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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홍엽은 아닐지라도 암회색 암릉미로 기억될 대둔산 산행
1. 일자 :
2. 장소 : 대둔산 (878m)
3. 행로 및 시간
[배티재(10:20) -> 산판길 출발(10:30) -> (가파른 오르막) -> 첫하늘열림(10:50) -> (진달래꽃) -> 오대산 갈림길(11:00) -> (내리막) -> 대둔산 전망(11:07) -> 이정표(11:19, 오대산 1.1km, 장군약수터 1.4km, 마천대 2.8km) -> 이정표(11:26, 낙조대 1.1km) -> 이정표(11:32, 낙조대 0.6km) -> 바위 전망대(11:39, 암릉 전경) -> 중식(-12:00) -> (계단길, 오르막) -> 안부 삼거리(12:14, 태고사 0.8km, 마천대 1km, 낙조산장 0.12km) -> (알바) -> 낙조대(12:22) -> 이정표(12:34, 해발 830m, 마천대 600m, 용문굴 400m) -> 바위지대 전망(12:38) -> 개척탑(12:57) -> (하산, 돌 길) -> 삼선계단(13:14) -> 금강구름다리 밑(13:25) -> 동심바위(13:36) -> (동심정 휴게소) -> 이정표(13:55, 해발 400m, 동심정 350m, 주차장 700m) -> 동학항쟁전적비(14:00) -> 주차장(14:10)]
4. 동행 : 홀로, 지암산악회
< 대둔산 산행을 준비하여 >
대둔산은 충남과 전북에 걸쳐 있는 산으로, 행정구역 상으로는 논산과 완주군에 속해 있지만, 배티재(제대로 된 표현은 ‘배고개’ 혹은 ‘梨峙’가 맞을 것이다.) 등 들머리는 금산을 통해 진입하기 때문에 서로가 자기 고장의 산이라 자랑하는 산이다. 그 동안 여러 차례 행선지로 마음 먹었지만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던 차에, 금주에도 당초 계획한 속리산이 성원 미달로 취소된 후 급히 연락해 한 자리를 얻어 가게 되었다.
한자로 ‘屯’자는 ‘머므르다’, ‘진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앞에 형용사 큰 대자가 붙었으니 ‘큰 둔덕’이라는 의미다. 높이로는 북한산 백운대(831m)보다 조금 더 높지만, 둘레에 그만한 산이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유독 산세가 쭈삣쭈삣하여 여느 웅산에 비하여 한결 장엄한 기상을 풍겨 준다. 산 정수리 가까이 불끈불끈 6km 길이로 늘어선 기암괴석의 암봉들이며, 가을철 그 암벽 틈서리마다 주름진 비탈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의 배합은 그대로가 한 폭의 산수화 같다는 산이 바로 대둔산이다.
출발 전 지도를 살피니 대둔산 정상은 마천대, 주변으로 북서쪽으로는 월성봉, 바랑산이 보이고 동쪽 금산 방향으로는 오대산이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천등산이 보인다. 이 모든 곳이 대둔산 도립공원으로 묶여 있다. 지도상으로만 보아서는 전라북도의 도립공원으로 보인다. 오늘 등산은 배티재에서 출발하면 낙조대까지 80분, 낙조대에서 마천대는 40분, 마천대에서 공원관리사무소까지는 1시간 남짓으로, 식사 시간 포함 총 3시간 30분이면 계획한 코스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은 등산 시간에 대한 의문이 든다. 서울로 일찍 돌아 오던가 다른 이벤트가 있겠지 하고 추측해 본다. ‘큰 둔덕’에 올라 붙을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 희망사항 >
등산 잡지 화보에서 본 대둔산 정상부의 암릉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주요 암릉에는 그 길을 개척한 이들이 명명한 고유의 이름들도 있다. 암봉을 가로질러 놓인 빨간 금강구름다리의 모습도 아름답다. 가파른 계단이 길게 놓여진 삼선계단도 인상적이다. 대둔산은 볼거리가 많은 산이다. 비록 단풍이 끝물이라 크게 기대할 바는 아니지만, 산 자체의 경치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어제 밤부터 산행 복장에 신경이 쓰인다. 아침의 서늘한 기운을 이기려면 점퍼를 입어야 되는데, 18도가 넘는 한 낮 기온을 생각하면 부담이 될 것 같고 망설여 진다. 정 더우면 배낭에 넣을 요량으로 점퍼를 챙긴다. 시절은 입동, 예전 같으면 초겨울인데 계절이 계절답지 않다. 그래도 겨울보다야 가을이 길어지는 것이 낮지 하는 마음으로 길어진 올해 ‘만추’를 즐겨보고 싶다.
