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청년이여 일어서라①다시 찾은 청년 공동체
‘영혼 구원’ 본질 향해 ‘뚜벅뚜벅’
청년목회의 시작, 성도교회 대학부
지금부터 37년 전, 예장합동 측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인 성도교회(장정일 목사)에선 복음성가(가스펠)가 울려 퍼졌다. 우리 귀에 익숙한 복음성가를 번역해 청년들의 문화로 보급시킨 교회가 바로 성도교회 대학부였다. 예배 후 갖는 성경공부, 제자훈련의 등장은 불모지였던 한국교회 청년 사역의 대안이자‘원조’가 되기에 충분했다.
성도교회 대학부는 청년 스스로가 필요성을 느껴 시작됐다는 게 특징이다. 청년시절 방선기 목사는 입시를 전후에 연약한 샌앙생활을 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대안의 필요성을 절감했다.‘한국의 스펄전’이라는 별칭을 가조 있는 고 김성환 원로목사가 대학부를 조직하고 담당 교역자로 옥한흠 전도사를 임명하면서부터 전환점이 마련됐다.
초창기 성도교회 대학부는 청년 한 사람의 온전한‘변화’에 집중했다. 캠퍼스, 직장, 세계 선교를 담은 3M의 비전을 품었다. 그래서 제자훈련(네비게이토)을 도입해 교회에 접목시켰으며 생소하기만한 큐티(QT)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방선기, 박성수, 박성남 청년들의 눈부신 헌신이 있었다. 특히 방선기, 박성수 청년은 직장도 포기하고 대학부를 세우기 위해 장기간 간사로 헌신했다. 한 달 만에 성경을 완독하고 69절의 성경요절을 암송해 쓰는 심도 깊은 훈련이 진행됐다.
그 당시 도시락으로 식사를 때우며 말씀을 배우고 훈련하는 정경은 교회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진풍경이었다. 그렇게 약 10여 년간 집중적인 양육훈련이 계속됐다. 캠퍼스에 다락방을 만들어 의욕적인 활동을 펴기도 했다.
“QT안하고 훈련과제 제대로 한하면 정말 창피한 분위기였습니다. 전도를 안 하면 뭔가를 빼먹은 것 같을 정도로 참 열심히 했어요.”
10기 방선오 집사(청년 1부 부장)의 회고이다. 이처럼 성도 대학부는 맨투맨 전도로 성장했으며 누군가를 데려오면 확실하게 훈련된다는 확신이 대학부 전반에 배어 있었다.
성도교회 청년들에게 대학부 조직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이때였고, 수적 규모가 기백 명에 달한 것도 이 시기였다.
옥 전도사 사임 후 대학부는 점차 변화가 시작되었다. 교회 출신 박영선 목사(남포교회)가 대학부를 맡으면서 훈련이 아닌, 설교에 집중하는 사역을 맞게 된다. 즉 그리스도안에서 신자다운 삶을 누려야 함을 강조하는 시기였다. 훈련과 삶, 이 두 가지가 성도 대학부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성도교회는 담임목회자의 부재와 급격한 교회 환경 변화로 지속적인 발전에 어려움을 맞는다.
대학부 담당 교역자의 빈번한 교체로‘성도 대학부’의 스피릿 계승이 이어지지 못했고 교역자의 스타일에 따라 사역 색깔이 바뀌는 시간들이 반복되면서 행사와 사업 위주의 사역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훈련세대였던 선배들이 안타까움을 느껴 자발적으로 후배들의 양육훈련을 시도하기도 했다.
내수동교회 대학부… 전통 꾸준히 유지
내수동교회(박지웅 목사)를 떠올리면‘청년’이 연상될 정도로 이 교회는 한국교회 청년 사역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수동 대학부는 70년대 중반, 미약한 모임에서 한번의 수련회를 통해 도약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978년 옥한흠 전도사가 인도한 여름수련회에서 오정현, 오정호, 박성규 등 초창기 멤버들은 비전과 열정을 도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제자훈련에 눈 뜨고 세계 선교를 품기 시작한다.
결정적 계기를 만든 수련회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년간 계속됐다. 옥한흠, 이동호 목사 등 당대의 열정가들이 함께한 수련회는 내수동 청년들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G 전환점이 됐다. 그룹성경공부가 신설됐고, 여기에 송인규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가 전한 특강은 지적 허기에 놓여 있던 젊은이들에게‘기독교는 인생을 던질만한 진리’임을 확신시켰다.
한 사람의 중요성, 제자 삼기, 본을 보이는 삶은 내수동교회의 모토가 됐고, 수시로 모여 갖는 말씀공부와 다양한 수련회는 내수동 청년들의 내성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빨간 날에는 쉬어 본 적이 없었어요. 수시로 모여 공부하고 훈련했고, 전도하러 많이 나갔습니다.”
79학번 신성현 집사의 말처럼 내수동교회는 기독교의 진리가 나의 것이 되도록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설교 위주의 신앙 방식에서 스스로 기독교서적을 읽으며 기독지성인으로 진리에 눈뜨는 일련의 과정이 새로웠다. 좋은 글이 있으면 직접 번역을 해서라도 주보에 싣기도 했다.
내수동교회의 트레이드가 된 이 8면짜리 주보(증인들)는 내수동 대학부의 전통을 담아 온 유용한 매개물이다. 청년들은 주보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열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변화가 알려지면서 내수동교회는 새 학기가 되면 지방에서 유학 온 청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들과 함께 내수동교회는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캠퍼스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전도와 새 생명 출석, 그리고 그들의 결신과 변화를 지켜보면서 공동체는 힘을 받게 됐다. 예배와 훈련을 통한 기독교 진리의 확산, 내수동교회는 이 같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대학부 출신자를 교역자로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근 30년 간 별다른 변화 없이 사역 패턴을 이어왔다.
4년 전, 내수동교회는 하나였던 대학부를 둘로 나눈 바 있다. 너무도 달라진 캠퍼스 사역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보자는 의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년 마르 두 개의 대학부가 다시 하나로 통합됐다. 캠퍼스의 현실이 생각보다 척박했고, 대학부의 사역 결과가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는 자체 평가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수동 대학부는 그 대안을 찾기 위해 현재 고심 중이다. (생략) 6월호에서 만나요
첫댓글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