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성동의소리에 최창준 대표님이 연재했던 글입니다. 지금 최창준의 성동의 소리 blog.daum.net/sdsori 를 검색하면 나오기도 하는데 여기에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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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기행 (1) 논 골
최창준
이 성동기행의 글들은 몇년전 성동의 소리에 연재했던 글들입니다.
우연히 들었던 동네 어른들의 지난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듣게 되었지요.
성동지역에 흩어져서 이제는 잊혀져 가는 서민들의 삶의 역사는 항상 마음에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요즈음 무차별적인 개발로 서민의 땅이었던 성동의 자취가 차츰 사라져 가고 서민들은 오히려 밀려나가는 안타까운 모습때문에 이 글들을 다시 되찾아 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더 취재하고자 했던 성동의 이야기들은 언젠가 꼭 다시 찾아보려고 한 마음의 약속은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왕십리의 외거노비 소리꾼 이야기, 뚝섬의 뚝방이야기와 기동차에 얽힌 이야기, 무쇠막과 두뭇개 포구, 뚝섬 나루터, 행당동 꼭대기뿐만 아니라 성동 전 지역에 있었던 야학이야기, 그리고 언젠가 우연히 들었던 논골 근방과 왕십리 일대의 전쟁 시기 있었던 이야기 등등,
그 이야기를 들려줄 분들이 아직 건강하실 때 꼭 찾아뵈여야 할텐데---.
지역의 어르신들은 사실 소중한 역사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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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민중)의 땅, 희망의 땅 성동의 기행을 출발하면서
예부터 성동 땅은 서울 사대문안에서는 땅을 얻지 못했던 서민들의 터였다.
봉건시대부터 60년대에 팔당댐이 생기기 전까지도 강원도, 충청, 경상 지방으로부터 한강을 타고 오는
물산의 종착지(뚝섬, 두뭇개 나루)이면서 솥과 가구 등의 생산지(금호4가 무쇠막)이기도 했고 선산이 없는
서민들의 공동묘지 터(금호2가동)이기도 했다. 분뇨를 처리하는 곳(왕십리)이기도 했고 배추,
미나리(행당, 뚝섬)가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중소 영세업체가 많은 곳이고 재래시장이 북적대는 곳이기도 하며 우시장을 품고 있기도 하고,
수 없는 철거를 겪고 새 역사를 만들어 오며 공동체를 이루어 서민의 희망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아름다운 곳, 서민이 어우러져 희망을 만드는 땅,
성동 서민의 역사는 눈물겹기도 하지만 어려움을 꿋꿋이 이겨온 역사이기도 하다.
우연하게 듣게 된 성동의 옛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민중의 생명력을 감동 깊게 느끼며
성동기행을 출발하려고 한다. 문화재 중심이 아니라 민중들 삶 중심의 기행길을 떠나 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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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에도 논을 일구어 낸 민중의 힘, 논골을 찾아서
금북초등학교 앞 다락논이 있던 자리. 지금은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앞에 보이는 골목은 예전에 물길이었다고 한다.(지점수 할아버지 증언)
행당동 지하철역에서 찻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벽산아파트를 지나서 논골사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를 직진해서 신금호역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전에 금북시장자리였던 마트가 나오고
그 시장을 보며 오른쪽으로 골목을 들어서면 금북초등학교이다.
그 금북초등학교 앞쪽의 작은 골목길을 따라(현재 “평화의 집” 옆골목) 계단식으로 된
다락논이 있었다. (지도 참조)
논 옆으로 대현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개울이 흘러 내려갔다.
개울물은 크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3-4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앉아서 놀기도 했으며
지금의 연립주택가를 지나 논골사거리에서 금호사거리쪽으로 흘러 무쇠막으로 이르렀는데
현재는 버스가 다니는 길이 되었다.
논골사거리 아래쪽으로는 현재의 소방서 자리까지 다락논이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사람도 별로 살지 않는 높은 곳이고 밭이나 배나무, 포도나무 밭이 있던 곳에 특이하게
논이 있어 논골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바로 논골이라는 지명이 생긴 연원인데
언제부터인지는 아직 알 길이 없다.
50년대 말까지도 그 논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니까 아마도 50년대 말, 또는 60년대
초까지도 논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개울물은 1978년쯤에 복개공사를 해서
논골사거리에서 금호사거리에 이르는 도로를 이루고 있어 지금도 도로 밑으로는
하수도 물이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현산6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연립주택 내의 조그만 길은 옛적부터 있었던
길로 중앙 시장으로 넘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장을 보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 어머니들이 넘어 오갔으며 상인들이 넘나들었으리라.)
지금은 전혀 다락논의 그 자취를 느낄 수 없지만 예부터 논골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민심에는 이 험한 곳에 논을 일구어 낸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또 논 한뙤기 갖기 어려웠던
당시 민중들의 바램이 어우러져 있다고 느껴진다.
험한 비탈에 계단식으로 다락논을 부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논 한 뙤기 없었던
우리 민중들 삶의 고단함, 그리고 그 고난을 묵묵히 이겨낸 역사를 논골은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증언; 한길섭 금호 노우회 회장님, 김봉국 새마을금고 이사장님, 지점수 할아버님, 조면구 용답동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