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세스카여사의 눈에 비친 이승만4. 날 된장에 밥 한그릇
결혼 후 나는 맨 처음 남편의 짐을 챙기면서 "어쩌면 남자가 이렇게 꼼꼼하고 알뜰한 면이 있을까?" 하고 속으로 놀랐다. 밤낮 바쁘게 돌아다니며 한평생 독립 투쟁을 해온 외통이 나그네의 짐이라 초라하긴 했지만 너무도 깔끔하고 단정했다. 결혼후에도 "내 집은 내가 알아서 정리 할테니 염려말라"고 하면서 아내의 도움을 귀찮게 생각할 정도로 남편은 혼자 사는데 익숙해 있었다.
연애시절 남편은 나에게 "과부 주머니에는 은이 서말이고 홀아비 주머니속에는 이가 서말"이라는 한국 속담을 가르쳐주면서 자기 주머니속에 담고 다니던 작은 참빗을 꺼내어 보여주며 "이것이 내 전재산이오."하고 진지하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내 빈주머니를 보여주면 현명한 여자는 달아날 줄 알았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쁜 [혹] 하나가 생겨서 이토록 내가 힘들게 살고 있다"고 남편은 나에게 농담을 하곤했다. "이것이 내 전재산이오"하며 남편이 소중하게 웃저고리 주머니에다 넣고 다니며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간직했던 그 참빗은 어머님이 남겨 주신 물건이었다. 이 참빗은 어찌나 빗살이 작고 촘촘한지 "어렸을 적에 어머님이 머리를 빗겨 주시면 아파서 울기도 했다"고 남편은 어린시절의 애틋한 추억을 나에게 얘기 해준 적이 있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후 남편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자녀를 모아 우리말을 가르치고 민족의 얼을 심어주며 이 빗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고 이와 서캐를 잡아 주기도 했다.
6.25동란을 치를 때는 부산 임시관저의 주변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전쟁고아들의 머리에서 이와 서캐를 남편은 그 참빗으로 흩어준 적도 있다.
하와이 병실에서 그토록 고국을 그리워하던 남편은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 빗을 만지며 향수를 달랬다.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남편이 외롭게 별세한 후 줄곧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나는 그 참빗을 며느리에게 맡겨 두었다. 나는 이 참빗을 보면 남편과 함께 지내온 세월의 한 맺힌 마디마디가 떠올라서 눈물로 목이 멘다.
아무리 죽은 사람이 말을 못한다고 건국대통령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러쿵 저러쿵 그럴듯한 거짓말을 쓰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글쓰는 사람이 양식이 있다면 역사의 현장에서 똑똑히 지켜본 증인들에게 진실과 사실을 확인한 후에 책임있는 글을 쓸 것을 권유하고 싶다.
지난번 나는 모 텔레비전이 방영한 1950년부터 1951년까지의 6.25동란 기록필름을 지켜보았다. 나는 남다를 감회를 느끼며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그런데 기록필름을 상영할 때는 그 당시 있었던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할 텐데 멋대로 편집하고 해설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기록영화가 보여주는 것보다 그 당시 전쟁의 참화는 훨씬 더 비참했고 국민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록 유엔군과 우방의 원조는 받았지만 한국인들의 줏대와 배짱은 꿋꿋했고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국민들의 도의심은 살아있었고 여성들의 정조관념도 대단해서 어느 유엔군 병사가 껴안았던 서울의 한 처녀는 그 수치심을 못이겨 한강에 투신자살까지 했었다.
6.25때 나는 대통령의 구술을 받아 매일매일 겪었던 일들을 타이프해 놓았다. 날마다 손끝이 브르트도록 타이프해 보낸 편지와 일기를 보면 지난 일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수많은 탱크를 앞세우고 불법남침했던 공산군을 맨손으로 막아야했던 긴박한 상황에서 맥아더장군을 전화로 불러내어 호통치던 대통령을 만류하던 일, 27일 새벽 남하하는 기차안에서 침통한 얼굴로 "내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 했다"고 고뇌하며 괴로와 하던 대통령의 모습, 단돈 5만원을 가지고 떠났던 피난길,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용변을 봐야했던 시골 변소, 이리역 구내에서 나눠먹던 건빵, 대통령이 권하는 건빵을 받아들고 눈물을 억제하던 일....
