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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mm의 비 속에서 7시간 30분 잊지 못할 우중 산행 (7구간)
1. 일자: 2013. 8. 24 (토)
2. 장소: 육십령-중기마을
3. 행로 및 시간
[육십령(03:45, 734m) -> (샘터) -> 깃대봉(04:40, 1014m, 민령 1.3km) -> (억새밭) -> 민령(05:20, 820m) -> (키 큰 산죽) -> 북바위(05:55, 977m) -> 이정표(06:20, 육십령/영취산 6.5km) -> (조식 06:40-50) -> 덕운봉(07: 50-55, 956m, 영취산 2km) -> 영취산(08:35-40, 1076m) -> 선바위/암봉(09:15) -> 백운산(09:55, 1279m) 중고개재(10:44) -> 중기마을(11:15), 17.3km(1.8km)]
< 7구간 산행을 준비하며 >
지난 복성이재-지지리 산행을 마치고 날머리 계곡에서 ‘알탕’의 매력에 빠진 뒤, 누군가의 긴급제안으로 이번 7구간의 들/날머리가 바뀌게 되었다. 지지리-육십령이 육십령-지지리로 변경되었다. 떡 본 김에 제사라고 산행 후 계곡 부근에서 평상을 빌려 그간 미루어왔던 상견례를 하기로 했다. 288 동기들과 서로를 조금 더 알아가는 과정이라 기대가 된다. (주말에 비가 전국적으로 비가 온단다. 산행에는 불청객이겠지만 한 달 이상 불볕더위에 지친 남녘 땅에는 모처럼만에 단비다. 비가 오면 계곡에서 평상을 빌려 삼겹살 파티를 하려던 계획의 차질이 불가피하다. 원래대로 지지리-육십령으로 코스를 정하고, 육십령에서 음식점을 빌려 식사를 하자는 제안과 육십령 출발 날머리를 중기마을로 하고 마을회관을 빌리자는 제안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하늘이 하시는 일에 인간은 순응해야 함이 마땅할 듯하다.)
이번 산행에서는 백운산과 영취산 두 곳의 명산을 지난다. 우선 백운산에 대해 살펴본다. “전국에 백운(흰구름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많다. 그 중에서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산이 바로 함양의 백운이다. 높이도 1,200m가 훨씬 넘는 동일 이름의 산들 중 최고 준봉인데다 산정에서의 조망도 으뜸이다. 남도의 내노라하는 명산들이 동서남북 어떤 방향에서든 거침 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남쪽에 하늘금을 그은 지리산의 파노라마는 그리움의 경지를 넘어 차라리 연민이다. 반야봉의 자태는 너무 뚜렷해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북쪽 끄트머리에는 넉넉한 덕유산이 태평스레 앉아 있고 그 너머에 황석, 기망, 월봉산이 줄기를 뻗대고 있다. 금원 기백도 가까이 보이고 동북 방향 멀리로는 수도, 가야, 황매산도 가물거린다. 양쪽날개인 양 백운산과 맥을 같이한 동쪽의 괘관산과 가을 억새가 멋진 장안산이 서쪽에서 마주보고 있다. 이렇듯 백운산은 명산에 둘러싸여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 지방 최고의 진산으로 산세는 전형적인 육산이다.” 한국의산하에 소개된 내용을 일부 편집한 것으로 산꾼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다음은 영취산으로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의 분기점으로 함양 백운산에서 백두대간이 육십령으로 북상하는 도중에 있는 산이다. 영취산 정상에 서면 북으로 남덕유산이, 서쪽으로 장안산이, 남으로 백운산이 조망된다. 영취산은 한자로 신령령(靈), 독수리취(鷲)을 쓴다. 석가가 인도 이곳에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설법한 데서 명명의 기원이 있다. 영취산를 준말로 영산, 또는 취산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뜻은 산세가 '빼어나다', '신묘하다',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몇 년 전 무령고개에서 장안산을 오를 때 잠시 들렀던 곳으로 당시에는 정보가 적어 크게 인상적인 곳으로 기억되진 않는다.