< 대둔산행 버스 안에서 >
안내산악회는 버스 중간 출발지로 산 소재지에 따라 복정과 양재를 선택하라고 하는데, 오늘은 양재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기 때문에 복정 대신 죽전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양재는 집 출발 시간이 복정에 비해 30분이나 빨라야 하고 귀가도 불편하다. 갑자기 늘 복정에서 출발하는 다모아산악회가 그립다. 어쨌건 이른 아침을 먹고 양재행 버스를 탄다. 약속보다 늦은 7시 35분에 산악회 버스는 양재를 출발한다. 좌석이 10석 이상 비었다. 덕분에 편안히 간다.
지암산악회 대장이라는 머리가 허연 분이 오늘의 등반대장이다. 인상이 선하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지도부터 나누어 주고, 분홍색 안내 띠도 준다. 정작 회비는 걷을 생각이 없다. 이상했지만 그냥 간다. (돌아 오는 길에 잊었다 하면 계면쩍은 표정으로 회비를 걷었다.)
버스는 추수를 마쳤지만 여전히 황금 빛인 들녘을 지나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문득,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나의 걸음은 항상 느리다. 가을볕을 머금은 들판이 황금 빛으로
넘실거린다. 아! 이렇게 또 한 해의 가을이 깊어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모를 차분함이 밀려 들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이어폰으로
< 배티재에서 낙조대 >
10시 20분 오늘의 들머리 배티재에 도착했다. 죽암휴게소에서 30분을 쉬었다 왔는데도, 시간이 이르다.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 가는 시간이 오후 4시이니, 산행시간은 5시간 30분이 주어졌다. 물론 내려 와서 온천욕 시간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그리 긴 것은 아니지만 마음만은 한가롭다.
대장이 10시 30분 같이
출발하잔다. 10여 분 여유 시간에 주위를 살피니, 진산자연휴양림이라는
간판 옆으로 커다란 비석이 서 있다. 버스에서 대장이 임진왜란 당시
지도상으로는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 가야 들머리가 있을 것 같은데, 대장은 쉼터 도로 건너편에 있는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나무를 베어 내는 산판을 했는지 휑하지만 무척 가파른 길로 올라 선다.
< 배티재에서 본 대둔산 >
< 때늦은/때이른 진달래 >
배티재에서 오르는 초입,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지만 50도가 넘는 오르막 경사가 계속 이어지니 온 몸에 땀이 솟는다. 벌써부터 점퍼가 부담이 된다. 배티재의 고도가 300m를 조금 넘었는데, 20분을 지나니 550m에 육박한다. 가히 살인적이다. 한여름에는 건각도 초반에 넉다운 시킬만한 위세다. 10시 50분 처음으로 하늘이 열린다. 작은 전망대에서 주변을 둘러 본다. 산 아래 지나 온 배티재가 보이고 그 밑으로 대둔산 도립공원 입구와 그 너머 천둥산의 뽀족한 봉우리가 눈에 들어 온다. 가야 할 길이 멀어 다시 길을 나서는데, 분홍빛 꽃이 자기를 보고 가라 한다. 진달래다. 이쁘다. 이런 경우를 때늦었다 해야 하나, 때 이르다 해야 하나. 하여간 제철을 잊고 나온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전망대를 지나서도 한참을 올라 11시경에 삼거리에 도착했다. 고도는 600m를 넘겼다. 30분 만에 고도 300m라, 오르막에 대한 큰 고비는 넘긴 것 같다. 우측으로는 오대산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좌측으로 내리막이 나 있고 그 위로는 대둔산이 암봉들이 눈에 들어 온다.
잠시 휴식 후 길을 나선다.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내리막을 내려 서는데, 한 지점 주변 벼랑에 나무가 사라져 대둔산 암릉이 맴 얼굴로 전모를 공개하는 지점이 있어, 얼른 카메라를 꺼내 기록을 남기고 내 머릿속에도 넣어 둔다. 길은 한동안 내리막이 이어지더니 이내 평지길로 바뀐다. 애써 오른 고도를 잡아 먹는 것 같아, 조금은 불안하다. 11시 20분 첫 이정표를 만난다. 오대산 1.1km, 장군약수터 1.4km, 마천대 2.8km. 지도를 살피니 당초 계획했던 곳에서 올랐으면 이곳으로 바로 올라 왔을 것 같다. 조금 더 가니 또 다른 이정표와 만난다. 오대산과는 1km 정도가 더 멀어졌고 약수터는 0.5km 남았다 한다. 낙조대까지는 1.1km 더 가야 한다. 일단 낙조대라는 1차 목표가 가시권 안에 들어 왔으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미지’는 ‘설렘’과 함께 ‘불안’을 낳는다. 추측하던 미지가 현실로 다가 오고 내가 감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불안은 자취를 감춘다.
