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두곡을 우리나라 최고라고 하는 레코드 회사에 직접 녹음을 하여 소위 납품을 하였지요. 여기에서 제가 느낀 것은 이 두 분의 선택의 예지입니다. 두 사람은 정확히 히트를 칠 예감을 하고 이 두곡을 한곡씩 선택했습니다. 그 들은 음악인 이 아니었지만 어떠한 곡이 대중에게 다가 갈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그 어떠한 끼가 있었던 겁니다.
제 곡을 선택한 이 두 분은 물론 이 곡들이 히트를 치는 바람에 돈을 벌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그 후가 문제였습니다. 저는 다른 작곡가들에게 왕따를 당 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 대중가요계는 '오아시스'와 '지구 레코드' 두 회사가 거의 모든 가수들을 전속시키면서 우리나라 대중음악계를 독식을 하던 시절 이였습니다. 레코드 사장에게 잘 보여야 히트 작곡가가 되었는데 저처럼 혼자 떠도는 떠돌이 작곡가가 나타나 한곡에 큰 금액을 받고 타이틀곡 까지 차지 하니 다른 작곡가들의 입장에서는 좋지 않게 보였을 겁니다. 저는 지금 도 대중가요 작곡가들하고 교감대가 없습니다. 그때 나 지금이나 사귀거나 또는 만나는 작곡가들이 없습니다.
유일한 작곡가는 최종혁씨(사진) 라고 윤시내의 “열애”를 쓴 분인데 유일하게 제가 친하게 지내던 분이였습니다. 제가 한참 “슬픈 노래는 싫어요”로 주가를 올릴 때 만나 음악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가요계의 병폐라든가 우리가 나아 갈길 을 열변을 토하며 이야기 하던 분인데 집이 없던 둘은 뜻이 맞아 둘 다 결혼을 하여 아이들이 있었지만 두 가족이 집 하나를 전세 내어 합치기로 했지요. 그 당시 화곡동에 작은 사글세 방 을 살던 때라 둘이 합쳐 독채 전세를 얻어 큰방 하나는 제가 쓰고 작은 방 두개는 최종혁씨 가 쓰기로 하고 두 집안의 동거가 시작 되였지요. 우리 둘은 유일하게 신인 가수들을 학원을 차려 연습을 시키는 시스템이 아니고 레코드 회사에서 청탁을 받아 작곡을 해주는 그런 방식의 작곡가 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분은 밤에 피아노를 치느라 카페 에 나가 밤늦게나 집에 오던 생활 패턴이고 저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청소 하고 운동 하고 그 다음 작곡을 하는 내 나름대로의 패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늦은 시간에 퇴근(주로 새벽2시)하여 늦게 일어나(주로 오후3시) 꾸물대다가 또 밤일을 나가는 스타일 이였는데 제가 “밤차”를 히트시키고 “제비처럼”을 히트시키자 상황이 달라졌지요. 그 분의 와이프가 그를 가만히 둘 수 가 없었겠지요. 매일 옆방에 있는 나를 보라고 다구 치니까 이 분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지요.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경쟁상대가 아니냐. 히트곡으로 음악적인 진검 승부를 하자고 말입니다. 그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 했을 겁니다. “그래 이대로 유승엽 에게 굴 할 수 는 없다” 라 구요. 그는 분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집에 사는 두 작곡가가 하나는 히트를 치고 하나는 그야말로 빌빌대고 있으니 어디 살맛이 났겠습니까? 드디어 그가 일을 냈지요.
그때 최종혁씨 하고는 소속만 다르지 회사는 같은 '서라벌 레코드' 라는 회사에서 활동을 할 때 였습니다. 새로 생긴 회사인 관계로 많은 신인 가수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최백호 라는 가수를 그가 담당하게 되었지요. 부산에서 올라온 아주 촌티가나는 스타일 이였는데 최종혁씨 는 그를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최백호의 “가을엔 떠나지 말아 요” 라는 명곡을 주어 드디어 신인가수도 키우고 작곡가로서 이름을 등재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런 노래 스타일을 쓰는 사람이 없었지요. 나는 그와 매일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 는 퇴폐한 이 가요계를 정화를 해야 할 사람은 우리들 밖에는 없다 라 는 식이였죠.
그 뒤에 바로 윤시내 의 “열애”를 발표하여 우리나라 가요계에 큰 반응을 이루어냅니다. 화곡동에 살던 두 작곡가가 큰일을 냈던 겁니다. 지금도 옛날을 돌아보면 아주 양심적으로 작곡을 한 둘이였습니다. 어떠한 가십에도 끼어들지 않고 그야말로 학처럼 가요계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을 더욱더 고립 시키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많은 작곡가들이 먹이 사슬처럼 고리를 만들어 가수들을 키우고 심지어는 그 중심에서 벗어나면 그야말로 왕따를 당하던 시절 이였으니까요. 예를 들어 진미령 의 “하얀 민들레”를 제가 취입을 해서 큰 금액을 받고 타이틀 곡 으로 선정 되었을 때 그 회사에 있는 작곡가들은 그 가수를 위해서 알게 모르게 작곡을 해주고 연습을 시켜 타이틀을 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몰랐었는데, 막상 음반이 나오니 많은 동료 작곡가들의 반발이 있었지요.
