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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국립국어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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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동안 서방 제국의 식민정책으로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언어 다종성이 무너지거나 다양한 언어 변이형이 획일화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는 뒤로 물리쳐 둔 채, 언어 내부의 구조 분석 쪽으로만 몰입해 왔다. 인류 문화와 역사의 유일한 증거이자 가치 있는 자산인 다양한 언어나 방언이 소멸되는 것은 인류의 지적 문명의 재앙이자 다가올 불행을 예고하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이나 부족의 언어를 조직적으로 멸시하고 짓밟는 언어 식민지화에 대한 일말의 문제점도 의식하지 않았던 언어학자들은 이제 지난 시대를 한번쯤 되돌아 보아야 한다. 모든 부족이나 민족의 언어나 방언은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언어나 방언에 해당하는 부족이나 민족 삶의 지혜와 생존 지략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감정과 정서가 반영되어 있으며, 그들의 언어와 관련해서 사회적 결속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값진 인류 자산이다. 이 글은 피지배 민족 혹은 부족의 언어나 방언이 겪어야 했던 식민 압제와 그와 파생된 우여곡절을 되돌아보는 일종의 반성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언어나 방언이 사멸한다는 것은 인문사회학자들의 양식이 될 귀중한 지적 재산의 상실을 의미하며, 결국 그 언어가 나타내는 문화 체계의 상실로 귀결되는 인류 문화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한국어나 조선어도 한낱 일개 방언으로 전락하거나 소멸되지 않을까? 이들 언어로 구성되는 우리의 문화도 영어에 떠밀려 일개 변방 잡종 문화로 몰락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어떤 공동체의 언어가 다른 공동체의 언어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이론화한다는 것은 곧이어 식민 언어 지배의 시도를 정당화하는 데 가담할 수 있게 된다. 조선조 오랜 시간 동안 한문과 한자가 우리의 말과 글을 지배해 왔고 또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에 일본어가 우리의 말과 글을 지배했으며, 그 이후 영어가 우리의 말과 글 속에 세포분열을 하듯 우리말과 글을 포식(捕食)하고 있다. 최근 영어마을을 곳곳에 설립하는 현상은 내면적 식민주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낸 모습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어의 세계화 국면은 60년 전 일제의 조선과 대만의 언어 식민지화나 서구 유럽의 여러 나라가 콩고, 알제리, 차드를 언어적으로 식민화했던 상황보다 훨씬 내면적으로 정교하고 폭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필리핀에서 소수가 사용하는 영어는 타갈로그어를 비롯한 3개의 주요 원주민의 언어를 지배하고 있으며, 튀니지에서도 프랑스어가 아랍어, 몰타어, 이탈리아어를 지배하고 있다. 루이 쟝 칼베(2004)는 최대 중심 언어인 영어에 종속된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비롯한 주변 언어들이 언제, 어떻게 잡아먹힐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한 언어의 내부로 들여다 보자. 근대 국가주의 이념과 결합하면서 피식민국가를 호령하는 국어가 슈퍼 중심 언어로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변방의 언어인 방언은 주변 언어로 인식하게 되었다. 주변 언어인 방언은 국어를 견고하게 하고 국어의 위엄을 갖출 수 있도록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방언을 타자화하여 희극화의 대상으로 또는 열등화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쩌면 국어와 방언의 차이는 언어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영역에 속하는 것일지 모른다. 언어학자들이 모호하거나 그릇 규정했던 ‘방언’을 식민 지배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말’로 그 가치를 폄훼하고 훼손시켜 왔다. 표준어는 잘 분화되고 규범화된 형태이고 방언은 가치가 떨어지는 다양한 하위 변이형을 가진 것으로 잘못 이해해 왔다. 규범어로서의 ‘표준어’는 정치·문화 영역에서 우위를 점유하여 동일한 위상을 가졌던 방언을 포식(捕食)하면서 발전했다. 언어와 언어가 지배 종속관계로 변환되는 언어 식민주의화라는 현상과 더불어 개별 언어 내부에서도 국어와 방언, 또는 표준어와 방언, 중심 언어와 주변 언어가 상호 지배 또는 포식의 관계로 변화했지만 대부분 언어학자들은 팔짱 끼고 관망만 해왔다. 언어 식민주의와 언어 포식은 결국 언어나 방언의 다양성을 깨뜨리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국어와 방언이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도 힘이 들지만 언어 식민주의와 언어의 포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국어와 방언이라는 이분법적인 명칭을 버려야 한다. ‘방언’은 억압을 받은 하나의 언어이며, ‘국어’는 정치적으로 성공한 하나의 방언일 뿐이다. 