잎을 떨구어낸 앙상한 나무들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날씨가 꽤 쌀쌀하다. 서늘한 공기 속에는 진한 숲 냄새가 배어 있어 들여 마실수록 머리가 조금씩 맑아 진다. 11시 30분 낙조대가 0.6k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길은 푸른 조릿대 길로 변한다. 나무 가지 사이로 대둔산 암릉이 점점 가까이 다가 온다. 하지만 높게 자란 그 놈의 참나무 가지로 인해 시원한 조망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 대둔산 암릉 전경 >
한참을 아쉽게 걷는데 작은 갈림에서 좌측으로 벼랑이 보인다. 주변이 위험해 보였지만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욕심으로 한참을 내리 걷는다. 바위 난간에서 바라 보는 대둔산의 전경은 참으로 멋졌다. 암회색의 바위지대는 잘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여백의 미 보다는 암괴의 사실성을 더 부각한 그림이다. 좌측 암릉이 끝나는 지점 뒤로 이름 모를 산들의 파노라마가 이어진다. 그 위로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온통 암회색의 전경이다. 그 칙칙한 색이 빛과 조화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평생 못 잊을 기억이 될 것이다.
경치를 두고 가기가 아쉬워 점심상을 차린다. 고달픈 다리를 쉬게 하고, 입도 즐기면서 눈도 호강을 더 하기 위해서다. 양지 바른 곳이지만 구름이 도와 주어 식사시간 내내 쾌적한 환경에서 죽과 밥으로 준비한 성찬을 맛나게 먹었다.
12시, 다시 길을 나선다. 낮은 오르막을 넘어 본격적으로 대둔산 암릉 속으로 파묻힌다. 계단을 올라 서는데 위에서 누군가 부른다. 올려 보니 대장이다. 늦었다 한다. 식사를 먼저 했으니 늦은 게 아니라 답하고, 이른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신선산악회 오대장 안부도 묻고 지암산악회에 대해서도 묻고 답하고 10여분을 같이 걷다, 태고사 갈림길에서 먼저 가라 한다. 지난 밤 술이 과했다 하면서, 길가에 앉는다. 올라 가면 들으니, 헛구역질 소리가 들린다. 산에서는 카리스마로 기억되는 등반대장의 인간다운 모습을 엿보는 것 같아, 피식 웃는다. “어젯밤 무리하셨군요”.
낙조대로 향하는 마지막 오르막을 씩씩하게 오르니 사거리 안부가 나왔다. 길이 이제까지와 달리 번잡해 진다. 이정표도 어지럽다. 낙조00라는 표지만 보고 길을 가는데, 내리막이 나온다. 이상하다 싶어 길을 물으니 낙조산장 가는 길이라 한다. 성급한 마음에 ‘낙조’만 보고 잘못 온 것이다. 길을 되돌린다. 소위 ‘알바’를 한 것이다. (어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알바’라는 표현은 신성한 산에는 어울리지 않은 통속적인 느낌을 준다. 이후로는 이 표현은 쓰지 말아야겠다. ‘알탕’이라는 흉물스러운 표현과 함께 말이다). 다시 이정표로 되돌아 와 보니 위쪽으로 낙조대로 향하는 길이 있다. 3분여를 오르니 헬리포트 같은 꽤 너른 평지가 나온다.
낙조대다. 원효대사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라 하는데 상세히 는 모르겠다. 좀 전에 길을 알려 준 중년의 남자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한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살피니 멀리 논산과 금산의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눈에 들어 오는 산야는 아직 황금빛이 우월하다. 가을은 아직도 진행형인가 보다.