가야 할 길의 대강을 그려본다. 대간 길은 17.3km, 중고개재에서 지지리 접속구간이 1km이니, 걸어야 할 총 거리는 18.3km이다. 지난 번 14.6km 거리를 5시간 50분 만에 걸었으니 얼추 시간당 2.5km로 이로부터 추산하면 대략 7시간 반, 휴식을 고려하면 8시간의 산행이 될 듯하다. 코스를 대분하면 육십령-깃대봉 80분, 깃대봉-영취산 3시간 30분, 영취산-백운산 90분, 백운산-지지리 90분이다. 멀다. 새벽에 출발하는 산행이 아니면 한 여름에는 쉽게 도전할 곳이 아니다. 비가 와 코스가 역으로 바뀌더라도 산행 소요시간은 크게 바뀌지 않을 듯하다.
차분한 마음으로 금요일 밤을 기다린다.
< 희망사항 >
월요일 아침, 다음 카페에 개설된 28산악클럽 대문에 내 산 닉네임이 떡하니(보란 듯이 의젓하고 여유 있게) 떠 있다. ‘우수회원’된 것을 축하한단다. 평소에도 카페에서 우수회원만 접근 가능한 곳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기에 우수회원인줄 알았는데, 그 동안은 아니었나 보다. 여러 분의 축하 메시지가 쏟아진다. 대간 종주가 한참 진행 중인데 새삼스러워 쑥스럽다. 어깨가 무거워진다. 진짜 산꾼이 되어가고 있구나 하고 마음가짐이 새로워진다.
가야 할 길을 조사하다, 육십령에서 깃대봉 오름 길에 샘터가 하나 있음을 발견하고 정보를 추가해 보니, 수량도 풍부하고 물 맛이 그만이 곳이라 한다. 대간 길이 능선 종주이다 보니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다. 새벽 능선 샘터에서 맛 보는 물 맛의 깊이가 궁금해진다. 수통의 물을 조금 덜어도 된다는 것이 희망으로 다가온다. 산꾼이 되는 것은 ‘좀 더 쫀쫀해진다’는 말과 동의어 일런지도 모르겠다. 하하!
날씨는 등산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최대 변수이다.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지는 아아(峨峨)한 풍광을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지만, 때론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고 싶을 때도 있다. 오랜 가뭄에 시달리는 지금 이 계절이 특히 그렇다.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생기발랄한 방울방울이 한없이 그립다. 우중산행은 스스로를 토닥거리고 받아들여 내가 나를 되찾는 시간이라 했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즐겨야겠다.
< 산행 궤적과 고도 >
< 다시 육십령 가는 길에 >
비 온 뒤라 더위가 한결 꺾인 느낌이다. 게다가 오늘은 처서, 서늘해진 기운이 느껴지는 금요일 밤, 나만의 의식을 위해 길을 나선다. 사당으로 향하는 777 버스는 늘 그렇듯 신호, 차선을 무시하고 밤 도로를 질주한다. 버스회사에 소속된 운전기사가 여러 있을 터인데 하나같이 난폭운전이다. 운행구간이 길다 보니 나타나는 일종의 직업병이다. 도를 넘어선 행동들이 큰 사고로 이어질까 두렵다.
12시 훨씬 전인데 버스는 벌써 교대역에 도착해 있었다. 옆 자리에 송암 선생 대신 웬 여자 2명이 앉아 있다. 다른 기수에서 보충산행을 왔나 보다. 곧 변화된 환경에 익숙해 진다. 죽전과 신갈을 지나자 소등이 된다. 모처럼 긴 잠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 육십령에서 민령 >
식사도 거른 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다 잠시 내린 덕유산 휴게소에서는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육십령에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쏟아진다. 심난한 마음으로 들머리 화장실 처마 밑에서 행장을 점검한다. 우비와 바람막이 사이에서 고민하다, 어차피 젖을 텐데 더위라도 피해보자는 심산으로 바람막이를 걸쳐 입는다. 얕은 겉옷에 비가 떨어져 소리를 낸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비라 우선은 반갑다.