표준어와 방언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언어학이 공인되지 않은 제국주의를 수호하는 수단으로 탈 없이 그 들러리를 해낼 수는 없다. 벨기에 가수 쥘 보카른느(Jules Beaucarne)가 “만일 루이 14세가 나뮈르(Namur)에서 거주하였다면 프랑스 전역에서 나뮈르의 반론어가 표준어가 되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왕국의 언어인 시엥 방언이 파리의 표준어로 발전하였다. 프랑스어 그것은 으뜸가는 언어의 지위를 인정받은 하나의 성공한 방언이다.”라고 한 말은 방언 간의 지배 종속 관계를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지난날 우리는 삶의 편의주의를 위해 모든 것을 표준화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편리함이라는 것을 손에 쥐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표준의 것들은 인간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소멸의 운명을 맞이해야만 했다. 종의 다양성의 건너편에 있는 이 표준화라는 함정 때문에 이 지구에 존재하는 생태들의 종의 다양성이나 인류 문화의 종의 다원성이 무너지는 불균형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본이 지배하는 중심부는 거대하게 발전되었지만 그 외의 변두리는 차츰 생명력을 잃고 퇴락하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제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관점으로, 표준화에서 다원화의 관점으로, 자본 중심에서 변두리로 우리의 눈길을 되돌려야 한다. 지난 세기 수수방관하여 잃어버린 인간 삶의 유산을 다시 복원하고 이를 불러 모아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죽어 가는 강을 살려 내고 사라진 새와 물고기가 다시 되돌아오도록 노력해야 하듯이, 소수의 언어인 변두리 방언의 미학이 우리의 일상 속에 소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식민 지배 아래에서 일제와 함께 민족 언어학자들 다수가 합의하여 만든 ‘표준어’는 한동안 우리의 근대화를 위한 여명의 이정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나라 안의 다양한 방언을 포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와 신비로 감싼 표준어의 절대 권위와 어떤 누구의 비판도 허락하지 않는 학계의 종속적 도제주의를 흔들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긴장 관계로 버텨온 ‘표준어’가 ‘문화어’를 표준어의 사생아 또는 인위적으로 왜곡한 표준어의 변종쯤으로 인식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표준어는 외세의 언어에 찌들고 오염되었기 때문에 주체적인 민족어의 수치로 받아들인다면 언어관의 차이에서 오는 남과 북의 긴장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남북 간의 언어 이질화가 오히려 공통 민족 언어의 풍부화로 해석할 가능성은 없는가? 남북의 언어를 하나로 담아 낼 수 있는 방안은 과연 없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방언의 풍부한 미학을 통합적 개념으로 서술해야 한다. 속도와 편리함의 고속 성장의 이면에 우리의 언어와 문화, 생물의 다양성이 훼손될 위험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인류 미래의 운명이 걸린 생태, 문화, 언어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절멸 위기에 있는 그들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복원하기 위해 함께 행동한다면 21세기는 진정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도 1992년 ‘생물 다양성 협약’이 체결되고 2001년 세계 문화 다양성 선언을 채택하여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 생태주의자들은 종의 다양성을 옹호하고 있는가? 진화라고 하는 발전과 변화는 오로지 종의 다양성의 기반 위에서만이 가능하듯이 언어의 변화도 언어의 다양함으로 창조해 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다양성의 대표 단수만 옹호하는 일은 언어의 다양성 자체를 무너뜨리고 진화에 역행하는 일이다. 근대화의 이정표였던 표준의 지평을 더 넓히면서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언어 규범을 멸시하는 행위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내팽개쳐진 언어문화 유산에 대한 안타까움, 이제 사라져 버리면 다시는 재현하지 못할 현실에 있는 언어와 방언의 소중함을 호소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거창한 학문적 담론이 아닌 담담한 일상의 느낌을 담아낸 목소리이며, 내 자신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반성문임을 전제해 둔다. 그만큼 앞으로 격렬한 논쟁의 담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 소재가 많은 것이지만 한 개인적 사유의 성과라는 점을 존중해 주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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