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추억을 잊으려고 자신의 과거를 지우는 일...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한 나라(國)의 차원에서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애써 왜곡한 나라가 바로 일본입
니다.
이 글의 제목을 보시고 무언가 좀 로맨틱한 내용을 상상하셨겠지만, 이 글은..
멸망하려는 백제를 구하기 위해 왜 일본이 그 옛날에 거국적으로 대군을 일으켜
백제에 파병하였나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천황가의 혈통
그리고 역사 왜곡의 이면을 살펴본 글입니다.
오래전부터 제 나름대로 이 문제에 관심이 깊어 틈틈이 읽어둔 책들을 꺼내어
다시 읽어보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347년전인 서기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갑니다. 의자왕의 4촌 동생인 복신(福信)은 지금의 충남 한산인 주유성(周留
城)을 거점으로하여, 일본으로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夫餘豊)을 모셔와
왕으로 추대하고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합니다.
663년.. 드디어 당대 동아시아 최대의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백강(白江 혹은 白
村江)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문무왕의 신라군과 유인원(劉仁源)의 당군(唐軍)이
주유성을 포위하는 한편 유인궤(劉仁軌)의 당 수군(水軍)은 지금의 금강 하구 혹
은 동진강 하구로 비정되는 백강구(白江口)에 포진합니다.
이에 왜국(倭國)은 전함 1,000척과 27,000명의 수군을 백강구로 보내어 당의 수
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예상외의 참패로... 백제의 부흥운동은 끝나고 고구려마저
내분이 일어나 5년 후인 668년에 당에게 멸망하게 되니 삼국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맙니다.
그런데 왜국(倭國)은 왜 백제를 도우려 했을까요? 당시의 국제상황이나 고대국가
의 틀을 이루어 가던 왜국 야마토(大和) 조정(朝廷)의 국력으로 볼때 전함 1,000척
과 27,000명의 수군 파병은 그야말로 국운을 건 모험임에도 불구하고 왜 전력을 다
하여 백제를 도우려 했을까요?
당시의 야마토 조정은 여왕인 제명(齊明)천황과 그 아들 천지(天智)천황이 지배
하고 있었습니다. 제명(齊明)천황은 파병을 결정하고 아들 천지(天智)와 함께 대
군을 백제의 백강구(白江口)로 파병합니다. 비록 천추의 한을 남긴 실패로 끝났지
만.....
제명(齊明)천황과 천지(天智)천황은 누구일까요? 이해를 위해 잠시 그들의 족보
를 좀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475년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자 아들 문주
를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대신과 함께 웅진으로 천도시킵니다. 이후 목협만치에 대
한 기록은 사라지고, 그 대신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소아만치(蘇我
滿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가족 계보를 보면 1대 소아만치(蘇我滿致) 이후 2대 소아한자(蘇我韓子), 3대
소아고려(蘇我高麗), 4대 소아도목(蘇我稻目), 5대 소아마자(蘇我馬子), 6대 소아하
이(蘇我蝦夷).. 그리고 7대 소아입록(蘇我入鹿)이 645년 친 신라세력에게 살해될 때
까지(대화개신, 大化改新) 150년이 넘도록 이들은 백제의 불교와 문화를 왜(倭)에
전해주며 실권자로서 친백제계인 조정을 지배하였습니다.
백제의 목협만치를 야마토(大和)의 소아만치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지만,
우선 아들과 손자의 이름인 韓子, 高麗만 보아도 범상치가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아도목(蘇我稻目)은 자신의 두 딸을 29대 천황인 흠명(欽明)천황과 결혼시켜 용
명(用明)천황, 숭준(崇峻)천황, 추고(推古)천황등을 낳게 합니다.
34대 서명(舒明)천황도 역시 백제계로서 백제궁, 백제대사(大寺)를 지었으며 백제
의자왕의 누이라는 설이 있는 그의 부인이 35대 황극(皇極)천황이 되었습니다. 황극
(皇極)의 동생인 효덕(孝德)과 황극(皇極)의 아들인 중대형(中大兄)황자에 의한 쿠데
타로 황극(皇極)천황이 물러나고 36대 효덕(孝德)천황이 등극했으며, 곧이어 중대형
(中大兄)황자는 다시 효덕(孝德)천황을 밀어내고 서기 655년에 어머니(황극천황)를
다시 37대 제명(齊明)천황으로 등극시켰습니다.