단 한곡 “하얀 민들레” 로 타이틀을 가져갔기 때문이지요. 제 입장에서는 선의의 경쟁이려니 생각했지만은 막상 다른 작곡가의 입장에서는 저의 이런 돌발적으로 녹음을 해 와서 사장과 직거래를 하는 행위 가 자기들의 생계에 위협을 가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그들은 될 것 같은 가수들에게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작곡을 하여 이름을 날리고 그 다음에는 신인가수들에게 뒷돈을 받고 곡을 주는 그런 방법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저희들끼리 뭉쳐서 회사의 가수들을 나누어 가져 녹음하고 신인가수들의 돈은 먹는 그런 시스템에 익숙했던 사람들 입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사장 이란 분들은 정확히 히트곡을 예측했습니다. 그것은 그 분들의 능력이지요.
저와 최종혁씨 는 이런 조직에서는 못 견디는 외골수 들이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보니 꼭 이방법이 좋다고는 말 할 수 없더군요. 그러나 그때 는 그 길 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최종혁씨 와는 생활 패턴이 다른 관계로 화곡동 에서 의 밀월의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밤늦게 들어오는 그는 술 좋아하는 저를 위해 곧잘 술을 밤늦게 사가지고는 두 손에 술병을 들고 발로 저의 방문을 발로 차며 술 먹자며 소리를 칩니다. 술 좋아하는 저는 새벽2시든 3시든 간에 일어나 같이 대작을 하지요.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술 먹고 하는 얘기 다음날 기억도 안 납니다. 그래서 이런 생활은 6개월 만에 끝납니다. 그야말로 합의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문득 문득 최종혁씨 가 생각이 납니다.
제가 이민을 간다고 하니 저보고 “유형은 나보다 10년은 항상 앞서가 어떻게 이민을 갈 생각을 해” 라고 말하던 그가 눈에 선합니다. 지금 저는 오카리나 만드느냐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입니다. 저는 원래 어릴 적부터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운동도 했으니 이 친구 저 친구 많았지요. 나이가 들어 히트 작곡가가 된 다음에는 매일 매일 카바레 출입 하는 것이 일과가 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춤을 못 추는 몸치인데.. 이상하게 음악을 직업으로 하면서도 춤은 못 추겠더군요. 쑥스럽기도 하고 제 체격하고는 맞지가 않는 것 같아서 전혀 배울 생각조차 도 없었지요.
그러나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골통으로 통하기 때문에 제 식으로 행동을 해서 그런대로 잘 어울렸습니다. 작곡가이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면 어울릴 수가 있었습니다. 직업이 연예인 이지만 저를 보고 연예인같이 생겼다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못 봤습니다. 젊었을 때는 예비군 중대장이나 운동하는 코치 정도 나이가 들어서는 기껏해야 동장 아니면 통장 이였지요. 털털하게 행동을 하니 그렇게 보였겠지만 연예인으로서는 자기 컨트롤을 못하는 덜 떨어진 작곡가였지요.
제가 가요계를 거의 떠나 세실극장에 극장장으로 들어가 연극에 몰두 하고 있을 때 최종혁씨 를 만났는데 그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저에게 진실로 충고를 하였지요. 아니! 왠 연극을 하냐고 말입니다. 의외라는 말과 이제 대중가요에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뜻으로 저는 들었지요. 그러나 1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다음 제가 극장을 그만두고 이민을 가서 한국에 왔을 때 그를 잠시 만났었습니다. 나는 10년 전에 그만둔 연극을 그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뮤지컬 작곡가로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물론 그를 만났지요. 그러나 우리는 멋 적은 듯이 웃고 말았답니다. 그가 저에게 충고를 한 것이 있기에... 보통 대중가요 작곡가들의 말년은 그리 화려 하지 많은 않거든요. 뻔 하지 않습니까? 누가 흘러간 작곡가를 찾겠습니까? 동네 아주머니들이라면 몰라도...
스스로 알아서 물러날 때 물러나야 합니다. 초라해 지지 않게 말입니다. 이것은 유독 작곡가들 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어떠한 분야든 똑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 위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저는 제 운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항상 알아서 그만 두었습니다. 지저분하지 않게 말입니다.
1998년 이제는 누구도 그만두라고 눈치 주지 않는 저의 일 즉, 흙과의 제 인생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일 준비를 합니다.
최종혁씨 의 “역시 유승엽씨 는 나보다 10년을 앞서가 어떻게 아이 들을 데리고 이민을 갔어” 라는 말을 뒤로하고 말입니다.
-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최종혁: 작곡 . 노래 : 최백호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 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 일을 잊으리라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가을엔 가을엔 떠 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첫댓글 연예인 처럼 생기셨어요.ㅎㅎㅎ
세월의 흐름을 엿볼수있네요 ,, 노래 정말 좋아했었는데.. 지금도 멋져요..
제가 좋아하던 노래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군요..원장님은 기억력도 너무 좋으셔요..어떻게 그렇게 다 기억 하세요??
제 친한 형님 덕분으로 형님 고향 친구인 최백호씨와 제 가게에서 각2병 했죠, 옛날 노래 얘기 많이 했었습니다.
시와 때를 아는 사람은 영웅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들어갈 시 나올 때를 분명히 아시는 영웅?
보통사람들과는라야 예술적인 작품들이 나오겠지요.. 선생님은 항상 시대보다 한발 앞서가시는것 같습니다. 그럼 삶이 고독하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