3시 45분, 깃대봉으로 향한다. 비고 300미터, 거리 2.5km다. 비가 시간이 지나며 더 굵어진다. 배낭 허리에 둔 카메라가 젖을까 온 신경이 쏠린다. 비가 와 기온이 낮은데도 오르막을 걸으니 땀이 난다. 길은 그리 거칠지 않다. 빗물에 반사되는 랜턴의 불빛이 허공 속에서 길게 이어진다. 졸음이 밀려온다. 비 오는 새벽, 낮 선 땅에서, 큰 짐 메고 이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40분 정도를 걸으니 선두가 멈춰 선다. 샘터다. 일행들이 집결하다. 산소리님이 목이나 축이고 가라 하더니, 정작 본인은 이내 출발해 버린다. 말 따로 행동 따로다. 목을 축이려 하다가 뒤처짐이 싫어 걸음을 재촉한다. 젠장! 물 한 모금 편히 먹을 여유도 없단 말인가?
잡초가 우거진 된비알을 7분여 오르니 널따란 개활지가 나타난다. 예전 구시봉이라도 불리던 깃대봉이다. 사방이 훤히 트여 밝을 때 오면 제법 풍광이 근사할 곳이다. 비 때문인지 평소와 같은 첫 이정에서의 술렁거림이 없다. 비가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비에 익숙해져 간다. 1시간 산행에 이미 온 몸이 흠뻑 졌었다. 카메라를 배낭 안으로 갈무리한다. 오늘은 사진 찍기를 포기해야겠다.
민령을 향해 내리막을 내려선다. 길이 미끄러워 걷는 속도가 더뎌진다. 억새와 잡초가 뒤엉킨 험난한 길이 이어진다. 좌측으로 불빛이 보인다. 유성마냥 꼬리를 달고 움직이는 것을 보니 대전통영 고속도로의 불빛이다. 새벽, 멀리서 아스라이 유혹하는 나트륨 등 불빛은 두고 온 집 생각과 침대에서의 아늑한 잠에 대한 그리움으로 길 위에 있는 나를 유혹한다. 이래서 집 떠나면 고생인가 보다.
갈대가 허벅지를 쓸고 간다. 그나마 성하던 엉덩이 부근까지 빗물이 스며든다. 산거북님이 양말이 젖지 말라고 준비한 비닐 스패츠 덕분에 신발은 아직은 괜찮지만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머지 않아 비에 온 몸을 내 주어야 한다. 마음을 편히 먹으니 걸음은 주저가 없다.
갈대와 가시덩굴로 인해 1.3km인 깃대봉에서 민령까지의 길이 길게만 느껴진다. 게다가 잡초 때문에 길 찾기도 만만치 않다. 산소리님이 러셀한 곳을 따라 가는 데도 여러 번 잘못된 곳으로 갔다가 되돌아 오곤 했다. 결국 민형은 4시 20분에 도착했다. 이정표만이 이곳이 갈림인 것을 알려준다. 민령을 지나며 길은 산죽의 세상으로 변한다. 키가 2미터는 넘어 보인다. 이번에는 허벅지 대신 얼굴이 비를 머금은 산죽 잎에 속절없이 당한다. 앞서 가던 이에 몸에 스친 대나무 잎이 사정없이 내 얼굴을 친다. 길을 잃을까 바 바짝 붙어 걸었는데 이제는 앞사람과의 거리를 두어야겠다.
< 민령에서 영취산 >
한동안 이어지던 평지 산죽 길은 서서히 오르막으로 변한다. 북바위가 977미터이니 비고 150미터를 이겨야 한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칠어진다. 빗물인지 땀인지 구분되지 않은 습기가 안경을 흐리게 한다. 비 속에서의 산행은 이래저래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6시 조금 전 북바위에 도착했다. 북 모양을 닮은 암릉은 어둠 속에서는 랜턴 불 빛 사이로 그 존재만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잠시 쉬어가면 좋으련만 선두는 벌써 길을 떠난다. 모두들 잘 길들여진 걷는 기계 같다.
다시 산죽 군락이다. 한껏 비를 머금은 산죽에 몸이 쓸린다. 지금까지 맞은 비 만으로도 내 평생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비를 맞은 셈이다. 동이 트려는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이 정도로 그쳐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그저 희망사항뿐 하늘은 내 바램에 응할 뜻이 업나 보다. 무엇이든 정도가 지나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모처럼 우중 산행을 한다고 들떠있던 동료들도 갈수록 짐이 되는 이 비에 모두 할 말을 잃고 힘겹게 길을 이어가고 있다.