다시 663년 백강의 전투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백천간두에 처한 백제 부흥군의 마지
막 결전에, 앞서 말씀드린대로 제명(齊明)천황은 전함을 징발하고 군대를 동원하고 훈
련하여 대대적인 파병을 결행합니다.
이렇듯 백제와 야마토의 황실은 인척 사이로 얽혀 있었기에, 잘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백제의 마지막 전투를 야마토 조정은 전력투구하여 돕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외의 참패로 끝나게 되었고,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이때 야
마토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아, 주유성(周留城)이 함락되었으니 오늘로써 백제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이제 우
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어찌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야마토 조정이 있던 나라(奈良)현 아스카 지방은 당시 인구의 8~9할이 그들이 말하
는 소위 한반도에서의 도래인(渡來人)이었고 그 숫자는 15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엄
청난 숫자입니다. 5~7세기 일본의 기내(畿內)지방은 백제의 분국이라고 하여도 과히 틀
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하여간, 백강의 전투에서 패한 왜국은 백제의 몰락과 함께 상당한 위협을 느끼게 됩
니다. 그리하여 큐슈에서 세토내해(瀨戶內海)를 거쳐 기내지방에 이르는 길목의 10여
곳에 성(城)을 쌓고, 수도(首都)도 나라현 아스카에서 시가(滋賀)현 비와코(琵琶湖) 호
수변의 오오츠(大津)로 내륙 깊숙이 천도합니다.
제명(齊明)천황 사후 그 아들 중대형(中大兄)황자는 38대 천지(天智) 천황으로 등극
하고, 670년에 천지천황은 국호마저 일본(日本)으로 바꿉니다. 40대 천무천황은 역사서
의 편찬을 명하여 712년에 고사기(古事記)가 720년에는 일본서기(日本書紀)가 편찬되는
것입니다. 그 역사서엔 소설을 방불케하는 꾸며낸 이야기들이 삽입됩니다.
그러나... 한 개인에 있어서도 과거를 완벽하게 왜곡하기란 어려운 것... 수많은 개
인의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킨 나라의 역사서를 후대에 완벽하게 왜곡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합니다. 그 역사서의 곳곳에 남아있는 조작의 흔적들이 이미 세계와 일본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 모두 알려져 있습니다.
긴 세월이 흘러 변하기는 해도 여간해서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 그 나라의 언
어(言語)와 지명(地名)이라고 합니다. 일본 역사에 대한 이러한 공부는 동시에 우리의
역사에 대한 공부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계속)
* 읽기 편하도록 일본의 인명(人名)을 우리 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참고 인용 문헌
* <일본 속의 한국 문화> 김 달수, 조선일보사, 1986
* <일본인의 조상은 고대 조선의 도래인이었다> 최 봉렬, 일주문, 1989
* <비류 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 김 성호, 지문사, 1982
* <노래하는 역사 1,2> 이 영희, 조선일보사, 1994
* <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 김 인배 김 문배, 빛남, 1991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김 인배 김 문배, 우리문학사, 1993
* <역사 스페셜 3> KBS, 효형출판, 2001
* <백제의 大和倭와 日本化 과정> 최 재석, 일지사, 1991
* <백제와 大和日本의 기원> 홍 원탁, 구다라 인터내셔널, 1993
*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 천황>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 지식여행, 2002
* <천무천황의 비밀>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고려원, 1990
*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홍 윤기, 효형출판, 2000
* <일본천황 도래사> 와타나베 미츠토시(渡邊光敏), 지문사, 1995
첫댓글 이영희 교수의 만엽집 해설책 빌려간 내친구는 왜 돌려주지 않울까요????일본에서 해석불가능한 시를 (만엽집속에서) 우리의 이두문자를 이용(?)하여 해석하면 쉽게풀리는 연구 논문,,,, 미카엘형제님 , 대단하십니다/감사합니다
이영희 교수의 책을 읽으셨군요. 책을 빌려주면, 갑자기 자신이 필요로할 때 딱 찾아볼 수가 없어서 제일 나빠요! 그래서 저도 책을 빌려주는 일을 좀 싫어(?)합니다.^^ 이영희 교수는 그 문제에 대해 <또 하나의 만엽집><노래하는 역사1,2권>을 냈지요.다시 읽으니 또 새롭습니다. 만엽집에 대해서도 저도 또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