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와 김영한 .
해방후 길상사는 원래 "청암장"이라는 고급 한식당이였다.
김영환은 청암장이라는 식당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간판으로 제3공화국 시절 밀실요정이 되어
군사독재시절 정치인들의 요정이였다.
대원각 소유주가 된 김영한(1915~1999)은 16세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 기명(妓名)을 받았다.
그녀는 월북시인 백석을 너무나 사랑했던 기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끔찍히도 사랑했으며
자야(子夜)라는 아명도 지어주었다.
한국전쟁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한 김영한은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그녀는 백석을 잊기위해
혼자서 대원각 경영에 매달렸다.
해방후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 낸 여걸이였지만 백석이 죽도록 그리워지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 댓다고 한다. 그래서 폐암이 발병하고 죽음이 임박하자.
자신이 운영하던 대원각 요정을 절에 기부했고. 또 갖고있던 현금 2억원은 백석 문학상 기금으로 기부한다.
그리고 내사랑 백석(문학동네).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창작과 비평)을 출간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얀게 쌓인 지금의 길상사 좌측 언덕 길상헌 뒤 숲에 뿌려졌다.
<설법전.소강당>
<범종각>
김영한씨와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란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김씨는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천여평(당시 시가 1천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근 8년 여만에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한 많았던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었던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1999년 11월14일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파란 만장했던 일생을 마쳤다,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길상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분원을 두고 있고, 헝가리 원광사, 인도 천축선원, 호주 정혜사를
자매도량으로 삼고 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창건 후 회주(법회를 이끄는 어른스님)를 맡아 정기법회에서 법문을 들려줬으나,
2003년 12월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그후에도 길상사에서 열리는 대중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해왔고,
생의 마지막 시간도 길상사에서 보냈다.
<일주문> 일주문 건축은 아니지만 일주문 역활을 하는 정문 루각이다.
<길상헌>은 단아한 건물이라 고풍스럽다.>
김영한씨가 마지막 밤을 보냈던 길상헌.
“나의 이웃이 바로 부처이며 예수님이며 천주님입니다.
이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가지들이지요.
불교를 배우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것이며 자기를 배우는 것은 자신을 텅 비우는 일이에요.
그래야 모든 사물과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주옥같은 어록과 함께 ‘무소유’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됐던 법정스님.
그가 입적한 지 어느덧 수년이 지났다.
법정스님 추모법회가 서울 성북구 길상사 극락전에서 봉행됐다.
법회는 먼저 차를 올리고 꽃을 바치는 헌다와 헌화를 시작해 5분 길이의 추모영상으로 이어졌다.
영상을 보던 신도들은 곳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스님이 그립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떠나라는 그분의 ‘무소유’ 가르침이 가장 그립고
그것을 가슴에 담아두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범인들에게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모든 것을 헛되이 하지 말고 늘 소유할 수 있는 것도 놓으라는 가르침도 아직은 마음에 남아있다”
법정스님은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 본분을 잃지 않았고 그의 산문집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삶으로 보여주신분이다.
그는 그 흔한 사찰 주지 한번 지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932년 10월 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했다.
이어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당대의 선승인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의 저서인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 된 후 지금까지 34년 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로 손꼽힌다.
또한 그는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다.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에게 맡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고 이에 대한 회답으로
이듬에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이후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이날 추모법회에서 자승스님은 “법정스님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맑고 향기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출가자에게는 수행자의 본분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재가자에게는 청정한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다”고 추모사를 발표했다.
한편 최근 길상사 주지와 맑고 향기롭게 이사장직을 맡았던 덕현스님의 갑작스러운 자진 사퇴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려 있는 가운데 새 주지로 덕운스님이 제청됐다.
덕운스님은 “법정스님 입적 1주기 추모식을 앞두고 심려를 끼친 데 대해
죄송하고 은사 스님께 깊이 참회한다”며 “앞으로 이 길상사가 은사스님의 정신에 입각해
맑고 향기로운 도랑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수행정진 하겠다”고 인사말을 밝혔다.
법정스님은 지난해 3월 11일 오후 1시 51분께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하셨다.
<아버지 같은 당신이 그립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사시다 가신 법정스님.
법정스님의 영정이 모셔진 <진영각> 옆 담 및에는 스님의 유골이
순천 송광사와 이곳 두 곳에 모셔졌다.
<線佛:선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