봉우리를 넘었는데도 한동안 오르막이 이어지더니 완만한 능선이 계속된다. 6시 20분 무렵 이정표를 만난다. 육십령에서 6.5km를 왔고 영취산까지 남은 거리도 6.5km란다. 머릿속에 갈무리한 정보에는 영취산이 그리 멀지 않았는데 6.5km라니, 혹시 백운산을 영취산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혼란이 온다. (지나고 보니 이정표는 정확했다. 영취산에 빨리 가고픈 내 마음이 착각을 일으켰나 보다.)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에 힘이 빠진다. 길은 여전히 키 큰 산죽 터널과 잡초 숲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두가 943봉 부근 작은 언덕이 만들어준 공터에서 자리를 잡는다. 서서 행동식으로 아침을 먹는다. 배낭 안까지 물기가 느껴진다. 서둘러 핸드폰, 카메라, 지갑 등을 비닐 속으로 넣는다. 많은 비로 인해 배낭커버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있다. 처음 겪는 일이다. 낭패다. 그렇다고 별 수도 없다. 뒷일은 하산 후에 처리할 수 밖에.
음식의 힘인지 에너지를 보충하니 다리에 한결 힘이 솟는다. 전망바위가 나오길래 덕운봉인지 알았는데 이정이 없다. 변화 없는 길은 더 길게 느껴진다. 속절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 정도의 비면 강수량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경험 없는 일이라 대충이라도 감이 안 온다. 긴 잡목 숲을 지나 잠깐의 바위구간을 지나며 힘겹게 비탈을 오르자 봉우리가 나타난다. 나무 이정표 옆에 누군가가 이곳이 덕운봉이라 표기해 두었다. 숲 속에 위치한 바위 봉우리라 전망이 근사할 곳이지만 지금은 비와 연무만이 상황을 말해 준다.
후미가 도착하자 기념 사진을 찍는다. 모두 카메라를 배낭 안에 넣어두었는지 망설이는데 유박사님이 용기를 낸다. 덕분에 오래 기억될 우중 사진 한 장을 얻는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후 유박사님은 백운봉에서 카메라를 꺼냈고, 그 과정에서 안경다리가 부러졌다. 이후 한쪽 스틱도 망가졌으니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은 그에게 글로나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 덕운봉에서 288 동기들 >
덕운봉에서 영취산은 2km 거리다. 지금까지의
속도라면 한 시간이 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연무 속에서 봉우리들이 하나 둘 머리를 내밀고 있다. 덕운봉에서 영취산까지의 비고는 100미터 남짓이다. 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이곳이 영취산이겠지 하며 기대를 가져 보지만 오르고 보면 앞에 또 다른 봉우리가 보인다. 심신이 지친다. 깃대봉에서 영취산까지의 시간과 거리를 잘못 기억한
까닭에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실망을 하다 보니 길이 더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산행 전체로 보면
시간과 거리의 추측은 정확했다. 덕운봉 출발 40여분 만에
드디어 영취산 정상에 섰다. 호남정맥과 백두대간이 지나는 곳, 몇
년 전 겨울 장안산을 가려다 잠시 들렀던 곳이다. 당시에는 혹한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은
비와 연무로 주위를 볼 수 없다. 인연이란 이렇게 유사한 상황을 되풀이 하는 습성이 있나 보다. 예전보다 공터가 잘 정비되어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곳에 오르려고 애쓴 노고를 생각하면 반갑고 고마운 곳이다.
일행들이 다시 집결하다. 거친 환경에서도 이 순간만은 모두의 얼굴에 작은 성취에서 나오는 웃음이 묻어 있다. 기쁜 표정의 일행을 보니 내 마음도 편안해 진다. 웃음은 전파력이 강하다.