< 낙조대에서 >
< 낙조대에서 마천대 >
낙조대에서 마천대까지는 배티재에서 오르며 감탄하면서 남쪽 측면을 보아 온 암벽의 능선길이다. 실제로 능선에 올라 서니 밑에서 보는 것만큼은 위압적이지는 않다. 마천대까지는 40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낙조대에서 다시 이정표 사거리로 내려 왔다. 오늘 묻지마 버스 멤버 중에는 여자 두 명이 낀 직장 동료인 듯한 일행이 있었는데, 배티재 오름길에서 한 여자는 엄청난 속도로 산을 오르는 반면 또 한 여자는 초입에서 뻗은 것을 목격했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보니 둘 다 생생하게 살아나 있었다. 등산 초입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첫 고비를 넘기면 정상까지는 힘을 내 가는 현상을 다시금 확인한다. 이른바 ‘하트 브레이크(사점)’의 고비를 넘기면 산에 본격적으로 적응하게 되는 것이다.
산 밑에서 볼 때의 험악한 기세와는 달리 마천대로 향하는 길은 그리 험하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산 9부 능선으로 주 등산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잠시 길을 이탈해 위쪽 바위 길을 걷는다. 위험을 무릎 쓴 보상은 생각보다 컸다. 대둔산 특유의 암릉미를 뽐내는 바위를 한껏 즐길 수 있는, 그리 험하지 않는 길을 한동안 걸을 수 있었다. 낙조대 밑 바위들의 조망이 그만이다. 마치 대야산 정상 능선 길의 전경과 닮았다. 뿌리가 같은 충청도의 인근 산이니 그렀지 하는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는 생각을 해 본다. 생김새는 닮았지만 하는 행동은 전혀 다른 형제나 사촌들을 볼 때 드는 생각과 비슷할 것이다.
< 마천대 가는 길의 암릉을 벗하며 >
점차 바위 길의 난이도가 높아짐에 따라, 너무 올라와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다시 밑으로 길을 내러 선다. 철 계단 길 밑으로 내려서서 계단이 있는 작은 고개를 넘어 쇠 난간 길을 지나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갈림길이 나온다. 수락리에서 올라 오는 길과 만난다. 인파로 주변은 매우 소란하다. 정상으로 향했던 그리고 향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곳으로 번잡함이 말할 수 없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살다가 서울역에 처음 내린 기분이 이럴 것이다. 게다가 간이 매점까지 있다. 눈 길도 주지 않고 내 길을 간다.
저 멀리 대둔산 정상의 상징 개척탑이 보인다. 무엇을 개척했다는 것인지 철제 구조물이 꽤 커 보인다. 산 정상에 있기에는 생뚱맞다. 언발런스하고 흉물스럽기 까지 하다. 정상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주변의 경관을 살핀다.
< 정상에서 본 경관 >
정상은 인파로 몹시 붐빈다. 등산객들보다는 캐주얼 차림의 학생들과 가족 단위의 행락객 그리고 관광 나온 어르신들이 더 많다. 제각기 정상에서의 흔적을 남기느라 분주하다. 주변에서 점심을 먹는 도시락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도 역겹다. 우리 나라는 산하의 경관은 참 좋지만, 국토가 좁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어느 철에 어느 곳이 좋다 하면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 뻔해 즐거운 여행에 대한 기억보다는, 번잡함과 무질서, 막히는 길 사정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래도 정상 한컨에 서서 바라 보는 대둔산 주변 산하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침 안개는 걷히고, 흐리지만 간간이 열린 하늘에는 햇살도 비친다. 북쪽 바위지대 넘어 월성봉과 바랑산이 솟아 있고 그 너머로도 아스라이 산들의 물결이 이어진다. 나와 같이 먼 경치를 관망하는 사람들을 살피니 하나 같이 모두 등에 배낭을 메고 있다. 산꾼은 혼잡한 무리 속에서도 자신의 본업에 충실한가 보다.
< 마천대에서 도립공원 매표소 >
하산 길로 내러 선다. 번잡함을 피해 일찍 점심을 먹은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860m 이정표로 내려 서서, 케이블카 방향으로 떠 밀리다시피 내려 온다. 길은 돌이 깔린 계단인데 오르고 내려서는 인파로 빈틈이 없다. 내 등산 경험 중 작년 태백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의 인파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산에서 본다.
대개 안내산악회의 들머리는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잡는데, 이를 단지 입장료를 아끼려는 경제적 관점에서만 생각했는데 오늘 대둔산에서 보니, 진정한 등산을 하려면 행락철에는 별 수 없는 선택임을 알게 되었다.