목포에서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가는데 파도와 풍랑이 심하여 모두 배멀리로 쓰러졌지만 75세의 남편은 혼자서 계속 꿋꿋하게 버티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초죽음이 된 나는 물론 수행원들까지 신음하며 노란물을 토하고 쓰러지자 백발의 대통령이 일일이 돌보아 주었다.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인자하셨던 어머님을 생각해봐. 그러면 속이 좀 가라앉을 걸세"하며 젊은 수행원들을 격려하던 남편의 다정한 음성이 아직도 내귀에는 들려오는 것 같다. 남편은 배안에서 일행들을 돌보느라 눈 한번 안 붙였다. 함정에서는 군인식사와 똑같이 했다. 꽁보리밥에 짠지, 날 된장이 전부였다.
일행 모두가 음식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다. 오직 대통령 혼자서 밥을 한알도 남기지 않고 한그릇을 다 비웠다.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밥그릇을 깨끗이 비울 수 있는 남편이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반찬 걱정을 해본 일이 없었다. 병영을 돌아다니면서 일선장병이나 유엔군 장병들과 식사를 할 때 "노인이 웬 식욕이 저토록 좋은가!" 하고 놀라는 외국장군들의 감탄사를 엿들을 때 아내로서 약간 창피할 따름이었다.
대구에서 나는 심한 설사로 큰 고생을 했다. 물을 갈아먹은 탓인지 3일동안 꼼짝없이 누워있는 상태가 됐다. 피난 중 심한 긴장과 더위때문에 탈진 상태에다 대구지사 관저 뒷마당에 있는 펌프물을 마신때문에 배탈을 얻은 것이다.
남편은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의 몸은 40도가 넘는 열로 종종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경북지사였던 조재천씨 부인이 정성스레 콩나물국을 끓여왔다. 파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맑은 장국이었다. 몇 모금 마시니 속은 한결 부드러웠다. 나는 이 국물을 두어모금 마신 후 두었다가 남편에게도 권했다. 남편은 이 국물을 받자 "마미, 당신이나 마실일이지...." 하면서도 단숨에 국그릇을 비웠다. 콩나물국을 받아 마시는 남편을 보고있던 나는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대구 피난시절 임시관저에는 우리 부부를 비롯해 각료.비서관.경호경찰.국회의원 등 70여명이 북적거렸다. 이들의 뒤치닥 거리를 조지사 부인이 가정부 2명을 데리고 맡아서 해주었다. 당시 남편은 양복보다 모시 옷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렇지만 나는 모시옷을 어떻게 매만지는가를 몰랐다. 빨래에서부터 풀을 먹여 다림질까지의 모든 일이 나에게는 너무나 서툴렀다. 이때 조지사 부인은 이런 일들을 모두 도맡아 해냈다. 참으로 고마왔다.
70여명이 넘는 임시관저의 사람들의 식사며 잔 심부름까지 해냈던 지사부인은 과로로 유산까지 했으며 손발이 퉁퉁붓고 거동조차 어려웠으나 꾹 참고 일을 해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됨을 가장 가슴 아파하던 남편은 어느날 나에게 달걀을 날로 먹자고 했다. 반숙이나 프라이를 하면 그만큼 조지사 부인의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일감을 줄여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다음날 아침식사부터 사과와 토마토 그리고 날달걀 2개씩을 먹기 시작했다. 또 매끼 반찬도 세가지만 하도록 했고 모시옷도 빨아서 그냥 입었다. 이런 남편의 부탁은 자신이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게 되며 그렇데 되면 지사부인의 일손을 덜게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남편의 이런 뜻을 잘 알아 차리지 못한채 그전처럼 식생활을 했고 신국방장관은 아침 5시반만 되면 나타나 날달걀이 아닌 반숙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요즈음도 서울에 살고 있는 조지사 미망인 강재례여사가 종종 나를 방문하면 피난시절 고생했던 얘기로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몇해전 KBS에서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할적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눈믈을 흘렸는지 모른다. 서로 얼싸안고 울고웃는 이산가족들을 따라 함께 울면서 나는 돌아가실때까지 나를 걱정하며 보고싶어하신 친정어머님을 생각했다.
나는 이박사와 결혼한후 늘 마음 속으로 생각은 있었지만 끝내 어머님을 생전에 찾아 뵙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TV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어머님, 이 불효막심한 딸을 용서해 주세요!"하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어머님은 내가 노후에도 한국에 와서 이토록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신다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시리라 믿고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나의 친정이 어느나라인가를 물어오는 시민들의 전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나를 "호주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친정은 호주가 아니고 유럽에 있는 음악의 도시 빈이 있는 오스트리아 이다. 나의 친정집은 아름다운 숲이 있는 빈의 교외에 있었다.