< 영취산에서 288 동기들 >
< 영취산에서 중기마을 >
산행 전 준비과정에서 참고한 지도는 월간 산에서 만든 백두대간 종주지도이다. 이에 의하면 역방향으로 영취산에서 백운산까지는 3.5km, 1시간 45분, 백운산에서 중고개재까지는 2.5km, 1시간 30분이다. 이후 중고개에서 중기마을은 2km, 40분쯤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남은 거리는 8km, 소요시간은 4시간이 조금 안 된다. 영취산에서 길을 나서며 대장님은 3시간이 안 걸려 날머리에 설 것으로 예측했다. 거리를 고려하면 무리라 판단되었지만 막상 걸어보니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영취산 출발 20여분 만에 전망대가 나타난다. ‘설마 벌써 백운산’ 이라는 생각은 역시나 였다. 예상보다는 오르내림이 덜하여 갈만하다. 이정표를 만난다. 걸어온 길과 백운산까지 가야 할 길의 거리가 1.7km로 같다고 알려준다. 약 30분 만에 1.7km를 왔다. 빠른 행보다. 언제부턴가 일행들의 거리 간격이 벌어진다. 소변을 보러 잠시 여유를 가졌더니 그사이 여럿이 내 앞을 지난다. 일부러 뒤로 쳐진다. 속도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리해 갈 필요가 없다. 마음을 비우니 발걸음에 여유가 생겨 좋다.
전망 바위를 지난다. 고도는 1200미터 어름이다. 비는 여전하다. 그래도 다행이 하늘은 조금씩 맑아 온다. 오후에는 비가 잦아들 듯하다. 백운산으로 향하는 마지막 된비알을 오른다. 빗 속에서의 산행은 평소보다 체력소모가 심하다. 같은 거리를 걸어도 맑은 날 보다 훨씬 힘겨움이 느껴진다. 그나마 비로 인해 기온이 오르지 않은 것이 다행스럽다.
10시 무렵 백운산 정상에 섰다. 국내에 존재하는 수 많은 백운산 중에서 높이로는 맏형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지리산과 덕유산의 풍광이 그리 좋다는 곳인데 빗 속에서는 허언이다. 널찍한 공터에 일행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무리를 향해 달려 가는 자들에게서 만이 느껴지는 뿌듯함이 전해온다. 카메라를 꺼내어 몇 컷 찍는데 빗물이 파고 든다. 좋은 사진은 기대할 수 없겠다.
마지막 힘을 내어 중고개재로 향한다. 채왕님과 길을 함께 한다. 이런 저런 산 이야기를 하며 걸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다리 총무님까지 합세하여 두런두런 말을 건낸다. 지난 여러 번의 산행으로 동기들과 친분이 깊어간다.
중고개재에 도착하자 대장님과 일행들이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 비가 잦아든다. 중고개재에서 좌측으로 길을 튼다. 잡초가 우거진 숲을 10여분 걷자 도로가 나타났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에 다리가 묵직해져 온다. 7시간이 넘는 빗길 산행,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날머리에 섰다는 안도감에 모두의 얼굴에는 행복의 웃음이 감돈다. 포장도로 양 옆으로 빗물이 흘러 내린다. 신발을 흐르는 물 속에 부러 잠기게 한다. 온 몸을 비에 맞기니 더 이상 몰골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7시간 30분간 빗 속에서 19.1km를 걸었다. 살다 보면 앞 일이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비를 맞은 하루였다. 어찌 오늘을 잊을 수 있으리오!!
< 중기 마을로 하산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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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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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보다’ 라는 말을 쓰곤 한다. 오늘 산행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비가 왔고, 길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았으나, 힘은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기대했던 멋진 풍광은 날라갔으나, 비 속에서 장거리 산행을 했다는 값진 경험을 얻었다. 대간을 종주하다 보면 여러 기상상황을 맞을 것이라 예측은 했지만, 7시간 넘게 80mm가 넘는 비를 경험할 것이라고는 미쳐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산행은 앞으로의 우중 산행에서 기준점이 될 것이다. 소중한 경험으로 간직해야겠다.
뒤풀이 장소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인근 마을 정자에 자리를 잡았다. 삼겹살이 구워지고 술잔이 돈다. 술은 반갑지 않지만 빵 조각 몇 개로 버틴 뱃속에 고기가 들어가자 행복해진다. 허겁지겁 그리고 즐겁게 식사를 했다. 우중 팔각정에서 고기 파티라, 이 역시 쉽게 잊혀지지 않을 색다른 경험이다.
산행을 마치고 버스에 오른다. 많은 비, 잡목 덩굴, 물에 젖은 배낭 때문에 힘겨웠고 남자들이 속 옷을 갈아입는대도 자리를 지키는 삼보를 알 수 없는 여인네들 때문에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오늘도 즐거운 산행이었다.
낯 섬 속에 나를 내어 놓은 일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행복한 도전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