1시에 마천대에서 출발하여 계단을 따라 15분 정도 내려 오니 우측으로 전망대 같은 것이 보인다. 무심코 오르니 의외로 한적하다. 희미하게 보이는 정상부 개척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찍어 주고 나서 주위를 살피니 굵은 쇠 케이블이 보인다. 순간 이곳이 케이블 카 탑승장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내가 와서 보니 이곳은 삼선 구름계단을 거쳐 올라 오는 길목이었다. 길이 올라 오는 방향으로만 나 있어서 한적해 보였다. 밑에서 보니 오르는 사람들로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 삼선 구름다리 전망대에서 >
길을 돌아 나와 다시 내려 가는데, 사람들이 더 붐빈다. 길도 더 험해지고, 우측으로 철제 난간이 있다. 우축통행은 자취를 감추고 힘겨워하는 어르신들이 철제 난간의 의지한 체 오르는 바람에 자주 길이 엉킨다. 눈 앞 허공에 커다란 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금강구름다리다. 책에서 읽었던 명성에 비해 크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단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인공 구조물일 따름이다. 좌측으로 구름다리로 향하는 길이 있어 오르려다가 오르는 방향으로만 길이 나 있는 것 같아, 다시 돌아 온다. 밑에서 올려다 보는 금강구름다리는 전선과 잎이 진 나뭇가지에 둘러 쌓여 어지럽게 돌고 있었고, 흡사 다리는 오선줄 그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음표처럼 보였다. 흔치 않은 모습으로 혼돈 속에서 새로운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케이블카는 금강구름다리에서 공원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나 보다. 사람이 이리 많으니 케이블카를 타려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인지, 성질 급한 노인네들은 걸어서 내려 가고 있다. 인파가 조금은 줄었으나 여전히 혼잡한 길을 10여분 내려서니 우측으로 ‘우리나라 지도 같기도 하고, X덩어리 같은 모양의 두 동강난 바위’가 위태롭게 서 있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 사진에 담고 내려 오니 ‘동심바위’ 입간판이 서 있다. 원효대사와의 인연이 있는 바위라 한다. 저 위치에 어떻게 서게 되었는지 그 근원이 자못 궁금하다. 자연의 경이로운 조화에 다시 한 번 놀란다.
< 금강구름다리의 전경 >
< 하산 후 매표소에서 본 대둔산 >
동심바위을 지나 팔각정을 지나 휴게소를 거쳐, 한참을 내려서니 해발 420m 이정표가 보인다. 길은 한결 편한 길로 바뀌어 있었다. 이곳에서 주차장까지는 700m가 남았다 한다. 긴 내리막의 끝이 보이려나 보다.
널따란 길을 따라 내려오니 관광단지 특유의 번잡스러움이 느껴진다. 길가에 커다란 돌탑이 서 있다. 동학항쟁비다. 구한말의 혼란스러웠던 시절의 민초들의 저항을 상징하고자 이곳에 비가 세워졌나 보다. 항쟁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등산을 마무리 되었다.
< 에필로그 >
누군가 대둔산의 풍경을 수직의 전율이라 하였다. 병풍 같은 암릉의 마루금을 조망하는 것은 분명 산을 오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전체적으로 기대만 못했지만 마천대 일대의 암름의 감동만은 진하게 남는다.
예상은 했지만 오늘은 등산 시간이 짧았다. 다 내려 왔는데도 아직 2시가 체 지나지 않았으니 버스 출발까지는 2시간이나 여유가 있다. 망설이다 대둔산 관광호텔에 있는 온천 사우나를 들어 간다. 따듯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산행의 피로가 일 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산행 후의 온천욕은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오늘 산행을 준비하며 금강구름다리, 삼선계단, 마천리, 낙조대 이런 단어들을 떠오르며 행복한 상상을 했는데, 늦가을 단풍이 진, 인파로 북적이던 대둔산은 생각만큼 화려하지도 멋지지도 않았다. 인간사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것이 때가 있나 보다. 오늘은 대둔산의 절정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배티재에서 오르면서 대둔산의 최고 경관, 남쪽 암릉의 장엄함 그 암갈색의 산수화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수확이었다. 최고봉인 마천대를 중심으로 기암괴석들이 제각기 위용을 자랑하며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멀리서도 뛰어난 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깎아낸 듯한 바위 절벽 위에 의연하게 서 있는 푸른 소나무와 고운 색은 바래가고 있지만 단풍의 절묘한 조화가 보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늘 산행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큰 둔덕에서 잠시 머무르다 다시 속세로 내려 온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