고(思考)의 틀이 됐다. 이같은 신보수주의의 주창자 가운데 한사람이 카네기 재단의 로버트 케이건 수석연구원이다. 케이건은 신보수주의자들의 복음서 같은 ‘주간 스탠더드(The Weekly Standard)’지(誌)의 발행인인 윌리엄 크리스톨과 함께 지난 95년부터 “미국의 헤게모니야말로 세계평화와 국제질서를 지키는 유일한 방어선”이라고 주장해 온 인물이다. 신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이념가인 것이다.
그는 작년 여름 ‘힘과 나약함(Power and Weakness)’이라는 논문을 발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케이건은 이 글에서 더이상 미국과 유럽은 세계 문제에 관해 공통의 견해를 갖고 있지 않으며, 결국 미국이 세계 질서 유지라는 책무를 혼자 떠맡을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미국이 더이상 ‘서방세계’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것이라는, 얼핏 보기에 노골적인 ‘미·유럽 결별선언’이었다.
이 글을 보완·확대한 것이 올해초에 나온 ‘미국 vs 유럽-갈등에 관한 보고서(원제: Of Paradise and Power)’라는 책이다. 이 책은 출발부터 도발적이다. 저자는 최근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불거진 유럽과 미국의 갈등에 대해 “이제 유럽과 미국이 서로 세계관이 같다거나 심지어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식으로 가장하는 행위는 중단할 때가 됐다”고 말한다.
그는 국제문제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힘의 차이(power gap)’라고 역설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자극적인 비유 중 대표적인 것이 ‘칼을 든 사람과 총을 든 사람이 곰과 마주쳤을 때의 상황’이다. 무기라고는 칼 한자루 밖에 없는 사람은 숲 속에서 곰을 만나면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납작 엎드린 채 곰이 덤벼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위험부담이 더 적지만, 거꾸로 총을 가진 사람은 곰을 제거해 위험을 없앤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국은 총을 가진 사람이고, 유럽은 칼을 가진 사람이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이런 논리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힘의 불균형 때문에 미국과 유럽은 더이상 공동의 ‘전략문화(strategic culture)’를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유럽연합(EU)의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루셀에 거주하면서 미국 워싱턴포스트지(紙)와 ‘주간 스탠더드’등에 정기 기고하고 있는 케이건은 미국적 시각에서 유럽의 허점을 맹공한다. 케이건 분석의 특징은 ‘선과 악’같은 이분법이다. 그는 유럽은 냉전 후 세계 질서를 국제법규와 비(非)강제적 수단에 의해 유지하려는 ‘칸트(Kant)의 영구평화’를 추구하는 반면, 미국은 점점 더 군사적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홉스(Hobbes)적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케이건은 유럽이 ‘EU통합’같은 평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낙원’을 밖에서 미국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라며, 유럽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제기하고 있다. 유럽을 향한 거의 경멸에 가까운 저자의 또 다른 비유 하나를 보자. 술집에 들어선 무법자는 술집 주인은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술집주인은 강제로 무법자에게 힘을 행사하려는 보안관이 더 큰 위협으로 여겨지곤 한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의 반대는 전형적인 술집주인식 태도이고, 미국은 보안관이다.
저자는 유럽과 미국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이고 그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이 화제가 되는 것은 그 주장의 대담하고 노골적이어서가 아니라, 갈수록 미국 대외정책에 대해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신보수주의의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딕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울포위츠 국방 부(副)장관 등이 신보수주의를 대표하는 행정부내 고위인사들이다. 체니 부통령은 매주 월요일 ‘주간 스탠더드’가 나오면 30부를 따로 주문해 정부 관계자들에게 돌릴 정도다. 올해 초 이 책의 영어판이 나오자 솔라나 EU집행위원장이 유럽의 모든 대사들에게 필독을 요구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